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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불편한 용서
스베냐 플라스푈러 지음, 장혜경 옮김 / 나무생각 / 2020년 9월
평점 :
용서하는 행위는 정의롭지도, 경제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 용서는 말 그대로 복수와 보상의
포기다. 용서하는 사람은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단념하고, 중지하며, 꾸짖기
(가르치고 알리기)를 멈춘다. 그러나 인간은 마법사처럼 순식간에 죄를 없앨 수 없다. 용서라는
개념의 한계는 다만 죄의 청산을 포기하는 것일 뿐 죄인의 죄는 그대로 죄로 남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들은 이 문제의 정답을 자신들이 아닌 '신적 존재'에서 찾는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용서의 문제에 대해 '용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사실상 그것이야 말로 용서해야 하는 유일한 것이 아닙니까'라는
말로 설명한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만이 용서다. 이 말은 용서 할 수 있는 것은 침묵한다는
의미다. 가해자의 동기를 이해하고 자신이 그 입장이어도 똑같이 행동 했을 것이라고 확신할 때 용서는
이미 용서가 아니다. 어떤 행위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순간부터 그 행위는 용서의 대상이 아니라
화해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용서는 합리성의 경계 안에 머물며 존재한다.
용서라는 주제의 철학적 스펙트럼은 용서를 '이해, 사랑, 망각'이라는 의미에서 바라본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뜻이다라는 19세기의 문구는 이해=용서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에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용서가 가능해진다. 용서와
사랑을 연결시킨다면 우리는 '다른 경제학'의 개척자 프리드리히 니체를 만나게 될것이다. 사랑처럼
미쳐야 하며 답례도 못 받는 순순한 소비이어야 용서가 성립된다. 잊어 버려야 용서가 완성된다.
머릿속에서 영원히 기억되지도 않아야 하며 다시 떠올려 지지도 않아야 한다. 이를 기독교에서는
'도말(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 처럼 없앤다)'이라는 표현을 쓴다.
용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행위다. 중개하는 제 3자가 필요하지 않다. 용서는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두고 진행되고 시간과 함께 완성되는 것이 용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용서는 죽었다(블라디미르 얀켈리비치의 '용서한다고?')'라는 말처럼 용서는 피해자
자신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용서는 '선물'이다. 용서하는 사람은 복수의 갈망이나
씁쓸한 보상의 요구에 지지 않고 자제를 한다. 자신이 겪은 고통을 정확히 계산하여 되갚아주겠다는
마음의 포기가 그의 '선물'이다.
용서. 참 어려운 말이다. 용서라는 의미를 정확히 알고 난 지금의 용서는 더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외적 용서라는 길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용서는 더욱 더 어렵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