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란사 - 조선의 독립운동가, 그녀를 기억하다
권비영 지음 / 특별한서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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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본명인 김란사보다 당시 선각적인 사고를 가졌던 여성들이 남편의 성씨를 따랐던 것과

자산을 나이 많은 이의 후처로 넘겨버린 아버지에 대한 반항, 그리고 자신을 지극하게 아끼는

남편에 대한 마음에서 남편의 성씨를 따라 '하란사'로 불렸던 신여성이자 최초의 여자

유학생이었던 그녀는 덕혜옹주의 오라버니인 의친왕과 함께 조선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던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사실 '란사'라는 이름도 본명이 아니다. 이화학당에서 만난 선교사가

낸시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한문으로 바꿔 '란사'라고 했고 본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덕혜옹주의 권비영 작가는 이 인물 하란사를 이화학당 친구인 화영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내 생각대로 사는 것이다. 내 생각은 그곳에 있다'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란사는 자주적인 사고를 가졌다. 생각의 폭이 넓고 깊어 대중 연설을 하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특별히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적극 독려했을 정도로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다.

빼앗긴 나라의 국민으로 살지만 의기와 희망은 하늘같이 높고 강해 위협 앞에 주눅들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었던 그녀의 삶은 '장부의 삶'이었다.

이 책은 소위 '무명'의 사람들과 당시 유학생들의 모습이 묘한 대립을 보이며 비춰진다.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생명 마저도 초개와 같이 던지는 기생들과 민초들이 있는가 하면, 선택 받은 자들의

오만함과 거만함, 시대적 상황이 낳은 패배주의적 감성들은 서로의 위치와 역할에서 동떨어진 '그들만의

세상'을 보여준다. 간절함과 절박감을 가진 이들과 누리고 즐기는데 익숙해 다른 이들이 눈에 들어 오지

않는 그들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것이 없는 것 같아 씁쓸함 마저 든다. 이곳에 나오는 기생들의

만세운동은 영화 덕혜옹주에도 나온다.

그런가하면 참 대단한 인물이 한 명 있다. 란사의 남편인 '하상기'다. '사람이 다 생김새가 다르듯 나라를

위해 해야할 일도 다를 것이오. 당신처럼 총명하고 바지런한 사람은 쓰임이 다른 이들의 몇배 몇십배는

많을 것이오. 부디 공부를 열심히 하여 이 나라를 위해 일해 주시오'라고 말하며 유학을 권하는 하상기의

모습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선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며 결단이었다. 자신의 부인을

이화학당에 보내 신문물을 배우게 하는 것도 쉬운 결정이 아닌데 유학이라니. 어쩌면 그는 란사를

남편보다는 친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였을수도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전폭적인 지원을 한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시대적 상황 속에서 여자 혼자 유학이라니 하는 미심쩍은 부분이 생겼으나 그는

끝까지 란사와의 의리를 지킨다. 란사의 돌발적인 행동들과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특히나 그녀의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의리를 지키고 죽은 란사의 흔적을 찾다 죽음을

맞이하는 하상기의 모습을 보며 진한 감동과 여운이 생겼다. 꽤 괜찮은 남자다.

책을 읽는 내내 조선 정조 때 나라의 부흥과 민초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노력을 몸으로 펼쳤던 빙허각

이씨(학자들이 뽑은 한중일 실학자 99인 중 유일하게 여성 실학자. 규합총서등의 저자. 실학자 서유구의

형수이자 스승. 허공에 기대선 여자 빙허각, 곽미경, 자연경실)가 생각났다. 그녀도 남편과 시동생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마음껏 의기를 펼쳤으며 남편이 죽은 후 많은 유혹 앞에 끝까지 '의리'를 지켰던

인물이다. 빙허각 이씨와 하란사, 그리고 두 사람의 남편과 남자들, 두 여인을 가까이 한 왕실의 인물들

묘하게 두 책이 하나인듯 닮아 있다.

이 책은 픽션과 논픽션이 적절히 섞여 있는 소설이다. 란사가 조선 최초의 여자 유학생이자 미국 학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고 이화학당 사감시절 유관순을 만났고 미주 순회 강연에서 모금한 돈으로

정동제일교회에 최초로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1918)한 인물이라는 것은 분명 팩트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캄캄한 밤길을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말한다. 막막했을것 같다. 남겨진 자료가

거의 없기에 작가적 상상력에 매달려야 하는데 하란사가 실존 인물이기에 최대한 사실에 입각한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과 고충이 '캄캄한 밤길'이라는 단어에 여실히 드러난다. 훌륭히 그 길을 걸은 작가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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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유가 있습니다 : 거룩을 키우시는 하나님의 훈련 - 사무엘상 3 김양재 목사의 큐티강해
김양재 지음 / 두란노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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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P89

홀로서기도 오직 하나님의 힘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P188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라는 질문은 삶을 살아가는한 끊이지 않을 질문이며 시련이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앞에 우리의 믿음은 여지없이 흔들리고 무너진다. 대체로 우리의 믿음은

상황을 뛰어 넘어 계시는 그 분을 보지 못한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그 일로 죽을 것

같은 그 순간이 하나님과 교제할 가장 좋은 시간이라는 것과 그 고난 속에서 외로움을 경험해

보지 못하면 결코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도 이해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훈련이 안된다는

사실도 분명히 알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상황은 난공불락일 경우가 많다. 이런 우리에게 저자는

'하나님의 이유'라는 단어로 도전한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이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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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싸울 수 없으리니'(삼상 17:33) 현실은 우리에게 늘 이렇게 말한다. 학벌이, 배경이, 물질이, 심지어

인물이..... 골리앗 앞에 서는 다윗에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어리고, 너는 힘도 없고, 너는

능력도 없으니 '너는 이기지 못할거야'.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말하는 이들은 적군이 아니라

우리편이다. 삶에서도 그렇다. 의지를 꺾고, 의욕을 잃게 하고, 힘이 빠지게 만드는 이들의 대부분은

주변 사람들 그것도 아주 가까운 이들이다. 이때 다윗의 반응이 참 멋지다. '사자의 발톱과 곰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현실적으로 두려워했고 공포를 느낀 그 순간에도 건져내신 분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실것이라고 담대히 말한다. 여기에서 다윗의 관점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이길수 있었고, 하나님이 도우셨기에 물리칠 수 있었고, 하나님이 건지셨기에 지금껏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은 없다. 오직 하나님만 드러난다. 저자는 이와 같은 다윗의 고백을

'지질하게 (사실 찌질함이 훨씬 맛이 난다)두려움에 떨었던 이야기'라고 말한다. 간증은 이 지질함 속에

함께 하시고 건져 내시는 그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경험은 설득력을 가진다. '무턱대고'가

아니라 경험을 통해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힘이고 능력이다.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삼상18:3) 생명같이 사랑했다는 말은 세상에서 이 보다 더 사랑한 이가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학문도 아니고, 이론도 아니고, 경험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실체도 아니다. 말로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생명같이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참 사랑은 내가 대신 죽는 것이다. '죽을 만큼'이 아니라 '죽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죽기까지 사랑하셨고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다.(롬5:8) 이 시대는

이런 사랑에 목말라 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의 전달자들 이어야한다. 세상의 근심거리가 아니라 세상을

근심하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20210723_145831.jpg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운동을 하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힘 빼'라는 말이다. 잔뜩 힘이 들어가면 뭔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것

같으나 정작 몸이 굳어서 오히려 움직임이 둔해지고 힘도 제대로 쓸 수 없다. 다윗이 그랬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잔뜩 들어간 힘을 빼길 원하셨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심히 귀하게 된' 그 때 도망자로 만드신다.

사울의 힘으로, 미갈의 힘으로, 요나단의 힘으로 왕이 되기를 원치 않으셨다.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길 바라시며 그를 도망자로 만드셨다. 우리의 삶에도 이렇게 개입하신다. 조금 더

당신을 향해 다가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광야로 내모시기도 하고 절벽 끝으로 데려 가시기도 한다. 이때

광야는 인내를 배우는 학교가 되고 절벽은 날을 수 있음을 발견하는 뜻밖의 장소가 된다. 다윗에게 그렇게

하신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신다.

세상은 두려움과 환난의 연속이다. 그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여전히 사울과 아기스의 위협과 블레셋의 침략이 존재함에도

다윗은 건지시는 하나님을 찾는다. 다윗은 형들의 질시와 아버지의 무시, 사울의 살해 위협, 광야 길에서의

가난과 배고픔, 사람과 질병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자신을 건지시는 하나님을 높인다. 바른 신앙이

이런것이 아닐까 싶다. 상황을 이기는 신앙, 현실을 뛰어 넘는 믿음, 두려움을 견디는 소망들이 모아져

오롯이 하나님 만을 바라 보는 것, 이것이 신앙이다.

이 책은 신앙의 위기 가운데 있는 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다윗에게 험께 하셨던 그 하나님이 지금 이순간

나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될것 같다. 그래서 그들의 광야가 축복의

장소로 변하는 은혜를 누리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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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떠난 뒤 맑음 상.하 + 다이어리 세트 - 전2권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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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날이어서 오히려 불온했다.' 에쿠니 가오리 다운 복선이 깔리며 이 책은

시작한다. 아름다움과 불온의 공존. 저자는 여행의 묘미를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정리한다. 쌈박하다.

(삼박하다는 좀 약하다) 짐은 최소한으로 하고, 집에 전화할땐 공중전화로, 휴대폰은 꺼두고,

여행 하는 동안 일어나는 일은 둘만의 비밀이고, 여행이 끝날 때까지 절대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규칙을 가지고 여행을 감행하는 어릴적 수의사가 되고 싶었던 레이나와 어른스러운 사촌언니 이츠카.

여행은, 어딘가에 가려면 그 어딘가가 어디인지 정해야 하고, 정하지 않고 찾아 나선다해도 우선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정해야 한다. 둘은 그렇게 여행을 시작한다. 현실적인 걱정이 생긴다. 과연

미성년자인 여자 아이 둘이서 그것도 미국을 여행한다면, 그것도 돈이 떨어지면 집으로 돌아 올거라는

생각으로 신용카드까지 정지시킨 상황에서 이 아이들에게 여행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생각과 더불어

아주 오래전 대학 신입생 여름방학에 무작정 떠났던 무전여행이 생각났다. 처음 계획은 딱 2주 였는데

이런저런 우연과 만남으로 무려 40일 가까이 여행을 했던 기억이 떠올라 옅은 미소가 지어지며 '이

아이들도 잘 해낼 수 있을거야'라는 위안과 바램으로 책장을 넘겼다.

여행은 늘 그렇다. 새로움과 낯섦의 만남이고 연속이다. 끝없이 새로운 것과 만나고 연속해서 낯선

상대와 부딪치고 그러면서 하루 또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레이나와 이츠카도 그랬다. 아주 작은

일상들이 모여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듯 여행은 작고 작은 사연들이 모여 하나의 삶을 만들어 간다.

그러면서 낯섦은 어느새 '일상'으로 바뀐다.

미시즈 패터슨과의 이별을 앞두고 이츠카가 말했던것처럼 이제 만나지 않는다는 것과 이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구별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을 나도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인 두 소녀도 그리고

에쿠니 가오리도 경험했다. 여행은 돌아감이 있다. 시선. 이 소설 속에도 시선과 생각이 겹쳐지고

나뉘어진다. 아이들의 당돌한 가출(아. 가출은 아니다. 편지에 분명 자신들은 가출이 아니라고

밝혔으니, 그런데 가출이다.)을 대하는 어른들의 생각이 흥미롭다. 늘상 가출하는 아이들을 보아 온

경찰은 그냥 대스럽지 않다. 늘 그래왔으니까. 하나 애지중지 키운 딸을 둔 부모의 입장은 도저히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도, 용납하기도 어렵다. 화가나고 걱정도 되고 그야말로 좌불안석이다.

그런가하면 자신들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아이들이 대견스럽고 그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시간이

지금이길 응원하는 부모.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머리의 믿음과 마음의 걱정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나는 여행이 좋다. 처음엔 완벽한 스케줄이 준비되지 않으면 어색하고 불안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계획 없음이 편하고 좋다. 가고 싶으면 가고, 쉬고 싶으면 쉬고,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잔다.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는 오롯이 너만의 시간이다. 딱 두가지, 조용하고 깨끗한 잠자리와 맛있는

커피는 항상 미리 준비한다. 혹시 몰라 차에는 드립을 할 수 있는 도구가 준비되어 있다.

사촌지간인 이 두 소녀의 여행을 보며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보면 나도 나이가 들었음이 느껴진다.

이 책 '집 떠난 뒤 맑음'을 보는 내내 나의 마음은 걱정과 기대로 가득했다. 그런 면에서 에쿠니

가오리는 성공했다.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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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았기에 더욱 빛나는 일본문학 컬렉션 1
히구치 이치요 외 지음, 안영신 외 옮김 / 작가와비평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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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플때 오히려 가볍고 즐거운 이야기를 쓰며 남들을 위해 그럴듯한 봉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다자이 오사무 그는 '인간이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이 나쁜일인가'라고 반문하며 여전히 씨알도

안 먹히는 농담을 던진다. 그의 소설엔 기폭제 혹은 도화선이 되는 단어가 종종 등장한다. 소설

앵두에서는 '눈물의 골짜기'가 그것이다. 아내의 눈물 골짜기가 주는 의미는 복합적이다. 그 눈물

골짜기가 위치한 장소가 바로 '가슴과 가슴 사이'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중의적 표현을 워낙

잘 쓰는 다자이 오사무이기에 그의 글은 항상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마치 '인간실격'이나

'벚나무와 마술피리'에서 처럼 말이다. 눈물 골짜기가 삶에 찌들어서 생긴것인지 남편의 외도로

생긴것인지 아니면 둘다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가슴과 가슴 사이에 존재한다. 만져지지

않는 가슴과 상처뿐인 가슴이 주는 허무함이 글의 전반에 흐르고 둘은 냉냉하다. 그래서 다자이는

집을 나와 술집에 들어가 평소 집에서는 보이지 않던 다정함과 여유로움으로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야겠지'를 말한다. 비싸서 아이들에게는 선뜻 사주지도 못하는 앵두를 먹고는 씨를 뱉기를

거듭하면서. 그리고는 허세를 부리며 '자식보다 부모가 소중하다'를 되뇌인다. 그의 작품은 작품의

화자 이외에 또 다른 화자가 존재하는 독특한 구성을 가져 '뛰어나게 전략적'이라는 평을 듣는데

노부인과 노부인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또다른 화자가 등장하는 '벚나무와 마술피리'가 그렇고

'앵두'에서 등장하는 또다른 인물인 나가 그렇다. 특별히 앵두에서는 엄마니까, 아빠니까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대한 소심한 핑계를 제공한다. '부모가 자식보다 소중하니까'가 아니라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싶다'는 변명과 함께. 그는 약물중독, 자살충동과 자살, 기성 문단과의 갈등 속에 고민하던

작가의 고뇌를 그대로 글로 옮겨 현대의 젊은이들에게 '블로그의 문체' 같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다자이 오사무는 다섯번의 자살 시도 끝에 생을 마감한다. 아사히 신문에서 조사한 '지난

1000년 간 일본 최고의 문인은 누구인가?'라는 설문에서 다자이 오사무는 7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짧은 생에 비해 남긴 족적이 큰 인물이다.

그밖에도 이 책에는 일본 오천엔의 초상화의 주인공이자 문학사에 남을 작품들을 1년 남짓한 사이에

발표해 '기적의 14개월'이라는 별명을 가진 '히구치 이치요', 35년의 짧은 생을 '그저 막연한 불안'을

이유로 스스로 마감해 다이쇼 문학의 종언으로 받아들여지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존재에 대한

회의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실존주의적 문제를 끊임없이 고뇌했던 '나카지마 아쓰시'등, 짧지만

강렬한 삶을 살았던 작가들의 작품이 실려있다. 문학작품은 독자와 만나는 순간 비로소 완성되는

열린 텍스트라는 역자 후기의 첫 문장이 좋다.

이 책 대부분의 작가들은 창작의 혼을 불사르다 20-30대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 이들이다. 천재라는

수식어가 뒤따르던 이들은 놀랍게도 100여년전의 작가들임에도 그 문체나 문장이 전혀 어색하거나

이질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들의 문학세계는 뛰어났다. 그런 이들의 혼이 담긴 작품들을 시공간을

초월하여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더욱 깊은 울림과 감동을 누리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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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 - 죽기로 결심한 의사가 간절히 살리고 싶었던 순간들
정상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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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에게서 흔히 보는 엘리트 집단의 일원이라는 자의식도 없고, 젊은 시절 세상을 바꾸는 활동가를

꿈꿨고, 그 과정에서 좌절도 하고 우울증에 걸려 분노를 저기에게 쏟아 내기도 했으며 의사가 되면

개업을 해서 돈을 많이 볼거리는 생각이 든다는 앵커의 질문에 '저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것

같아요. 이런 활동을 하면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안도감이 저를 만족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거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저자는 아픔과 아픔이 만나면 두배의 아픔이 아니라

거기서 희망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준다.

우울증. '서울대를 나온 사람이 우울할 일이 있냐?'는 친구의 질문이 무색하리만치 그는 심란 우울증을

겪었다. 운명 앞에 좌절했고, 좌절을 스스로를 가두기 시작했으며, 세상을 피해 자기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숨어 버렸다. 이때 그는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공포는 의외로 쉽게 사람에게 다가온다.

부지불식간 간에 찾아와 그대로 손을 잡아 끈다. 이 손을 놀지 못하면 그냥 죽는 것이다. 삶의 의미

조차 없기에 무기력하고 만사가 귀찮았지고 세상을 향해 공격적이 된다. 저자는 그런 우울증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 왔다. 터널은 희망이다. 동굴이 아니라 터널이기에 아무리 길어도 반드시 출구가

나온다. 양양터널이 개통 되었을 때 그 길을 지나며 '죽음'을 생각한 친구가 있다. 다행히 그 터널은

11km가 끝이다. 이렇듯 긴 터널을 지나 그는 새로운 길에 들어 선다. 그의 삶의 변화는 해외구호

활동가가 되면서 시작된다.

서아시아의 최빈곤국인 아르메니아(성경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가 마지막으로 머무른 곳인 아라라트

산이 있는 나라로 1991년 소련의 붕괴 후 독립)에서 에이즈 보다 무섭고 치사율이 높은 '다재내성

결핵'(중요한 항생제에 내성이 생긴 결핵 때문에요 생기는 병으로 한웅큼의 약을 하루 두번 2년을

먹어야 치료가 가능)환자들을 치료했다. 그는 이곳에서 국립결핵병원으로 보낸 환자가 정신병동에

갇혀 있는 것을 보고 '존엄'에 대해 생각했다. 평화롭게 존엄을 지키며 죽을 수 있음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그리고 세상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단단하고 개인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곳을 깨달았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아르메니아에서 만난 어떤 죽음도 자유롭지도 평화롭지도 못하다. 심지어

죽음의 부조리한 민낯은 슬피 우는 것 조차도 허락하지 않는다'

'Ebola is real'. 2014년 '사자의 산'이라는 이름의 시에라리온에 에볼라가 창궐했을때 '국경없는 의사회'가

그곳에서 구호 활동을 한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저자도 그곳에 있었다. '몸에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는

괴질'인 에볼라는 의사들 마저도 접근을 하지 않으려 할 정도로 치사율이 높고(실제 초기 치사율은

90%였다) 내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그곳으로 가려고 하는 의사들도 적은 척박한 시에라리온에

저자는 '내가 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찾지 못하겠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많은

죽음과 마주하고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 보는 시간을 가진다. 그런 그는 '한국인

최초의 에볼라 의사'라는 수식을 받지만 정작 본인은 '시에라리온에 온 700번째 의사'라고 말한다. 둘다

맞는 말이다. 최초이긴 하지만 700번째이기도 하다. 어쩌면 국제구호에 관한 우리의 현주소일수도 있다.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서 죽음을 경험한 그는 이제 죽음이 아닌 '살아냄'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길을

걷는다. 남들이 가지 않고 남들이 걷지 않은 그 길을 먼저 걷는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큰 돈을 벌지

않아도 그의 길은 계속 될것이다. 나는 그의 길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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