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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 데이즈
혼다 다카요시 지음, 이기웅 옮김 / 예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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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나 큰 울림은 없지만 찌릿한 전율과 작은 탄성을 내뱉게 만든 단편들이다. 네 편의 단편은 대칭구조(대위법식 전개)를 공통 특성으로 신비에 싸인 주인공('Yesterdays'는 예외)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작품별 서평을 하기 전에 네 편을 관통하고 있는 대칭구조에 대해 말하고 싶다. 예전에 읽었거나 근래에 읽은 작품 중 이런 대칭구조를 가진 작품은 잘 없었다. 대칭구조를 사용하지 않는 한 가지 이유는 대칭구조형식의 소설을 가볍게 썼다가는 작품의 질을 떨어뜨리는 위험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여간해서 능력이 뛰어난 작가가 아니라면 대칭구조를 고급스럽게 구사할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대칭구조형식을 기피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혼다 다카요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대칭구조형식을 모든 작품에 적용시키고 있다. 단순한 평행 대칭구조가 아닌 높낮이나 경중의 차이를 적당히 이용한 비평행 대칭구조를 구사하고 있다. 『파인 데이즈』에서는 '그 애'와 '야스이'가 각각의 세계에서 갖는 의의를 대척점으로 등가 표시되며(물론 작품의 말미에 이르면 균형이 깨어지면서 '야스이'가 지배인물이 된다), 『예스터데이』에서는 암투병중인 아버지와 그의 36년 전 애인인 마야의 관계가 주인공 막내아들인 '나'와 '여자'와의 관계와 서로 오브랩되며 『잠들기 위한 따사로운 장소』에서는 누나인 유코 대 유키의 관계가 주인공 '나' 대 동생의 관계로 등치된다. 마지막 작품인 『셰이드』에서는 골통품 가게 노인이 들려주는 유리램프 셰이드에 얽힌 이야기 속의 주인공인 유리공과 유랑패 여성의 관계가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주인공 '나'와 '나'의 여자친구의 관계와 서로 복사판인양 똑같이 전개된다. 이 모든 단편들이 각자의 색깔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액자소설에 가까운 이중틀과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혼다 다카요시의 다른 작품은 어떨까'라는 의문이 생기게 만드는 특별한 소설들이었다.

『파인 데이즈』를 읽기 시작했을 때, 등장인물들이 내뿜는 흡입력에 정신없이 빨려들어갔다. '그애와 '야스이' '간베' 등 모두 다 재미있는 인물이었으며, 특히 '그애'의 무서운 저주는 마치 만화적이다라고 느끼면서도 충분히 개연성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동시에 갖게 만들었다. '야스이'의 저주로 선생이 자살하고 상급생이 오토바이를 타다 사고가 나며 옥상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입는 등 다소 미스테리 소설에 가까운 면도 지니고 있었다. 공교육 현장이 붕괴된 학교와 여기를 다니는 선생과 학생을 보는 것 같아 많이 안타깝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막내아들인 주인공에게 옛애인과 당시 임신 중이었던 주인공의 '누나'(아버지는 임신한 자녀의 성별을 작품 후반구까지도 모른다)를 수소문해서 찾아주길 바란다. 결국 주인공은 아버지의 옛 애인 '마야'씨와 그의 딸을 찾아낸다. 간절히 한 번 보기를 바라는 주인공의 아버지의 맘과 달리 마야씨는 조용한 인생에 파문이 생기길 원치 않는다. 마침내 자초지종을 암투병중인 자신의 아버지에게 말하자 그는 만약 첫사랑과 결혼을 했더라면 ' 너무 과분한 인생'이 전개됐을 거라고 말하면서 웃는다. 소란하거나 번잡하지 않은 깔끔한 전개가 인상적이었던 작품이었다.

『잠들기 위한 따사로운 장소』는 그림으로 예지력을 표현하는 누나 유끼와 그 그림을 해독하는 남동생 유코의 특별한 주종관계가 자동차 사고현장에서 동생을 제치고 지나가던 승용차 운전자가 내민 구조의 손에 자신은 구조되고 동생은 차와 더불어 폭발되는 사건을 겪은 주인공 '나'의 죄책감과 서로 병립하면서 화해의 접점 혹은 운명에의 도전을 (가능하지 않지만) 시도하는 단편이다. 누나의 질투심으로 다친 유끼를 병문안하는 주인공 '나'는 유끼가 누나가 보기 전에 (누나가 또다시 질투심이 발동하면 '나'가 다칠 것이고 자신은 죽을 수 있기에) 가라고 하지만 되려 '애인이에요'(261p.)라고 유코에게 말하면서 '눈을 빤히 뜬 채 유키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261p.)개는 장면은 사랑의 힘이 마법적인 저주의 힘보다 강하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마지막 단편 『셰이드』는 마치 한 편의 중세 항해 이야기와 흡사하였다. 사랑을 얻기 위해 유리 램프 셰이드를 만들어 사랑하는 그녀(유랑단원)가 '어둠에 녹지 않기를 기도하'(269p.)는 최고의 유리장인의 애절한 사랑이야기임과 동시에 '나'와 '그녀'의 사랑이야기이다. 재미있었던 부분은 유랑단원 '그녀'와 '나'의 연인 '그녀'는 둘 다 아픈 과거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옛날에 사랑하던 사람이 육지에서 '그녀'와 함께 살다가 죽고 난 후 그 남자의 사자는 그녀를 죽음으로 데려가려고 하기에 더는 육지에서 생활하지 못하는 '그녀'를 어머니의 간곡한 소원으로 인해 바다로 가지 못하는 반대상황에 처해 있는 유리장인인 '나'가 육지에서 그녀와 함께 살기 위해 죽음인 어둠을 영원히 물리치는 도구로 온갖 정성으로 만든 유리램프를 소재로 하는 다소 신파적 내용이지만 나름대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는 인상을 받게 되어 퍽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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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먼로의 죽음>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버니 먼로의 죽음
닉 케이브 지음, 임정재 옮김 / 시아출판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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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케이브가 누구인지, 어떤 경력의 작가인지 궁금해서 책 표지 안쪽에 적힌 약력을 읽었다. 1957년생의 호주 출신 뮤지션이며 1989년 우화소설 ‘And the ass saw the angel'을 발표한 후 20년 만에 쓴 장편이 ’버니먼로의 죽음‘이라는 이 책이다.

일반적인 독서행위는 작가가 새로운 인물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독자에게 펼쳐 보이고 자신의 주관에 따른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이 책 또한 이런 고정관념을 갖고 읽기 시작했다. 어떤 책이든 처음 부분은 작가가 대개 친절하게 등장인물의 성격묘사나 전개될 내용의 단초들을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마련이다. 19금이라든가 에로소설이라는 특정 표시가 없는 한 등장인물이 욕을 한다거나 성적으로 무절제한 행위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총3부 중 1부 ‘난봉꾼’에 나타난 주인공은 도덕적 기준으로 보자면 거의 인간쓰레기나 성도착증 환자에 가까웠고 내용 또한 에로소설과 맞먹을 정도의 성적묘사와 외설용어가 난무하여 무척 당황하였다. 자살한 아내를 둘러싼 아내의 친구들과 자살의 원인이 사위라고 확신하면서 그를 벌레 보듯 하는 장인, 장모 등을 통해 주인공 버니는 난봉꾼 수준이 아니라 인생패배자 그 자체였다. 유일하게 그를 신뢰하고 있는 사람은 버니 자신의 친구와 상사 그리고 제대로 이름도 붙이지 않은 아들 ‘아이’ 정도이다. 특히 ‘아이’는 9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빠를 보호하려는 의젓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다소 읽기가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본능적인 호기심이 발동하여 요상하고도 기괴한 버니라는 인물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뭔가 있을거야’라는 일말의 기대를 갖고 계속 읽었다. 아내의 장례식을 끝으로 1부가 끝나고 아들과 함께 짐을 챙겨 2부로 넘어가면서 부자지간의 드라마틱한 감동이야기를 기대했다. 새롭게 태어나는 아버지와 이런 아버지의 변신에 일등공신역을 맡은 아들이라는 다소 전형화된 러브스토리로의 전환을 기다리면서 계속 읽었다. 기대는 깨어질수록 더 큰 감동이 온다는 독서경험에서 얻은 진리가 물거품으로 변해갔다. ‘그래도...’ ‘그래도...’라는 아쉬움은 2부가 끝날 때까지 손에서 놓지 못했지만 3부의 버니의 병든 아버지를 만나는 장면에서까지도 (이제 책은 거의 끝나갔다.) 실험소설과 같은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정신파탄자인 버니와 그의 아버지 이야기는 쫓겨 나오듯 아버지의 집에서 나오는 버니와 손자 ‘아이’의 뒷모습을 휑하니 보는 것으로 끝이 났다. 마지막 장면은 버니의 환상으로 지금까지 자신을 거쳐간 인물과의 이상야릇한 (나이트클럽에서의 몽환) 해후와 화해로 끝이 났다. 더 이상의 이야기는 없었다.

아무리 교훈적이고 권선징악을 내세우는 고전 신파소설류가 싫고 따분하다 해도 이런 계통이 불분명하고 치열한 인물의 내면이나 혹은 활달한 외적 인생살이가 부재한 소설을 읽는 일은 결코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단 한가지 의의를 두자면 이런 비정상적 인물과 엉성한 글의 전개는 다른 소설을 읽을 때 별반 보잘 것은 없지만 하나의 준거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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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어차피 불편한 것이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삶은 어차피 불편한 것이다 - 티베트에서 만난 가르침
현진 지음 / 클리어마인드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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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왜 삶이 불편할까?” 라는 의문을 갖고 책을 폈다. 때로 나의 삶이 불편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있지 않던가? 책의 표지와 1장 ‘삶은 어차피 불편한 것이다 - 하늘에 물들다’에 펼쳐진 푸르디 푸른 창공을 배경으로 한 티벳 사원의 그림이 책을 읽기도 전에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전체 3부 63장으로 이루어진 현진 스님의 수필집인 이 책은 객관적인 눈으로 나의 일상을 바라보고 잠시나마 명상에 젖게 만들었다. 티베트 산하의 사진이 곁들어진 시원한 책이었다.

현진 스님은 그곳 현지인들의 삶의 방식을 동서고금의 철학자, 종교인, 문학가 등등의 지혜로운 말과 접목시켜 가면서 삶의 불편이나 고통, 행복이나 즐거움이 외따로 떨어진 사건이 아니며 업이나 인과응보의 관계망 속에서 바라봐야한다고 말한다. ‘우리 인생에서는 정해진 결과는 없다. 다만, 원인과 조건에 의해 형성될 뿐이다.’(157p.) '정해전 팔자와 운명은 없다. 설령 있다 해도 그것은 자신 스스로가 만든 원인의 결과일 뿐 어떤 신이나 절대자가 정해준 것은 하나도 없다.‘(157p.) ‘잠아함경’에서 인용한 “탐내고 인색하나 가난을 벗어나지 못함은 과거세에 베풀지 않은 것이다. 만약 복덕을 누리고자 한다면 마땅히 베풀어야 한다.”(61p.)는 말은 미래의 나의 행복을 바라거나 혹은 더 적은 고통을 당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베품이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현진 스님은 삶을 애닯아 하지 말고 애걸복걸 하지 말라고 한다. 인생살이의 여유를 찾아 책을 읽으라고 하면서 후한 때 학자 동우라는 선비의 독서 삼여설(三餘說 - 일년 중 겨울과 하루 중 밤, 비오는 날)을 말하고 (63p.)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그것은 그저 커다란 조화의 물결일 뿐이‘(94p.)며 ’행복은 삶의 목표가 아니라 내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95p.)고 말한다. 항상 여유로운 삶을 원하였던 나 자신에게 좋은 교훈이 된 말들이다. 늘 애닯아 하면서 현재보다는 미래의 나를 찾고, 목표만 원대하게 세울 뿐 현재 삶의 방식에는 별반 변화를 주지 못하였던 시간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현재 나의 삶의 방식에 충실하면 미래의 행복이 또 다른 현재로 다가올 것이며 흘러 간 현재는 과거가 되어, 이 또한 후회로 남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3부 5장의 ‘곡선의 삶이 아름답다’에서는 ‘곡선이 없는 인생길은 가속도 때문에 스스로의 삶을 즐길 수 있는 여유와 낭만이 없’(202p.)으며 ‘좌절과 실패는 곡선의 묘미’(202p.)라고 하는 대목에서는 현정부가 들어서고 난 후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4대강’문제가 떠올랐다. 그냥 그대로 제 유속대로 물이 흘러가도록 해야 하고 필요한 제방이나 관리만 있으면 될 것을 인간이 나서서 굳이 곡선의 강을 직선의 강으로 만들고 유속을 높여 대형운반선을 띄울 이유가 뭐인지 다시 곱씹어 보았다.

티베트가 처한 정치, 경제, 종교적인 상황을 애정을 갖고 서술한 부분에 대해서는 티베트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이 없어서 실감 있게 읽지는 못하였다. 그냥 재미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었지만 밋밋하게 겉만 훑고 넘겼다. 티베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겠다.

한 잔의 시원한 산속 물을 마신 느낌이자 자연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스러지는 아침안개 끄트머리에서 나는 냄새를 맡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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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러스트>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아메리칸 러스트
필립 마이어 지음, 최용준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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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아이작이 큰 야망을 품고 부엘(아이작이 살았던 지역)을 떠날 때와 친한 친구 포가 중간에서 아이작을 배웅하기 위해 동행할 때까지만 해도 ‘십대의 도전과 반항을 다룬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유의 소설이면 당연히 등장하는 재미있고 감동적인 에피소드를 기대했었고, 책의 두께로 보아 적어도 5건 이상의 에피소드가 나올거라 예상했다. 

나의 방식대로라면 첫 번째 에피소드는 산업화의 녹(rust)인 폐쇄된 철광소 건물 안에서 일어났다. 비를 피하기 위해서 들어간 아이작과 포는 부랑배인 세 명의 남자와 다투게 되고 그 와중에 아이작은 칼로 목이 눌려진 채 잡혀 있는 포를 구하기 위해 공장에 버려진 베어링을 던져 그 중 한 명을 죽이게 된다. 이 대목에 이르러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류의 재미와 웃음을 기대한 나의 소설읽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형사 해리스의 등장과 더불어 다시 나의 소설읽기는 범죄 스릴러로 초점이 맞춰졌다. 살인의 주범인 아이작은 집에 들렀다가 사건이 불거지자 다시 집을 떠났고 포는 자신의 풋볼 점프를 현장에 두고 오는 바람에 체포되어 수감된다. 이쯤이면 친구와의 우정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인물형이라든지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위해 갚힌 친구의 누명을 풀어주는 영웅적 인물형을 통한 감동적인 우정 앤(and) 범죄 스릴러의 전개는 당연한 듯 보이게 마련이다.

범죄 스릴러라면 당연히 CSI에서의 치밀한 범죄현장조사를 통한 기상천외한 과학수사와 셜록 홈즈의 놀라운 통찰력, 논리를 뛰어넘는 기발함이 등장하여 독자를 깜짝 깜짝 놀라게 하고 인물과 인물이 내뿜는 물고 물리면서 반전을 거듭하는 사건전개는 다음 장면을 궁금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아메리칸 러스트’에는 눈을 닦고 코를 비벼 씻고 봐도 비범의 ‘비’자에 가까운 인물을 찾을 수 없었다. 나의 소설읽기의 두 번째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고 이런 평범한 비(非)영웅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전하려했는가라는 작가의 심중을 다시 훑기 시작했다.

꽤 분량이 많은(545쪽) 소설인지라 어떤 이야기로 이 많은 지면을 채울까 궁금해 하면서 계속 읽었다. 플롯은 단순하였다.
① 가출하던 중에 살인을 저지른 두 친구 ② 한 친구는 감옥에 잡혀가고 다른 한 친구는 또다시 가출하여 도망침 ③ 주인공 아이작의 아버지와 불행한 결혼생활 중인 누나(포와 애인 사이), 주인공 포의 어머니와 포의 어머니와 연정 사이인 해리스 형사반장 등의 인물들이 살인사건을 둘러싸고 벌이는 행동을 각자 이름을 소제목으로 하여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대단원은 포를 구하기 위해 목격자인 부랑자 2명을 해리스가 몰래 해치우는 것으로 끝이 난다. 포는 조만간 감옥에서 풀려날 것이고 자수를 하려 온 아이작은 해리스로부터 모든 이야기가 다 끝났으니 멀리 떠나라는 말을 듣고 경찰서를 나선다.

경제붕괴의 여파로 경제활동의 어려움을 겪는 등장인물들의 몸과 마음에 ‘녹’이 슬고 필연적인 결과로 서로간의 비정상적인 애증(愛憎)이 과장 없이 담담하게 써내려간 소설이자 모험소설이나 스릴러소설이 아닌 인간의 속성을 차분하게 파헤친 환경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치열한 내면의 모습을 차분히 그려낸 소설이었다.

나의 소설읽기의 마지막 유형은 ‘나와 너의 인생 이야기’이자 ‘끈적끈적한 인간굴레’의 속성을 갖춘 ‘(소시민의) 심리소설’류로 귀착하였다. 1910~20년대 영국문학을 풍미한 ‘의식의 흐름‘과 같은 집요하고 복잡한 심리보다는 밀란 쿤데라의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서 보여준 인물들의 가벼운 심리를 잠시 엿보았다.

인물들 중 가장 인상깊었던 인물은 해리스 형사반장이었다. 포의 엄마인 그레이스와 애정을 나누면서 가식이 아닌 진심을 내보이고자 노력한 인물이다. 진정으로 그레이스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그는 범죄현장에서 포를 본 목격자를 처치한다. 이 장면에서 그를 통해 나는 구원자의 이미지를 볼 수 있었다. 정의를 찾아보기 힘든 현대사회에서 ‘정의의 사나이’를 보는 듯하였다. 아쉬운 점은 해리스와 아이작의 아버지인 헨리 잉글리시를 좀더 깊이 탐구해 들어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그들은 한 사회의 번영과 몰락을 동시에 보았고 현재 사회의 모습이 있기까지의 과정을 입증할 수 있는 산증인이기 때문이다. 

필립 마이어의 첫 장편소설을 읽고 앞으로 더 진화할 그의 소설이 기대되었다. 내일도 태양이 뜬다는 간단한 진리의 수준을 넘어 내일의 태양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을 드러낼까라는 흥분된 기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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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 법학자 김두식이 바라본 교회 속 세상 풍경
김두식 지음 / 홍성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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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훌륭한 책이다.
근래 읽은 책에서 나의 생각을 글로 대신 표현해준 책으로는 단연 최고였다. 저자 김두식 님이 지식의 깊이 뿐 아니라 글쓰기에 뛰어난 재주가 있음은 글이 술술 읽혀짐을 통해 알게 되었다.

책 제목에서 풍기는 종교서적 냄새는 첫 장을 읽으면서 말끔히 사라지고 이 나라에서 교회의 종교적 사명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써내려간 훌륭한 책이었다. 현재 무교인이자 다종교 인정주의자인 나는 저자 김두식님이 참으로 존경스럽고 본받아야 할 이 시대의 참 스승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교회와 목사에 대해 솔직하고 대담한 생각을 자기 반성적인 자세로 써내려간 명작 중의 명작인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는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타종교 귀의자나 무종교인 모두에게 귀감이 될 만한 책이자 필독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웬만한 책도 공감대가 쌓이는 부분이 전체의 10분의 1이나 될까 말까한 요즘 기독교와 기독교인에게 고함치는 논리 정연한 자기 반성적 사색과 예수님의 올바르고 참된 사랑에 대한 간절한 바람에 큰 공감을 하였다. 책의 모든 장들이 어느 것 하나 빠뜨릴 수 없을 정도로 절로 공감과 존경을 보낼만한 책이었다.

머리말에서 그가 말했듯이 자신의 명저 “헌법의 풍경”이 괴물로 변하기 쉬운 국가와 그 국가를 통제해야 하는 법의 사명을 설명한 책이라면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는 대통령을 배출한 후 외형적으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나날이 영향력을 잃고 있는 한국 교회의 모습을 반성하고, 교회와 세상의 올바른 관계를 모색해 본 책이다. 그는 책의 요지는 ‘2장 비전과 욕심 - 방향을 거꾸로 잡은 교회’와 ‘8장 샬롬의 공동체 - 교회의 교회됨을 위하여‘ 에 담겨 있다고 하면서 책을 다 읽을 수 없는 사람은 이 두 장을 읽으면 전체 내용의 핵심을 알게 될 거라고 하였다. 하지만 내가 읽어본 바로는 4장(콘스탄티누스- 세상을 교회 속으로 끌고 들어온 사람), 5장(16세기- 세상이 교회를 지배한 시절), 6장(중세의 이단- 먼저 실험을 시작한 사람들)이 교회가 힘을 얻게 되고 세속의 권력과 야합을 하게 된 역사과정을 조금은 지루하게 나열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느 장 하나도 두 번 이상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음을 느꼈다.

이명박 현 대통령이 서울시장 당시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바친다)’는 말도 안 되는 기도를 올린 이후로 기고만장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명박’을 마치 이 나라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점지하여 보낸 선지자인 양 떠벌리는 작태는 아무리 상식적인 생각과 이해로 그들을 역지사지 하려고 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임에는 틀림없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조용히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뭇사람의 마음에 안식을 제공해야 하는 교회가 도리어 교회 속의 세상을 만들어 스스로‘권력기구’의 중심에 앉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이렇게 신앙인 중에서도 신실한 지은이가 말하는 교회의 사명을 함께 생각하다보면 지금까지 기독교인에 대해 가졌던 선입견이 깨끗이 없어짐을 경험하였다.

지은이는 결코 어느 쪽에 경도되어 자신의 주장만이 올바른 길이라도 주장하지 않는다. ‘진짜 보수는 권력의 절대화에 반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진짜 보수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하는 대목과 ‘진짜 진보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을 이어받아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103-104pp.) 말하는 그에게서 진정 인간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7장 질문 바꾸기 - 고통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는 교회‘에서 동성애 문제를 ’동성애가 죄인지 아닌지 묻기 전에 먼저 왜 나에게는 동성애자 친구가 없는가‘로 질문을 바꾸어 말하라고 하는 지은이에게서 이해와 사랑은 결코 율법주의자와 같이 정해진 틀에서 무작정 사람을 우겨넣으려는 작태가 아니라 사랑과 이해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는 배움을 얻었다.

’8장 샬롬의 공동체:교회의 교회됨을 위하여’에서 ‘현대 기독교인들은 ’평화‘하면 주로 예수를 믿고 마음속에 얻게 되는 평안으로 이해하지만 실제로 히브리어 ’샬롬‘이나 헬라어 ’에이레네‘가 말하고자 하는 평화는 그런 마음속의 주관적 내적 영역으로 제한되지 않으며’(277p.) '단순히 마음속에서 얻는 평안으로 축소함으로 교회는 대부분의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자유(278p.)'를 얻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전쟁과 빈곤에 맞서 싸우게 될 뿐, 정치적 결사체로서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279p.)‘이라는 대목은 진정한 기독교인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으로 예수님을 진정 스승으로 모시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였다.

김두식 님이 말하는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과 나눔 정신을 일독만으로 다 깨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현재의 ‘교회 속의 세상’이 말하는 세상은 절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세상 속의 교회’로 남기 위한 기독교의 부단한 노력과 자기성찰의 계기가 되어 진정한 세상의 밀알이 되는 교회를 보고 싶다. 그리고 나 자신부터가 열린 마음으로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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