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행복은 해킹당했다
비벡 와드와.알렉스 솔크에버 지음, 홍유숙.김주현 옮김 / 처음북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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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과유불급'

넘쳐남, 과잉공급과 지식의 분출, 사람다움과 사람냄새는 점점 줄어들고 기계화되고

획일화된 가치관이 주류를 이루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고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행복의 해킹'이라고 정의한다. 손에서 스마트폰이 사라지면 초조해지고 불안해진다.

스마트폰에 문자를 입력하다 사이클하는 무리를 덮칠뻔한 알렉스와 이메일 금단 현상을

겪은 비벡의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편리를 위해 개발하고 발전되어가는 테크놀로지가 어느새 나의 의사 결정권 마저 빼앗아

버렸고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 당하는 수준의 무방비적 노출 상태에 놓였다.

그뿐인가. 인터넷 상의 사진 공유나 추천수에 몰입하고 몇개의 하트를 받느냐고 목적이

되어버린 중독수준의 과몰입 상태는 수단이 목적으로 둔갑하는 어이없는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는 편리함을 넘어서 문명의 이기가 우리의 시간과 관계마저

빼앗아  버렸고 급기야 가족간의 단절을 가져오기도 한다. 며칠전 4 가족의 식사 자리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가족 모두가 각자의 스마트 폰에 집중하며 심지어 식사

시간에도 스마트 폰을 들여다 보며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정말 사람 모두

아니면 안되는 중요한 일이 있었길 바라는 마음과 달리 함께 자리한 분의 '요즘 대부분

저래요'라는 말은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 존재하는 스마트 기기들이 인간의 기본적인 성향과 생각마저도 잠식하고

결국 기계화시켜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정도로 우리의 삶은 테크놀로지에

종속적이다. 삶이 종속적이라는 말은 삶의 질이 떨어진다는 의미이며 조금 과장하면 인간성

말살마저도 염려해야 한다는 말이다. 오죽하면 걸을 때에도 앞은 안보고 스마트 폰만 보며 걷는

스몸비라는 말과 스마트 폰과 일심동체가 되어 한시 몸에서 떼지 않는 신감각인류라는 의미의

스마트포노이드, 휴대폰이 가까이 있지 않으면 불안감을 느낀다는 뜻의 'no+mobile+phobia'

합성한 노모포비아, 디지털기기에 익숙해져 뇌가 현실에 무감각해지거나 무기력해지는 현상을

일컫는 팝콘 브레인등의 신조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는 형편이니 심각성은 말이 필요 없을

지경이다. 여행 내내 셀카와 동영상찍는데 열중하느라 정작 여행에서 자신만 빠져버린

어리석은 놀이에 집중하는 우리 역시 별반 다르지는 않다. 


책을 읽으며 통신사의 ' 다른 세상을 만날 , 잠시 꺼주셔도 좋습니다'라는 카피가

생각 났다. 물론 피는 다른 의도에서 사용 것이지만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가족과

이웃과 사람들을 위해 잠시 전원을 꺼두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에겐

'디지털 다이어트' 혹은 '디지털 디톡스'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테크놀로지의 노예에서

벗어나 자신과 주변에 조금 관심과 애정을 쏟는 사람냄새 나는 세상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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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옥을 살아가는 거야
고바야시 에리코 지음, 한진아 옮김 / 페이퍼타이거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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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죽지 못했다.

이것은 죽지 못한 내가 다시 살아가기까지의 이야기다."

프롤로그의 마지막에 있는 문장이 마음에 걸린다. 죽음이라는 종착역은 쉽사리

여행객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는가 보다. 주변에 많은 이들이 역에 가려고 티켓을

준비했지만 정작 그곳에 자신들이 원하는 그때 도착한 이는 없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그냥 살고 있다. 


책은 저자의 삶과 죽음이 담겨있다. 철저하게 무너지고, 치열하게 버텨내고, 죽을 만큼

살아내는 저자의 인생이 가감없이 민낯을 보인다. 정신장애, 기초생활수급자, 자살미수....

얼핏 보기에도 녹녹히 않은 삶의 파편들이다. 어느것 하나 쉽게 해결될 가능성 마저 존재하지

않는 잿빛 하늘이다. 저자는 이런 현실 앞에 맞서기로 하고 당당해진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 지옥을 살아가는거야'


가난을 경험한 사람은 저자의 마음을 이해할 있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두려워진다.

점심 한잔이 부담스러워지고, 저축은 꿈도 꾸며, 패트병에 음료 하나를 구입

하는것도 망설여진다. 여기저기 지출되어야 할것들을 미루고 미루는 심정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그러다보니 기초생활수급자의 자살율이 전체 자살율보다 월등히 높다.

의미없이 단지 막연하게 살다보니 삶은 고통스럽고 서서히 사회로부터 고립되기 시작하고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적 약자들이 많은 사회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인데 아쉽게도 지금 우리가 그렇다. 


그런 저자가 무려 10년만에 월급이라는 것을 받았을때 기쁨은 이루 말할 없을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울고 싶을 만큼' 감동할 것이다. 저자는 이날 소박한 사치를 부린다. 비록

할인으로 사는 것이지만 회도 사고, 닭다리와 튀김가루도 산다. 튀김옷을 입히고 기름에

튀길때 나는 '차르르' 소리는 행복한 비명일 것이며 참치회 점과 함께하는 시원한 맥주의

넘김은 그야말로 '끝내주는' 조합이다. 그저 평범하게 일하고 평범하게 살아 가고 싶은데

사회적 약자에게는 그마저도 쉽지 않다. 화려한 보석도 값비싼 옷도 필요 없고 단지 하루하루

만족하며 사는 이것이 저자가 꿈꾸는 욕심이다. 아니 어쩌면 대부분의 고바야시들이

꿈꾸는 행복일지도 모르겠다. 


요즘 '소확행'이러는 말이 유행이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의 줄임말인데 뭔가

거창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지만 자신의 삶에서 찾을 있는 작은 것들을 통해 만족하며 인생

자체의 주인이 되어 주도적 삶을 사는 이것이 행복의 출발이다. 어렵다고 힘들다고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해보는 , 그냥 걸어가 보는 , 이것이 인생이다. 그렇게

발씩 내딛다 보면 어느새 조금은 수월해진 다른 지옥을 만나게 될것이지만 이미 거쳐온

길은 처음보다는 훨씬 쉽다. 

저자는 그렇게 세상과 편견과 맞선다. 지옥을 살아내고 있는 그녀의 인생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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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나의 빈센트 - 정여울의 반 고흐 에세이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21세기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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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간절함의 기원은 어디일까?'

스스로도 이해할 없는 열정으로 때론 몰입으로 한차례 격렬한 폭풍이 지나면 찾아오는

탈진을 즐기는것 처럼 우리는 또다시 무언가에 빠지게 된다. 대부분이 그렇다. 한가지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찾는다. 그런데 저자는 조금 달랐다. 한결같다. 한결같이 인물을

갈망하고, 한결같이 인물을 찾고, 한결같이 인물의 길을 걸어 간다. 마치 파랑, 노랑,

빨강의 빛이 만나면 다시 하얀 빛이 되는 처럼 저자의 문학과 여행 그리고 심리학이

만나는 교집합에서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의 편지는 아름다운 문학 작품으로 다가왔고,

그의 그림을 통해  동료와 사람들 심지어 부모에게까지 무시와 배척을 당하고 비난의

대상이었던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심리학적 몸부림을 느꼈고, 오직 '그릴 있는

자유' 찾기 위한 처절한 싸움과 대립은 자신의 영역에 만족하면 결코 보이지 않는

' 너머의 세계' 꿈꾸는 여행이다. 비극적일 정도로 짧은 삶을 그는 Vincent

Van Gogh(1853-1890)이다. 

누군가가 좋아지면 가리지 않는 성격은 저자와 내가 아주 많이 닮았다. 일본손보재팬

건물에 빈센트의 작품 '해바라기' 소장되어 있음을 알고 무작정 여행을 떠나 이른 아침

건물 앞에서 전시관 문이 열리기를 한참을 기다렸으나 하필 날이 휴관일임을 뒤늦게

저자나, 대학 한눈에 반한 그녀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일주일을 같은 시간대에

그곳을 서성였던 나나 오십보 백보다. 이렇듯 정말 좋아하는 무언가는 사람을 그곳으로

이끈다. 저자가 뉴옥현대미술관에서 빈센트의 그림을 펑펑 울었던것 같이 나는

그녀를 다시 그냥 그자리에 멈춰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리움은 그런것이다.

대상이 무엇이든 가슴절이게 그리워하는 앞에서는 자동으로 무장해제가 된다.

그렇게 빈센트를 사랑하게 저자는 그의 작품을 따라 그리기도 하고 색칠도 한다. 마치

내가 다시 그곳에서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약없는 기다림을 시작한것 처럼.


빈센트. 그는 고독한 사람이었다. 동생 테오를 제외하면 제대로 그의 진가를 알아봐주는

이도 없는 평생 타인의 오해, 비판, 멸시, 조롱 속에서 혼자였다. 심지어 가족조차도 등을

돌려 버리는 환경에서 벌이는 사투는 어느덧 그의 영혼을 갈아 먹기 시작한다. 타인의

끊임없는 오해와 싸우는 소모전은 빈센트에게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작품을 남기게 하는

승리를 거두는가 싶었지만 자신의 삶을 남김없이 태워 하나뿐인것, 가장 빈센트적인 무언가를

창조한 그는 정작 텅빈 부스러기가 되어있었다.

책에는 수많은 빈센트의 작품이 나온다. 그럼에도 유독 눈길이 가는 작품은 얼굴 표정을

전혀 보여주지 않고도 슬픔과 절망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영원의 '(1890)이라는 작품이다.

눈에 보이는 얼굴을 그리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보이지 않는 영혼의 얼굴을 그리는 , 얼굴의

눈코입이나 표정이 아닌 그림 자체가 전달하는 분위기나 묘사 하나하나에서 '인물의 슬픔'

자체를 표현한 작품은 전율을 느끼게 한다. 투박하게 색칠 인물의 옷과 주름에서

느껴지는 삶의 굴곡과 아픔이 그렇고, 바랜 벽의 볼품없음으로 느껴지는 인생의 무게가

그렇고, 닳고 닳은 구두에서 느껴지는 하루의 고단함이 그렇고, 얼굴을 감싸쥔 거친 손에서

느껴지는 고된 삶이 그렇고, 모든 것을 덮어주듯 타고 있는 벽난로의 불길이 그렇다. 저자의

표현처럼 작품은 사람의 '마음의 지문' 같은 절망의 속살을 드러낸다.


'아무도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빈센트가 가장 깊은 슬픔을 느낄때 말이다. 고갱과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때 자신의 귀를

잘랐던 것도 '제발 들어줘'라고 절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니

제발 마음의 귀를 열어 말을 들어 달라고. 그리고 그는 그렇게 귀가 잘린 자신의 자화상을

그린다. 고독과 외로움에 정면으로 맞서던 그는 결국 자살을 선택하고 그렇게 죽어 갔고 유일한

지지자였던 동생 테오와 오베르쉬르위아즈의 양지 바른 곳에 나란히 묻혀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눈이 행복했다. 수도 없이 나오는 빈센트의 그림과 해설은 개인전에 초대 받아

작가에게 직접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듣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훌륭한 작품집을 제작한 작가에게

무한한 경의를 표하며 빈센트의 사랑에 대한 마디를 전한다. 

"아름다움이 가져다 주는 행복은, 우리를 단번에 무한으로 이끌어 준다. 마치 사랑에 빠졌을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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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영성 - 내 마음의 주인 찾기
폴 트립 지음, 최요한 옮김 / 두란노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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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영성 글 냄새 2019 / 2019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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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영성

작가
폴 트립
출판
두란노서원
발매
2019.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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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예수님은 고통받는 사람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도와 달라고 할때 절대

롱하거나 비난하지 않으신다. P45

하나님의 후하심을 힘입어 지갑을 열라 p176



', '하는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어쩌면 불가능하다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주님은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죄라고 말씀하시고 주인을

섬길 없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그냥 냉혹한게 아니라 비정하리 만치

냉혹하다. 이러한 현실 앞에 '경외' 통해 만났던 저자의 강력하고 날카로운 메시지가

떠올라 책이 궁금해졌다. 경외의 부제목은 '뒤틀린 삶을 바로잡는 '이다. 제목과 같이

강력한 메세지와 날카로운 말씀을 전하지만 역시 저자는 '결국은 하나님'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물론 이런 결론에 식상할 수도 있지만 이상의 대안은 없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의 메세지는 옳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는 불가능이란 없다.' 

불가능과 없음에 자포자기하는 우리 모두에게 도전하는 저자의 말이다. 우리는 찬양으로

말씀으로 혹은 묵상으로 사실을 분명 알고 있다. 문제는 알기만 한다는 것이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고 믿음이고 아는것이 아니고 그렇게 사는 것이다. 지적충만함이라는 괴이한 병에 걸려 뭔가

유식하고 있어보이는 말을 늘어 놓는게 신앙이 아니라 부족하고 어리숙해도 말씀대로 사는게

신앙이다. 불가능을 가능케하시는 분이 주님이시다. 우리는 여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 대해

자신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특히나 가난이라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조금의 넉넉함이나 생각지 않은 수익이 때론 그런 우리를 병들게 하고 죄의 속성을 실천하게 만든다.

이때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이여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51:10)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다윗은 하나님께 '창조' 요청한다. 새로 만들어

달라고 한다. 우리에게도 '' 대할 이런 기도가 필요하다. 너무 쉽게 넘어지고 너무 쉽게

굴복하는 앞에 당당할 있는 정한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철저히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고백하고 새롭게 창조되기를 소망하는 마음 이것이 영성이다. 저자는 돈을 사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마음의 문제이고, 정체성의 문제이고, 타락한 세상의 문제이고, 예배의 문제라고

정의한다. 불만이 있는 사람은 겸손한지 않고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분에 넘치는 요구를 당연히

여기는 뻔뻔함을 가진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자연스레 창조주를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을 예배하고 섬기게 되는 것이다. 맘몬을 주인으로 섬기며 예배를 빙자한

돈놀이에 열중하고 온갖 악에 빠지고 하나님께 바쳐야 마땅할 사랑과 기도와 예배와 봉사를

그에게 돌리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돈에 관한 영성이다. 


삶은 모순이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완벽하게 사는 사람은 없다. 다만 자신이 변하고 생활이

바뀌는 것이 성경이 추구하는 목표이다. 저자도 말하듯이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일상의 중심에

두고 '사는 '보다 믿는다고 '말하는 ' 훨씬 쉽다. 영생이 주는 자유함을 모르기에

형식적

로나마 그렇게 보이고 싶어 연극을 하는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에 하리라'

말씀처럼 바른 진리를 알게되면 속박과 구속이 아닌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를 모르니

연극을 하는것이다. '' 마찬가지다. 진리 안에 들어 있는 돈의 목적을 바로 안다면 물질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나는 다만 청지기이므로 주인의 목적에 맞게 '선용'하는 것이 내가 해야

일이고 돈에 대한 바른 가치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돈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돈에 대한 영성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나를 ''라는 굴레에서 해방시키셨기에  이상

욕망의 노예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의 자유인으로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개인의 쓰임새'라는

렌즈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낌없는 베푸심'이라는 렌즈로 돈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돈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너그러움을 드러나게 하는 수단이고 넉넉한 공급의

은혜를 만천하에 알리는 대리인이다. 


책을 읽으며 청년들이 생각났다. 이제 경제활동을 시작한 청년들이 읽는다면 맘몬이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바른 그리스도인의 경제관과 돈에 대한 바른 시각이 생겨 맡기신 재물을

주인의 뜻에 맞게 선용하는 충성된 청지기들이 될것 같다. 그래서 책도 권을 동네 서점에서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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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ing Somebody - 배우가 되고 싶다
양성민 지음 / 큐리어스(Qrious)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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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에는 끝이 없다. 아직도 어렵고 새로움을 추구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연기를 60년을 넘게 이순재 선생의 말이다. 연기에 완성은 없고 다만 빈칸을 조금씩

채워가는것이다는 말처럼 연기는 어렵다. 그런데 연기자는 연기를 잘해야 한다. 이것은

어찌보면 숙명이다. 연기자에게 있어서 연기를 못한다는 소리는 치욕이고 수치다. 그런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현장에서 혹은 연습실에서 자기와의

싸움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연기를 한다고 해서 수입이 많은것도 아니다.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곤 시쳇말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수히

많은 이들이 연기판에 뛰어드는 것은 연기할 느끼는 벅찬 감동이나 희열 때문이다.

자신의 몸짓 하나 대사 한마디에 신경을 집중하는 관객들과의 호흡이 그들을 아직

그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다. 


연기는 공동작업이다. 말은 주연배우라서 튀어야 하고 조연이나 단역이라 병풍이나

튀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합을 맞춰 하나를 이루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배우는

인간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직업이기에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매우 중요하다. 시간을

지킨다거나 약속을 끝까지 책임진다거나 하는 작은 것에서부터 연기를 하는 순간 자신

보다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배려이다. 이런 배려를 요즘은 '개념'이라고

부른다.


생각은 말이 되고 말은 행동으로 드러나며 인격은 운명이 된다는 말처럼 항상 준비된

자세가 필요하다. 언제 어떤 배역이 맡겨지더라도 감당할 있는 체력을 기르기 위해

수만보씩을 걷는 하정우나 촬영이 있든 없든 하루에 줄넘기를 천개씩하는 설경구나

체력과 지구력이 연기의 기본이기에 운동을 하루도 없다고 말하는 장혁이 그렇다.

그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혹은 맡겨질 배역을 위해 끊임없이 준비하고 노력한다. 이것이

자기관리다. '먼저 소설가가 되어야만 소설을 있는게 아니라 먼저 무엇을 써야만

소설가가 있다' 말처럼 자신을 준비하지 않으면 결코 기회를 잡을 없고 기회가

오더라도 그것은 이미 내것이 아니다. '백년가게' 처럼 꾸준히 자신의 일을 계속해야 명인이

있는것같이 연기도 꾸준히 연습해야 먹을 있다.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어쩌면 평생이다)이기에 반복과 습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루고 완성하는 것보다 '참고 기다리면서 계속하는 ' 중요하고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한다. 하고 있다'이다. 완성이 없기에 계속 그곳으로 가는 것이다. 어딘가에 도착하는

것보다 그곳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실망과 기대가 반복되는 시간이 길어

질수록 체념의 시간은 빨리 온다. 뭔가 될것 같다는 희망고문으로 스스로를 다독여 보고

최면을 걸어 보지만 이내 한계를 느끼게 되고 많은 이들이 대열에서 떨어져 나간다. 이때

일희일비하지 않고 결과에 상관없이 '하고 있다'라는 마음가지는게 중요한데 이것이 마음을

비우는 길이며 쉽게 지치지 않는 방법이다.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결과가 나올 까지의

모든 상황은 과정이다. 결과를 떠나서 방향이 맞다면 오롯이 과정에 집중할 있고 그럴때

비로소 마음을 비우게 된다. 


책을 덮으며 눈에 들어 오는 구절이 있어 비록 연기는 아니더라도 어떠한 일에든

도전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두려움은 생각만큼 두려운 존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당신은 강인한

사람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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