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치 - 돈으로 살 수 없는 미래
마크 카니 지음, 이경식 옮김 / 윌북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것의 가격은 알면서도 그 어떤 것의 가치도 알지 못한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경구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 되어 버렸다. 가치관과 가치는 서로 관련이 있지만 뚜렷하게 다른

개념이다. 가치관은 우리 행동의 여러가지 원리나 기준을 드러내며 삶에서 무엇이

소중한지를 판단해준다. 완전성, 공정성, 친절함, 탁월함, 지속가능성, 열정, 이성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에 비해 가치는 간직할만한 소중한 것이다. 어떤것에 내포된 중요성

혹은 효용성이 여기에 해당하며 둘 모두 판단이 전제된 개념이고 문제는 항상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그토록 많은 것을 만들어내고 많은 해법을 찾아내는 시장 시스템을

고정불변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시장은 사회의 발전과 삶에 가장 긴급한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을 찾는데 꼭 필요한 요소다. 그러나 시장은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않고

사회적인 것이어서 이것의 효과성은 국가가 정한 규칙이나 사회의 가치관에 따라서 결정된다.

만약 우리가 시장을 예의 주시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시장은 그 가치관이 좀먹고 만다.

시장이 제대로 잘 작동하도록 사회적 자본을 재구축하는데 집중하고 개인과 기업은 시장

시스템을 위해서 연대감과 책임감을 회복해야 하는데 이는 사회의 가치관에 대한 평가를

새롭게 하고 '초超 가치'를 지향함으로써 번영의 여러 플랫폼을 만들 수 있다.

초가치(metavelue)는 절대적인 가치, 즉 가치 중에서도 바람직한 것이냐 소망스러운 것이냐의

여부에 대해 평가나 논란의 여지가 없이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기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말하며 일부학자들은 이를 '기본 가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치에는 재산, 명예, 지위,

건강 등과 같이 우리가 좋아하며 갖기 바라는 '좋음(the good, 善)'과 정의, 공익, 책임의식

등과 같이 집단 전체에 바람직한 '옳음(the right, 義)'이 있는데 좋음은 주로 개인의 욕구 충족에

관련되어 있어 개인적 가치, 옳음은 도덕적 당위적인 것으로서 공동체 자체와 관련된 집단적

가치를 말한다.

'성공의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하는 능력에 있다'는 핸리 포드의

말처럼 모든 것이 빠르게 바뀌는 파괴적인 시대에 지도자는 멀리 지평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주변부의 관점으로도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며 이를 포용적 자본주의

(inclusive capitalism)라 부른다. 좋은 리더십은 효과적이며 또한 윤리적이어야 한다. 인간의

진정한 진보는 도덕적 진보이기 때문이고 도덕적 진보는 가치관 뿐 아니라 미덕들도 필요로

하며 이들은 상대적인 것들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들이다.

저자는 700여 페이지의 장문을 마치는 마지막 결론에 '겸손함(humility)을 놓았다. 겸손함은

중요하다. 겸손함은 앞서서 이끌고 다스리는 것이며 겸손하다고 해서 어떤 행동을 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는다. 겸손함은 자신이 가진 지식과 성과주의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며,

행운의 역할과 의무를 인정한다. 모든것이 동등함과 공익이 공리주의 보다 우선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저자가 남기는 마지막 말인데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가치 있는 과거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를 죽이는 건 언제나 나였다 - 내 안의 천재를 죽이는 범인(凡人)에 대하여
기타노 유이가 지음, 민혜진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안에는 천재와 수재와 범인이 있다. 이들은 같이 혹은 따로 발현되며 자신을 끌어간다.

자신 안에 공존하는 이들이 공생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내가 가진 능력치를 최고로 끌어 올릴 수 있을까? 저자가 내놓은 답은 '공감'과

'소통'이다. 좀 진부하다. 뭔가 대단한 것을 기대했기에 늘상 들어 온 말을 또 듣는 기분이다.

그런데 그 결이 다르다. 저자가 이야기 하는 공감과 소통의 대상이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사회 속에서 다른 이들과의 소통과 공감이 중요하듯 자신과의 소통과 공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 이 부분은 우리가 그동안 간과하고 있던 어이없는 현실이다.

천재와 수재와 범인은 커뮤니케이션의 축이 다르다. 그들이 사용하는 말의 주어를 보면 확연한

차이를 알 수 있다. 주어를 사람 중심으로 말하는 이가 많은 범인, 조직이나 규칙 등 선악으로

말할 수 있는 수재, 세계나 진리등 초월된 무언가로 말하는 천재. 이와 같이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주어가 그들의 세계관과 의식을 드러낸다. 우리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채 사용하는

말의 주어를 통해 이미 우리는 천재, 수재, 범인의 구분을 완성해가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알라딘'을 통해 이야기하는 '공감력의 함정'은 나 역시도 몇번이고 딜레마에 빠졌던

부분이다. 배가 고파서 빵을 훔친 알라딘, 도주에 성공 한 후 빵을 먹으려는 그의 눈에 들어오는

굶주린 아이들, 그들에게 빵을 나눠주는 알라딘, 여기서부터 이미 알라딘이 빵을 훔쳤다는

사실은 사라지고 불쌍한 아이들에게 빵을 나눠주는 착한 사람이 되어버려 그가 어떤 행동을

하던 관객은 옹호하고 이해하고 관용을 베푼다. 이처럼 공감력은 어느 부분을 보느냐에 따라

전체의 틀을 보는 시각이 바뀌는 것이다. 공감력이 언뜻 뿌리가 깊고 단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언제 뒤집힐지 모르는 돛단배에 불과하다. 소위 예능에서 많이 사용하는 좋은 부분은

잘라내고 나쁜 부분은 부각해서 관객의 흥미와 시선을 끄는 '악마의 편집'이 바로 이런 감성의

축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내가 뭘 잘하는지 모르겠고, 할 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고, 그래서 인생이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이 든다면 그때가 자기 자신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시간이 필요한 때이다. 스스로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남도 이해할 수 있다. 누구보다 열렬히 자신을 믿고 지지하고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여

인생 최고의 '나'를 만나길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 - 이어령의 서원시
이어령 지음 / 성안당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석학의 가르침은 울림이 있다. 가슴 깊은 그 어느곳에서부터 스물스믈 기어나오는 울림은

마음을 정화시키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언젠가부터 그 울림이 없다. 잔잔한 미동 정도만

느껴지고 진한 울림이나 폭포수가 떨어지는 것과 같은 거대한 울림은 기대할 수가 없다.

이 책은 그 울림을 다시 전해준다.

고정관념. 우리의 생각은 늘 틀에 박혀 있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아는 것의 전부이기에

그 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마주한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판단과 결정은 늘

아쉽다. 단단하게 벅혀 버린 관념은 도통 타협과 침범을 허락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과

영혼에 상채기가 남에도 그 칼 끝은 여전히 자신을 향한다. 자신이 그린 빨간 토끼를 향한

어른들의 조롱에 '세상엔 없지만 그림 속에는 있어요'라고 말하는 톨스토이의 발상은

고정관념이 대한 우리의 단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선생은 '고정관념은 상상력의 적'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런 발상이 그로 하여금 세계도시디자인서미트에서 '건축 없는 건축'이라는

명강의를 하게 한 것일수도 있을것 같다. '사고의 자유'는 결국 자신의 영과 육을 건강하게

하고 틀을 바꾸는 함이 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기억한다.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소설, 그리고

영화로. 사실 존 던(John Donne)의 기도서에 나오는 산문임에도 대부분은 헤밍웨이를 먼저

떠올린다. 그가 소설을 다 쓴 다음 거기에 합당한 제목을 찾다 우연히 발견한 이 구절을

발견하고 사용한 것인데 말이다. 이 종은 우리의 생각처럼 축제의 종이나 일상적인 종이

아니라 조종(弔鐘)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종이다. 누군가 죽으면 마을 전체에 알려 함께

슬퍼하는 교회당의 종소리다. 그리고 그 종은 그 누군가를 위한 종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종소리, 즉 내 마음의 조종이다. 누군가 죽는다는 것은 내 대륙 안에 모래가, 흙이 바다로

휩쓸려 떨어져 간다는 의미다. 그래서 선생은 '그의 고통은 나와 무관하지 않고, 그의 생명은

나와 똑같은 샘물에서 흘러온 것이다'라고 말한다.

선생의 발상은 늘 흥미롭다. 문풍지와 한복을 그 활용에 따른 융통성으로 바라보고, 지게의

모습에서 자연과 가술의 조화를 찾아내고, 보자기에서 인간과 도구의 하나됨을 발견하고,

짚으로 만든 달걀꾸러미에서 포장 문화의 원형을 끄집어낸다. 그러면서 우리것에 대한 감흥과

감회를 전하는데 어느덧 나는 그것들과 마주하고 있다.

책의 서문에 이상의 소설 의 마지막 장면이 소개 된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이 글 귀 처럼 선생은 다시 한 번 날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젠 우리 곁에 없다. 아마도 그가 바라던 그 어딘가에서 그가 이땅에서 누리지 못한

그 '자유와 평안'을 가장 사랑하는 이들과 누리고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라이 라마의 마지막 수업 - 내 삶의 방향키를 잃어버렸을 때
달라이 라마 지음, 소피아 스트릴르베 엮음, 임희근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Faites la Revolution'. '변혁을 꾀하다'로 번역되는 이 문장이 먼저 눈에 들어 옵니다. 평생을

변혁을 꿈꾸던 14대 달라이 라마의 강연을 통해 그의 숙원이자 희망이었던 것들과 일생의

숨결을 담은 간곡한 당부를 느낄 수 있다.

달라이 라마(Dalai Lama)는 몽골어로 큰 바다를 뜻하는 '달라이'와 티베트어로 영적인 스승을

뜻하는 '라마'가 합쳐진 말로, '넓은 바다와 같이 넓고 큰 덕의 소유자인 스승'을 뜻한다. 티베트

불교 종파인 겔루크파(황모파)의 수장인 법왕의 호칭으로,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며

티베트의 자치권 확대를 주장하는 정신적 지도자이자 실질적인 통치자를 의미하며 현재는

14대 달라이라마가 통치 중이다. 특이한 것은 달라이 라마는 자신이 입적하기 전에 환생할

장소를 예시하거나 신탁에 의해 환생할 달라이 라마에 대해 예시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 라모

톤둡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지금의 달라이 라마는 두살때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로 인정

받았으며 1940년 제 14대 달라이 라마로 공식 취임했다.

그의 정치적 스펙트럼은 굉장히 넒고 다양하다. 붓다의 제자이면서 프랑스대혁명과 카를

마르크스의 추종자인 그는 해방과 사회정의를 추구하는데 정치적 책임자들이 걸림돌이 될 때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프랑스대혁명은 프랑스 귀족들이 예전에 독점했던 권력과 특권을

차지하려 했다가 사회계급의 첨예한 대치로 발생하였고, 볼세비키혁명은 지나친

프롤레타리아의 착취에 맞선 권리주장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프랑스혁명이든 볼셰비키혁명이든 문화혁명이든 모든 혁명은 유혈사태와 약탈과 공포를

불러왔다. 혁명으로 정치 지도자가 실각하거나 체제가 변화했다고는 해도 인간 정신을 바꿔

놓지는 못했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는 젊은이들에게 평화를 기치로 삼는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조용한 혁명을 제안한다.

이 책은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젊은 친구들로 시작한다. 젊기에 무엇이건 해 볼 수 있고

젊기에 도전할 수 있고 젊기에 더욱 함껏 할 수 있다. 달라이 라마는 젊은이들에게 개인적

자유와 거기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이야기하며 그들이 함께라는 것과 함께 나아가길

청한다. 이 책은 7년전인 2015년에 2001년부터 태어난(세번째 천 년 2001-3000년) 이들

그러니까 당시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글이다. 막상 이렇게 생각해보니 조금은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 - 공감을 넘어선 상상력 '엠퍼시'의 발견
브래디 미카코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저자의 이름을 보았을 때 익숙함이 전해졌다. 그리고 이내 'emphthy'와 라는 책이

떠올랐다. 2019년에 발간된 이 책은 신드롬을 낳기도 했고 많은 학자들에게 'empathy"를

'공감'으로 번역해도 되는지에 대한 논쟁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저자는 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듯 싶다. 이 책의 구석구석에 자신이 생각하는 진짜 'empathy'에 대한

견해가 녹아있다.

아이의 멋진 답변에서 시작된(어쩌면 더 일찍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던) 책의 제목 'To put

yourself in someones shoes'는 'empathy'와 'sympathy'를 분명하게 구분해 준다. 얼핏

비슷하고 의미상 통하는 면이 많아 보이나 분명 둘은 다르다. 먼저 대상이 다르다. 앰퍼시의

대상인 '타인'에는 지정된 조건이나 제한이 없지만 심퍼시의 대상에는 가엾거나 문제가 있는

사람, 지지나 동의를 표할 사상과 이념을 지녔거나 그러한 조직에 속한 사람, 비슷한 의견이나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는 제약이 붙는다. 그래서인지 엠퍼시를 '감정이입, 자기이입'으로

심퍼시를 '동정, 배려, 지지'등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그래서 저자는 엠퍼시를 단순하게

'공감'으로 번역하는 부분에 대해 변화가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계속해서 증명되고, 인식되고, 추궁당하는 것은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비로소 체험한 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양식화 하는 일이

가능하다. 인간의 갖가지 특색과 상이점, 유사점, 다양성은 타인의 승인 혹은 거절을 통해

비로소 뚜렷해진다. '진정한 나', '진정한 누군가'라는 개념에서 해방되는 일. 그것은 소속된

아이덴티티가 하나라는 생각에서 해방되는 일이다. 단 하나여만 하고 하나인 것은 훌륭하다는

믿음에서 벗어날수 있다면 사람은 자기 신발 한 짝에 집착하지 읺고 타인의 신발을 신기 위해

자기 신발을 벗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우리는 아이덴티티의 감옥에 갖힌 구속자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저자는 제임스 스콧(James C Scott. 무정부 주의자에 대한 가장 쉽고 이해하기 좋은 책 'To

cheers for Anarchism'을 쓴 역사학자)이 주장하는 '자립'과 마거릿 대처(Magaret Thatcher,

영국 수상을 지낸 정치가, 철의 여인이라 불리기도 했다)가 말하는 '자조'의 차이를 설명한다.

자기 일은 어떻게든 자기가 알아서 해야만 하는 '자조'와 누구에게도 지배 받지 않는 '자립'은

명백히 다르다. 조금더 들어가서 '자조'를 뜻하는 영어 단어 'self-help'의 의미는 '자신, 혹은

자신과 비슷한 경험과 역경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조직에 가지 않고 필요한 것을 스스로

해결하는 행위'라고 되어 있는데 특이한 것은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역경을 가진

사람들'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BBC의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문장 하나를 소개한다.

'She was sympathetic, but not empathetic(그녀에게 심퍼시는 있었지만, 엠퍼시는 없었다.)'.

이 책은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기'위해 떠난 여행이 '발밑에 담요를 깔고 민주주의 세우기'로

끝이 난다. 사실 이 부분은 조금 고개가 저어진다. 굳이 이렇게까지 멀리 갈 이유가 존재할까

라는 의문과 함께. 인간이 인간을 판단한다는 것부터가 애초에 엉터리다고 말하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것은 '인간은 자주 잘못을 저지른다'는

점이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 본다는 것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역지사지'와도 그 결을 같이 한다. 틈만

나면 잘못을 저지르는 생물이며서 판단을 내리기에도 성급하기에, 가능한 타인에 대해 잘 알고

나서 판단해야 한다. 저자는 이를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To put yourself in someones

shoes)'로 표현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