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북한 사람들 조차 모른다. P79
북한 사역을 할 때 주의 할 점은, 남한 사람들은 섬기고 싶어 하고 북한 사람들은 그것을
잘 받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P170
같은듯 다른 그러나 결국은 같은 그런 나라가 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하나의 민족, 70여년을 다른 체제에서 살아 이제는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극 노년층이거나
점점 그 수가 줄어가는 즈음, '통일'이라는 화두는 정치지도자의 폭주 기관차와 같은 행보로
다시금 화제가 되고 있다. 법과 제도적 통일 이전에 사람의 통일이 더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는
이정미 판사의 말처럼 서로 알아야 하며 서로 관심을 갖아야 하며 서로 친해야 가능한 것이
통일 이기에 '통일 한국'의 최전선에 있는 저자의 글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읽는다.
사랑은 관심이다.
관심은 상대방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이고, 알고 싶어 하는 것이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관심은 행동이다. 어릴적 어떤
목사님께 들은 말인데 수십년이 지나도 잊혀 지지 않는 말이 있다. '사랑하면 지갑이 열린다'.
주선애 교수님도 사랑하기 때문에 수많은 거짓과 기만을 당하시면서도 여전히 지갑을 열고 계시는
것이다. 사랑하기에 가능하며 사랑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통일을 바라보는 경제적, 정치적, 민족적인 관점은 차지하더라도 참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늘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세속적인 계산에 입각한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뜻에 맞게 통일을 바라 보아야 하며 통일 이전과 이후 모두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통일을
이루어 가야 한다. 복음보다 이념을 우상화하고, 복음의 자리에 하나님 대신 다른것을 앉혀 놓고
우선시하던 이분법적 사고에 의한 이념 프레임에 갖혀 이데올로기 논쟁에 빠져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C.S.Lewis가 지적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주의(ism)나 사상을 신봉하게 되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관심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는 말은 거듭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우신 목적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그들을 부르셨고 사용하셨다. 그렇다면 우리의 '통일'은 하나님의 어떤 계획하에
있는 것일까? 하나님 나라와는 무관한 정치적 이념으로만 똘똘 뭉쳤거나 극단적 민족주의의
신봉자이거나 충실한 박애주의의 헌신자라는 이유를 제외하면 과연 우리에게 통일은 왜 필요한가.
아! 한가지 빠졌다. 북한 땅에 무수히 매장된 지하자원과 남한의 우월한(?) 기술력을 결합하여
충분한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어 서로가 윈윈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본주의 경제 이론도 있다.
이러한 것들을 모두 제하고 나면 남는것이 별로 없다. 아쉽게도 '하나님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여전히 우리는 통일을 말한다. 갈길이 너무 멀다. 북한을, 북한 사람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에겐 의지도 노력도 없고 정보도 제한적이지만 통일의 열병에 빠져 있다. 실제로
북한교육현장에서 사용하는 자료의 대부분은 3년 이전의 것들이고 10년이 넘은 자료를 사용하는
경우도 본적이 있다. 하루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 살면서 과거를 붙잡고 있는 기형적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다행히도 우리도 그랬던 시절이 있다. 아무런 준비도, 생각 조차도 없던 그때, 인도로 가고자
했던 언더우드 선교사를 조선으로 인도하시고, 중국 선교에 관심이 있던 토마스 선교사에게 조선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이 땅에 복음을 심었다. 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고
가려 하지 않던 조선을 향한 '섭리'는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섭리가
우리의 통일을 인도할 것이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사55:8)
통일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팀 캘러의 '내가 만든 신'에 보면 '사람의 마음은 우상공장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선하고 좋은 것도 우상으로 만드는 나쁜 죄의 본성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통일'은
분명 좋은 것인데 이를 통해 얻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이 통일의 본질마저 훼손시키고 결국 하나님의
섭리도 잃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 대신 세상의 부와 이익과 권력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 이것이 우상이 된다.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 앞에 감옥이 열리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지만 도망치지 않고 자리를 지킴으로 옆에 있던 죄수와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나의
유익과 세상의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선포되고 회복되던 곳이 하나님 나라이다.
이 나라에는 우상이 없다. 통일도 이것보다 앞서서는 안된다.
책의 내용 중에 '도문교회 십자가와 밤에 넘어 온 할머니'와의 대화는 많은 도전을 준다. 산 너머 두만강
앞 도문교회 십자가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자신의 예배이고 그 예배를 드리기 위해 며칠씩 걸어서
위험천만한 길을 걸어 온다는 할머니의 고백은 너무나도 편하고 안일하게 예배에 임하는 우리의
형식주의와 일수찍기식 예배에 경종을 울린다. 1997년 사천성 인근 마을에서 드렸던 예배가 생각 났다.
그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3일을 걸어온 자매들, 그 예배를 드리려고 일주일의 휴가(사실 돌아가면
자신의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져 직장을 다시 구해야 하는)를 얻어 온 형제, 그 예배를 드리려고
일년을 기다렸다는 부부, 그들과 함께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중국 찬양을 부르는데 당시 가사가
쓰여진 궤도의 종이가 30여장이 넘어가는 긴 곡이었다. 찬양을 인도하던 자매가 은혜를 받으셨는지
重做를 외치셔서 그 긴 곡을 다시 불렀음에도 모두가 눈물 바다가 되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마도
그 할머니도 이랬을 것이다.
진정한 예배는 형식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그 선하심을 맛보는 것이다. 탈북민
에게도, 우리에게도, 북한 땅의 동포들에게도 진정한 예배가 있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예배의 회복'이
아니라 '예배의 시작'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맛보아 알아야 하며 경험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타암(טַעַם)이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체험해서 직접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경험은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키고 믿음을 강하게 한다. 또한 알아야 한다. 초월적 존재에 대해 다 알 수는
없지만 구약성경은 940회나 소개 된 '야다(יָדַע)'라는 단어를 통해 '관계적 앎'을 이야기 한다. 스스로
드러내서 알게 하신 그 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신뢰하는 것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다
'(시34:8)는 구절에서 피한다는 무서워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의 품에 안기는 것을
의미하며 그를 신뢰하며 의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언가를 받아야만 성공한 예배가 아니라 내가 드려지는
그런 예배가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현실에 급급하지 밀고 '꿈 너머 꿈'을 꾸어야 하며 그 꿈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누구나 꿈을 꾸지만 그 꿈을 이루는 이가 적은 이유는 꿈만 꾸기 때문이다. 그 꿈이 현실이 되도록
힘쓰고 애써야 한다. '통일 한국'을 꿈 꾼다면 그 꿈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야하며, 이 땅 가운데
함께 이루는 하나님의 나라를 꿈꾼다면 그 꿈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탈북민이 한국에
오는 것 자체가 통일의 과정이다라고 말하는 태영호 전 북한 공사의 말처럼 혼란과 갈등을 막을 수 있는
완충지대로 탈북민을 '먼저 온 통일'로 이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해야 한다.
이 책은 유독 북한 선교에 관심이 많은 자매에게 선물할 생각이다. 북한을 품게 하셔서 기도하게 하시고
준비하게 하시는 주님 앞에 묵묵히 순종하는 자매에게 큰 도움과 도전이 될 것 같다. 또한 이 책은 통일 된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해야 할 모든 목회자들이 꼭 읽어 봤으면 좋겠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맞닥뜨리는
혼란이 아니라 섭리 가운데 다가오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되는 통일'을 꿈꿔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