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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나의 자서전 - 김혜진 소설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4
김혜진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7페이지에 이르면 이렇게 시작하는 문구가 있다.
나는 남일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우체국 옆 2층 주택.
남일동이라는 특별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면서 '홍'이라는 아이를 통해 이 사회의 어도운 모습을 비춰주고 있다. 즉 재개발 이후 빈부 격차로 양분된 지역사회 갈등으로 황폐한 곳, 대물림되는 빈부에 대한 불안과 집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낸 우리 사회의 위태로운 욕망을 이 책은 그려내 주고 있다.
픽션 같지 않는 글이 책의 글귀 속에서 보여진다고 할까?
마치 헤르만 헤세가 자신의 얘기를 데미안에 투영해서 썼듯이 저자는 홍이씨가 되어 이 책을 써 내려가며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편견과 배제가 만들어 낸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즉 주류에서 소외된 이들의 절박함과 욕망을 담담하게 그려내면서 자신이 어릴적 받아 온 그 서러움과 차별을 문학을 통해 표출하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바로잡아 보려는것같다.
남일동이라는 마을을 중심으로 해서 '집이 가진 삶의 애착'과 사람들의 차별이 서려있는 이곳을 벗어나는 존재가 되는 것이 어쩌면 꿈인 사람들의 마음을 보여주면서 저자는 인간의 삶이 가진 복잡미묘한 감정을 쏟아내 주고 있다.
애잔함과 뭔가모를 스산함, 불합리한 세상을 향하여 불이라도 질러서 모두 날려버리고픈 동질감을 저자는 독자에게 안겨다 주며 한국 사람으로 집이 가진 의미와 어떤 지역이라는 선긋기를 통해 차별과 혐오라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불합리한 심리를 마치 카뮈처럼 부조리버린 세상을 고발하며 사람들에게 뭔가 호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편의 영화를 본 거와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 바로 오늘 내가 본 "불과 나의 자서전"이라는 책이다.
자기 응시를 통해 혐오를 비추는 불빛,
패배가 난들어내는 뜨거운 눈빛.
이 두 가지를 이 책에서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다음 책이 기대가 되고, 또한 그가 출판한 책도 궁금해진다.
또한 이 책을 읽은 느낌을 남겨본다.
어쩌면 저자는 추억 속의 집이 그대로 남아 있어 삶의 그리움을 붙잡아 두려고 하는 지도 모른다.
그때의 아련한 추억과 내 어릴적 추억은 삶의 행복이자 마음의 낙원이기에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내 추억을
뭉게 버릴 수 있으니 차라리 추억 없는 현대 문명의 화려함과 편리 보다는 나만이 간직한 추억 속의 보물을 홀로 간직하고자 저자는 대여섯살의 주소지를 외면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실제 고향을 가보면 오히려 개발이 되어 서글프다.
내 삶의 자락들이 한꺼플 두꺼플 벗겨져 나를 이방인처럼 맞이하게 만들고,
나도 이방인처럼 내 고향을 바라보게 된다.
오랜 과거의 집은 나만의 낙원이다.
절대로 건들 수 없는 영역이기에 나는 저자처럼 나만의 추억을 간직하고자 나만의 방식으로 과거를 그려보고 글로서 그리움을 적어보고자 한다.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나의 자서전도 책으로 출간되기 바라면서...
아래는 마음에 남는 글을 실어본다.
한 마을에도 일평생이라는 게 있다면 남일동의 시간은 어디쯤일까?
어떤 삶은 조금씩 나아지고, 또 다른 삶은 내리막길을 걷고, 느닷없이 중단되는 삶이 있고, 어느 날은
흐리고 어두워서 앞이 보이지 않다가 또 어느 순간엔 무서울 정도로 환한 날이 계속되고. 그런 종잡을 수 없는 많은 순간들을 응축해 놓은 것이 삶이라면 남일동은 어디쯤 지나고 있는 것일까 가늠해본다.
p50
주해는 그마저도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었습니다....사람들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있나요.
안다고 해도 어쩔 수 없고요. 전 동네분들이랑 잘 지내고 싶어요.
주해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도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오해하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어쨎든 좋은 의도일 거라고, 고마운 마을일 거라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p63
홍이 씨는 주해라는 사람을 통해서 삶의 담대함과 무미한 신경전, 삶의 아웅다웅하는 모습 보다는 태연한 받아들임을 배워나가는 것이 아닐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는 그날 내가 보았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비로서 희망이라 할 만한 것을 가지게 된 한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삶이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 틀림없이 그렇게 될 거라는 확신. p72
내게 주해는 이웃이었고 친구였으며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누군가였습니다. 그게 누구든 나는 다시금 실패하는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p75-76
누군가가 누군가에게서 집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누군가의 슬픔과 불행을 목격하는 대가로 싼 집을 구입할 때 각오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때는 알리가 없었습니다. p81
홍아, 사람이 사는 데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아니? 집이다. 사람은 자기 집이 있어야 떳떳하게 살 수 있어. 두고 봐라. 앞으로 점점 더 그렇게 될 테니까. p85-86
그리고 나는 깨달았습니다.
어머니가 결혼식장에서 먹었던 싸구려 뷔페 음식을 토해내던 그날, 이 집이 어머니를 슬프게 만든다고 생각했던 그 밤에, 집을 가진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즐겁고 기쁘기만 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p109
홍이 씨, 남일동에 살아본 적 없죠? 집이 없어서 불안해본 적 있어요? p 156
주해가 몰고 온 변화는 다만 눈에 보이는 그런 것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이곳이 달라질 거라는 믿음, 바꿀 수 있다는 자신.
주해가 보여준 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내내 설마설마했고, 망설이다가 오래전에 포기해버린 그런 마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주해가 일으켜 세운 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잔뜩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p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