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지키는 것이 여자에게 최고의 미덕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자가 남자에 비해 이성적 사고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정이나 국가를 포함한 모든 조직에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가 있기 마련이며, 이러한 조직에서는 이성적 사고 능력을 더 많이 가진 자가 지배하는 위치에 서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노예는 아예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아이들의 능력은 아직 미숙하다. 여자는 가지고 있지만 그 권위가 부족하다˝<정치학>. 따라서 여자가 남자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여자의 침묵을 미화한 고대 그리스의 시인 소포클레스를 좋아했다는 말에 수긍이 된다.




이 책이 페미니즘에 관한 최고 권위를 지닌 고전으로 자리를 굳힌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어떤 주장이 사람들의 감정 속에 깊숙하게 뿌리는 내리고 있는 한, 비판이 제기되면 될수록 완강하게
버티는 힘 역시 더 커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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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야만적인 습속이기는 하나 현재까지 오랜 세월 이어왔다고 해서, 그것이 앞서 털어버린 다른 야만적인 것들보다 한결 참을 만하다고 상정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정치적 해방을 얻기 위해 투쟁에 나선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뇌물 공세에 무너지고 또 테러 위협에 주저앉고 마는지 잘 안다. 종속 상태에 있는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하나같이 뇌물과 협박이라는 만성적인 두 사슬에 묶여 꼼짝을 못한다.




전체 인류의 반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어이없는 불이익을 주는 경우를 제외하면, 태어나면서부터 짊어져야 하는 치명적 장벽 때문에 - 아무리 노력하고 환경을 바꾸더라도 소용없다 -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지 못하게 되는 일은 어디에도 없다.




오늘날 여성의 본성이라도 알려져 있는 것들은 확실히 인위적으로 - 특정한 방향을 향해 강압적으로 몰아가고, 또 어떤 방향으로는 부자연스럽게 자극을 준 결과 -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분명히 말하지만, 아주 친밀할 뿐 아니라 동시에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면 서로에 대해 충분히 잘 알기만 매우 어렵다. 여성이 남성의 지배 아래 놓여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맞춰가야 한다고, 그리고 남성의 마음에 드는 것을 제외하고는 여성이 아무것도 보여주거나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고 오랫동안 교육받아 왔다면, 이 경우만큼 남성과 여성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또 있을 것인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완전히 말살시킬 수 있는 힘을 가졌지만 그 사용을 자제하는 권력자들에 대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한 고마움을 느낀다는 것은 인생에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 중 하나이다.




흔히 이상적인 형태의 가정은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 그리고 자기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을 길러주는 학교과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 집안의 우두머리 입장에서 본다면, 가정은 분명 제멋대로 살며 무서울 정도로 횡포를 부리고, 끝없이 방탕한 생활을 하며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이기적인 사람이 똬리를 틀 수 있는 온실과도 같다.



집안일을 감독한다는 것은 설령 육체적으로 그다지 힘이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찬찬히 사색하기에는 여간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은 통장적으로 주어진 일상적인 일 말고도 언제나 자신의 시간과 능력을 다른 사람을 위해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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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러한데도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끈질기게 집중해야 하는 일에서 여성이 최고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해서 이를 가볍게 볼 수 있겠는가? 철학,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술이 바로 그런 분야이다.
생각과 감정을 집중해야 할 뿐 아니라 고도의 기량을 갖추기 위해서는 손도 늘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공부깨나 한다는 남성을 포함해서 세상 사람들이 사회적 환경의 영향력을 애써 무시하고 외면하는 가운데, 여성의 지적 능력에 대해 근거없이 폄하하는 한편 타고난 도덕성에 대해서는 엉뚱하게 찬사를 늘어놓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은 없다고 확신한다.




현대의 도덕과 정치 운동을 관통하는 중요한 원리는 오직 행위만이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어떤 존재냐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는가에 따라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출신이 아니라 능력이 모든 권력과 권위의 유일한 원천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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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그렇듯이 설익은 깊이로 어느 한 분야, 특히나 요즘같이 남혐,여혐의 극한으로 치닫는 남녀갈등에 대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공개적인 포스팅에 자신만의 명확한 주관으로 썰을 풀기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더군다나 오랫동안 접근이 제한된 교육의 기회와 남성적 권력이 주가 되는 가부장적 제도하에서 세뇌되다시피 자연스럽게 체화된 여성들의 모순된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쉬울지 몰라도,
지극히 자연스럽게 누려웠던 남성 권력이 얼마나 여성들에게 실패의 고통을 가져다 주었던가? 라는 걸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직시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이 책은 밀의 사상 전반 <자유론>의 기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밀 사상의 종합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간의 삶에서 각자가 최대한 다양하게 자신의 삶을 도모하는 것 이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라는 말이 자유론에 나오는데 <여성의 종속>은 이런 정신에서 잉태된 것이다.

여성들이 정치에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 불과 20세기 전반인 것을 볼 때 19세기에 살았던 밀이
당시의 기득권을 상대로 이런 글을 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밀의 저서 <대의정부론>의 핵심메시지가 ˝무식과 지식이 동일한 정치권력을 향유한다는 것은 원칙상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훌륭하고 현명한 사람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더 커야한다˝라는 것처럼 남성들에게조차 전부 1인1표를 주어야 한다는 발상도 매우 급진적인 사람이 아니면 하기 어려운 생각인 걸 감안했을때 말이다.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또 다른 프랑스의 천재 루소가 해내지 못한 ˝인류의 평등˝이라는 가치를 밀이 멋지게 이 책을 통해 드러낸 것이다.
마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상반된 입장처럼.


하지만 이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다시피
안타까운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다.
근대 서구 여성주의 이론사의 출발점이라고 할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고, 1702년에 나온 메리울스턴크래프트의 <여권옹호론>의 뒤를 잇는다는 평을 듣지만, 시대적인 한계를 고려한다고 해도 전반적으로 원론 수준을 맴돌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잘못된 점을 비판하고 향후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지만, 그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행위‘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점일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남녀가 정신적인 능력이나 평균적인 힘 또는 소질 면에서 천성적으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거듭 천명하면서도 여성이 실용적인 재능을 더 많이 타고났다고 하는점이나, 사변적 능력은 남성의 몫에 가깝다고 서술한 점, 그리고 나아가 여성 개개인의 성격에 따라 편차가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전제하면서도, 여성이 자기 가족의 사적인 이익에 도움을 주지 않는 일에 마음을 쏟거나 나서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정의에 대한 문제인식을 폄하한 점은 매우 안타깝다.




그때로부터 또 20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한민국은 그 견고한 남성의 권력을 시대의 변화에 맞게끔 되돌리기 위해 몸살을 앓고 있다.
하지만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하지 않는 남성들이나, 같은 여성을 배제하고 폄하하는 또 다른 냉대와 차별은 문제해결의 걸림돌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성이 탁월하다거나 형편없다고 남녀평등의 문제에 혜안이 깊거나 얕다고 무시하는 것 또한 바람직한 행동이 아닐 것이다.
현 시대의 고통과 신음을 바라보는 문제해결의 실마리는 물줄기의 원천인 고전에서 찾는 것도 또 다른 방법중 하나일게다.
너무나 많은 자극적인 책들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나를 포함한 침묵하는 대다수의 남성, 그리고 여성들이 시대의 진통을 바라보고 모순된 체제의 변화를 갈망한다는 점을 가슴에 끌어안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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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9-02 19: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부녀인 해리엇을 20년간 기다렸다가 남편이 죽고 7년반동안 결혼생활을 한 밀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해리엇을 만나 밀의 사상은 더 성숙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북프리쿠키 2018-09-02 19:48   좋아요 2 | URL
자유론 서문에 해리엇의 죽음 이후 감수없이 출간되었다고 안타까워한 글이 떠오르네요.
성인이 된 이후 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서글프네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처럼, 밀과 해리엇처럼 남녀의 조화는 이렇게 위대한가봅니다^^
요즘 벨루치님 읽으시는 것보니 따라가는 건 고사하고 근처도 못갈듯ㅠ
아주 가랑이 찢어집니다ㅎ

카알벨루치 2018-09-02 19:59   좋아요 1 | URL
요즘 전 잘 읽지 못해요 그냥 글쓰는것에 우선순위를 두다 보니 읽기가 더딥니다~글은 흘러넘쳐야하는건데 쥐어짜내면 안되는데 고갈이 예상됩니다 ㅋㅋ밀이 많이 아쉬웠겠습니다 더군다나 주제가 <여성의 권리>에대한 건데... 밀의 마음이 느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