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책과 질문이 유행이었던 적이 있다. 그때 청년들과
각각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일주일씩 고민하고 머리를 맞대던 기억이 난다. 그후 아주
오랜만에 다시 이 질문 앞에 서니 감회가 새롭다. 저자의 이력 중 특이한 점 하나를 발견했다.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를 분석해서 그 행동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행동 양식에 대한 답을 구하는
학문인 '행동 과학'을 전공한 점이다. 행동과학은 심리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학문인데
배우기가 굉장히 어려운 학문이라고 알고 있다. 이런 저자의 이력 때문인지 중동 문화 속 '예수
이야기'가 얼마나 정교하고 섬세하게 묘사 될 지 기대되고 기대된다.
'기독교인과 무슬림. 복음으로 대화를 시작하다'.
책을 덮는 띠지의 글이다. 그런데 막연하다. 선교는 일종의 '소통'이라고 배웠는데 문화도 역사도
심지어 그들의 종교도 제대로 모른채 일방적 외침과 뻔한 질문들을 던져 그들을 당황케 하는데
익숙한 우리에게 복음으로 대화를 시작한다는 말은 낯설기까지 하다. 그러나 신선하다. 지금
우리의 고질화되고 정형적인 시각이 아니라 2000여년전 그 땅을 거닐며 사시면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이적과 기사를 베푸실 그때 그분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그들의 입장에서 접근한다.
'시선의 왜곡'이라는 말이 있다. 어떠한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보이는 대상이 왜곡되어 보이고
달라 보인다는 말이다. 아쉽게도 우리의 시선은 왜곡되어 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메세지를 아라비아의 문화로 설명하고 종교적 차이를 뛰어 넘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려는 시도는
약간의 두려움과 새로움에 대한 기대감을 동시에 가져다 준다.
특별히 결혼식이라는 주제 속에서 만나게 되는 랍비 양성과정은 양산형 목회자 배출 상황에 즈음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개 여섯살 즈음에 시작되는 교육인 '벳 세페르, Bet Sefer, 책의 집'는
열살 무렵까지 계속되며 이 중 재능이 있는 이는 '토라'를 외우게 된다. 이때 성경을 가르치는 랍비는
공동체에서 가장 존경받는 이들이며 최고중 최고이다. 열살이 된 전도 유망한 학생들은 '벳 탈무드,
Bet Talmud, 배움의 집'라는 다음 단계로 진출하여 14세까지 교육을 받게 되는데 이 시기에 구약성경의
나머지 책들을 외우게 된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인 교육이고 14, 15세가 되면 랍비에게 제자로 받아줄
것을 청하게 되고 이에 허락을 받은 이는 '벳 미트라쉬, Bet Midrash, 연구의 집'라는 배움의 단계를
밟게 되는데 이때 랍비의 지식 뿐만 아니라 랍비가 살아온 방식과 종교적 훈련 마저도 모방하게 된다.
그리고 30세 쯤 되면 스스로 가르치는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우리의 경우 신학대학을 나왔다면 7년,
일반 대학 출신이라면 3년을 공부하면 전임사역자가 될 수 있으니 그 훈련과 지식의 양에서 현격한 차
이를 보인다. 아무튼 이렇게 수학한 랍비들은 잔치 중의 잔치인 '결혼식'의 최고의 손님이다. 당시
고대근동지역 사람들은 유일하게 결혼식을 통해 사치를 부리거나 훌륭한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는
구실로 삼는다. 요한복음의 등장하는 가나의 결혼식 잔치에서 예수는 대중 앞에서 행하신 첫번째
이적을 보이신다. 학식도 높고 명성도 높고 자존심도 높은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혹자는 이도
예수의 전략적 도발이라고 하기도 한다).
누가복음에서는 더 강력한 메세지가 전달된다. 잔치를 배설하고 사람들을 초대하는데 모두 일치하게
거절을 하고 그 거절의 내용이 조악하기 그지없다. 먼저 '방금 밭을 사서 나가서 살펴봐야 합니다'라고
한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다.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일인가. 아마도 평생을 모아서 산 밭일 것이다.
자신의 땀과 눈물의 결실로 소유하게 된 밭이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러나 딱 여기까지가 우리의
생각과 문화이다. 사막 기후에 경작 가능한 토지는 아주 비싼 가격에 거래되기 때문에 토지 상태를 살
펴보고 수확량이 얼마나 되는지도 여러달 동안 확인하지 않고는 어느 농부도 땅 한 뼘을 사지 않는다.
이런 문화적 지리적 배경 없이 이 말씀을 전한다면 그 자체가 왜곡이고 오류가 되어 버린다. 두번째
변명 역시 모욕적이다. 비싼 소를 이미 충분히 검토하고 확인하고 비교해서 샀음에도 그것을 시험해야
한다며 초청을 거절한다. 세번째 변명은 더 조악하고 불편하다. 당시 금기시 되는 '부부 사이의 관계'에
대해 공공연하게 말하며 초청을 거절한다. 당시 사회에서 초청의 의미와 그것을 거절할 때 느끼는
초청자의 모욕감을 알면서도 말이다. 잔치에 초청했으나 말도 안되는 변명으로 거절을 당한 주인과
손님의 관계는 이미 깨어진 것이고 모욕당한 주인이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정당성을 찾을
충분한 명분이 준비된 것이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 진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지독한 모욕이 풍성한 은혜의 기회로
바뀐 것이다. 연회에 참석하고 초대받을 자격이 있는 이들이 배제되고 소외되고 무시당하던 사람들이
초청 대상이 된다. 하인이 나가서 가난한 사람, 몸이 불편한 사람, 앞을 못 보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누군가의 앞에 서는 것 조차도 어렵고 불편한 이들을 가장 중요한 손님들을 모셔야 할 잔치에
초대한 것이다. 이는 당시 투철한 종교집단의 독선과 오만에 대한 도전이고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들의
투철한 종교성과 치열한 오만 앞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이끄는 '겸손'을 가르치며 그들의 종교적 자부심과 율법에 의해 닫혀버린 '겸손의 눈'을 뜨게 한다.
기실 우리에겐 그 잔치에 초대될 어떠한 명분도 없다. 다만 은혜가 그것을 가능케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이 '겸손'이다.
저자는 도날드 할리(Donald Hawley)의 말을 인용하여 아랍의 전통적인 두 종족 하다리(Hadari)와
배드윈(Bedouin)종족을 이야기하는데 하다리는 동부 산악지대와 오아시스에서 마을과 정원을 이루고
사는 정착민이고 배드윈 종족은 사막의 유목민이다. 농부 가인과 목동 아벨 사이에 끝나지 않은
영원한 전쟁은 베드윈 종족의 동물들이 정착민들의 정원을 마구 짓밟으며 들이 닥치는 시기마다
재개된다고 말한다. 아직까지 그들은 그렇게 싸우고 있나보다. 이는 아라비아 주민들의 대부분이
유목민이라는 대중적 인식의 오류를 지적해 준다.
이 책은 생각보다 빨리 '나가며'를 내놓는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들었던 나의 의문과 생각이 저자와
일치했다. '과연 예수의 가르침이 그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하는
부분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결코 쉽지 않은 부분이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에 이런
사역을 하고 있는 저자의 투지와 용기에 감사함을 표한다.

이 책의 부록은 어쩌면 본문 보다 흥미진진하다. 성경훼손문제와 십자가 처형에 대한 이슬람의 견해,
그리스도의 정체성, 아랍인과 아라비아에 관한 성경 구절을 이야기 하는데 특별히 십자가 사건에 대한
양 측의 견해는 첨예하다.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의 신적인 뜻에 따라 계획하시고 의도하신 용인된
일이라는 역설적이고 온전한 진실에 대해 무슬림들은 부끄러운 비극으로 보는 반면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표현으로 본다. 책을 읽는 내내 느낀 그 느낌 그대로 딱 이정도의
간극을 유지한다.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의 왜곡'은 어느 한 편의 전적 수용이나 전적 포기 없이는
좁혀지기 어려운 부분이다. 예수께서 사역하시던 그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끝까지'의 사명을 가진 우리가 끊임없이 도전하고 시도해야 할 부분이다.
이 책은 막연함으로 무슬림과 아랍을 바라보는 모든 사역자들이 꼭 읽어 보면 좋겠다. 그 막연함이
간절함과 절실함으로 다가오게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