신성한 제인 에어 북클럽 - 충분히 깊게 읽는 경이로운 경험에 대하여
바네사 졸탄 지음, 정효진 옮김 / 옐로브릭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으며 리뷰를 두 편 썼다. 전문을 옮긴다.




접힌 부분 펼치기 ▼

 [SNS에 간략하게 작성한 리뷰]



'신성한'이라는 말이 붙었듯이 바네사 졸탄은 샬롯 브론테의 소설 제인 에어를 깊이 읽고 자신의 삶에 빗대어 본다. 이렇게 독서하는 방법도 있구나, 싶다. 소설보다는 졸탄 자신의 이야기가 더 많다. 제인 에어 독자에게 흥미로운 내용은 바로...... 소설 해석. 그리고 나는 제인 에어의 독자.


이렇듯 버사는 두 종류의 상황(로체스터가 침대에 누워 있는 상황과 제인이 침대에 누워 있는 상황)에서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준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이 사실은 그가 심각한 정신적인 문제를 가진 여자도, 모든 것을 파괴하는 데 골몰한 여자도 아님을 시사한다. 그는 의식을 잃은 그레이스 풀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반면, 자신을 보러 온 오빠는 칼로 찌른다.

버사는 미친 여자가 아니다. 미친 여자는 자신의 분노를 통제할 능력이 없지만, 버사는 철저한 통제력을 보여 준다. 그의 분노가 향하는 대상은 자신을 가둔 남자와 자신을 가두도록 허락한 남자일 뿐, 돈을 받고 자신을 보살피는 여자와 다음 희생자가 될 또 다른 여자에게는 아니다. 버사는 미친 여자가 아니라, 분노하는 여자다.

_220/346p


버사는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구분할 수 있다. 누워있던 로체스터는 공격하고 제인은 공격하지 않았다. 미친 사람은 그걸 구분 못 한다. 버사는 미치지 않았다.



또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로체스터는 제인을 강간하지 않기로 했다는 건데, 로체스터가 원하는 건 제인의 영혼이며, 강간을 통해 떠나려는 제인과의 관계에서 변화가 생긴다 해도 제인은 영혼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세상에! 바네사, 그가 제인을 강간하지 않았다고요? 참 훌륭하기도 하네요! 남자가 "강간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만족하라고요?' 내 대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사실 상대를 충분히 진실하게 이해하고 동의를 구하는 것이 남자들 사이에서는 희귀하고 급진적인 태도임은 인정하자). 하지만 나는 로체스터가 여기서 말하는 것이 '나는 너를 강간하지 않을 거야'의 의미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_244/346p


제인 에어를 다시 읽고 싶어졌다.


하지만 졸탄도 말했듯이 버사 메이슨의 존재는 제인 에어를 마음 편히 읽지 못하게 하고, 많이 이야기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버사는 소설을 마냥 좋아할 수는 없게 만든다. 그래서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가 읽고 싶어진다. 버사 시점으로 쓴 또 다른 제인 에어를.

펼친 부분 접기 ▲


접힌 부분 펼치기 ▼

[독서노트에 쓴 리뷰] 



이 책의 내용을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은 분류 또한 수월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이 책을 검색하고 나서 알았다. 떡하니 쓰인 한국십진분류법으로는 214, 듀이십진분류법으로는 204.3이라는 기호와 '종교신앙', '명상록'이라는 주제어를 보며 적잖게 당황했다.


 대학생 때 배웠던 분류법 중에는 다른 것도 있으니까, 어떻게 잘 하면 모든 주제를 담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왜인지 지금 내 머리에 떠오르는 몇 가지 주제 중 하나를 고르고만 싶다.


우선 도서관에서 대출한 이 책은 총류-문헌정보학-독서 및 정보매체의 이용에 들어가 있다. 서평집 등 책을 읽고 그 내용에 대해 쓴 글은 으레 여기 들어가니까 이상할 것 없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 책은 너무 개인적이랄까…. 모호한 경계다.


그럼 문학-영미문학-영미수필에 분류하면 될까? 출판사에서는 이 책을 문학에 분류했으니 맞지 싶다. 저자의 개인적인 삶을 산문으로 썼으니(리뷰에서 잘 언급하지 않았으나 저자는 자신의 삶을 많이 언급한다) 844 영미수필이나 848 영미르포르타주에 넣으면 될 텐데. 르포르타주보다는 수필에 더 가까운 듯하다. 하지만 이 책은 책으로 말미암아 자기 삶을 성찰하기도 하지만, 책의 해석도 함께 하고 있다.


주제가 어떻든 이 책의 저자가 지닌 태도는 경전을 여러 번 읽고 곱씹으며 자기 삶을 성찰하는 신앙인의 것…!


그래서 명상록이라는 주제를 납득할 수 있다. 이게 명상이지, 이게 명상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명상일까?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명상은 태도일 뿐이고 이 책의 내용을 한 번에 말해주지 못하는데.


여기서 십진분류법의 한계가 드러난다. 책이 품은 다양한 주제어를 반영할 수 없어서 하나 외의 선택받지 못한 모든 주제어가 빛을 받지 못하게 된다. 현장에서 일하며 이런 문제가 많았다.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도 그렇다. 영미문학으로 분류하면 더 많은 이용자의 눈에 띌 수 있는데, 여성문제로 분류하면 상대적으로 덜 노출된다. 사회과학 중 가장 인기 있는 분야는 아무래도 경제학이고, 문학 중 영미문학은 많은 인기를 누린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영미문학에 확실히 분류하기에는 이 책이 띠고 있는 주제의 강한 색깔을 뭉개고 만다.


이런 고민, 쓸모 없다. 아직 내 생각에는 잘 찾아만 준다면 어디 있어도 될 것 같은데.


그런데 이렇게 주제 분류를 숙고하는 것도 독서의 일종이라는 생각이 든다.

펼친 부분 접기 ▲


소설에 대한 나의 의견. 로체스터 언급이 안 나올 수가 없긴 하구나. 나는 소설에 나온 남자 인물은 대체로 다 싫어한다. 유일하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양반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레트 버틀러. 안 잡혀준다는 점이 사냥하고자 하는 마음에 불을 지른달… 그런 사람이 마음이 든다. 로체스터는 제인보다 나이도 너무 많고, 방탕하고, 게다가 아내를 가두고 제인을 속여서 결혼하려고 했다. 아무래도 로체스터보다는 제인에 더 가까운 나로서는 극대노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제인을 좋아하지 않음에도 로체스터에게 제인은 너무 과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하지만 강간할 수 있었음에도 강간하지 않았다는 점은 소설이 쓰이고 200년 뒤에도 중요한 점이다. 졸탄도 말했듯 남편이, 남성이 아내의, 여성의 권리를 대신 행사하는 시대에서 보잘것없는 여자 한 명 강간하는 것 정도는 지탄의 대상도 아니었을 테다. 분명히 그 여자가 돈을 노리고 남자를 유혹했을 테고. 세상이 로체스터의 편이 되어 제인을 비난했을 텐데, 로체스터는 제인이 떠나려는 순간에도 한없이 유리하고 쉬운 선택지를 고르지 않았다. (지금도 여성을 주저 앉히고 묶어두기 위한 유효한 방법이다.) 그는 정말 제인의 내면을 보고 싶은 것이다. 강간하면 몸을 제 옆에 묶어두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로체스터가 진정 얻고 싶고 보고 싶은 제인의 내면은 그에게 영영 닫힐 것이다. 로체스터는 많은 남자들이 그렇듯이 확실히 얻기 위해 택하는 어리석은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그 점을 높이 산다. 졸탄이 그랬듯이.


그리고 졸탄이 또한 그랬듯이,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그런 선택지 자체를 지울 수 있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이 책, 처음에 들어갈 때는 그냥 그랬고 다 읽고 나서도 '아, 좋았다~' 정도인데, 리뷰 쓰면서 곱씹으니까 생각보다 더 괜찮은 책임을 느끼고 있다ㅋㅋ 곱씹다가 괜찮으면 전자책 사야지.











그리고 브로클허스트 씨는 그런 곳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피하게 위해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이때 제인은 내가 아는 모든 문학 작품의 대사 중 가장 좋아하는 말로 대답한다. "반드시 건강을 유지해서 죽지 않을 거예요."
제인은 여기서 자신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대들고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정말 재미있다. 그녀는 이 잔혹한 사람들한테 원하는 것을 주지 않기 위해, 괴롭힘을 당해 겁을 먹고 ‘원하신다면 무엇이든 할게요‘라고 말해버리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제인의 말에 이런 의미도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죽음을 맞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건강을 유지할 거예요.‘ 그리고 나는 이 말이 자신의 내면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바꾸는 데 초점을 둔 말이라고 본다. 제인이 전념하고 있는 것은 생존이다. 그리고 생존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다. - P129

잔인함은 그것을 행사하는 사람 쪽에서는 큰 노력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희생자에게는 큰 트라우마를 남긴다. 사실상 상대방은 자신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제인은 숨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 P156

그리고 나 같은 어린애들은 남자가 여자에게 저지르는 끔찍한 행동을 지켜보는 전통을 이어받을 뿐 절대로 이런 조언은 듣지 못한다. ‘얘야, 난 좀 복잡한 이유 때문에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만, 넌 절대 여기에 만족해선 안 돼.‘ - P185

《제인 에어》는 로체스터와 사랑에 빠지는 제인이라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소설은 가부장제가 강요하는 신화를 폐기하고 자신에게 걸맞은 관계를 시작하기 위해서 여성들이 스스로 가슴을 찢는 아픔을 감내해야 함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 P187

분개를 옹호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작업은 그것을 증오hate와 구별하는 것이다. 때로 납득할 만한 경우도 있지만, 증오는 위험할 때가 너무 많다. 증오한다는 것은 대상을 제압하고 전멸시키고 싶다는 뜻이다. 증오는 공격하는 행위다. 증오는 상대를 비인간화하고, 복잡성이 제거된 하나의 사물로 축소하는 능력이다. 물론 증오가 전적으로 정당화되는 순간이 있다. 희생자는 가해자를 보통 증오한다. 하지만 희생자라고 해서 가해자가 선 법정의 배심원석에 앉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는 도리어 나 자신과, 종종 누군가를 증오하는 우리 모두가 독약을 마시고는 타인이 죽기를 바란다는 격언처럼 될까 봐 염려한다. 증오가 납득할 만한 것이라도, 최선은 증오를 다루고 보내 주는 것이다. - P199

이렇듯 버사는 두 종류의 상황(로체스터가 침대에 누워 있는 상황과 제인이 침대에 누워 있는 상황)에서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준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이 사실은 그가 심각한 정신적인 문제를 가진 여자도, 모든 것을 파괴하는 데 골몰한 여자도 아님을 시사한다. 그는 의식을 잃은 그레이스 풀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반면, 자신을 보러 온 오빠는 칼로 찌른다.

버사는 미친 여자가 아니다. 미친 여자는 자신의 분노를 통제할 능력이 없지만, 버사는 철저한 통제력을 보여 준다. 그의 분노가 향하는 대상은 자신을 가둔 남자와 자신을 가두도록 허락한 남자일 뿐, 돈을 받고 자신을 보살피는 여자와 다음 희생자가 될 또 다른 여자에게는 아니다. 버사는 미친 여자가 아니라, 분노하는 여자다. - P220

버사는 도구화된 여성의 전형이다. (...) 버사는 누구에게도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다. 이는 가부장제의 여성에 대한 페티시즘을 보여 주는 전형적 사례다. 즉 여자는 성적 매력이 있는 한에서 쓸모 있게 여겨지고 남자에게 이용된다. 성적 매력을 잃는 순간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기로 선택하면 미친 여자가 된다. - P226

바로 그때, 한 번도 고려해 보지 않았던 카드가 로체스터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바로 제인을 겁탈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제인이 임신하거나 적어도 상황이 확실히 바뀔 것이다. 제인은 자신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P242

‘세상에! 바네사, 그가 제인을 강간하지 않았다고요? 참 훌륭하기도 하네요! 남자가 "강간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만족하라고요?‘ 내 대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사실 상대를 충분히 진실하게 이해하고 동의를 구하는 것이 남자들 사이에서는 희귀하고 급진적인 태도임은 인정하자). 하지만 나는 로체스터가 여기서 말하는 것이 ‘나는 너를 강간하지 않을 거야‘의 의미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 P244

하지만 내가 이 계획을 계속 말하고 다니는 진짜 이유는, 정말로(내 강아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추정되는) 땅콩 버터 한 통을 꺼내 수의사를 불러야 할 때가 올 것을 대비해 마음을 훈련하고 가다듬기 위해서다. 내가 절망의 순간에 사랑하는 대상에게 얼마나 필사적으로 매달릴지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내가 로체스터였다면 제인의 몸에 필시 손을 댔을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은 그를 나는 정말로 존경한다. 바로 이 순간 로체스터를 구원해준 것은 놀랍고도 강력한 사랑, 바로 그것이다. - P246

우리는 모두 이런 순간을 경험한다. 추악한 진실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전복시키는 순간. 바로 배신의 순간 말이다. 우리는 모두 배신을 당한 경험이 있다. - P259


댓글(8)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3-08-28 22: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백수가 되어 리뷰가 불타는 고라니

책식동물 2023-08-29 17:45   좋아요 0 | URL
저 아직 백수 아님!!! 아파서 병가 내고 책을 읽었다네요

잠자냥 2023-08-29 21:40   좋아요 1 | URL
곧 백수가 될 고라니

책식동물 2023-08-29 21:50   좋아요 0 | URL
벌써 백수생활 빌드업하는 중입니다ㅎㅎ

반유행열반인 2023-08-28 16: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독후감 친필로 쓰는 사람 몇십년만에 보네요 ㅋㅋㅋㅋㅋㅋ

책식동물 2023-08-29 17:4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제 독서노트인데 후기랑 필사... 거든요 보통 후기를 길게 쓰지는 않는데 이 책은 고민이 많아져서 본의아니게 길어졌습니다

단발머리 2023-08-28 2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묘한 고라니님~~ 제가 위의 사진에 눈이 희번덕해졌.... @@ 손글씨 리뷰 너무 근사합니다. 제가 최근에 이 책을 읽고 너무 좋았던 기억이 있는데요. 이 책을 읽은 분을 만나니 반갑기 한이 없습니다.

감격을 나누고 싶어서 제 리뷰를 놓고 갑니다. 느무느무 반가워요!!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4669937

책식동물 2023-08-29 17:57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댓글 감사합니다. 사실 책 읽기 전에 사전지식을 좀 쌓으려고ㅋㅋㅋ 단발머리님 리뷰를 열심히 읽었습니다. 덕분에 이 책의 매력을 알게 되었고, 길잡이가 되어서 끝까지 마칠 수 있었습니다!! ㅋㅋㅋ 그러니 이 리뷰는... 단발머리님께 빚을 지고 있군요... 아니 그나저나 저는 제인에어도 제인에어지만 필리스 체슬러의 카불의 신부가 너무 탐나는데요!!!!!!! 영어 까막눈이지만 킨들과 킨들의 훌륭한 영한사전으로 읽어봐야겠어요...(전자책이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