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영혼은 육체라는 뻘 속에 갇혀 있어서 무디고 둔한 것이다. 영혼이 지각 능력이란 조잡하고 불확실한 법이다. 그래서 영혼은 아무것도 분명하고 확실하게는 예견할 수 없다.


그 친구가 나를 <책벌레>라고 불렀을 때, 불쑥 솟아오르던 그 분노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당시 내가 영위하고 있던 삶에 대한 나의 모든 역겨운 감정이 그 말로 형상화되었다. 그토록 강렬하게 인생을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책 나부랭이와 잉크로 더럽혀진 종이에다 자신을 그리도 오랫동안 내박쳐 둘 수 있단 말인가! 그 이별의 날, 내 친구는 내가 나 자신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게 해준 셈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오?˝ 그가 스스럼없이 물으며 큰 머리통을 흔들었다.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오?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보는 버릇 말이오. 자, 젊은 양반, 결정해 버리쇼. 눈 꽉 감고 해버리는 거요˝


언어,예술,사랑,순수성,정열의 의미는 이 노동자가 지껄인 가장 단순한 인간의 말로 내게 분명히 전해져 왔다.


우리의 지향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더 길어지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훨씬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의 한계에 이르지 않은 채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자유일까?


우리는 베를린 박물관을 나오는 길이었다. 거기에서 친구는 가장 좋아하던 그림, 청동 투구 차림에 움푹 들어간 뺨, 비극적이지만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렘브란트의 <전사>를 마지막으로 돌아보고 온 길이었다.(...) ˝내가 내 평생에 사내다운 행동을 한다면 그건 저 그림 덕분일거야˝


두목, 사람들 좀 그대로 놔둬요. 그 사람들 눈뜨게 해주려고 하지 말아요! 그래, 눈을 띄워 놓았다고 칩시다. 뭘 보겠어요? 자기들 비참한 처지밖에 더 봐요? 두목, 눈 감은 놈은 감은 대로 놔둬요! 꿈꾸게 내버려 두란 말이에요!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언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그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어렴풋하게나마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낡은 세계는 구체적이고 견고하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실재하는 세계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환상적이고 유동적이며 꿈을 빚는 재료인 빚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광풍 - 사랑, 증오, 상상력, 행운, 하느님 - 에 휩쓸린 한 조각 구름이다. 지상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표어를 줄 수 있을 뿐이다. 그 표어가 막연할수록 선지자는 더 위대한 것이다.


조르바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그 머리는 지식의 세례를 받은 일이 없다. 하지만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마음은 열려 있고 가슴은 원시적인 배짱을 고스란히 품은 채 잔뜩 부풀어 있다. 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자르듯이 풀어낸다.(...) 우리들 교육받은 자들이 오히려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골이 빈 것들일뿐.


먹은 음식으로 뭘 하는가를 가르쳐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말해 줄 수 있어요. 혹자는 먹은 음식으로 비계와 똥을 만들어내고, 혹자는 일과 좋은 기분을 만들어 내고, 혹자는 신을 만들어 낸다나 어쩐다나 합디다. 그러니 인간에게 세 가지 부류가 있을 수 밖에요.


˝두목, 내 생각을 말씀드리겠는데, 부디 화는 내지 마시오. 당신 책을 몽땅 쌓아 놓고 불이나 확 싸질러 버리쇼. 그러고 나면 누가 압니까. 당신은 바보가 아니고, 당신은 착한 사람이니까...뭔가 썩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나는 타락해 있었다.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에 대한 책을 읽는 것중에서 택일해야 한다면 책을 선택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나이 먹어 가는 걸 인정한다는 것은 여간 창피한 노릇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걸 눈치채지 못하도록 별 짓을 다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길 잃은 영혼이며, 우리의 삶이 하찮은 쾌락과 고통과 헛소리로 소진되어 가는 중임을 깨닫는다. 그러면 부끄러워하면서 입술을 깨무는 법이다.


˝거룩하신 원장, 내가 한가지 청을 드립지요. 날 그 수도원 문지기로 취직시켜 주시오. 밀수도 좀 해먹고 이따금 그 성스러운 경내에다 괴상한 물건도 좀 들여놓게. 여자, 만돌린, 라키 술통, 애저구이. 그래야 당신네들이 허튼수작이나 부리며 인생을 우습게 살아 버리지 않을 게 아닙니까?˝


이게 사람이 자유를 얻는 도리올시다. 내 말 잘 들어요. 터질 만큼 처넣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금욕주의 같은 걸로는 안 돼요. 생각해봐요 두목. 악마를 이길려면 자기가 악마 한 마리 반은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두목! 이 세상에서 악마의 발명품이 얼마나 근사한지, 혹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예쁜 여자, 봄, 애저구이, 술...이런 건 모두 악마의 발명품이라고요. 하느님은 수도승, 금식, 카밀러 차, 못생긴 여자 같은 걸 만들었고요...니기미!


˝그래요. 당신은 그 잘난 머리로 이해라는 걸 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진실이고 저건 아니다. 그 사람은 옳고 딴 놈은 틀렸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 팔과 가슴을 봅니다. 그래, 팔과 가슴이 뭘 합니까? 침묵한다 이겁니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아요. 흡사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이겁니다. 그래,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건가요? 머리로? 웃기지 맙시다.!˝


˝내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쓰여 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나같은 사람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여자도 그걸 알고 있으리라. 여자에게 사내란 얼마나 가련하고, 허풍선이고, 불합리하고, 무력한 동물일 것인가!˝


˝인간이란 참 묘한 기계지요! 속에다 빵, 포도주, 물고기, 홍당무 같은 걸 채워 주면 그게 한숨이니 웃음이니 꿈이 되어 나오거든요. 무슨 공장 같지 않소. 우리 대가리 속에 무슨 영화관 같은 게 들어있는 게 분명해요.˝


˝한줌의 흙이로구나˝ 조르바는 생각했다.
˝배가 고팠던, 웃기도 했던, 한 줌의 흙. 인간의 눈물을 흘리던 진흙 한 덩어리. 지금은...우리를 이 땅에 데려나 놓은 악마는 어느 놈이고, 이 땅에서 데려가는 악마는 또 어느 놈인고?


˝조르바, 사람이란 누구나 뱃속에 악마 몇 마리쯤은 갖고 있으니 그건 걱정 마세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지요. 중요한 건, 이 악마들의 최종목적이 같아야 한다는 거죠. 가는 방법은 다르더라도˝


인간이라는 불운한 존재는 작고 초라한 자신의 삶 둘레에 난공불락이라고 믿는 방벽을 쌓아 올린다. 그 안을 피난처로 삼아, 삶에 미미한 질서와 안정을 부여하려 애쓴다. 미미한 행복을 말이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밟아 다져진 길들을, 알 수 없는 것들의 무서운 침범을 막으려 요새처럼 방비한 그 테두리 안에서, 자잘한 확신들이 지네처럼 꼬물꼬물 기어다니며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적이 딱 하나 있다. 모두가 죽을 듯이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그 적의 이름은 <거대한 확신>이다. 지금, 이 거대한 확신이 내 존재의 장벽을 뚫고 들어와 내 영혼을 덮치려 한 것이다.


생전에 그가 마련해 놓은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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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끼와 고열로 1일 반차를 내고 코로나19 의심 증세로 드라이브 스루 선별진료를 받았다.
다행히 음성판정을 받았지만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불안과 고통으로 짓눌리고, 주말도 여전히 감기몸살 기운으로 무기력하게 보냈다.

혹시나 만에 하나 양성으로 판정되면 직장과 가족에게 끼칠 민폐는 이만저만이 아니라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내가 대구의 한복판에 있었구나˝를 절실하게 실감한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러다 또 열나고 감기몸살에 걸리면? 햐..생각만 해도 불안해진다.
코로나에 감염되고 안되고를 떠나 감기에 걸리는 것도 개인의 건강 관리를 제대로 못한다는...비난 아닌 비난을 들을 수 밖에 없는 요즘...참 심사가 복잡해진다.

이렇게 딱 3일하고도 반일동안 끙끙거리며 만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예전에 몇번 시도하다가 초반에 실패를 몇번 했었는데, 이번 기회에 완독할 수 있었다. 방에 처박혀 누워서 할 수 있는 게 책보고 음악 듣는 거 밖에. 컨디션이 엉망이라 썩 기분좋은 상태로 감상은 하지 못했지만.

<그리스인조르바>는 이렇게 내 인생에서 코로나19의 특별한 경험과 함께 했다.
특히, 육체와 정신에서 합일점을 찾아가려고 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명문장들이 요 몇일간의 근육통과 함께 훗날 강렬하게 남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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