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읽어야 할 손자병법 - 처세의 어려움을 알 때면 손자병법이 들린다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읽어야 할 시리즈
손무 지음, 박훈 옮김 / 탐나는책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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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려울때 도움이 되는 자를 친구라 한다면 불확실성의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

많은 지혜와 도움을 주는 손자병법은 분명 친구이다. 학교 다니면서 리포트를

써야 하기에 억지로 대충 읽어보고 한참이 지나서야 만화로 것을 너무 재미있게

읽고 정독을 하게 되었던 책을 이렇게 다시 해설과 같이 읽게 되니 사뭇

감회가 새롭다.


특별히 제11 구지편(九地篇) 예전부터 눈이 갔고 흥미를 느꼈던 부분이다.

전장을 아홉종류로 분류하여 지역의 특성과 그에 따른 적절한 작전 변화의 원칙을

논하는 부분인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적진을 주도 면밀하게 살피는

정탐에서부터 우군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전략과 적절하게 운영하는 용병술까지

전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전투에 나가 싸움을 하는것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그전에 먼저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능한 군대라

하더라도 필기는  당연한 수순이다. 이렇듯 확실한 분류를 통해 적의 약점을 이끌어

내고,주도권을 쟁취하며, 빈틈을 찌르고, 빠르게 출격하는것이 구지의 목적이다. 이는

유리하면 움직이고, 불리하면 멈춰 기다리라는 명언과도 연결된다. 정확하게 정세가

분석 되었기에 멈출때와 나아갈 때가 분명해지고 이를 토대로 우군의 승리를 쟁취할

있다라는 점에서 일단 덤벼보하는, 일단 해보라는 등의 조금은 억지스러움이 강조되는

요즘의 세태를 돌아보게 하는 좋은 대목이기도 하다. 또한 머리를 치면 꼬리가 달려들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달려들며 허리를 치면 꼬리와 머리가 한꺼번에 달려든다는

상산의 뱀인 솔연(率然) 예로 드는 용병술은 자기 살기 바빠 배신을 먹듯이 하며

출세하기에 바빠 권모와 술수만 난무하는 세태에 좋은 용병술의 결과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것이다. 자기를 위해 목숨을 거는군요 아니고 자신의 장수를 위해

목숨을 있는데 부하를 그는 분명 훌륭한 장수이며 지도자이다. 


장마다 드러나는 번뜩이는 계책과 머리씀에 다시한번 감탄을 하며 장수 혹은 지도자가

갖추어야 다섯이나 덕목을 소개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將者智信仁勇嚴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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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 이덕무 청언소품
정민 지음 / 열림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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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지금 여기' 있으면서 마음은 자꾸만 '그때 거기' 향할 때가 많다. 

우리네 마음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과거에 집착하고

과거에 얽매이고 과거를 탐닉하며 계속 그곳에 머물기를 원하는 마음을

아마도 대부분 동의 것이다. 

바쁨과 빠름의 세상을 살면서 우리에게 과거는 어쩌면 기억하고 싶은 신기루

일수도 있다. 머나먼 그곳에 그것이 있기에 희망을 가져보기도 기쁨을 느껴보기도

하는게 아닐까. 책을 읽는 내내 "숨통을 터준다" 저자의 서문처럼 조선후기

문인인 이덕무의 식견과 지식의 깊이에 감탄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비록 중국 고서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문장이고 어법과 어투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말이 좋다. 대학 교양과목, 그것도 학점을 얻기위해 형식적으로

참여했던 대학국어 수업 유독 이말은 기억에 남았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무언가에 미쳐 본적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미친듯이 사랑하고, 미친듯이 놀아보고,

미친듯이 일하고, 미친듯이 다녀보고....그러고 싶었는데 어느새 나이가 들어 이제는

그것들이 그저 부러워 보일 뿐이다. 나이는 허울일 뿐이라고 하지만 무언가에 

미치기에는 걸리는것이 너무 많고 포기해야 할것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무언가에 미쳐보고 싶다. 마치 이덕무가 추운 겨울 홑이불만 덮고 자다가 '논어'

병풍삼고 '한서' 물고기 비늘처럼 잇대어 덮고서야 겨우 죽음을 면할 있는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책을 삼아 살며 여전히 책을 읽고 싶고 얻고

싶어하는 열망을 가졌던 처럼 나도 무언가에 미쳐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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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 이덕무 청언소품
정민 지음 / 열림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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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지금 여기' 있으면서 마음은 자꾸만 '그때 거기' 향할 때가 많다. 

우리네 마음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과거에 집착하고

과거에 얽매이고 과거를 탐닉하며 계속 그곳에 머물기를 원하는 마음을

아마도 대부분 동의 것이다. 

바쁨과 빠름의 세상을 살면서 우리에게 과거는 어쩌면 기억하고 싶은 신기루

일수도 있다. 머나먼 그곳에 그것이 있기에 희망을 가져보기도 기쁨을 느껴보기도

하는게 아닐까. 책을 읽는 내내 "숨통을 터준다" 저자의 서문처럼 조선후기

문인인 이덕무의 식견과 지식의 깊이에 감탄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비록 중국 고서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문장이고 어법과 어투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말이 좋다. 대학 교양과목, 그것도 학점을 얻기위해 형식적으로

참여했던 대학국어 수업 유독 이말은 기억에 남았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무언가에 미쳐 본적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미친듯이 사랑하고, 미친듯이 놀아보고,

미친듯이 일하고, 미친듯이 다녀보고....그러고 싶었는데 어느새 나이가 들어 이제는

그것들이 그저 부러워 보일 뿐이다. 나이는 허울일 뿐이라고 하지만 무언가에 

미치기에는 걸리는것이 너무 많고 포기해야 할것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무언가에 미쳐보고 싶다. 마치 이덕무가 추운 겨울 홑이불만 덮고 자다가 '논어'

병풍삼고 '한서' 물고기 비늘처럼 잇대어 덮고서야 겨우 죽음을 면할 있는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책을 삼아 살며 여전히 책을 읽고 싶고 얻고

싶어하는 열망을 가졌던 처럼 나도 무언가에 미쳐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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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당신을 위한 갈라디아서
팀 켈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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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질된 세상의 신앙을 향한 바울의 외침은 당당하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한마디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수없이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쓰러져 갔다.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포기하지도 않았다. 당당히 그러면서도 담대히 

주님이 걸었던 뒤를 따라 걸었다. 여기에는 두려움이나 좌절이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미 이겨 놓으신 길을 따라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결코 우리에게 

새로운 길과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지 않으신다. 이미 그분이 걸어 가신 길과 이루어 

놓으신 길을 묵묵히 따라오길 원하신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의 외침은 이것에 충실하다. '다른 복음은 아예 복음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변질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회심을 요구한다. 그들이 처음 가졌던 복음이

부끄럽지 않다면 복음을 지키는 역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궤도를 일탈한 기차가 

죽음이 공포를 가져오듯이 영적 궤도를 이탈한 그리스도인은 본인 뿐만 아니라 주변을

변질시키고 위험에 빠뜨린다. 복음이 하등하고 저차원적이라고 생각해서 인지 무언가

고차원적인 것을 추구하며 뭔가 다른 것들을 동원해 복음의 본질을 변질시키려는

시도가 요즘 강단에서 많이 보여진다. 복음을 풍성하게 만들고 교인들의 니드를

충족시킨다는 허울 좋은 괴변을 늘어 높지만 실상 복음에 자신없어서이다. 복음이

전부라면 그것으로 승부해야한다. 복음이 삶이라면 그것으로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전부가 아니고 삶이 아니기에 자꾸 뭔가 부족하다고 여긴다. 주님의 말씀을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복음 이외의 것을 선포하지 않는다. 오직 복음만을 선포한다. 왜냐하면 복음이

능력이고 복음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바울의 복음은 정말 명확하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그분이 계획하여 부르시고 그분이 실행하여

이루시기에 영광도 마땅히 영원히 그분의 것이다."

이러한 당당함이 바울을 바울되게 한다. 


변질되고 오염되어 본래의 색깔 마저도 잃어버린채 살고 있는 이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컬러는 바울의 갈라디아서를 통해 도전한다.

"다른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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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오리진의 회복 - 처음이 좋았더라
도은미 지음 / 두란노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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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ship이나 Rule over 의미가 아닌 섬기고 경영하다의 의미를 가진 '아브다'

의미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신 마음을 이해할 있다. 보상적 의무관계가

아닌 오른손이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무상적 관계언어' 아보다는 지배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씨줄과 날줄이 아닌 순수한 섬김의 언어이고 지극히 철저히 ''

위한 서비스를 의미하는 생활언어이다. 권력적 우위가 아닌 철저한 섬김으로

높은자가 낮은자를 가진다고 가진자를 강한자가 약한자를 섬기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피조물인 우리를 향하여 끊임없이 섬기고 섬기시고 마침내 인간을

'God like'하게 하시려고 죽으시기까지 섬기시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아보다는

'예배하다'라고 해석 되기도 한다. 유대교의 회당인 시나고그에 가보면, 앞에

'아보다'라고 있는데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긴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오직 하나님 분이시고 하나님이 모든 삶의 중심에 계신다면 우리의 삶의 호흡은

예배 섬김의 연속 이어야 할것이다.

특별히 '하나님과 가족이 되는 라다' 챕터에 등장하는 도박에 빠져 있는 남편을

권사님과의 대화는 망치로 머리를 한대 얻어 맞는것 같은 충격을 주었다. 몇년째

도박에 빠져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집안에 있는 돈은 다가져가고 급기야 하나

남은 마저 팔아서 달라고 하는 남편과 이혼을 생각하고 찾아온 권사님과의

대화에서 오히려 남편을, 아버지를 위해 무엇을 해주었느냐라는 질문은 상식을

뛰어 넘는다. 우리의 일반적 상식으로는 그런 남편과는 당장 헤어지라고 말하는게

정상일텐데 하나님의 방법으로 접근하니 전혀 다른 행동들이 나오고 행동들로

인해 남편이 스스로 인정하고 회복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도박에 빠져있는

남편에게 집이라도 팔아서 도박 자금을 마련해주려고 하는 아내, 아버지의 도박자금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아이들. 어쩌면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라다

내려오심이 아닐까한다. 라다는 내려오는 자의 가슴 안에 긍휼을 품었음을 의미하며

기쁨을 이기지 못함을 결과이며 아무 이유가 없지만 스스로 의미를 찾고 부여하여

기꺼이 내려와 값을 치르는 자율적 행위가 라다이다. 라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너희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신다. 

아브다와 라자의 영성으로 가족과 공동체를 대하기를 이제라도 시작한다면 많은

공동체들이 바로서고 많은 가정들이 회복되는 기적같은 역사가 이뤄질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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