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는 남자들에게 속해 있지 않은 여자란 거의 없군.‘ 그는 그런 여왕 같은 여자들을 정복한다는 것은 피를 흘리는 것보다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늦게야 깨달았다. -91쪽
딸은 십칠년 간이나 우리 가정의 즐거움이어서, 라마르틴의 말에 기대어본다면 순백의 영혼이지요. 그런데 이 딸은 나중에 우리 가정에 해독을 끼치게 된다는 말이예요. 사위가 딸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가면, 그는 우선 그녀 사랑을 도끼자루 쥐듯이 꼭 쥐고서 딸의 몸과 마음에서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감정을 싹뚝 베어버린단 말이예요. 어제까지만 해도 딸은 우리 것이었고, 우리는 딸에게 전부였지요. 하지만 다음날에는 딸은 우리의 적이 되어버려요. 매일처럼 이런 비극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지 않아요? -105쪽
인간의 모든 감정이란 이런 거지요. 우리 마음은 보물 같아서 단번에 이 보물을 쏟아버리면 우리는 끝장나지요. 돈 한푼 없는 사람보다도 자기 감정을 전부 드러내보인 사람을 우리는 더 용납하지 않지요. 이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주어버렸어요. 그는 이십 년 동안 그의 오장육부와 그의 사랑을 모두 바쳤고 모든 재산을 하루아침에 바쳐버렸어요. 딸들이 레몬을 꽉 짠 다음에 레몬 껍질을 길 모퉁이에 던져버린 것이나 같아요. -108쪽
여자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괴로움을 겪을 때 많은 기쁨을 누리는 법이지요! -130쪽
이곳 파리에서 어떻게 출세하는가를 알고 있나?천재성을 떨치든지 아니면 능수능란한게 타락해야 하네. 사회 집단 속으로 대포알처럼 뚫고 들어가거나 페스트 균처럼 스며들어 가야 하네. 정직이란 아무 소용없네. -148쪽
부자가 되려면 선풍을 일으켜야 하네. 선풍을 일으키지 못하면, 뭣하지만, 사기쳐야 하네. 미안한 말이지만 자네가 뛰어들고 싶은 백가지 직업에서 재빨리 성공하는 사람이 열 명쯤 있을 걸세. 세상은 이 사람들을 도둑놈이라고 부르네.-149쪽
위대해지고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은, 거짓말하고 굴복하고 굽실거리고, 다시 일어나서는 아첨하고 속이겠다고 결심하는 게 아닌가? -158쪽
˝부인의 우정은 남다르지만 나는 부인의 친구로만은 만족할 수 없습니다 ˝ 라스티냐크가 말했다.
풋내기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이런 어리석은 문구는 여성들에게 항상 매력적이다. 냉정한 눈으로 살펴보아야만 비로소 초라하게 생각된다.-173쪽
앞으로 당신도 당신 행복보다 자식들 행복에 대해 더 즐거워하게 된다는 걸 알게 될 거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소. 몸의 도처에서 기쁨을 내뿜는 내적인 움직임 말이오.-181쪽
제가 결코 행복하지 못하다는 걸.
쇠사슬 중에서도 돈의 사슬보다 더 무거운 건 없으니까요. -194쪽
그는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속에 진정한 부끄러움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90쪽
사랑이 열렬하고 진지할수록 더더욱 감추어져야 하며 신비로워야 하오. -291쪽
어쩌면 사랑이란 쾌락에 대한 보답에 불과한 것이다. 더럽건 숭고하건, 그는 그녀가 지참금처럼 그에게 가지고 온 육체의 기쁨 때문에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한테서 받은 모든 관능적 쾌락 때문에 그녀를 뜨겁게 사랑했다. 델핀도, 마치 탄탈로스가 자기의 배고픔을 만족시키고 말라버린 목구멍의 갈증을 풀어주려고 오는 천사를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라스티냐크를 사랑했다. -351쪽
내가 딸애들을 지나치게 사랑했기 때문에 그애들은 나를 사랑하지 못했어. 아버지는 항상 부자여야되고 자식들은 마치 엉큼한 말들처럼 굴레를 씌워서 꼭 쥐고 있어야 하지. -368쪽
딸들을 위해서라면 나 스스로 타락했을 거야!
어떤가? 가장 아름다운 성격과 가장 훌륭한 영혼을 가진 사람조차도 어버이로서는 타락에 쉽게 빠져버리지. 나는 불쌍한 인간일세.-372쪽
요컨대 당신들이 딸을 사랑한다면, 딸을 시집보내지 마시오. 사위란 도둑놈이지. 사위는 딸의 모든 것을 망치고 더럽히지. -376쪽
---------------------------------------------
발자크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모든 것을 소설을 통해 완벽하게 그려내려는 큰 뜻을 품고 <풍속연구><철학적연구><분석적연구>라는 세 계열에 91편을 담았다.
이 91편을 담은 <인간희극>은 서로의 작품들을 관련시켜 같은 인물이 여기저기 등장하는 인물 재등장 기법을 최초로 사용하면서 하나의 거대한 작품으로 구성되도록 한 것이다. 마치 영웅들이 솔로무비에서 활약하고 어벤저스에서 합쳐지는 마블의 세계관 같다고 해야 할까.
사실 발자크 작품을 읽기 전 <인간 희극>은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일 귀에 익은 이 소설을 읽어보려고 알라딘을 검색했지만 제대로 나오지 않더라.
<고리오 영감>은 지독한 수전노 이야기인줄로만 알았다는 것도..
예전 무라카미하루키의 1Q84를 아이큐84라고 읽고 친구한테 놀림받았던 기억, 또는 북플지기 ‘안녕반짝‘님처럼 독서내공이 깊은 분도 포스팅에서 ‘율리시스‘와 ‘오디세우스‘가 같은 말인지 몰랐던 그..그런 느낌이랄까.(저도 그랬답니다.ㅎㅎ)
발자크도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윌터스콧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 도스토예프스키가 20대때 발자크의 작품 <으제니 그랑데>를 번역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이 작품을 통해 직접 확인하니 참 반가웠다.
소설속에서 직접 작가가 개입하는 특징은 푸시킨이나 발자크나 도스토예프스키가 닮아있었다.
이 작품은 특히나 <인간 희극>의 중심에 서 있는 작품이라 중요한데, 발자크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려면 인간희극의 전체 짜임새를 봐야 한다니.
절로 헉소리가 난다.
제대로 이해했을지는 모르지만,
이 작품은 흥미로웠고, 가독성도 좋았고, 무엇보다 딸을 키우는 아빠 입장에서 고리오 영감의 입장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내가 죽을 때 수의하나 살 돈까지 다 써가면서 딸들의 행복을 바란다는 그 마음은 무릇 딸가진 아빠라면 누구나 그러할 것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한켠에는 딸들과 사위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을 떠올렸다.
딸애야, 제발 빈다. 날 미치게 하지 마라.
얘야, 널 귀찮게 않으마. 잘 가거라.
우린 다시 만나지도 보지도 않을 거야.
하지만 넌 내 살,내 피, 내 딸, 아니 넌 오히려
내 것이라 해야 하는 내 몸 안의 질병이고
내 썩은 피가 만들어낸 부스럼, 페스트 발진이나
부풀은 옹이다. - <민음사. 2막4장 217~223행>
난 어떨까?
누구나 난 그렇지 않을거야. 내 자식은 설마?
인간사 삶의 공식에서 크게 예외란 없는 법인 걸.
하지만 저마다 푸근하게 난 아닐꺼야. 하면서 살지 않은가.
허리가 굽고 얼굴이 쪼글쪼글한 초라한 노인들을 보며
나의 미래라고 생각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 사는 것이 다 대동소이하다는 걸 느끼는 게 늙어가면서 얻는 지혜가 아닐까?
그렇다면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이 프랑스 사회를 사실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데서 소설속의 인물들이나 우리네 삶도 또한 크게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리라.
줄곧 예술가는 어떤 신념을 가지고 한 노선에 편드는 자가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발가벗겨서 독자들에게 당차게 들이대는 자라고 말한 발자크이기에 당대 호평과 악평이 엇갈리는 진흙탕속에서도 위대한 작가로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