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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 - 이어령의 서원시
이어령 지음 / 성안당 / 2022년 3월
평점 :
석학의 가르침은 울림이 있다. 가슴 깊은 그 어느곳에서부터 스물스믈 기어나오는 울림은
마음을 정화시키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언젠가부터 그 울림이 없다. 잔잔한 미동 정도만
느껴지고 진한 울림이나 폭포수가 떨어지는 것과 같은 거대한 울림은 기대할 수가 없다.
이 책은 그 울림을 다시 전해준다.
고정관념. 우리의 생각은 늘 틀에 박혀 있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아는 것의 전부이기에
그 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마주한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판단과 결정은 늘
아쉽다. 단단하게 벅혀 버린 관념은 도통 타협과 침범을 허락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과
영혼에 상채기가 남에도 그 칼 끝은 여전히 자신을 향한다. 자신이 그린 빨간 토끼를 향한
어른들의 조롱에 '세상엔 없지만 그림 속에는 있어요'라고 말하는 톨스토이의 발상은
고정관념이 대한 우리의 단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선생은 '고정관념은 상상력의 적'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런 발상이 그로 하여금 세계도시디자인서미트에서 '건축 없는 건축'이라는
명강의를 하게 한 것일수도 있을것 같다. '사고의 자유'는 결국 자신의 영과 육을 건강하게
하고 틀을 바꾸는 함이 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기억한다.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소설, 그리고
영화로. 사실 존 던(John Donne)의 기도서에 나오는 산문임에도 대부분은 헤밍웨이를 먼저
떠올린다. 그가 소설을 다 쓴 다음 거기에 합당한 제목을 찾다 우연히 발견한 이 구절을
발견하고 사용한 것인데 말이다. 이 종은 우리의 생각처럼 축제의 종이나 일상적인 종이
아니라 조종(弔鐘)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종이다. 누군가 죽으면 마을 전체에 알려 함께
슬퍼하는 교회당의 종소리다. 그리고 그 종은 그 누군가를 위한 종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종소리, 즉 내 마음의 조종이다. 누군가 죽는다는 것은 내 대륙 안에 모래가, 흙이 바다로
휩쓸려 떨어져 간다는 의미다. 그래서 선생은 '그의 고통은 나와 무관하지 않고, 그의 생명은
나와 똑같은 샘물에서 흘러온 것이다'라고 말한다.
선생의 발상은 늘 흥미롭다. 문풍지와 한복을 그 활용에 따른 융통성으로 바라보고, 지게의
모습에서 자연과 가술의 조화를 찾아내고, 보자기에서 인간과 도구의 하나됨을 발견하고,
짚으로 만든 달걀꾸러미에서 포장 문화의 원형을 끄집어낸다. 그러면서 우리것에 대한 감흥과
감회를 전하는데 어느덧 나는 그것들과 마주하고 있다.
책의 서문에 이상의 소설 의 마지막 장면이 소개 된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이 글 귀 처럼 선생은 다시 한 번 날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젠 우리 곁에 없다. 아마도 그가 바라던 그 어딘가에서 그가 이땅에서 누리지 못한
그 '자유와 평안'을 가장 사랑하는 이들과 누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