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생활 거룩 - 신앙의 공회전을 멈추고 거룩으로
강정훈 지음 / 두란노 / 2019년 8월
평점 :
기독교인이란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열쇠 구멍이다. P47
생활거룩으로 살아야 한다. P171
성화는 성품으로 시작하여 일상생활에서 드러나야 하고 성화가 드러나야 할 영역은 성격과
일상생활이다. 우리 성격이 십자가에서 계속 수술 받지 않고 입으로만, 교리로만 성화를 말하는 것
은 A. 토저의 말을 빌린다면 '종교적 소꿉 놀이'에 불과하며 유치하게 짝이 없는 행동들이다.
'이미'와 '아직'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믿었기에 '이미'에 속하는 구원과 믿음 이후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아직'에
속하는 구원. 솔직하게 말한다면 '아직'이 아닌 희망사항에 불과 할 수도 있다. 믿기를 고백했기에
더 덧붙일 것이 없어야 하는 우리에게 구원을 볼모로 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제약과 제한들을 너무 많고
이는 개교회의 전반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성경 어디에 찾아봐도 구원의 다른 조건과 이유가
존재하지 않고 다른 이름 역시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면(믿으면) 된다.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에 대해 말한다. 애굽과 가나안 사이, 홍해와 요단강 사이로
통칭되는 간극에 '구원 이후'가 존재 한다. 신분 만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회심과 바로서기를 통한 '제대로 된 삶' 즉 '성화의 삶'이 그것이다.
처음 책을 받으며 기대했다. 내가 익히 아는 분의 책이기에 그의 촌철살인과 같은 직언과 폭풍과도
같은 과감함과 무딘 심장을 쪼개고 들어오는 강력한 드릴과 같은 묵직한 울림을 알기에 더더욱
그랬다. '교회학교 이대로는 미래가 없다'와 '신수성가'를 이은 이 책 '생활 거룩' 제목부터
도전적이다. 그런 기대감과 들뜸으로 첫 장을 열었다.
예상했지만 프롤로그부터 독설(아니 이건 째찍이고 바른 소리다)이 여기저기서 튀어 나온다. 복음의
순수성과 교회의 거룩성을 맞바꾼 현재의 결과를 말하는 '불편한 진실'이 그렇고, 고신대 박영돈
교수의 '많은 이들을 구원하는데는 성공했지만 거룩하게 하는데는 실패했다'는 말이 그렇고, '오직
믿음이 아닌 오직 말뿐'이라는 구호가 그렇고, 교회 교패는 많은데 신패(信牌)는 없다는 말이 그렇고,
박영선 목사의 '세상 사람들에게 쪽 팔린다'는 말이 그렇다. 여기에 존 파이퍼(John Piper) 목사의
선언은 결정적이다. '삶 속에서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다'. 입만 거룩한 우리는
이 말에 충격도 받아야 하고 무릎도 꿇어 져야 한다.
지금 우리는 개혁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에서 '칭의'에 몰입한
나머지 칭의만능주의를 살고 있다.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된다는 은총의 교리이다. 여기에는 다른 어떤 것도 첨가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필요하다. 그런데 '칭의만능주의'에 빠지다 보니 칭의의 본질인 '죄인되었던 우리'를 잊어
버리고 자신이 정말 의인인양 착각을 한다. 더불어 이 착각은 타인을 향한 정죄의 무기가 되어 전가의
보도인양 마음대로 휘둘러 여기저기서 상처 받고 고통받는 이가 속출하고 결국 교회(믿음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를 떠나고 만다. 매일매일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를 쳐서 복종케 하는
회개의 진심으로 나아가야 성화에 가까워 지는데 회개는 없이 죄에 대해, 거짓에 대해, 가짜에 대해
스스로 타협을 해 버린다. 마치 중세교회의 그들처럼. 그래서 존 칼뱅(John Calvin)은 이렇게 선언한다.
'성화 없이는 칭의도 없다.' 물론 성화는 칭의의 열매로 반드시 나타나지만 성화가 칭의의 어떠한
근거나 조건이 될수는 없다.
성공회 대주교인 헤르스 코트 박사는 구원을 셋으로 나눈다. 이미 받았고 이미 완성된 영혼 구원인 과
거형 구원(I was saved), 지금 받고 있거나 혹은 받아 가고 있는 현재형 구원(I am being saved),
미래에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미래형 구원(I will be saved)이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현재형 구원'이다. 현재형 구원은 지금 이순간 이루어져가는 구원으로 삶에서 , 생활에서,
인격에서, 성품에서 이루어 내야 할 미완성의 구원이다. 사도 바울의 이에 대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빌립보 교인들과 지금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다.
저자는 현재 한국교회의 심각성을 이야기하며 지식에만 집중되는 성경공부와 온갖 미신적 요소를
가진 주문을 외는 듯한 기도를 예로 든다. 실제로 각 교회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살펴 보면 교재
수준이 신학대학 수업 수준이거나 심한 경우 이를 뛰어 넘기도 한다. 여기에서 문제 중 하나가
발생한다. 그 성경공부 인도자(대부분 목회자 1인)가 그 내용을 충분히 그리고 정확하게
숙지하였느냐이다. 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교수들도 각각의 전공 분야가 있어서 자기 분야만
가르치는데 개교회 목회자가 무슨 만물박사도 아니고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고대근동문화,
고대역사, 지리, 거기다 각 문장의 해석에다 요즘에는 상담이나 심리학까지 등장하다 보니 어느것
하나 제대로일 수가 없고 부실 할 수 밖에 없다. 가르치는 이가 부실하니 배우는 이 역시 부실하기
마련인데 평생 들어서 그런지 이런 저런 풍월은 많아 잘난척도 잘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말씀을 배우는 목적은 말씀을 제대로 배워서 그 말씀 대로 사는 것인데 제대로 배우지 못하니
제대로 살 수도 없다. 제대로 살아야 영향력도 미치고 방주도 될텐데 여전히 우리는 교회다니는
사람이니 '생활 거룩'은 요원하다. 지식으로만 성장하고 연륜만 늘어가는 현대판 바리새인이 되어
가는 현실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기도다. 샤머니즘과 유교적 사상이 토대이기에 우리의 기도에 무속의식이 잠재해
있는것도 문제지만 기도의 본질에 대한 오해 역시 무시 못할 부분이다. 하나님은 '자판기'가 아니다.
자판기에 일정한 돈을 넣으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처럼 기도를 이만큼 했으니까, 봉사를 이정도하니까,
헌금을 예배를 이렇게 하니까라는 이유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려는 잘못된 생각이 우리의 기도를
하늘나라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게 만든다. 주님의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은 그냥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고 암송을 하라는 1차원적 요청이 아니라 '그렇게 살라'는 강한 명령이다. 그렇게
기도하면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이것이 안되니 '생활 거룩' 이 될 수가 없다.
세상 사람들의 기독교 혹은 크리스천에 대한 기준은 명확하다. '남과 다르다'는 것이다. 지금 교회가
욕을 먹고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것은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이다. 같이 살아 보니 세상 사람이나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기에 그들의 기대는 점점 교회로부터 멀어 진다.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신 그 '거룩'이 무게 잡고 어깨 힘주고 엄숙한 척 하는것이 아니라
'세상과 구별 된 생각, 행동, 삶으로 살아내는 것'인데 그 거룩을 말로는 찬양으로는 쉴새 없이 부르지만
정작 중요한 '교회밖 거룩'은 찾아 보기 어렵다. 저자는 이를 '신앙의 공회전'이라고 부른다. 이런
공회전은 연료만 낭비 할 뿐이다. 우리는 이런 공회전과 같은 게토(getto) 신앙에서 벗어나 '생활 신앙'을
살아야 한다. 교회 안 자기들 만의 거룩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제대로 살아 내는 '생활 거룩'을
살아야 한다.
저자는 인생 1막 밧단아람과 가나안에서의 130년과 인생 2막 애굽에서의 17년을 산 이름마저도 '발꿈치를
잡는 자'이자 희대의 사기꾼인 야곱의 등장시켜 그의 삶을 통해 개입하시는 하나님과 더디지만 성화의
길을 조금씩 이루어 가는 우리네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요즘 같이 빨리빨리를 외치는 시대면 속터져
죽을 만큼 더디지만 탄탄하게 다지며 그 길을 걸어 나간다. 때론 흔들리기도 하고, 때론 넘어지기도
하지만 어느새 그는 부쩍 앞으로 나가 있다. 키에르케고르가 '이제. 하나님의 도움으로 나는 나 자신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것처럼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이름을 밝힘으로써 에서라는 마음의 가면을 벗고
오롯이 야곱으로서의 삶을 산다. 결정권을 내려 놓고 바라보며 지켜보는 입장에서 자신을 성찰하며
더 깊게 하나님께 들어 간다. 야곱의 더 이상 에서 행세를 하지 않고 야곱으로 살때 비로서 성화가
시작된다.
우리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 안에 가진 '그것(혹은 우상)을 내려 놓아야 제대로 된 성화가 시작된다.
하나님 보다 앞서 있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그게 우리의 '에서'이다. 성화 없는 열심은 광신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성화 없는 우리의 신앙은 브레이크가 파열된 폭주 기관차와 같다. '기독교인이란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열쇠 구멍이다'는 최초의 미국인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이 더욱
절실해 진다.
이 책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책이다. 초신자는 초신자대로, 오래 믿은 사람은 오래 믿은 사람대로, 사역자는
사역자 대로 각각 자신에 상황에 맞춰서 읽는 다면 분명 도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