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발견 -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윤철호 지음 / 두란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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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가 한국교회를 위협하며 위기를 가져오고 있다. 
신천지가 사회악인지 알았는데 정상적인 기독교도 사회악으로 규정되고 이해되고 있다. 물론 그 중에는 개성? 강한 교회로 인해서 더 인식이 좋아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그들만의 문제인가 할 때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금에 벌어진 현상을 보더라도 모든 신학적인 이해 관계를 떠나 불교, 카톨릭은 현상의 문제에 단호(지혜롭게)하게 대처하여 사람들에게 불안감과 나쁜 시선을 받고 있지 않다. 유독 기독교라 칭하는 이들만 지금 문제시 되고 있으며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교회를 제외하고)

일반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 교회나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교회나 똑같은 시선으로 본다.
이런 시점에 '복음의 발견'이라는 책이 눈에 띄였다.

특히 이 책을 설명하는 부제가 눈에 띄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해하기 전까지
신자의 삶은 해석되지 않는다

신자의 삶의 문제는 결국, 이중적 실존이다
실존에서 부딪히는 문제의 답은,
복음을 발견할 때라야 가능하다

복음이 과연 인간 삶의 문을 열고, 삶에 진동을 일으켜 외부세계와 소통하게 하면서 종국에는 공감과 평화의 세계로 나아가게 해 줄 능력이 되는지 일반인의 관점에서도 보고 또한 기독교인의 관점에서도 이 책에 조금이라도 해답이 있을까 하여 손에 잡게 되었다. 

특히 저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하며 자신감을 드러내는 듯한 메시지를 책 겉표지에 실었다. "삶의 무기"라는 굵직한 문장이 읽는 이에게 기대감을 갖게 하였던 것이다.

저자는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어쩌면 교회 지도자를 배출하는 근본 원산지이다. 그는 30년 이상을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에 매진을 했는데 본 책은 대략 10년 동안 전해진 메시지 가운데 발췌한 글들이다. 특정한 주제에 따라 쓰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상황과 관심을 반영하여 '복음의 발견'이라는 큰 틀 안에서 본 메시지를 써내려 갔다.

사실 신학적 메시지인 줄 알았다. 학문의 선상에서 바라 본 신학적인 해석과 통찰을 통해 이 땅을 살아가는 교인들이 "삶의 무기"라는 거대한 해석을 어떻게 쥐어주게 만들까하며 기대감 속에 책을 펼쳤는데 본 논고가 "설교" 형태로 전해진 메시지라서 살짝 아쉬운 감이 있었다.

반면에 조직신학자로서의 신학적 담론만 다룰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사변적인 신학으로 삶을 다루는 글을 보면 독자와 교인들에게 전혀 감동이 전해지지 않고 단순한 학술적 자료만 되는 글들이 있기 때문이다.
전문성을 가지고 잘 썼지만 혼자만 똑똑하고 혼자만 누리는 그런 글들로 인해 사실 독자는 바로 외면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섣부른 우려였다. 다시 뒤에서 말하겠지만 저자가 전하는 글은 상당히 가독성이 좋고 메세지는 설교 형태를 띄지만 삶이 오롯이 녹아난 메시지로서 가슴을 건들고 행함(삶)을 건들고 있다. 즉 너무 높은 하늘의 메시지가 아니라 이 땅의 메시지로서 독자에게 말을 걸어 온다는 것이다.

저자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이라는 틀을 정해 놓고 설교의 형태를 한데 묶어 나누고 있다.
문제를 제기하는 (기)에서는 "사랑과 섭리가 시작이다"를, 문제를 전개하는 (승)에서는 "은총과 믿음이 현재를 직면하게 한다"를, 방향을 전환하는 (전)에서는 "인간의 실존을 뚫고 은혜는 임한다"를, 거두어 끝맺음인 (결)에서는 "인생의 열매는 이끄심을 따를 때 허락된다"를, 마지막을 하나님께라는 소제목에는 合(합)이라는 한문을 넣고 "십자가를 기억한다면 광야는 영광의 문이다"라고 제시한다.

틀이 주는 의미가 없잖아 있지만 굳이 틀을 정해 놓지 않아도 될 포괄적인 메시지가 이 책에 흐르는 주제이다.
그건 '실존에서 부딪히는 문제의 답은 복음을 발견할 때'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십자가의 은혜'를 알 때 결국 삶의 절망은 희망이 되고 진정한 변화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으로서 이 땅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교 학자인 마틴 부버가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 것을 들어보자.
"기독교인이 보기에 유대인들은, 구속되지 않은 세상에서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완고한 사람들이다. 반면에 유대인들이 보기에 기독교인들은, 구속되지 않은 세상에서 어떻게든지 일어났다고 확신하는 부주의한 사람들이다." 

유대교 랍비는 메시야가 오셨다는 말을 듣자 창밖을 내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변한 것이 없네" p123

기독교의 현주소가 아닐런지. 변한 것이 없다면 과연 복음은 삶의 무기가 될까?

사실 이 문제는 사죄의 은총과 믿음을 제대로 가지지 못해서이다.
죄의 성향이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제대로 긍휼을 구하고 믿음의 방향성을 완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설 때 내면의 영적 질서는 거룩함에 이르게 된다. 저저는 '태양'이라는 비유를 잘 사용하고 있는데 '믿음은 방향성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식물은 빛을 향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든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이다.... 여전히 우리가 죄와 허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하는 방향성을 회복하고 긍휼을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울와 다윗의 차이, 가롯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는 결국 어디를 향했느냐과 관건인데 사울과 유다의 비극은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지 않는데 있다고 말한다. p72-73

책은 계속해서 믿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주며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믿음의 이해 방식을 새롭게 해주고 있다. 익히 잘 알고 있는 종교개혁의 리더자인 루터가 외친 "오직 은혜로만, 오믹 믿음으로만"이라는 외침은 당시 부패의 상징이 된 로마 카톨릭을 향하여 필요한 메시지가 되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하박국 2장 4절에서 가져온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의미가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만'의 믿음이 아니다. 
즉 믿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무나'는 성실함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 받은 묵시가 더디게 느껴질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끝까지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기다리는 믿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루터가 말하고자 한 '믿음'의 메시지는 행동없는 믿음이 아닌 거대한 종교개혁에 맞서 싸운 행동하는 믿음, 불의에 저항하는 믿음인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우리의 믿음이 아닌 "그리스도의 믿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런 부분을 신학적 지식을 통해 멋지게 해석해 주고 있는데 여기서 독자들은 잘못 정리된 믿음이 수정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고 해석해 주는 내용을 보자. 
성경본문 2:16절 첫 부분을 보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라고 나온다.
이 구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문에서 보면 문법상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주체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법적으로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

그리고 이 구절 바로 다음에 나오는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은 '그분의 믿음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바울에 따르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믿음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en Christou) 있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이 신학적 용어로 '코르 쿠르붐 인세'(cor curvum in se)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어거스틴이 만든 말인데 문자적으로 '자기 자신 안으로 굽어져 있음'을 뜻한다. 즉 자신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중심적인 마음, 자기 중심적인 하나님을 믿게 되면 공감적 믿음과 사랑이 생기지 않아 하나님을 공감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은 공감적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이 사랑은 자기 희생적 사랑으로 나타난다. 즉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존재로 부름받고 있다. 그리고 이 변화는 개인을 넘어 사회와 정치의 영역에서도 발휘되어야 한다. 교회가 사회의 현실을 외면해서는 복음은 한낱 '정치적인 구호' 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저자는 25개의 글(설교)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잘못된 믿음의 이해를 수정케 하고 복음을 새롭게 발견하는 자리로 초대한다.

본 서적에서 주목할 부분은 설교의 본유적인 과제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삶에 오롯이 기록되도록 쉽게 독자들을 초청한다. 즉 일단 가독성이 좋다. 조직신학자라 읽기가 곤란하지 않을까? 딲딱하게 전문 용어로 글을 써내려가지 않았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읽기가 수월하고 이해도가 빨리 된다. 

그런데 이 책은 가독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성이 깊이 묻어난 글이다. 익히 알고 있는 글과 예화가 보이지만 품격있는 글과 깊이가 묻어난 글이 어우러져 편안하게 읽고 (설교를 듣는 다면)듣기에 좋다. 

아마도 이 부분은 저자가 교수의 직함만 가지지 않고 신앙의 실제를 살아가는 교회를 담임하며 설교를 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더불어 '삶의 실제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인카네이션 incarnation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조직신학자인 저자가 삶의 언어로 잘 풀어낸 이 책은 현제 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회자만 아니라 신학에 입문한 자들에게도 설교의 방향성과 메시지가 어떻게 구성되고 만들어져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귀한 샘플이 되리라.
사실 시간을 두고 읽으려 했는데 읽으면서 손에 놓지 못하고, 두번에 걸쳐 읽어냈다. 
다시 말하지만 가독성이 매우 좋은 깊은 신앙적 사색이 담긴 메시지다. 

아쉬운점은 그분의 개인적 신앙 체험의 글이 자세히 내포되어 설명되어졌다면 더더욱 귀한 책이 되지 않겠나 싶다. 삶에서 우러난 메시지가 더 깊이 사람의 마음에 남아돈다. 그 부분이 많이 절제되어 있고, 아쉬움을 남긴다.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루소의 고백론은 자신을 드러내기를 놀라울 정도로 드러내어 공감를 일으킨다. 
톨스토이의 자서전도 그렇고, 존 번연의 자서전(죄인의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크리스천 다이제스트)도 보면 리얼한 삶의 예화가 읽는 자들에게 공감과 감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삶의 무기'가 되어야 한다.

그대가 겸손(온유)하지 못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언짢게 한다면 삼위일체를 아무리 심오하게 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고상한 말이 사람을 거룩하고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덕스러운 삶이야말로 그 사람이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가 되게 합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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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다움의 사회학 - 남자를 지배하는 ‘남자라는 생각’
필 바커 지음, 장영재 옮김 / 소소의책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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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 어린 소년들에게는 남자가 되는 길로 가는 첫발을 내딛기 오래전부터 마음속에서 메아리치는 말이 있다.
 남자를 지배하는 "남자라는 생각"

남자의 일생을 좌우하는 ‘남자다움’의 의미와 실체

다양한 사례와 연구 결과, 그리고 저자 자신의 경험을 곁들여 써내려간

오늘을 살아가는 남자들에 대한 모든 것을 이 책은 꼼꼼하게 짚어준다!

남자라는 이 단어는 남성들에게 굉장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여자와는 다른 존재로서 세상을 남자처럼 대하고, 남자처럼 세상을 살아가며, 남자만이 누릴 수 있는 우월감을 갖게 하는 원동력을 부여한다.

나 또한 남자이기에 여자로서 태어나지 않는 자신을 초등학교 때이지만 자랑스러워 했던거 같다.

남자는 결코 계집애가 아니기에 남자는 '하늘'이라는 당당함이 주어졌고, 여자는 '땅'이라는 복종으로 남자를 대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살다보니 그게 아니다. 남자는 하늘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불쌍한 동물이다.

즉 여성시대를 맞아서 남자는 그저 하늘이라고 생각만 하며 살지 여자가 이제는 남성이 상징하는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어쩌면 남성이 이제 소리치며 호소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즉 여성들이 원하는 남자다움의 이미지가 극단적 페미니즘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남자가 집안에서 큰소리를 치는 순간, 남자는 더 못난 남자가 되며, 내가 남자이기에 남자의 뜻을 따라서 여자가 순종하며 순순히 따라와야 된다고 하는 순간 가정은 해체되고 아파진다.

그래서 남자는 선택했다. 외적으로는 남자 같아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여성에게 순종하며  하게 살기로 결정했다. 어쩌면 이것이 요즘 시대에 여성이 원하는 남자가 아닌가 생각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말하는 '남자다움'은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음을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면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남자다움이라는 사회적 관례가 세대 간에(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전수되면서 사회에 많은 해악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오스트레일이라에서는 매주 여성 한 명이 배우자나 이전 배우자의 손에 목숨을 잃고 있다. 매년 30만명 이상의 여성이 배우자가 아닌 사람이 저지르는 폭력을 경험한다. 남자는 여성이라는 대상을 지배하고 통제하고 압박해도 된다는 생각을 은연 중에 주입받아 여성에 대한 폭력과 학대가 쉽게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남성다움'은 남자에게도 해악을 가져오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남자이기에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이겨내며, 가정을 지키며, 강인해야 하고, 약점이 없고, 이성애자이고, 통제하는 사람이며,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하루 6명의 남자가 자신을 죽인다. 즉 '자살'을 선택한다. 자살방지 서비스인 '라이프라인'은 남성의 자살률이 여성의 세 배라고 보고한다. 매년 자살하는 남성의 수가 자동차 사망자 보다 두 배가량 더 많다는 것이다.(오스트레일리아 기준)

더군다나 자살 관련 통계에서 남성이 다수를 차지하는 이유를 보니 남자들은 더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확실하게 원하는 자살 방법을 택한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대게 약을 과다 복용하거나 물을 채운 욕조에 손목을 긋는 형식을 취하는데 남성은 총을 사용하고나, 목을 매거나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다.

최근 아는 지인 마을에 한 아버지가 자살을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용을 들어보니 끔찍했다.

아들에게 퇴직 연금을 다 몰아주어서 사업을 하게 하고, 본인은 아내가 나오는 연금으로 생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업이라는게 코로나가 맞물려 도산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우울증이 찾아오고 아내와 사이도 좋지 않는 가운데 자살을 했는데, 어떻게 했느냐가 충격이다. 그건 바로 칼로 자신의 배를 그어버린 것이다.

이렇듯 남자다움이라는 것이 결코 사회적으로 더이상 요구되는 것을 버릴 때가 되었다.

남자다움에 관한 사회적 정의의 재검토는 남자들이 받는 -충족 불가능한 성취를 기대하는 -압박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남성다움을 기대하는 압박은 여성에 대한 폭력, 학대, 통제가 발생하는 상황을 조성한다.

맨 박스Man Box 용어가 이 책에 나온다. 한 책에 보면 대부분의 남성들은 선량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여러 차례 확고히 강조하면서도, 그런 선한 남성들이 여성들의 고통에 마음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악한 사회화가 바로 맨 박스라고 말한다. 맨 박스로 인해 남성들 역시 희생당한다는 이야기는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맨 박스는 남성들이 보유한 성적 편견과 고정관념을 강화하며, 이는 마침내 그 남성들의 자녀들에게까지 대물림되는 현상이다. 맨 박스가 가미된 사회화는 자녀들이 아주 어릴 때의 양육에서부터 반영되는데 예컨대, 아버지들은 딸들이 울면 괜찮다고 안아주지만 아들들이 울면 먼저 호통부터 친다.

대표적으로 사례를 들면, "사내놈이 되어가지고 울고 있다니, 어서 뚝 그치고 고개를 들어라! 아버지 화나게 만들지 말고, 울지 말고 문제가 뭔지 확실히 얘기해라! 네 방에 들어가서 감정이 진정되면 그때 와라!"같은 식이다. 우리나라 용어로 보자면 "남자는 평생 눈물은 세 번만 흘리는 것이다."

어릴 때 넘어진 경험이 있을 것이다. 무릎이 까이고 핏방울이 맺힌다. 이전 같으면 옆에 있는 엄마 아빠가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안아주었지만 웬일인지 이번에는 다르다. 힘주어 어깨를 잡고 빤히 눈을 응시할 뿐이다. 그러고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정도쯤은 괜찮아. 넌 씩씩한 남자니까 아파도 울지 않을 거지?

그렇다. 남자는 남자로서의 강요를 어릴 때 부터 끊임없이 강요당한다. 남자답지 못하게 굴면 또래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고립된다. 그와 달리 남자답게 행동하면 칭찬과 우러름이라는 보상이 주어진다. 약점을 보이지 마라.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울지 마라. 계집애처럼 굴거나 감상적인 사람이 되지 마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지 말고 모든 관계를 주도하는 사람이 되어라…….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남자다움의 규범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으면서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가 생기게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말해보고자 한다. 즉 가정폭력, 자살, 직장 내에서의 성폭력, 여성 혐오, 동성애, 미투 운동 등과 같은 사회문제를 야기하는 주요인이 되고 있다. 이것은 '진정한 남자'라는 허울 뒤에 숨겨진 '남자다움'이다.

이처럼 남자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남자답게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끊임없이 교육받고 강요당한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약점을 드러내서도 안 되고, 모든 관계를 주도해나가고, 모든 문제를 앞장서서 해결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남자답다고 칭찬받고, 일생 동안 그러한 생각과 행동을 당연시하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 피해자는 늘 여성의 몫이다. 이 책은 여러 사례를 통해 남자다움이 유발하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상세히 나와 있다. 그러면서 성역할의 변화 양상,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의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 등을 알려주고 있다.

남자다움을 가장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성은

평생토록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다.

저자는 우리에게 새로운 남성성을 말하며 사회학적 요소도 제거되면서 여성도 행복하고 남성도 행복한 세상을 보게 한다. 하버드 대학의 연구를 보면(무려 80년을 걸쳐 진행 중임) 행복하고 오래 살도록 해주는 유일한 요소가 삶을 통한 인간관계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이제남자다움의 연기에서 자신을 해방시킬 때가 되었다. 남성성을 다시 생각하는 일은 강인함을 부드러움으로, 폭력을 연민으로, 완고한 극기심을 유연함과 소통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모든 문제를 치료하는 길은 "서로가 존중하며 사랑하며 건전한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자세이다. 이것이 전부다.


추신: 썩 괜찮은 책이다. 남자다움이 뭔지를 알고 싶다면 괜히 허세 잡지 말고 보면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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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탐욕의 인문학 - 그림속으로 들어간
차홍규 엮음 / 아이템하우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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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의 욕망과 탐욕을 관음하는 섹슈얼판타지에 관한 예술가의 시선


“인간에겐 인간의 내부에 도사린 신을 향한

상승하는 욕망과 이성을 향한 하강하는

쾌감의 상반된 양면이 있다.”

《악의 꽃》의 악마적 에로티스트 시인 보들레르

책이 무언가 독자에게 끌림을 주고 선택하게 만드는 것은 아마도 인간 자신이 원하고 추구하는 내적 욕망일 것이다.

시인 '보들레르'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인간에겐 인간의 내부에 도사린 신을 향한 상승하는 욕망과 이성을 향한 하강하는 쾌감의 상반된 양면이 있다.”

이 문구가 내 눈에 각인이 되었다. 인간에게 있는 욕망을 잘 투영한 문장이라고 본다.

인간은 욕망하는 무엇이 있다. 아담의 아내 이브는 그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찾는 존재이면서 아담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책에서는 이브가 가진 욕망에 대해서 다루지 않았지만 정신세계사(출판사)에서 나온 '제 3의 이브'라는 책에서 보면 이브는 아담보다 더 내적 진리를 욕망하며 찾는 진리의 용맹자로서 나온다.

아무튼 이 책에서는 아담 안에서 욕망의 대상이 나오는 장면을 묘사한다. 아담의 갈비뼈로 만든 이브는 실로 아름다웠고 에로티시즘을 분출하게 하였다. 처음 마주 대한 이성의 존재를 느끼는 순간 아담은 자연스럽게 끓어오르는 감정에 휩싸였다. 아담은 이브가 들고 있는 선악의 열매가 금지된 열매인 줄 알면서도 이브가 건넨 열매를 받아 먹는다. 과연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파멸의 순간임을 아담은 진정 몰랐던 것일까?

이후로 이브는 죄를 잉태한 사악한 존재로 여기게 되었고 중세사회의 뿌리 깊은 여성혐오를 낫게 했다.

심지어 20세기 중세 미술에서는 '여자=성욕을 충돌질하는 요부'라는 편견 가득한 그림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예술 작품에 그려진 이브의 모습은 눈부신 나체와 함꼐 요염함을 강조하는 복숭앗빛 살결과 출렁이는 황금빛 머리카락, 발르게한 뺨, 풍만한 육체가 관객들에게 숨이 멎을 만큼 고혹적인 존재로 이브를 느끼게 하고 있다.

무엇보다 지극히 인간적인 애정의 시선으로 보면 이브는 낙원에 홀로 선 남자에게 영혼과 섹스의 황홀감을 안겨주며 욕망을 알게 해준 인물이다. 성의 신비는 낙원에서 쫓겨나도 좋을 만큼 남자에게 있어 마력적인 끌림을 주며 새로운 낙원의 세계인 것이다.

이브가 가진 모습이 어쩌면 이 책에서 주로 말하고자 하는 근본 뿌리가 된다.

즉 이브는 욕망의 대상인 동시에 파괴의 위험성을 갖는 여성으로서 팜프 파탈의 성격을 갖고 있다.

프랑스어로 팜므 파탈은 '치명적인 여자'가 된다. 흔히 우리나라에서는 악녀의 캐릭터로 등장한다. 화려한 외모와 선정적인 몸매의 한 여자가 한 남자를 감미롭게 유혹한 후 파멸로 이끄는 것이다. 때로는 공멸을 자초하면서 말이다.

『욕망과 탐욕의 인문학』에는 46가지 그림의 주제와 함께 다양한 욕망을 부추기는 요염한 팜므 파탈의 여인들이 나온다. 한마디로 ‘사랑에 이르는 46가지 러브로망’이 작가의 글솜씨와 역사성 지식과 예술적 그림으로 서술되고 있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욕망과 탐욕에 대한 관음이며, 예술가는 대상을 엿보는 관음증자이다. 그런데 화가가 그리는 대상은 그림을 소비하는 관객의 욕망을 형성하면서 내적 욕망을 대신 투영해 준다. 그래서 예술가를 일컬어 관음과 사랑을 욕망하는 판타지의 창조라고 부르는 것이다.

욕망의 소재이며 관객이 선호하는 영원한 주제는 '사랑'인데 이 사랑은 신성한 아카페적인 사랑도 아니고, 관념적인 플라토닉의 사랑도 아닌 자기중심적이고 소유적인 이성간의 사랑인 '에로스'이다. 재미있는 것은 예술가가 지고지순하고 순정적인 사랑으로서는 관객을 유혹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림을 엿보는 관객이 호감을 느끼는 것은 흥미롭고 드라마틱한 에로스적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예술가가 그리는 사랑은 파괴적이고 일탈이며 금지된 사랑이다.

이브는 욕망의 대상인 동시에 파괴의 위험성을 갖는 여성, 즉 팜프 파탈의 성격을 갖는다. p28

이브의 그림을 첫 장면으로 해서 수많은 에로티시즘적인 그림들은 보는 관객들를 유혹하면서 대개 가장 완벽한, 환상의 세계에 대한 메타포를 형성한다. 이 나쁜 환상의 메타포는 우리가 사는 허무한 세상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희미한 힘인 동시에 막강한 희망으로 나타난다.

사랑과 욕망의 간극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 간격의 틈새에는 섣불리 말하지 못하는 사실 혹은 진실이 숨겨져 있다.

로마의 역사를 바꾼 '헌신의 여인 루쿠레티아'에 대한 글과 그림은 인간의 욕망과 탐욕 속에 벌어진 에로티시즘이 가져다 준 선물로서 비극인 동시에 희극으로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즉 팜므 파탈(나쁜 여자)의 이미지가 아니면서도 결국 너무 아름답고 지고 지순해서 타르퀴니우스의 셋째 아들인 '섹스투스'에게 팜므 파탈로서의 여자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옴므 파탈(나쁜 남자)의 남자가 결국 욕망에 못 이겨, 그 욕망과 탐욕이 과욕으로 나타나 개인적인 멸망을 가져온 동시에 로마 시대의 새로운 포문을 여는 계기가 되고 있다.

로마의 역사를 바꾼 사건

​루크레티아(Lucretia, ?~BC509) 이야기

어느 날 저녁 왕자인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의 막사(아르데아를 공격하러 나간 전쟁터)에서 참전한 귀족들이 모여서 저녁 식사후 담화를 나누다가 서로 자신들의 부인의 미덕을 자랑하는 자리에, 로마의 귀족이었던 콜리타누스가 자신의 아내 루크레티아가 얼마나 정숙한지를 자랑하며 진짜인지 내기를 한다. 급기야 그들은 로마로 돌아가 아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오자고 제안한다. 예상대로 섹스투스를 비롯한 다른 장교의 부인들은 모두 젊은 여인과 파티를 즐기며 흥청망청 보내고 있는데 오직 루크레티아만은 밤이 깊었는데도 시녀들과 함께 남편의 어깨걸이를 만들기 위해 양모를 손질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예고 없이 찾아온 남편과 동료들을 극진히 대접한다.

문제는 루크레티아가 미덕만 갖춘게 아니라 미모까지 눈부셨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한 눈에 반한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는 일행들과 함께 일단 진영으로 돌아왔지만 밤에 몰래 빠져나와 루크레티아를 찾아가 위협하며 만일 자기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그녀를 죽인 뒤 하인을 이용해 거짓추문을 퍼트리겠다고(노예를 죽여 알몸으로 침실에 눕혀 놓고, 루크레티아가 간통을 저지르다 대가를 치른 것으로 위장하겠다고 협박), 가문에 불명예를 안기겠다는 협박으로 겁탈하고 아침일찍 떠난다. 물론 루크레티아는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명예를 목숨처럼 여겼기에 섹스투스에게 마지 못해 자기 몸을 주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가져 올 후폭풍은 어마어마 했다. 그녀는 아버지와 전쟁터에 남아 있는 남편을 급히 편지를 통해 부르며, 자신에게 벌어진 비극을 설명 후 강간범을 처벌해 줄 것을 약속 받은 후 자결을 하게 된다. 이때 남편과 함께 온 친구가 그녀의 가슴에서 칼을 뽑아들고 이렇게 외쳤다.(혁명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왕의 조카였음)

이 여인의 피로서 맹세하노라. 왕과 그의 자식들을 죽이고,

다시는 그 누구도 로마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겠너라. p91

이렇게 섹스투스는 살해되었고 로마는 왕을 폐하고 왕가를 추방했으며(기원전 590년) 로마 공화정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민주공화국들이 채택하고 있는 대통령제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욕망과 탐욕의 인문학』이라는 책은 여인이라는 이름의 원죄 끌림, 치명적 탐욕의 유혹 광기, 팜므 파탈의 치명적 욕망 유혹, 억압된 영혼의 아름다움 동경, 가질 수 없는 관음, 예술의 마지막 지점 애증, 불같은 사랑의 지배 탐닉,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질투 복수, 경계에 선 치명적 유혹 근친, 멈출 수 없는 권력의 확신 치정, 권력자를 향한 치열한 암투 도발 등 11장 46가지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게 화려하게 또는 매혹적인 그림으로 독자들을 초청하고 있다.

두 가지의 욕망인 '신을 향한 상승하는 욕망과 이성을 향한 하강하는 쾌감'의 양면성에 대해 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심리적으로 잘 그려져 책은 무척 흥미를 주고 재미를 주는 책이다.

파격 러브로망으로 그리는 욕망과 탐욕의 에로틱판타지

남자는 마음이 없어도 팔을 내어줄 수 있지만 여자는 마음이 없으면 그 팔을 베지 못한다. 남자는 마음속에 묻어둔 그냐가 곁에 없을 때 그 그리움이 자기를 조금씩 갉아먹고 끝내는 흔적도 없이 무너뜨림을 안다. p59

칼립소 : 절대 사랑의 경지를 보여준다. p61

칼립소는 사랑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열정을 다해 사랑했고, 실연으로 상처와 절망을 겪었지만

포기할 줄 아는 미덕까지 지녔다.

자발적이며 독립적인 여자들은 절대로 서성거리며 기다리지만은 않는다. 한 남자만을 바라보는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자신이 찾은 사랑을 포기할 줄 모르는 나쁜 여자는 자신이 가고 싶은

열락의 세계로 자신을 던진다. p61


사디즘의 원조

아래는 성의 가학자 사드 후작의 사진이다. 1768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부활절 사건'을 통해 프랑스 사회는 술렁이게 된다. '매춘부 로즈 켈러 학대 사건, 처녀 유괴, 최음제 사건 등 그 외 추악한 행위들이 마치 N번방 박사처럼 나타나고 있다. 맨 아래 그림은 감옥에 갇혀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는 집필을 하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책이 <소돔의 120>일이다. 수없이 다양한 성적 도착 행위를 그림처럼 생생하게 묘사했다.

암튼 나쁜놈이니 읽고 머리에서 지우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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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이 알고 싶다 - 미혹되지 않기 위해 알아야 할 이단의 모든 것 알고 싶다
탁지일 지음 / 넥서스CROSS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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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혹되지 않기 위해

알아야 할 이단의 모든 것

코로나 19와 이단 신천지 문제

그것은 모든 이단에 대한 경각심을 우리에게 주는 싸인이다.

2019년도에 기묘한 영화 하나가 나왔습니다. <미드소마>라는 영화입니다.

공포, 미스터리물 영화라고 하는데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사이비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과 집단 생활의 모습에서 기괴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한국 드라마로 사이비에 대해 실감나게 보여 준 드라마가 있는데 바로 "구해줘"라는 드라마입니다.

사이비는 우리나라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는 이상 단체입니다.

특히 한국에는 코로나 19가 확산되면서 "신천지"에 대한 거짓된 모습들이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전형적인 사이비의 모습이며 사회의 역기능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단은 가정과 사회를 좀 먹을 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가혹한 '삶'을 가져다 줍니다.

이단에 빠져있을 때도 간혹 자신이 바른 삶을 살고 있는가 질문을 하겠지만 그러나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이단이 삼단이 되고 사오단, 칠팔단이 되어도 어떤 계기가 아니면 절대로 이단에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양태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자신이 이단에 빠졌다는 사실과 그동안 속아왔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에는 정신과 영혼이 완전히 '패닉' 상태로 빠져들어 한동안 사회 생활과 가정 생활, 종교 생활이 힘들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이단은 삶의 해악을 넘어 극악이며, 이 땅에서 추방되어야 할 망극된 모임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1992년도 였지요. TV에서 처음으로 이단을 마주 대하게 되었습니다. 흰옷 입은 사람들이(다미선교회) 자신들이 휴거 당하여 하늘 나라에 올라간다면서 집단으로 모여 난리를 쳤습니다. 분명 10월 28일에 예수님이 오셔서 자신들을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야했는데, 그래서 열정적으로 찬양하며 함께 분위기가 업되어 하늘만을 바라보았는데 저녁 12시가 넘어서도 그 예수님은 오지 않고 그들은 여전히 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단이 있구나 하고 바라보았던 것이 시간이 흘러 이단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이 책에 나오는 것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11개나 됩니다.

“신천지, 하나님의교회, 구원파, 통일교, 안식교, 전능신교, 여호와의 증인, JMS, 만민중앙교회, 은혜로교회”가 대표적입니다.

자칭 재림 예수라고 말하는 자들이 한국에만 하더라도 50명이 된다고 하니 아마도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단을 더한다면 100여개나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외에도 타종교에도 이단과 같은 사이비들을 더한다면 세상에는 미혹하는 존재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책은 핵심 이단에 대하여 그 교리와 실제 상태에 대해 매우 엑기스적인 자료만 잘 뽑아서 한눈에 보도록 하였습니다. 특히 이단에 대한 계보를 보여주면서 그 뿌리에 통일교 문선명과 전도관 박태선과 장막성전 유재열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모든 이단의 시초가 여기에서 비롯되었고 여기에서 업그레이드 되었다는 것입니다.

6.25 전쟁을 전후하여 한국교회 이단운동들은 본격화 되었고 지금까지도 계속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끝이 안 보이는 이단들의 계략에 기존 정통 교회는 바른 교리와 가르침으로 무장하여 대처를 해야만 이단들에 의해 교회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가정이 잘 지켜질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렇습니다. "젊고 똑똑한 사람들이 이제는 이단에 빠지고 있습니다."

나날이 업그레이드 되고, 교묘해지는 포교 방법으로 사람들의 정신과 삶을 망쳐 놓고 있는데 마치 백신 주사처럼 예방과 대처가 꼭 필요한 상황입니다.

이 책 한 권을 통해 이단에 대한 매우 실용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단의 현상은 성서에서 미리 예언 된 현상입니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24장에 그 내용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몇 부분만 인용해 보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마태복음 24:3-5, 10-12

거짓에게 미혹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신을 차리며 항상 징검다리는 건널 때 돌을 두드리고 건너라는 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옳은 종교는 사회와 가정과 삶을 건강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단은 반드시 가정과 사회와 삶을 망가지게 하고 패허로 만들어 버립니다.

극단적인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한 마디로 다 가짜로 보면 됩니다.

칸트의 말입니다.

참된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신이나 영혼에 관해서, 또는 과거와 미래는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일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삶에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아니 될 일을 확실히 아는 것이다.

인생의 길 _톨스토이

참된 신앙을 깨닫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맹목적으로 신봉해 온 종전의 신앙에서 잠시 벗어나,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모든 것을 이성에 의해 측정해 볼 필요가 있다.

신을 알지 못하는 것은 나쁘지만, 신이 아닌 것을 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더욱더 좋지 않다.

인생의 길 _톨스토이

지금은 종교인들만 아니라 비종교인들도 이단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단은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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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나의 자서전 - 김혜진 소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4
김혜진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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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7페이지에 이르면 이렇게 시작하는 문구가 있다.



나는 남일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우체국 옆 2층 주택.

남일동이라는 특별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면서 '홍'이라는 아이를 통해 이 사회의 어도운 모습을 비춰주고 있다. 즉 재개발 이후 빈부 격차로 양분된 지역사회 갈등으로 황폐한 곳, 대물림되는 빈부에 대한 불안과 집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낸 우리 사회의 위태로운 욕망을 이 책은 그려내 주고 있다.

픽션 같지 않는 글이 책의 글귀 속에서 보여진다고 할까?
마치 헤르만 헤세가 자신의 얘기를 데미안에 투영해서 썼듯이 저자는 홍이씨가 되어 이 책을 써 내려가며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편견과 배제가 만들어 낸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즉 주류에서 소외된 이들의 절박함과 욕망을 담담하게 그려내면서 자신이 어릴적 받아 온 그 서러움과 차별을 문학을 통해 표출하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바로잡아 보려는것같다.

남일동이라는 마을을 중심으로 해서 '집이 가진 삶의 애착'과 사람들의 차별이 서려있는 이곳을 벗어나는 존재가 되는 것이 어쩌면 꿈인 사람들의 마음을 보여주면서 저자는 인간의 삶이 가진 복잡미묘한 감정을 쏟아내 주고 있다. 

애잔함과 뭔가모를 스산함, 불합리한 세상을 향하여 불이라도 질러서 모두 날려버리고픈 동질감을 저자는 독자에게 안겨다 주며 한국 사람으로 집이 가진 의미와 어떤 지역이라는 선긋기를 통해 차별과 혐오라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불합리한 심리를 마치 카뮈처럼 부조리버린 세상을 고발하며 사람들에게 뭔가 호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편의 영화를 본 거와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 바로 오늘 내가 본 "불과 나의 자서전"이라는 책이다.

자기 응시를 통해 혐오를 비추는 불빛,
패배가 난들어내는 뜨거운 눈빛.

이 두 가지를 이 책에서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다음 책이 기대가 되고, 또한 그가 출판한 책도 궁금해진다.
또한 이 책을 읽은 느낌을 남겨본다.

어쩌면 저자는 추억 속의 집이 그대로 남아 있어 삶의 그리움을 붙잡아 두려고 하는 지도 모른다. 
그때의 아련한 추억과 내 어릴적 추억은 삶의 행복이자 마음의 낙원이기에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내 추억을 
뭉게 버릴 수 있으니 차라리 추억 없는 현대 문명의 화려함과 편리 보다는 나만이 간직한 추억 속의 보물을 홀로 간직하고자 저자는 대여섯살의 주소지를 외면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실제 고향을 가보면 오히려 개발이 되어 서글프다. 
내 삶의 자락들이 한꺼플 두꺼플 벗겨져 나를 이방인처럼 맞이하게 만들고, 
나도 이방인처럼 내 고향을 바라보게 된다. 

오랜 과거의 집은 나만의 낙원이다. 
절대로 건들 수 없는 영역이기에 나는 저자처럼 나만의 추억을 간직하고자 나만의 방식으로 과거를 그려보고 글로서 그리움을 적어보고자 한다.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나의 자서전도 책으로 출간되기 바라면서...

아래는 마음에 남는 글을 실어본다. 
 

한 마을에도 일평생이라는 게 있다면 남일동의 시간은 어디쯤일까?

어떤 삶은 조금씩 나아지고, 또 다른 삶은 내리막길을 걷고, 느닷없이 중단되는 삶이 있고, 어느 날은

흐리고 어두워서 앞이 보이지 않다가 또 어느 순간엔 무서울 정도로 환한 날이 계속되고. 그런 종잡을 수 없는 많은 순간들을 응축해 놓은 것이 삶이라면 남일동은 어디쯤 지나고 있는 것일까 가늠해본다.

p50

주해는 그마저도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었습니다....사람들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있나요. 
안다고 해도 어쩔 수 없고요. 전 동네분들이랑 잘 지내고 싶어요.
주해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도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오해하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어쨎든 좋은 의도일 거라고, 고마운 마을일 거라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p63

홍이 씨는 주해라는 사람을 통해서 삶의 담대함과 무미한 신경전, 삶의 아웅다웅하는 모습 보다는 태연한 받아들임을 배워나가는 것이 아닐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는 그날 내가 보았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비로서 희망이라 할 만한 것을 가지게 된 한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삶이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 틀림없이 그렇게 될 거라는 확신. p72 

내게 주해는 이웃이었고 친구였으며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누군가였습니다. 그게 누구든 나는 다시금 실패하는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p75-76

누군가가 누군가에게서 집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누군가의 슬픔과 불행을 목격하는 대가로 싼 집을 구입할 때 각오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때는 알리가 없었습니다. p81

홍아, 사람이 사는 데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아니? 집이다. 사람은 자기 집이 있어야 떳떳하게 살 수 있어. 두고 봐라. 앞으로 점점 더 그렇게 될 테니까. p85-86

그리고 나는 깨달았습니다.
어머니가 결혼식장에서 먹었던 싸구려 뷔페 음식을 토해내던 그날, 이 집이 어머니를 슬프게 만든다고 생각했던 그 밤에, 집을 가진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즐겁고 기쁘기만 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p109

홍이 씨, 남일동에 살아본 적 없죠? 집이 없어서 불안해본 적 있어요? p 156

주해가 몰고 온 변화는 다만 눈에 보이는 그런 것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이곳이 달라질 거라는 믿음, 바꿀 수 있다는 자신. 
주해가 보여준 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내내 설마설마했고, 망설이다가 오래전에 포기해버린 그런 마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주해가 일으켜 세운 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잔뜩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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