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흐름으로 보는 세계사 - 역사는 화폐가 지배한다
미야자키 마사카쓰 지음, 송은애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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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덩이와 별배고둥의 초기화폐에서 비트 코인에 이르기까지 수천년에 이르는 세계의 역사

중요한 시점마다 묘하게 화폐들의 변화와 자본의 이동이 따라온다. 그러는 와중 통화는 교환의

수단이 아닌 투자의 수단으로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고 현대 사회에서 통화는 최강의

무기로 자리한다.


최초의 화폐 개념으로 은덩이가 사용됐다는점은 사실 의외다. 누가보아도 금이 가치를 가지고

좋아 보이는데 태양신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이 금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파라오의 등장으로

금을 독점하게 되고 권위와 종교성을 상징하는 제화로 머물 밖에 없게 된다. 이런저런 이유와

더불어 금속을 뜻하는 메탈(metal) 그리스어 메탈론(metallon)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본래 달을

의미했고 사람들은 금속 중에서 달과 가장 가깝게 여겼기에 자연에서 채굴되는 양이 적고 번거로운

재련과정을 거쳐야 하는 점이 상인들이 은덩이를 비싼값에 팔아 넘기는데 유리해지므로 이를 화폐로

사용하게 된다. 처음엔 주머니에 달아 무게로 거래하던 은이 '세겔'(당시 노동자의 한달 임금)이라는

단위가 등장하며 점차 거래가 확대되었고 세겔의 50배애 해당하는 '므나' 등장하게 된다. 세겔이라는

단위는 아직도 이스라엘에서 사용되고 있다. 


신대륙의 감소와 이상기후에 따른 흉작으로 침체기에 빠지고, 종교 대립에 의한 오랜 내전으로

혼란을 겪는 유럽은 그대로 '17세기의 위기' 시대를 보내게 된다. 시기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네덜란드는 프로테스탄트들의 일치단결로 카톨릭 종주국인 스페인과 80 간의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을 '네덜란드 독립 전쟁'이라고 부른다. 네덜란드는 전쟁을 치르면서 유럽의 해운을 지배했고

인도양과 대서양까지 진출하여 세계무역의 절반을 지배하는 해양강국이 되었다. 시기 네덜란드의

선박 수는 1 6천척, 선원은 16 3천명에 달했고 이는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독일의 선박을 합친

보다 많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네덜란드의 조선업이 발달하게 배경에 '청어' 있었다.

겨울에 먹는 생선인 몸길이 30cm 정도되는 청어의 어장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북해로 이동한 까닭에

북해에 연한 네덜란드가 수요가 많은 청어를 독식하게 되었고 위에서 내장을 제거하고 소금과 식초에

절여 가공한 청어를 수출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올리게 된다. 이외에도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 회사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고배당 전략등으로 막대한 부를 소유하게된 네덜란드는

세계를 아우르는 무역국가가 된다. 그러나 '넘쳐나는 ' '버블' 만드는 세계 경제의 진리는

어김없이 적용된다. '궁정의 '으로 각광받던 튤립에 투자처를 찾지 못하던 돈들이 몰려 들게 되고 이는

버블로 이어져 결국 만성 디프레이션에 빠지게 되고 '자본'이라는 눈덩이는 영국으로 이동하게 된다. 


미국 7 대통령 앤드류 잭슨에 의해 단행된 '미합중국 2은행 폐지'  이후 70년간 미국 중앙 은행

부재 사태를 야기했고 이는 1600개가 넘는 소규모 은행의 난립과 발행지폐 7000여종, 위조지폐 5000여종에

이르는 일대 혼란을 가져오게 되며 훗날 미국이 카드 사회로 변신하는데 일조하게 된다. 

'자본' 이동에 따라 권력과 국력도 이동한다. 영국으로 넘어간 자본의 물결은  영국 화폐 '파운드'

세계 경제 통용 화폐로 사용되게 하나  역시도 강대국으로 등장한 미국의 '달러' 밀려 나게 된다.

역사 변동의 토대는 '통화' '경제'이며 역사는 화폐가 지배한다. 지금 전세계적으로 열풍이 불고 있는

비트코인 역시 범주에 속하며 아직까지 통화로써 가치를 부여 받지는 못했지만 향후 어떠한 변화와

혁신을 일으킬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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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의 예수 - 복음 안에서 만나는 중동
앤드류 톰슨 지음, 오주영 옮김, 김태완.김현경 감수 / 두란노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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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모욕을 풍성한 은혜로 바꾼 것이다. p 87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들을 달리게 했다. p213


한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책과 질문이 유행이었던 적이 있다. 그때 청년들과

각각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일주일씩 고민하고 머리를 맞대던 기억이 난다. 그후 아주

오랜만에 다시 질문 앞에 서니 감회가 새롭다. 저자의 이력 특이한 하나를 발견했다.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를 분석해서 행동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행동 양식에 대한 답을 구하는

학문인 '행동 과학' 전공한 점이다. 행동과학은 심리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학문인데

배우기가 굉장히 어려운 학문이라고 알고 있다. 이런 저자의 이력 때문인지 중동 문화 '예수

이야기' 얼마나 정교하고 섬세하게 묘사 기대되고 기대된다. 


'기독교인과 무슬림. 복음으로 대화를 시작하다'.

책을 덮는 띠지의 글이다. 그런데 막연하다. 선교는 일종의 '소통'이라고 배웠는데 문화도 역사도

심지어 그들의 종교도 제대로 모른채 일방적 외침과 뻔한 질문들을 던져 그들을 당황케 하는데

익숙한 우리에게 복음으로 대화를 시작한다는 말은 낯설기까지 하다. 그러나 신선하다. 지금

우리의 고질화되고 정형적인 시각이 아니라 2000여년전 땅을 거닐며 사시면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이적과 기사를 베푸실 그때 그분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그들의 입장에서 접근한다.

'시선의 왜곡'이라는 말이 있다. 어떠한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보이는 대상이 왜곡되어 보이고

달라 보인다는 말이다. 아쉽게도 우리의 시선은 왜곡되어 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메세지를 아라비아의 문화로 설명하고 종교적 차이를 뛰어 넘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려는 시도는

약간의 두려움과 새로움에 대한 기대감을  동시에 가져다 준다. 


특별히 결혼식이라는 주제 속에서 만나게 되는 랍비 양성과정은 양산형 목회자 배출 상황에 즈음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개 여섯살 즈음에 시작되는 교육인 ' 세페르, Bet Sefer, 책의 '

열살 무렵까지 계속되며 재능이 있는 이는 '토라' 외우게 된다. 이때 성경을 가르치는 랍비는

공동체에서 가장 존경받는 이들이며  최고중 최고이다. 열살이 전도 유망한 학생들은 ' 탈무드,

Bet Talmud, 배움의 '라는 다음 단계로 진출하여 14세까지 교육을 받게 되는데 시기에 구약성경의

나머지 책들을 외우게 된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인 교육이고 14, 15세가 되면 랍비에게 제자로 받아줄

것을 청하게 되고 이에 허락을 받은 이는 ' 미트라쉬, Bet Midrash, 연구의 '라는 배움의 단계를

밟게 되는데 이때 랍비의 지식 뿐만 아니라 랍비가 살아온 방식과 종교적 훈련 마저도 모방하게 된다.

그리고 30 되면 스스로 가르치는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우리의 경우 신학대학을 나왔다면 7,

일반 대학 출신이라면 3년을 공부하면 전임사역자가 있으니 훈련과 지식의 양에서 현격한

이를 보인다. 아무튼 이렇게 수학한 랍비들은 잔치 중의  잔치인 '결혼식' 최고의 손님이다. 당시

고대근동지역 사람들은 유일하게 결혼식을 통해 사치를 부리거나 훌륭한 사람들을 초대할 있는

구실로 삼는다. 요한복음의 등장하는 가나의 결혼식 잔치에서 예수는 대중 앞에서 행하신 첫번째

이적을 보이신다. 학식도 높고 명성도 높고 자존심도 높은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혹자는 이도

예수의 전략적 도발이라고 하기도 한다). 


누가복음에서는 강력한 메세지가 전달된다. 잔치를 배설하고 사람들을 초대하는데 모두 일치하게

거절을 하고 거절의 내용이 조악하기 그지없다. 먼저 '방금 밭을 사서 나가서 살펴봐야 합니다'라고

한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다.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일인가. 아마도 평생을 모아서 밭일 것이다.

자신의 땀과 눈물의 결실로 소유하게 밭이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러나 여기까지가 우리의

생각과 문화이다. 사막 기후에 경작 가능한 토지는 아주 비싼 가격에 거래되기 때문에 토지 상태를

펴보고 수확량이 얼마나 되는지도 여러달 동안 확인하지 않고는 어느 농부도 뼘을 사지 않는다.

이런 문화적 지리적 배경 없이 말씀을 전한다면 자체가 왜곡이고 오류가 되어 버린다. 두번째

변명 역시 모욕적이다. 비싼 소를 이미 충분히 검토하고 확인하고 비교해서 샀음에도 그것을 시험해야

한다며 초청을 거절한다. 세번째 변명은 조악하고 불편하다. 당시 금기시 되는 '부부 사이의 관계'

대해 공공연하게 말하며 초청을 거절한다. 당시 사회에서 초청의 의미와 그것을 거절할 느끼는

초청자의 모욕감을 알면서도 말이다. 잔치에 초청했으나 말도 안되는 변명으로 거절을 당한 주인과

손님의 관계는 이미 깨어진 것이고 모욕당한 주인이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정당성을 찾을

충분한 명분이 준비된 것이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 진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지독한 모욕이 풍성한 은혜의 기회로

바뀐 것이다. 연회에 참석하고 초대받을 자격이 있는 이들이 배제되고 소외되고 무시당하던 사람들이

초청 대상이 된다. 하인이 나가서 가난한 사람, 몸이 불편한 사람, 앞을 보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누군가의 앞에 서는 조차도 어렵고 불편한 이들을 가장 중요한 손님들을 모셔야 잔치에

초대한 것이다. 이는 당시 투철한 종교집단의 독선과 오만에 대한 도전이고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들의

투철한 종교성과 치열한 오만 앞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이끄는 '겸손' 가르치며 그들의 종교적 자부심과 율법에 의해 닫혀버린 '겸손의 ' 뜨게 한다.

우리에겐 잔치에 초대될 어떠한 명분도 없다. 다만 은혜가 그것을 가능케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가 있는 유일한 반응이 '겸손'이다. 


저자는 도날드 할리(Donald Hawley) 말을 인용하여 아랍의 전통적인 종족 하다리(Hadari)

배드윈(Bedouin)종족을 이야기하는데 하다리는 동부 산악지대와 오아시스에서 마을과 정원을 이루고

사는 정착민이고 배드윈 종족은 사막의 유목민이다. 농부 가인과 목동 아벨 사이에 끝나지 않은

영원한 전쟁은 베드윈 종족의 동물들이 정착민들의 정원을 마구 짓밟으며 들이 닥치는 시기마다

재개된다고 말한다. 아직까지 그들은 그렇게 싸우고 있나보다. 이는 아라비아 주민들의 대부분이

유목민이라는  대중적 인식의 오류를 지적해 준다. 


책은 생각보다 빨리 '나가며' 내놓는다. 책을 읽는 동안 들었던 나의 의문과 생각이 저자와

일치했다. '과연 예수의 가르침이 그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하는

부분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결코 쉽지 않은 부분이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일이기에 이런

사역을 하고 있는 저자의 투지와 용기에 감사함을 표한다. 


책의 부록은 어쩌면 본문 보다 흥미진진하다. 성경훼손문제와 십자가 처형에 대한 이슬람의 견해,

그리스도의 정체성, 아랍인과 아라비아에 관한 성경 구절을 이야기 하는데 특별히 십자가 사건에 대한

측의 견해는 첨예하다.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의 신적인 뜻에 따라 계획하시고 의도하신 용인된

일이라는 역설적이고 온전한 진실에 대해 무슬림들은 부끄러운 비극으로 보는 반면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표현으로 본다. 책을 읽는 내내 느낀 느낌 그대로 이정도의

간극을 유지한다.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의 왜곡' 어느 편의 전적 수용이나 전적 포기 없이는

좁혀지기 어려운 부분이다. 예수께서 사역하시던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끝까지' 사명을 가진 우리가 끊임없이 도전하고 시도해야 부분이다. 


책은 막연함으로 무슬림과 아랍을 바라보는 모든 사역자들이 읽어 보면 좋겠다. 막연함이

간절함과 절실함으로 다가오게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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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됐을까 - 힘든 관계와 작별하고 홀가분해지는 심리 수업
일자 샌드 지음, 이은경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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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속에서 산다. 결코 사람을 떠나서 없으며 모든

사람과는 '관계'라는 것을 통해 연결되고 이어져 있다. 관계 맺음은 우리 삶의 가장 기본이며

이를 통해 사회 생활이 영위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도 하다. '센서티브'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깊고 넓게 이해하길 바라는 글을 썼던 저자는 이번에는 폭을 넓혀 다른 사람을

향한다. 나를 넘어선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오는 아픔과 어려움에 대해 어떻게 하면 수월하게

극복하며 자유로워질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의 중에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다. 

'이별을 선택했다면 제대로 작별인사를 건네세요.'

우리는 누구나 이별을 한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아픔이고 상처가 된다. 미적거리며 제대로 이별을

말하지 못하는 이에게도, 단호하게 이별을 통보하는 이에게도  동일하고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이에게도 마찬가지로 아픔이다. 저자는 이에대해 단호하다. 제대로 작별인사를 건네라고 말한다.

'제대로' 작별인사를 건네는 것이 무엇일가에 대한 궁금함과 기대감으로 책을 읽어 나간다. 


인간 관계는 정답이 없다. 정답이 없다는 말은 오답도 없다는 의미와 같다. 각자의 상황이 답이 되고

형편이 현실이 되는 것이 인간관계이다. 저자는 이렇게 복잡미묘한 우리의 인간관계에 대한 해결책으로

다음의 네가지를 이야기한다. 마음점검, 대화하기, 문제해결, 떠나보내기. 사실 쉽지 않다. 그리고

떠나 보내기는 더욱 어렵다. 떠나 보내는 것이 눈에서만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도 지워

보내는 것이기에 더더욱 쉽지 않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제대로 라는 단어가 이해가 된다. 마음 한편에

편린으로 존재하는 기억에서 조차도 지워버리는 , 가슴 뒤편에 꼭꼭 숨겨두고 때때로 꺼내서

곱씹을 그것마저도 도말 하는것, 어쩌면 이게 '제대로'일텐데 우리에게 너무 어려운 과제다. 그래서

떠나보내기를 연습해 보는 이유는 관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을 있고, 관점이 바뀌면 불편했던

마음이 편하지고 답답하던 가슴이 자유로워질 있다는 저자의 말이 조금 낯설다. 


우리의 관계를 망치는 가장 원인 하나가 '분노'인데 정작 우리는 분노의 원인이나 이유를 정확히

모르거나 무작정 타인에게도 찾을 때가 많다. 분노는 자신이 상처 받거나 다치지 않기 위한 방어기재로

사용되는데 자주 자기기만의 표현이 되기도 한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거나 못미칠때

여기서 오는 패배감이나 슬픔등이 분노로 표출되기도 한다. 이와같이 분노는 자신도 이유와 원인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에 자신의 마음을 닫게 만들고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 쉽다.

부정적인 생각이 반복되면 신념이 되듯, 분노가 반복되면 습관이 된다. 반복된 습관은 자신의

아니라 타인의 삶도 고통스럽게 만든다. 분노의 양날의 검이다. 관계를 망치는 주범이기도 하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탈출구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기' 주문한다. 자신의 감정 상태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 놓음으로 새로운 관계 형성의 물꼬를 트게 된다는 것이다. 


책은 다시 한번 용기를 내보라고 충고하며, 이상 회복하거나 치유 없는 관계라면 작별을

고할 것을 조연하고 제대로 작별을 고할 있다면 오히려 삶의 활력과 기쁨을 되찾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미적거리다가 기회를 놓치지 말고 용기를 내어 어정쩡하고 궁색한 만남에 대해 '제대로' 작별을

고해야갰다는 마음이 든다. 용기를 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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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사역 - 현장에서 분투하는 청년사역자를 위한
양형주 지음 / 두란노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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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전도, 양육, 기도가 기본이다. 169P

청년을 만날 있는 곳으로 가라. 88P

 

 

'청년이 없는 교회는 미래가 없다' 김회권 교수의 말이 사실이라면 한국 교회는 맘모스들만

살아 남고 나머지 교회들은 사라질것이다. 그러나 구호 역시 대상만 바뀌었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별로 데미지를 주지 못한다. 어쩌면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두운 것은 이와 같은

종에   기울이지 않으며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방관하는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저자와는 MEBIC'이라는 프로그램 때문에 심하게 충돌 적이 있다. 명성 교회라는 거대집단에서나

먹을 법한 도구와 장비를 동원하였고 고가의 온갖 인형과 음향기기까지 동원한 그들의 예배에,

예배실에 마이크 하나에 어디 사무실에서도 쓸법한 컬럼스피커를 하나를 사용하는 교회의 입장에서

솔직히 그림의 떡이어서 매직 1 세미나에 참석했던 몇몇 동료 사역자들과 ' 프로그램이 교회의

70%이상을 차지하는 소형 교회들이 사용할 프로그램 이냐며' 언성을 높여가며 부딪쳤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양형주 목사 그는 분명 탁월한 디렉터이며 열정가이다. 그의 사역에 대한 뜨거움은 누구보다

강렬했고 영혼에 대한 열망은 누구보다 간절했던 그는 열정적 사역자다. 그랬기에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아이들이 행복해 하는 예배' 부르짖으며 몸을 살랐던 것이다. 그런 그를 알기에

그의 청년사역 이야기를 담은 책이 기대된다.

 

저자는 청년 사역을 자동차에 비유한다. 멈춰 있을 시동을 걸어 가동을 시켜 저단으로 서서히

출발하고 일정 속도가 되면 기어를 변속해 주듯이 청년 사역도 멈추면 움직이게 해야 하고 저단 만이

아닌 때론 고속으로 때론 정속으로 주행할 필요가 있으며 연료가 떨어지지 않게 보충을 하듯 적절한

시점에 새로운 것들이 도입돼서 충전되어야 한다. 


청년부 무엇이 문제인가.

먼저 외적인 부분으로 저출산을 있다. 대학의 정원을 채우기 조차 버거운 실정인 '밀레니엄 키즈'

세대는 저출산의 표본이다. '아들 구별말고 둘만 낳아 기르자' 구호는 옛날 옛적 고래당적 얘기고

지금은 집에 아이 한명도 제대로 없는 실정이다. 스마트폰에 익숙한 '모바일 원주민', '디지털

네이티브' 불리는 이들의 사고는 현장 사역을 하는 나조차도 버거운 때가 많다. 정말 독특하다.

개교회 대부분의 대학부를 형성하는 이들이 소위 말하는 'Z'세대이다. 

이들보다 조금 나이가 들고 사회 생활을 하는 이들은 'Y'세대 혹은 '밀레니엄 세대'라고 하는데

욜로(YOLO) 워라벨, 가심비를 따지는 다른 인류이다. 소규모 교회에는 이들이 섞여 '청년부'라는

이름으로 모여 심하면 나이차가 15살까지 나기도 한다. 


저자가 소개하는 원주제일감리교회 권용주 목사의 이야기는 청년 사역자라면 반드시 숙지해야 하는

내용들이다. 역시도 몇가지를 배운다. 하나가 청년들을 사역의 실험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넘치는 열정과 도전 의식으로 뭔가를 해보고 싶어 외부에서

좋다는 것들을 끌어 들여 판을 벌린다. 그리고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판은 머지 않아 식어 버리거나

사역자의 이탈로 그냥 멈춰 버린다. 그러다 보니 청년부에 오래 있었던 이들은 거쳐간 사역자들 덕분에

어지간한 프로그램 이름은 한번씩 들어 봤고 경험이 있기에 새로운 사역자의 열정이 부담스러워진다.

여기서부터 이미 간극은 벌어진다. 교회의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떠한 시도 자체가 조심스러워진다. 


하나는 사역자 자신이 성장한 만큼 그만큼 청년들을 성장시킬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역자들이

그래야 되겠지만 특별히 청년 사역자들은 부단히 자기개발에 힘써야 한다. 끊임없이 영성을 추구하고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증거해야 하며 현실 상황에 민감해야 하고 삶이 투명해야 한다. 무엇보다

요한것은 하나님이 대한 갈망으로 깊이 체험하고 인정해야 한다. 이런 사역자의 모습은 그대로

청년들에게 전달되고 이는 선한 영향력으로 전파된다. 


책의 내용 '변증적 지식에서 자라야 한다' 구절이 눈에 들어 온다. 청년들은 논리적인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논리적인 것을 쉽게 인정하고 마음을 움직인다. 이런 청년들에게 논리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저자가 이야기 하는 '성경은 어떤 책인가', '하나님은 어떤분이신가',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구원이란 무엇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종말은 언제 오는가'

교리 7 영역은 계시,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등에 대한 교리적 이해와 숙지를 통해

논리적 접근이 가능하다. 논리적인 질문에는 논리적인 답변이 필요하다. 이를 토대로 하나 하나씩

증명해 나가는 것이다. 물론 쉽지는 않다 그러나 쉽지 않은 만큼 결과는 청년들의 확신과 믿음으로

나타날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설렘을 잃지 말라'

만남, 데이트는 설레고 긴장된다. 그러다 익숙해지면 설렘과 긴장이 풀려서 나사풀린 같은

모양이 된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설렘도 마찬가지다. 사역자가 먼저 설레야 한다. 말씀을 대하는게

설레고, 말씀을 선포하는게 설레고, 청년들을 만나는 것이 기대되고 설레야 한다. 사역자가 냉담하면

청년들은 즉시 눈치채고 멀어진다. 설레임으로부터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된다.


앞으로의 청년 사역 여건은 분명 나빠질 것이다. 그러나 준비하는  교회는 살아 남을 것이고 청년이

든한 교회는 미래가 탄탄하다. '다음 세대' 외친지 벌써 십여년이 지나 아이들이 이제 청년이

되었다. 그들이 한국 교회의 미래이고 희망이다. 


책은 모든 청년 사역자 뿐만 아니라 교회의 담임 목사님들이 읽어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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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거룩 - 신앙의 공회전을 멈추고 거룩으로
강정훈 지음 / 두란노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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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란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있게 해주는 열쇠 구멍이다. P47

생활거룩으로 살아야 한다. P171

 

성화는 성품으로 시작하여 일상생활에서 드러나야 하고 성화가 드러나야 영역은 성격과

일상생활이다. 우리 성격이 십자가에서 계속 수술 받지 않고 입으로만, 교리로만 성화를 말하는

A. 토저의 말을 빌린다면 '종교적 소꿉 놀이' 불과하며 유치하게 짝이 없는 행동들이다. 


'이미' '아직'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믿었기에 '이미' 속하는 구원과 믿음 이후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아직'

속하는 구원. 솔직하게 말한다면 '아직' 아닌 희망사항에 불과 수도 있다. 믿기를 고백했기에

덧붙일 것이 없어야 하는 우리에게 구원을 볼모로 정체를 없는 제약과 제한들을 너무 많고

이는 개교회의 전반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성경 어디에 찾아봐도 구원의 다른 조건과 이유가

존재하지 않고 다른 이름 역시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면(믿으면) 된다. 저자는 부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 대해 말한다. 애굽과 가나안 사이, 홍해와 요단강 사이로

통칭되는 간극에 '구원 이후' 존재 한다. 신분 만이 아니라 삶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회심과 바로서기를 통한 '제대로 ' '성화의 ' 그것이다. 


처음 책을 받으며 기대했다. 내가 익히 아는 분의 책이기에 그의 촌철살인과 같은 직언과 폭풍과도

같은 과감함과 무딘 심장을 쪼개고 들어오는 강력한 드릴과 같은 묵직한 울림을 알기에 더더욱

그랬다. '교회학교 이대로는 미래가 없다' '신수성가' 이은 '생활 거룩' 제목부터

도전적이다. 그런 기대감과 들뜸으로 장을 열었다.


예상했지만 프롤로그부터 독설(아니 이건 째찍이고 바른 소리다) 여기저기서 튀어 나온다. 복음의

수성과 교회의 거룩성을 맞바꾼 현재의 결과를 말하는 '불편한 진실' 그렇고, 고신대 박영돈

교수의 '많은 이들을 구원하는데는 성공했지만 거룩하게 하는데는 실패했다' 말이 그렇고, '오직

믿음이 아닌 오직 말뿐'이라는 구호가 그렇고, 교회 교패는 많은데 신패(信牌) 없다는 말이 그렇고,

박영선 목사의 '세상 사람들에게 팔린다' 말이 그렇다. 여기에 파이퍼(John Piper) 목사의

선언은 결정적이다. ' 속에서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으면 지옥에 것이다'. 입만 거룩한 우리는

말에 충격도 받아야 하고 무릎도 꿇어 져야 한다. 


지금 우리는 개혁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에서 '칭의' 몰입한

나머지 칭의만능주의를 살고 있다.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된다는 은총의 교리이다. 여기에는 다른 어떤 것도 첨가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필요하다. 그런데 '칭의만능주의' 빠지다 보니 칭의의 본질인 '죄인되었던 우리' 잊어

버리고 자신이 정말 의인인양 착각을 한다. 더불어 착각은 타인을 향한 정죄의 무기가 되어 전가의

보도인양 마음대로 휘둘러 여기저기서 상처 받고 고통받는 이가 속출하고 결국 교회(믿음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떠나고 만다. 매일매일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를 쳐서 복종케 하는

회개의 진심으로 나아가야 성화에 가까워 지는데 회개는 없이 죄에 대해, 거짓에 대해, 가짜에 대해

스스로 타협을 버린다. 마치 중세교회의 그들처럼. 그래서 칼뱅(John Calvin) 이렇게 선언한다.

'성화 없이는 칭의도 없다.' 물론 성화는 칭의의 열매로 반드시 나타나지만 성화가 칭의의 어떠한

근거나 조건이 될수는 없다. 


성공회 대주교인 헤르스 코트 박사는 구원을 셋으로 나눈다. 이미 받았고 이미 완성된 영혼 구원인

거형 구원(I was saved), 지금 받고 있거나 혹은 받아 가고 있는 현재형 구원(I am being saved),

미래에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미래형 구원(I will be saved)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것은 '현재형 구원'이다. 현재형 구원은 지금 이순간 이루어져가는 구원으로 삶에서 , 생활에서,

인격에서, 성품에서 이루어 내야 미완성의 구원이다. 사도 바울의 이에 대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 빌립보 교인들과 지금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다.

 

저자는 현재 한국교회의 심각성을 이야기하며 지식에만 집중되는 성경공부와 온갖 미신적 요소를

가진 주문을 외는 듯한 기도를 예로 든다. 실제로 교회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살펴 보면 교재

수준이 신학대학 수업 수준이거나 심한 경우 이를 뛰어 넘기도 한다. 여기에서 문제 하나가

발생한다. 성경공부 인도자(대부분 목회자 1) 내용을 충분히 그리고 정확하게

숙지하였느냐이다. 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교수들도 각각의 전공 분야가 있어서 자기 분야만

가르치는데 개교회 목회자가 무슨 만물박사도 아니고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고대근동문화,

고대역사, 지리, 거기다 문장의 해석에다 요즘에는 상담이나 심리학까지 등장하다 보니 어느것

하나 제대로 수가 없고 부실 밖에 없다. 가르치는 이가 부실하니 배우는 역시 부실하기

마련인데 평생 들어서 그런지 이런 저런 풍월은 많아 잘난척도 잘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말씀을 배우는 목적은 말씀을 제대로 배워서 말씀 대로 사는 것인데 제대로 배우지 못하니

제대로 수도 없다. 제대로 살아야 영향력도 미치고 방주도 될텐데 여전히 우리는 교회다니는

사람이니 '생활 거룩' 요원하다. 지식으로만 성장하고 연륜만 늘어가는 현대판 바리새인이 되어

가는 현실이다. 


하나의 문제는 기도다. 샤머니즘과 유교적 사상이 토대이기에 우리의 기도에 무속의식이 잠재해

있는것도 문제지만 기도의 본질에 대한 오해 역시 무시 못할 부분이다. 하나님은 '자판기' 아니다.

자판기에 일정한 돈을 넣으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처럼 기도를 이만큼 했으니까, 봉사를 이정도하니까,

헌금을 예배를 이렇게 하니까라는 이유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려는 잘못된 생각이 우리의 기도를

하늘나라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게 만든다. 주님의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말씀은 그냥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고 암송을 하라는 1차원적 요청이 아니라 '그렇게 살라' 강한 명령이다. 그렇게

기도하면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이것이 안되니 '생활 거룩' 수가 없다.

 

세상 사람들의 기독교 혹은 크리스천에 대한 기준은 명확하다. '남과 다르다' 것이다. 지금 교회가

욕을 먹고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것은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이다. 같이 살아 보니 세상 사람이나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차이가 없기에 그들의 기대는 점점 교회로부터 멀어 진다.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명령하신 '거룩' 무게 잡고 어깨 힘주고 엄숙한 하는것이 아니라

'세상과 구별 생각, 행동, 삶으로 살아내는 '인데 거룩을 말로는 찬양으로는 쉴새 없이 부르지만

정작 중요한 '교회밖 거룩' 찾아 보기 어렵다. 저자는 이를 '신앙의 공회전'이라고 부른다. 이런

공회전은 연료만 낭비 뿐이다. 우리는 이런 공회전과 같은 게토(getto) 신앙에서 벗어나 '생활 신앙'

살아야 한다. 교회 자기들 만의 거룩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제대로 살아 내는 '생활 거룩'

살아야 한다. 


저자는 인생 1 밧단아람과 가나안에서의 130년과 인생 2 애굽에서의 17년을 이름마저도 '발꿈치를

잡는 '이자 희대의 사기꾼인 야곱의 등장시켜 그의 삶을 통해 개입하시는 하나님과 더디지만 성화의

길을 조금씩 이루어 가는 우리네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요즘 같이 빨리빨리를 외치는 시대면 속터져

죽을 만큼 더디지만 탄탄하게 다지며 길을 걸어 나간다. 때론 흔들리기도 하고, 때론 넘어지기도

하지만 어느새 그는 부쩍 앞으로 나가 있다. 키에르케고르가 '이제. 하나님의 도움으로 나는 자신이

것이다'라고 말한것처럼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이름을 밝힘으로써 에서라는 마음의 가면을 벗고

오롯이 야곱으로서의 삶을 산다. 결정권을 내려 놓고 바라보며 지켜보는 입장에서 자신을 성찰하며

깊게 하나님께 들어 간다. 야곱의 이상 에서 행세를 하지 않고 야곱으로 살때 비로서 성화가

시작된다. 


우리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 안에 가진 '그것(혹은 우상) 내려 놓아야 제대로 성화가 시작된다.

하나님 보다 앞서 있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그게 우리의 '에서'이다. 성화 없는 열심은 광신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성화 없는 우리의 신앙은 브레이크가 파열된 폭주 기관차와 같다. '기독교인이란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있게 해주는 열쇠 구멍이다' 최초의 미국인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이 더욱

절실해 진다. 


책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책이다. 초신자는 초신자대로, 오래 믿은 사람은 오래 믿은 사람대로, 사역자는 

사역자 대로 각각 자신에 상황에 맞춰서 읽는 다면 분명 도전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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