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발견 -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윤철호 지음 / 두란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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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가 한국교회를 위협하며 위기를 가져오고 있다. 
신천지가 사회악인지 알았는데 정상적인 기독교도 사회악으로 규정되고 이해되고 있다. 물론 그 중에는 개성? 강한 교회로 인해서 더 인식이 좋아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그들만의 문제인가 할 때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금에 벌어진 현상을 보더라도 모든 신학적인 이해 관계를 떠나 불교, 카톨릭은 현상의 문제에 단호(지혜롭게)하게 대처하여 사람들에게 불안감과 나쁜 시선을 받고 있지 않다. 유독 기독교라 칭하는 이들만 지금 문제시 되고 있으며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교회를 제외하고)

일반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 교회나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교회나 똑같은 시선으로 본다.
이런 시점에 '복음의 발견'이라는 책이 눈에 띄였다.

특히 이 책을 설명하는 부제가 눈에 띄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해하기 전까지
신자의 삶은 해석되지 않는다

신자의 삶의 문제는 결국, 이중적 실존이다
실존에서 부딪히는 문제의 답은,
복음을 발견할 때라야 가능하다

복음이 과연 인간 삶의 문을 열고, 삶에 진동을 일으켜 외부세계와 소통하게 하면서 종국에는 공감과 평화의 세계로 나아가게 해 줄 능력이 되는지 일반인의 관점에서도 보고 또한 기독교인의 관점에서도 이 책에 조금이라도 해답이 있을까 하여 손에 잡게 되었다. 

특히 저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하며 자신감을 드러내는 듯한 메시지를 책 겉표지에 실었다. "삶의 무기"라는 굵직한 문장이 읽는 이에게 기대감을 갖게 하였던 것이다.

저자는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어쩌면 교회 지도자를 배출하는 근본 원산지이다. 그는 30년 이상을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에 매진을 했는데 본 책은 대략 10년 동안 전해진 메시지 가운데 발췌한 글들이다. 특정한 주제에 따라 쓰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상황과 관심을 반영하여 '복음의 발견'이라는 큰 틀 안에서 본 메시지를 써내려 갔다.

사실 신학적 메시지인 줄 알았다. 학문의 선상에서 바라 본 신학적인 해석과 통찰을 통해 이 땅을 살아가는 교인들이 "삶의 무기"라는 거대한 해석을 어떻게 쥐어주게 만들까하며 기대감 속에 책을 펼쳤는데 본 논고가 "설교" 형태로 전해진 메시지라서 살짝 아쉬운 감이 있었다.

반면에 조직신학자로서의 신학적 담론만 다룰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사변적인 신학으로 삶을 다루는 글을 보면 독자와 교인들에게 전혀 감동이 전해지지 않고 단순한 학술적 자료만 되는 글들이 있기 때문이다.
전문성을 가지고 잘 썼지만 혼자만 똑똑하고 혼자만 누리는 그런 글들로 인해 사실 독자는 바로 외면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섣부른 우려였다. 다시 뒤에서 말하겠지만 저자가 전하는 글은 상당히 가독성이 좋고 메세지는 설교 형태를 띄지만 삶이 오롯이 녹아난 메시지로서 가슴을 건들고 행함(삶)을 건들고 있다. 즉 너무 높은 하늘의 메시지가 아니라 이 땅의 메시지로서 독자에게 말을 걸어 온다는 것이다.

저자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이라는 틀을 정해 놓고 설교의 형태를 한데 묶어 나누고 있다.
문제를 제기하는 (기)에서는 "사랑과 섭리가 시작이다"를, 문제를 전개하는 (승)에서는 "은총과 믿음이 현재를 직면하게 한다"를, 방향을 전환하는 (전)에서는 "인간의 실존을 뚫고 은혜는 임한다"를, 거두어 끝맺음인 (결)에서는 "인생의 열매는 이끄심을 따를 때 허락된다"를, 마지막을 하나님께라는 소제목에는 合(합)이라는 한문을 넣고 "십자가를 기억한다면 광야는 영광의 문이다"라고 제시한다.

틀이 주는 의미가 없잖아 있지만 굳이 틀을 정해 놓지 않아도 될 포괄적인 메시지가 이 책에 흐르는 주제이다.
그건 '실존에서 부딪히는 문제의 답은 복음을 발견할 때'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십자가의 은혜'를 알 때 결국 삶의 절망은 희망이 되고 진정한 변화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으로서 이 땅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교 학자인 마틴 부버가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 것을 들어보자.
"기독교인이 보기에 유대인들은, 구속되지 않은 세상에서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완고한 사람들이다. 반면에 유대인들이 보기에 기독교인들은, 구속되지 않은 세상에서 어떻게든지 일어났다고 확신하는 부주의한 사람들이다." 

유대교 랍비는 메시야가 오셨다는 말을 듣자 창밖을 내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변한 것이 없네" p123

기독교의 현주소가 아닐런지. 변한 것이 없다면 과연 복음은 삶의 무기가 될까?

사실 이 문제는 사죄의 은총과 믿음을 제대로 가지지 못해서이다.
죄의 성향이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제대로 긍휼을 구하고 믿음의 방향성을 완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설 때 내면의 영적 질서는 거룩함에 이르게 된다. 저저는 '태양'이라는 비유를 잘 사용하고 있는데 '믿음은 방향성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식물은 빛을 향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든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이다.... 여전히 우리가 죄와 허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하는 방향성을 회복하고 긍휼을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울와 다윗의 차이, 가롯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는 결국 어디를 향했느냐과 관건인데 사울과 유다의 비극은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지 않는데 있다고 말한다. p72-73

책은 계속해서 믿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주며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믿음의 이해 방식을 새롭게 해주고 있다. 익히 잘 알고 있는 종교개혁의 리더자인 루터가 외친 "오직 은혜로만, 오믹 믿음으로만"이라는 외침은 당시 부패의 상징이 된 로마 카톨릭을 향하여 필요한 메시지가 되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하박국 2장 4절에서 가져온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의미가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만'의 믿음이 아니다. 
즉 믿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무나'는 성실함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 받은 묵시가 더디게 느껴질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끝까지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기다리는 믿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루터가 말하고자 한 '믿음'의 메시지는 행동없는 믿음이 아닌 거대한 종교개혁에 맞서 싸운 행동하는 믿음, 불의에 저항하는 믿음인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우리의 믿음이 아닌 "그리스도의 믿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런 부분을 신학적 지식을 통해 멋지게 해석해 주고 있는데 여기서 독자들은 잘못 정리된 믿음이 수정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고 해석해 주는 내용을 보자. 
성경본문 2:16절 첫 부분을 보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라고 나온다.
이 구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문에서 보면 문법상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주체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법적으로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

그리고 이 구절 바로 다음에 나오는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은 '그분의 믿음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바울에 따르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믿음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en Christou) 있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이 신학적 용어로 '코르 쿠르붐 인세'(cor curvum in se)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어거스틴이 만든 말인데 문자적으로 '자기 자신 안으로 굽어져 있음'을 뜻한다. 즉 자신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중심적인 마음, 자기 중심적인 하나님을 믿게 되면 공감적 믿음과 사랑이 생기지 않아 하나님을 공감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은 공감적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이 사랑은 자기 희생적 사랑으로 나타난다. 즉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존재로 부름받고 있다. 그리고 이 변화는 개인을 넘어 사회와 정치의 영역에서도 발휘되어야 한다. 교회가 사회의 현실을 외면해서는 복음은 한낱 '정치적인 구호' 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저자는 25개의 글(설교)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잘못된 믿음의 이해를 수정케 하고 복음을 새롭게 발견하는 자리로 초대한다.

본 서적에서 주목할 부분은 설교의 본유적인 과제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삶에 오롯이 기록되도록 쉽게 독자들을 초청한다. 즉 일단 가독성이 좋다. 조직신학자라 읽기가 곤란하지 않을까? 딲딱하게 전문 용어로 글을 써내려가지 않았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읽기가 수월하고 이해도가 빨리 된다. 

그런데 이 책은 가독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성이 깊이 묻어난 글이다. 익히 알고 있는 글과 예화가 보이지만 품격있는 글과 깊이가 묻어난 글이 어우러져 편안하게 읽고 (설교를 듣는 다면)듣기에 좋다. 

아마도 이 부분은 저자가 교수의 직함만 가지지 않고 신앙의 실제를 살아가는 교회를 담임하며 설교를 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더불어 '삶의 실제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인카네이션 incarnation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조직신학자인 저자가 삶의 언어로 잘 풀어낸 이 책은 현제 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회자만 아니라 신학에 입문한 자들에게도 설교의 방향성과 메시지가 어떻게 구성되고 만들어져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귀한 샘플이 되리라.
사실 시간을 두고 읽으려 했는데 읽으면서 손에 놓지 못하고, 두번에 걸쳐 읽어냈다. 
다시 말하지만 가독성이 매우 좋은 깊은 신앙적 사색이 담긴 메시지다. 

아쉬운점은 그분의 개인적 신앙 체험의 글이 자세히 내포되어 설명되어졌다면 더더욱 귀한 책이 되지 않겠나 싶다. 삶에서 우러난 메시지가 더 깊이 사람의 마음에 남아돈다. 그 부분이 많이 절제되어 있고, 아쉬움을 남긴다.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루소의 고백론은 자신을 드러내기를 놀라울 정도로 드러내어 공감를 일으킨다. 
톨스토이의 자서전도 그렇고, 존 번연의 자서전(죄인의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크리스천 다이제스트)도 보면 리얼한 삶의 예화가 읽는 자들에게 공감과 감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삶의 무기'가 되어야 한다.

그대가 겸손(온유)하지 못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언짢게 한다면 삼위일체를 아무리 심오하게 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고상한 말이 사람을 거룩하고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덕스러운 삶이야말로 그 사람이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가 되게 합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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