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는 연일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기사가 대 여섯 단씩 실리기는 했지만, 소스케는 그걸 훑어본 것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암살 사건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 35쪽



"나 같은 가난한 월급쟁이는 살해당하는 게 싫지만 이토 씨 같은 사람은 하얼빈에 가서 살해당하는 게 나아"하고 소스케가 비로소 우쭐해하며 말했다. (중략) "왜라니, 이토 씨는 살해당했으니까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거거든, 그냥 죽어보라고, 그렇게는 안되지." - 36쪽



세간을 넣어두는 방에서 꺼내온 것을 환한 데서 보니 분명히 본 적이 있는 두 폭짜리 병풍이었다.

아래쪽에는 싸리, 도라지, 참억새, 칡, 마타리를 빈틈없이 그려놓고 동그란 달은 은박으로 처리했으며 그 옆의 빈 곳에 "들길, 그리고 하늘에 뜬 달 속의 마타리, 기이치"라는 하이쿠 한 수가 쓰여 있었다. - 65쪽



소스케는 아주 짧았던 그때의 대화를 일일이 떠올릴 때마다 그 하나하나가 거의 무색이라도 해도 좋을 만큼 담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투명한 목소리가 어떻게 그렇게 두 사람의 미래를 새빨갛게 뒤덮었는지를 신기하게 여겼다. 지금은 그 붉은색도 세월이 흘러 옛날의 선명함을 잃어버렸다. 서로를 불태운 불꽃은 자연스럽게 변색되어 까매졌다. 두 사람의 생활은 이렇게 어둠 속에 가라앉았다. - 184쪽



지금까지 소스케의 마음에 비친 오요네는 색과 소리가 어지러운 가운데 서 있을때조차도 무척 차분했다.

그리고 그 차분함은 눈을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데서 온 것이라고만 생각되었다. - 188쪽



"그런데 말이오, 공자의 제자 중에서 자로를 제일 좋아한다더군요. 그 이유를 물어보니까, 자로라는 사람은 뭔가 하나를 배웠는데 그것을 미처 행하기도 전에 또 새로운 것을 들으면 고민을 할 정도로 정직해서랍니다. 사실 저도 자로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어서 난처했지만, 아무튼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 사람하고 결혼도 하기 전에 또 새롭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고민되는 거 아니겠느냐고 물어보았지요." - 203쪽



오늘까지의 경과로 미루어보아 모든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은 세월이라는 격언을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 이끌어내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것이 그제 밤에 완전히 무너졌던 것이다. - 218쪽



"책을 읽는 것은 아주 해롭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독서만큼 수행에 방해되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저희도 이렇게 <벽암집>같은 걸 읽고 있습니다만, 자기 수준 이상의 것은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적당히 어림짐작하는 버릇이 붙으면 좌선할 때 방해가 되어 자기 이상의 경계를 예상해보거나 깨달음을 기다려보거나 해서 충분히 파고들어야 하는 데서 좌절할 수 있습니다. 무척 해가 되니 그만 두는게 좋을 겁니다. 만약 굳이 뭔가 읽고 싶으시면 <선관책진>처럼 사람에게 용기를 주거나 격려해주는것이 좋겠지요. 그것도 그냥 자극의 방편으로 읽을 뿐이지 깨달음 자체와는 무관합니다." = 234쪽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큰일이 절반쯤 끝난 것처럼 느꼈다. 자신은 문을 열어달라고 하기 위해 왔다. 하지만 문지기는 문 너머에 있으면서 아무리 두드려도 끝내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다만,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열고 들어오너라"하는 목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그는 어떻게 해야 이 문의 빗장을 열 수 있을 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수단과 방법을 머릿속에서 분명히 마련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열 힘은 조금도 키울 수 없었다.

따라서 자신이 서 있는 장소는 이 문제를 생각하기 이전과 손톱만큼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닫힌 문 앞에 무능하고 무력하게 남겨졌다. 그는 평소 자신의 분별력을 믿고 살아왔다. 그 분별력이 지금은 그에게 탈이 되고 있음을 분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취사선택도, 비교 검토도 허용하지 않는 어리석은 외골수를 부러워했다. 또는 신념이 강한 선남선녀가 지혜도 잊고 여러가지로 생각도 하지 않는 정진의 경지를 숭고한 것이라며 우러러보았다. 그 자신은 오랫동안 문 밖에 서 있어야 할 운명으로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지날 수 없는 문이라면 일부러 거기까지 가는 것은 모순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도저히 원래의 길로 다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견고한 문이 언제까지고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문을 지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문을 지나지 않아도 되는 사람도 아니었다. 요컨대 그는 문 아래에 옴짝달싹 못하고 서서 해가 지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 252~253쪽



놀랍게도 이 제목 자체는 소세키의 작명이 아니다. 전작 <그 후>를 마무리 짓고 신문사에서 다음 작품의 제목을 알려달라고 독촉하자 소세키는 아사히 문예란을 담당하던 제자에게 적당한 제목을 붙여달라고 부탁했고, 이 제자가 친구와 상의해서 정한 제목이 "문"이었다. - 266쪽



그는 문을 열 만한 힘이 없다. 이것이 전근대적 전통에서도, 근대 문명에서도 출구를 찾지 못했던 소세키 자신의 모습은 아닐까. - 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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