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1909~1948)
일본이 한국을 집어삼킨 바로 전 해에 태어나 일본이 패망한 후 3년을 살다가 <인간실격>을 발표한 그 해 도쿄 미타카의 다마강 수원지에 야마자키 도미에와 투신 자살한 불운의 작가였다.

민음사세계문학전집에서 발간한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을 시대순으로 나열해본다.

1. 만년(1936년, 26세)-단편집
2. 달려라 메로스(1940년, 30세)-단편집
3. 쓰가루(1944년, 34세)-자전적 소설
4. 사양(1947년, 37세)-몰락한 귀족을 지칭하는 ‘사양족‘이라는 단어를 유행시키며 베스트셀러가 되고, 다자이의 생가는 현재 ‘사양관‘이라 이름 지어져 기년관으로 운영
5. 인간실격(1948년, 38세)-˝요조˝의 탄생

[작품속 밑줄 긋기]

어느 해 봄, 나는 태어나서 처음 혼슈 북단 쓰가루 반도를 얼추 삼 주 남짓 걸려 일주했는데, 그건 나의 서른 몇 해 생애에서 상당히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나는 쓰가루에서 태어나 그로부터 이십 년간, 쓰가루에서 자라면서도(...)

가나기는 내가 태어난 읍내다.
쓰가루 평야의 거의 중앙에 자리하며 인구 오륙천, 이렇다 할 특징도 없지만 어딘가 도회지풍으로 살짝 거드름 피우는 읍내다. - 9쪽



나는 이 아오모리시에 사 년 있었다. 그리고 그 사 년은 내 생애에서, 매우 중대한 시기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 무렵의 내 생활에 대해서는 <추억:[만년]창작집에 수록>이라는 나의 초기 소설에 꽤 자세히 쓰여 있다. -13쪽


그 후로도 나는 여러 교사에게 얻어 맞았다. 히죽 히죽 웃는다거나 하품을 해댔다는 둥, 다양한 이유로 벌을 받았다. - 14쪽


3학년이 되고 나서는 항상 반의 수석이었다. - 16쪽


나는 그 뾰루지가 욕정의 상징이라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창피했다. 차라리 죽어버릴까? 이런 생각까지 했다. -17쪽

나는 그 무렵, 사람을 대할 때 죄다 감춰버리든가, 죄다 드러내 버리든가, 둘 중 하나였다. - 17쪽


이 남동생은 그러고 나서 이삼 년 뒤에 죽었는데. - 18쪽

스미다가와 비슷한 너른 강이란, 아오모리시 동부를 흐르는 쓰쓰미가와강을 말한다. 곧장 아오모리만으로 쏟아져 든다.(...)
아오모리시에서 삼 리 남짓 동쪽에 있는 아사무시라는 해안 온천도, 내겐 잊을 수 없는 지역이다. 역시나 그 <추억>이라는 소설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 19쪽

멋들어진, 쓸모없는 행동거지가 언제나 가장 고상한 취미라고 믿었습니다. - 25쪽


히로사키 성시 사람들에겐 뭐가 뭔지 통 알 수 없는 껄끄러운 반골 기질이 있는 듯하다.
무얼 감추리! 사실은 내게도 그런 다루기 까다로운 뼈가 하나 있어, 그것 때문만은 아닐 테지만 뭐, 덕택에 여태껏 하루 벌어 하루 꾸려가는 연립주택 살림을 벗어나지 못한 채인 거다. 몇 년 전, 나는 어느 잡지사로부터 ‘고향에 보내는 말‘을 요청받아 그 응답으로 말하길,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를 미워하노라. 30쪽

아오모리현의 현청을 히로사키시가 아니라 아오모리시에 가져갈 수 밖에 없었던 부분에 아오모리현의 불행이 있었다는 생각마저 나는 하고 있다.(...)
나는 어떡해서든 히로사키시의 편을 들어주고 싶기에 서툴기 짝이 없는 문장으로나마 이리저리 궁리해 힘껏 써 왔지만, 히로사키시의 결정적 미점(美點), 히로사키 성의 독특한 강점을 끝내 묘사하지는 못했다.-32쪽

생각건대 자신의 육친을 이야기하는 게 지극히 어려운 일인 거와 마찬가지로 고향의 핵심을 이야기하는 것도 수월한 일이 아니다. 칭찬해야 할지 헐뜯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 34쪽

나는 이번 여행에서 보아 온 고장의 지세, 지질, 천문, 재정, 연혁, 교육, 위생 등에 대해 전문가인 양 아는 척하는 의견은 삼갈 생각이다. 내가 그걸 말해 봤자, 어차피 벼락치기 공부 같은 부끄럽고 경박한 도금질이다. 그런 거에 대해 상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그 지방의 전문 연구가에게 묻는 게 좋다. 나에겐, 또 다른 전문 과목이 있다. 세상 사람은 예컨대, 그 과목을 사랑이라 부른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이 맞닿는 걸 연구하는 과목이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주로 이 한 과목을 추적했다. 어느 부문으로 추적해도 결국은, 쓰가루의 현재 살아 있는 모습을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할 수 있다면, 쇼와의 쓰가루 풍토기로서 우선 뭐, 합격이 아닐까 나는 생각하는데, 아아! 일이 잘 풀리면 좋으련만! -36쪽

쓰가루에 대해 써 보지 않겠는가. 어느 출판사의 친한 편집자에게 전부터 이런 말을 들어 온 데다 나도 살아 있는 동안 한 번 자신이 태어난 지방을 구석구석 보아 두고 싶어서, 어느 해 봄, 거지 같은 차림새로 도쿄를 출발했다. - 40쪽


이번 쓰가루 여행을 앞두고, 마음속 다짐한 일이 하나 있었다. 먹거리에 담백해져라, 라는 거였다. 나는 딱히 성자도 아니고 이런 말을 하는 건 대단히 쑥스럽지만, 도쿄 사람은 어쩐지 먹거리를 지나치게 탐낸다. 나는 자신이 케케묵은 인간인 탓인지, 무사는 굶고서도 잇새를 후빈다 따위의 살짝 자포자기 비슷한 그 어처구니 없이 무작정 버티는 모습을 우스꽝스레 여기면서도 사랑한다. - 44쪽

사람은 믿을 게 못 된다, 라는 발견은, 청년이 어른으로 이행하는 제1과다. 어른이란, 배신당한 청년의 모습이다. - 47쪽

나는 게를 좋아한다.(...)
그리고 즐기는 건 술이다. -50쪽

나는 중학 시절에는 남의 집으로 놀러 간 적이 전혀 없는데, 어찌 된 까닭인지 같은 반 N군 집에는 참으로 뻔질나게 놀러 갔다.(...)
<추억>이라는 내 초기 소설에 나오는 ‘친구‘란 대개 이 N군을 가리킨다.(...)
나는 남한테 속임을 당할 때마다 조금씩 칙칙하고 비굴한 남자가 되어 갔지만, N군은 그와 반대로 아무리 속임을 당하건, 더더욱 무사태평에다 밝은 성격의 남자가 되어 간다. -52쪽

도회인으로서 내게 불안을 느껴, 쓰가루인으로서 나를 움켜잡으려는 염원이다. 표현을 바꾸자면, 쓰가루인이란 어떤 사람이었나. 그걸 밝혀 내고 싶어서 여행을 떠난 것이다. 내 삶의 본보기로 삼을 순수 쓰가루인을 찾아내고 싶어서 쓰가루에 온 것이다. -55쪽

˝믿는 데에 현실이 있는 것이고, 현실은 결코 사람을 믿게 만들 수 없다˝ 라는 묘한 말을, 나는 여행 수첩에 두 번이나 거듭 쓰곤 했다. - 56쪽

삼가야지 생각하면서도, 그만 어설픈 감회를 늘어놓았다. 나의 이론은 횡설수설,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거짓을 말할 때 조차 있다. 그러니 기분을 설명하기가 싫은 거다. 어쩐지 아무래도 속 들여다보이는 서툰 허식을 부리는 듯하여,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힐 따름이다. 어김없이 된통 후회하리란 걸 알면서도 흥분한 나머지 그야말로 잘 돌아가지도 않는 혀에 채찍질을 연신 해대어 입을 삐죽거리며 주저리주저리 지리멸렬한 말을 내뱉고, 상대방 마음에 경멸은 커녕 연민의 정마저 일으키고 마는 건, 이 또한 내 슬픈 숙명의 하나인가 보다. - 56쪽

이 산맥은 전국 유수의 노송나무 산지다. 그 오랜 전통을 자랑삼아도 좋을 쓰가루의 산물은, 노송나무다. 사과 따위가 아니다. 사과 같은 건 메이지 초기에 미국인한테서 씨앗을 얻어 시험적으로 심었고, 그 후 메이지 20년대에 이르러 프랑스 선교사로부터 프랑스식 전지법을 배워 별안간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로부터 지방 사람들도 이 사과 재배에 달려들기 시작하면서 아오모리 명산품으로 전국에 알려진 것은, 다이쇼에 접어들고 나서의 일이다.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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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안의 책 (페르난두 페소아)
민음사세계문학전집 약 450여 권을 소장하고 있는 터라 일전에 문학동네세계문학전집 150여 권을 눈물을 머금고 팔았다.
하...근데 알라딘 중고매장에서 이 책을 발견한 순간...흠...이건..사야지..그래도 다시 문학동네를 모으진 말아야겠다..민음사와 문학동네를 함께 모은다는 건 중복된 책도 책이거니와 너무 많은 부담을 지고 있는 느낌이라..그런데 이건 사야겠다..과연 민음사에서 페소아의 책을 출간해줄 것인가...
민음사 빵과 책갈피, 키캡 등에서 히트를 친 것은 환영해 줄 일이지만 문학동네의 디자인과 판형은 민음사의 실용적인 판형과는 달리 블리블리한 느낌은 어쩔 수 없이 끌리는 것 같다. 트렌디하고 핫한 현대 소설의 출간 또한 문학동네로 마음이 간다. 그래도. 줄 긋고 낙서하고. 막 접고 하는 것은 민음사가 최고긴 하다.

2. 지극히 사적인 일본(나리카와 아야)
나에겐 일본 소설이 취향이 맞다
하루키라던지, 쏘세키라던지, 다자이오사무, 엔도 슈사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와바다야스나리 등등
이번에 다자이오사무의 소설 <쓰가루>를 읽으면서 그의 고향이 아오모리현 쓰가루 라는 것을 다시 떠올렸다. 지도를 찾아가며 우리에게 익숙한 아오모리 시도 찾아보면서 언젠가 퇴직 후 또는 그전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 딸과 아내랑 일본 전역을 꾸준히 여행하는 꿈을 마음에 다시금 품게 되었다. 가령 아오모리에 가서 유명한 사과도 먹어보고, 때론 이카타 현의 설국 유후인도 숙박해보고, 또는 구마모토의 소세키 생가도 가보고, 시즈오카의 오뎅도 먹어보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일본인의 눈으로 본 현재의 일본을 읽고 싶었다.
가령 독도 문제에 대한, 때론 일본 전국시대의 풍신수길..한국사람이 이렇게 부른다는 것도 전혀 몰랐다는 저자의 말 등 한국인이 일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다시 일본인의 입장에서 어떤 느낌을 받는지 등이 책에 적혀 있다. 여러모로 쌓여가는 일본에 대한 깊이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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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유대인 혐오는
편견이었을까?
현 시대에서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만행을 보면 혜안이었을지도.
인간의 고통에 대해 그토록 예민한 사람이, 학대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열정적으로 옹호하던 사람이,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에게는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거의 미친 듯이 설파하던 사람이, 잎새 하나와 풀잎 하나하나에 환희에 찬 송가를 바치던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 그 당시 수천 년간 쫓기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옹호도 변호도 하지 않았다는 점은 현재의 이스라엘을 예견했던 것인가. 여러 작품속에서 묘사한 유대인에 대한 혐오를 옮겨적는다.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중 마지막에서 두 번째 권에는 <작가의 일기>가 실려 있었다.
1877년인가 1878년인가에 쓰인 이 책에서 나는 그가 유대인들에 대해 쓴 글을 발견했다.
제목은 ‘유대인 문제‘로 되어 있었는데, 나는 이런 제목의 글을 발견하고도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그는 유대인과 유대인 여자와 유대인 아이들과 유대인들의 모든 것을 어디든 한 군데에 모아 쓰고 싶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런 예기들을 소설 여기저기에 많이 흩트려 놓았다.
언제나 젠체하지만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러대는 <악령>의 럄신도 유대인이었으며, 콧대가 높으면서도 겁쟁이인 <죽음의 집의 기록>의 이사이 포미치는 같은 수형자들에게 엄청난 이자를 받고 돈놀이를 하는 뻔뻔스러운 자이다. 또 <죄와벌>에서 소방관으로 나오는 자는 이렇게 묘사된다.
˝영원히 투덜거리는 듯 비판에 젖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유대인이라는 종족의 얼굴에는 예외없이 그렇게 언짢은 낙인이 찍혀 있는 것이다.˝
이 인물의 우스꽝스러운 러시아어 발음은 소설에서 뭔가 특별하고도 섬세한 만족감을 유발시켰다. 또 유대인의 모습은(<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리자 호흘라코바의 이야기에 나오듯) 가련한 어린아이를 못 박아 벽에 매달고는 손가락을 자르면서 아이들의 고통을 즐기는 자들로 묘사된다. 무엇보다도 유대인들은 자주, 익명의 고리대금업자나 소상인이나 좀스러운 사기꾼들로 묘사되거나 심지어는 제대로 묘사조차 되지 않은 채 그저 유대인이라고만 이름 붙여지기도 했다. 또 유대인은 가장 저급하고 속물적인 인간성을 지닌 자의 대명사쓰럼 쓰였다. - 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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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9-06 1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럽의 유대인 편견은 뿌리가 깊지요.중세부터 이어진 ˝유대인은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기독교적 편견이 근대 초기에도 뿌리 깊게 남은데다가 토지 소유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상업, 무역, 금융업(고리대금업)에 종사해야 했고 그 결과 유럽대중은 이들을 ˝피도 눈물도 없이 돈만 아는 고리대금업자˝로 낙인찍은 것이죠.게다가 19세기 유럽에 근대적 국가관과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19세기 말 프랑스를 뒤흔든 드레퓌스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들의 영토 없이 유럽 전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은 ˝국가에 충성하지 않는 영원한 이방인˝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유럽의 바탕위에 19세기 들어 슬라브 민족주의가 일어나고 러시아 정교와 맞물려 토스토예프스키도 유대인을 혐오한 것이지요.

북프리쿠키 2026-09-08 09:48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반갑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대인 혐오입장에 대해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유대인 문학가와 비평가들은
도스토예프스키를 칭송하는..그 입장에 대해 자괴감을 느끼기도 하는 대목이 있더라구요.
역사와 종교, 철학 등 다방면에 깊이를 가지면 문학을 풍부하고 재미있게 읽을수 있는 실감을
카스피님의 자세한 설명으로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지만 러시아 정교에 대해 깊이가 없다보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꽤나 어렵게 느껴진 기억이 있어 이번 기회에 러시아정교에 대해 깊이있게 공부해보려 합니다.
댓글 감사드립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말년에 노름에 빠져 속기사인 2번째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에게 늘상 돈을 뜯어가며 찌질하게 행동하던 모습입니다. 노름꾼의 강박은 정말 무섭습니다. 안나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요설체로 자기혐오하던 문장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녀를 천사라고 부르면서,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며 용서를 비는 일이 더 자주 있었다.
그러면 그녀는 옷을 깁다 말고 한숨을 쉬면서 말없이 서랍장으로 다가가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돈을 내어주었는데, 이럴 때 그녀가 기침을 하거나 재채기라도 하면, 그는 그녀에게 마구 화를 내고 저주를 퍼부었다. 이것은 그녀의 돈이며, 그녀 어머니의 돈인 것을 잘 안다. 그녀가 불평하지도 않고 순순히 그에게 돈을 내주는 것은 바로 그 선량함으로 그를 억압하려는 의도다. 등등. 하지만 그는 다시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는 그가 그녀의 돈을 훔쳤으며, 그녀가 자신을 혐오해야 마땅하다고 말하고는, 하지만 아직 자기를 더 혐오하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 156쪽

페쟈(도스토예프스키)는 우선 자신의 약혼반지를, 다음으로 그가 결혼식 때 선물한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금귀고리와 브로치를 저당잡혔다.(...)

브로치와 귀고리를 맡기고 빌린 돈을 잃는 그는 다음으로 그녀의 레이스 달린 숄(안나가 가장 아끼며 늘 외출시 하고 다니는 것)을 저당잡히려 했지만, 그런 것은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 162쪽

그들은 집세를 나흘이나 밀렸고, 주인은 그들에게 식사를 한 끼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는 아침에 하녀 마리에게 끓인 물을 청했지만, 하녀는 이제는 물 끓일 장작도 없다고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164쪽

안나그리고리예브나의 동의를 얻은 그의 품에는 포장으로 감싼 그녀의 라일락 빛 옷이 안겨 있었다. (...)
안나그리고리예브나의 옷으로 받은 돈은 5탈러였는데, 그는 이 돈을 첫판에 몽땅 베팅해서 잃고 말았다. - 168쪽




도스토예프스키는 ˝수정궁˝을 자주 비판적으로 묘사합니다.
수정궁은 당시 유럽에서 열렸던 상품 박람회 이름으로 1851년 철과 유리로 만든 런던에 세워진 대형 건축물로 제1회 만국박람회 개최하기 위해 건설되었습니다.
1936년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를 문명의 이상이자 상징으로 삼아 자주 비판적으로 묘사합니다.
<지하생활자의 수기>,<죄와벌>에 수정궁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이 책에서도 수정궁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당시 도박에 빠져 돈을 딸때 수정궁으로 가닿는 환상을 묘사합니다. 그리곤 추락하는데 읽어보시면, 지금 주식에 빠져 돈을 잃는 현대인의 모습과도 흡사한 것 같네요.


˝처음 두 번의 베팅에서나 때로는 세 번째 베팅에서까지도 그는 돈을 따곤 했다. 그럴 때면 도박꾼들과 구경꾼들이 이루고 있는 그 회전목마가 소용돌이처럼 그의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하고, 그는 다시 수정궁이 있는 저 미답의 정상을 향해 수직으로 곧추선 낭떠러지를 기어 올라갔다. 아래쪽에서는 낯익은 얼굴들이 그 애처로운 원무를 추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는 돈을 잃기 시작했다. 그래도 자기 방식을 고수하려고 노력해 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잃게 되었던 것이다. ‘자기 방식‘ 같은 것은 포기해 버린 후에도 그는 계속 잃고, 결국에는 돈을 가지러 집으로 달려가곤 했다. 이것은 의학적으로 ‘강박 흥분증‘과 비슷한데, 좌절을 하면 할수록 그 시도를 반복하려는 집요한 욕망이 더 강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 161쪽

하지만 누군들 편리하게 ‘이론‘을 만들어 자기 자신을 기만하지 않을 것인가. 그것으로써 우리는 우리에게 부여된 충격들을 일종의 숙명으로 바꾸어 완화시키고, 또 그렇게 해서 우리의 실패와 나약함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어쩌면 여기에, 도스토예프스키가 유형지에서 겪었던 소위 ‘정신적 변화(사회제도의 변혁에서 종교적 구원으로의 관심 이동)‘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병적인 자존심은 그가 그곳에서 겪었던 그런 모욕들과 결코 타협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출구는 하나뿐이다. 이 모든 모욕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 말이다. 그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
˝나는 십자가를 지고 있으므로 이 모욕은 당연한 것이다˝
-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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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등한시했던..
그래 최애는 도스토예프스키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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