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배수아 옮김 / 한겨레출판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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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이라는 운명


창작은 고독을 필요로한다. 세상의 밖에서 홀로 있을 때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기 때문일 테다. 그래서 탁월한 예술가 중에는 고독한 삶을 자처하여 불행하게 생을 마감한 이들이 많다. 그들이 고독에서 불행을 감내하며 절망에서 길어 올린 빛 같은 작품이 우리에겐 감동과 위안을 준다. 그러므로 창작에 몰두한 순간,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세계를 열었던 순간만이라도 그들 창작자에게 지극한 행복과 위안이 있었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 에밀리 디킨슨이 적은 것처럼 ‘영혼의 창조자’들에게 고독은 잴 수 없는 어둠일테지만 무언가를 밝히는 빛의 씨앗 또한 품고 있기를.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그 크기는 그 파멸의 무덤에 들어가서 재는 대로

추측할 뿐-

(…)

이야말로 내가 두려워하는-고독-

영혼의 창조자

고독의 동굴, 고독의 회랑은

밝고도-캄캄하다-

_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에밀리 디킨슨



고독 속으로 한없이 걸어 들어가 세상을 산책한 작가가 한 명 있다. 바로 로베르트 발저(1878~1956)다. 1878년 스위스에서 태어나 가난 탓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오랫동안 하인, 사무보조, 사서, 은행사무원, 공장노동자 등의 직업을 전전했던 그는 원래 배우가 되길 꿈꿨다고 한다. 하지만 그 꿈은 좌절되었고 틈틈이 글을 써 신문과 잡지에 발표해 작가로 문인 사회에 입문했지만 지성인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고 한다. 당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면서 궁핍한 생활에 시달렸고 자살 시도에 실패하자 1929년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1933년에는 절필을 선언하고 걷기와 도보 여행, 종이봉투 붙이기 외의 활동은 하지 않으며 여생을 보냈다.



그가 쓴 에세이가 묶여 있는 <산책자>(배수아 옮김, 한겨레출판)에는 내내 걸어 다녔다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집을 보러 다니고, 정처 없이 걸었던 그는 우연히 발견한 하찮고 사소한 것들과 자연이 내어주는 풍경에 무한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였다. 그는 일과 성취, 겉치레에 몰두하는 사람들과 달리 남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자신으로 존재하길 바랐다. 그런 비범한 시선에만 발견될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책 속에 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에게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으면서 존재 그대로의 자연스러움 만을 읊조렸다. 그러기 위해 스스로 고독 속으로,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가 작은 존재가 되었다.





◊◊





고독의 두 얼굴


“클라이스트는 높은 교회 담장 위에 앉아 있다. 대기 중에는 습기가 가득하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후텁지근하다. 그는 셔츠 단추를 열어서 가슴을 드러낸다. 노랗고 불그스름하게 반짝이는 호수가 막강한 신의 손에 의해 심연으로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저 아래쪽에 놓여 있다. 밑바닥에서부터 용솟음쳐 올라오는 광채로 호수 전체가 뜨겁게 이글거린다. 호수는 활활 불타고 있다. 알프스의 산들이 살아나 환상의 동작으로 이마를 물속에 담근다.”

_196쪽 '툰의 클라이스트'



이 책에 실린 산문 ‘툰의 클라이스트’에는 클라이스트(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19세기 독일의 극작가이자 소설가)라는 작가가 자신과 글쓰기에 절망하며 느끼는 깊은 고통이 주변의 눈부신 풍광과 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담겨 있다. 천상의 것인 듯 황홀하리 만치 아름다운 풍경처럼 그의 가없는 고통과 슬픔도 이 세계에 속한 게 아닌 듯하다.



“그는 고통스러울 만큼 행복하다. 너무도 행복하여 숨이 막힐 듯이, 바싹 말라버릴 듯이 고통스럽다. 그렇게 외롭다. 죽은 자들이 살아나 이 고독한 남자와 반시간 정도만 대화를 나눠준다면 좋을 텐데. 여름밤에는 연인이 있어야 한다. 하얗게 빛나는 젖가슴과 입술을 생각하며 클라이스트는 서둘러 언덕을 내려온다. 호숫가로 달려가 그대로 물속으로 돌진한다. 옷을 입은 채로, 큰 소리로 웃으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_197쪽 '툰의 클라이스트'



그는 아름다운 경치에서 어떤 목소리가 자신에게 오기를 기대하며 스스로를 철저한 고독 속에 남겨둔다. 그리고 쓰고 또 쓰기만이 있는 날들. 하지만 “클라이스트는 원고를 한 편, 두 편, 세 편의 원고를 찢어버린다.” “더 새로운 것, 더 격렬한 것, 더 아름다운 것”, 최고의 걸작을 원하기에 절망만 깊어 간다. 오로지 글쓰기에 매달려 ‘시인의 불운’에 전 생애를 온전히 내맡기고 만, 예술을 향한 지고지순한 열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클라이스트의 삶을 발저는 마치 자신의 것 인양 적어 내려간다. 툰에서 양조 주식회사 직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 발저는 그곳의 아름다움에 대해, 고독한 작가의 운명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리라.



발저 또한 그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카프카와 헤세가 칭송한 글을 썼지만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돈을 벌 수 없어 여러 일자리를 전전긍긍해야 했다.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던 그는 거처와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정신병원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고 이 책에 실린 산문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쓰인 문구처럼 산책을 나섰다 눈 오는 길에 쓰러져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떠났다. 빼어난 묘사와 놀라운 발견으로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주는 그의 글이 살아생전에는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가난과 절망으로 그를 밀어 넣었다는 사실이 쓸쓸하고 가슴 아프게 전해온다.



그러니 ‘툰의 클라이스트’가 품고 있는 미묘한 뉘앙스를 뭐라고 적어야 할까. 슬프도록 아름답다고 해야 할까, 예술가의 절망에 아름다움마저 옅어졌다고 해야 할까. 스스로 고통을 자처하는 이들의 숭고한 삶에 대해 우리는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다. 후에 클라이스트가 살았던 집 앞에는 그가 글을 썼던 곳이라고 알리는 현판이 걸렸고 무수한 사람들이 지나며 무심히 그걸 읽는다. 클라이스트가 그곳에서 보낸 절망의 시간과 현판의 가벼움 사이의 간극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것이라 더 막막해진다. 그러니 무상하고 헛되다고, 쓸쓸히 읊조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헛된 열정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은 그렇게 여겨져도 되는 걸까.



“아마도 어느 정도 몸이 피로했기 때문인지 나는 한 아름다운 소녀를 생각했고, 이 세상에서 내가 얼마나 홀로인지, 그리고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인지를 생각했다. 스스로에 대한 책망이 뒤에서 나를 밀었고 내 앞길을 막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나쁜 기억을 물리쳐야만 했다.”

_374쪽 '산책'



책에 실린 발저의 또 다른 에세이 ‘산책’의 말미에는 여름 비가 내리는 오리나무 숲에서 혼자임을 뼈저리게 느끼며 손에 쥐고 있던 꽃다발을 놓아버리는 그 자신의 쓸쓸한 초상이 그려진다. 이 모습은 외로움에 떨며 호숫가로 돌진하며 웃는 동시에 울고 있는 클라이스트와 정확하게 쌍을 이룬다. 클라이스트는 별다른 소득 없이 병을 얻어 결국 그를 데리러 온 누이의 손에 이끌려 툰을 떠났다. 발저는 정신 병원에서 절필을 선언하고 모두에게 잊힌 채 죽음을 맞았다.



웃으면서 눈물 흘리게 하는 것이 고독의 양면성이다. 고독의 입구에는 한정된 시간 동안 맛볼 수 있는 희열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끝에는 분명 잴 수 없는 깊이의 어둠에 잠긴 동굴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이다. 한 번 사로잡히면 나올 길도 알 수 없는, 절망과 파멸로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낭떠러지가 있다. 그런데도 고독의 끝으로 홀린 듯 걸어 들어간 작가와 예술가들이 있다. 문학과 예술에 대한 굽힐 줄 모르는 열정으로 고립을 자처하고 절망을 자신의 옷으로 택했던 이들. 그것을 한없는 사랑이라고 읽을 수밖에 없다. 무엇이 그들에게 그런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걸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독의 낭떠러지 앞에서 막막해질수록 그 사랑에 화답하고 싶어 진다.





◊◊◊





온전한 내가 되기 위한 산책


발저에게 유일한 기쁨은 산책이었다. 그의 산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산책과 달랐다. 그것은 생활의 전부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해가 뜨면 집을 나서 해가 질 때까지 정처 없이 걸었던 그는 다른 이들이 잠을 잘 때 글을 썼다. “성실하고 헌신적으로 자신을 지우고 대상에 몰입하여 자신을 잃는 행위, 모든 사물과 현상에 품는 열렬한 애정은 마치 의무를 완벽하게 의식하고 수행하는 일이 내면의 큰 기쁨이자 충만함인 것처럼 그렇게 큰 행복감을 산책자에게 안”겼다고 그는 산책을 예찬하고 그 효용성을 대변했다. 걷는 동안 그에게는 무수한 생각이 떠올랐고 갖가지 아름답고 미묘한 사색이 따라붙었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에 몰입하고 교감하는 사이 진정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산책은 그의 내면으로 닿는 여정이었다. (발저에게 산책의 의미는 이 책에 실린 ‘산책’에 완벽하게 적혀 있다.)



“나는 하나의 내면이 되었으며, 그렇게 내면을 산책했다. 모든 외부는 꿈이 되었고 지금까지 내가 이해했던 것들은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표면에서 떨어져 나와 지금 이 순간 내가 선함으로 인식하는 환상의 심연으로 추락했다. 우리가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이해하고 사랑한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라 어떤 다른 존재였으며,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진정으로 나 자신이었다. 감미로운 사랑의 빛 속에서 나는 깨달았고, 아니 깨달았으리라고 믿었는데, 아마도 내면의 인간이야말로 진정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_349쪽 '산책'



발저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허위나 허식 없이 자신을 존중하고 동일한 시선으로 타인을 존중했다. 그러므로 무언가가 되기보다 아무 것도 되지 않는 것을 바랐고 여러 글에서 한 장의 위선도 없이 자신을 드러냈다. 그저 하찮고 작은 존재, 먼지에 지나지 않는 자신으로 자연스럽게 있으며 그것에 만족한다고 썼다. 누군가는 감추고 싶거나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을, 몽상가적 기질이나 가난, 외로움과 좌절까지도 진솔한 문장으로 적어 내려갔다. ‘헬블링 이야기’나 ‘한 시인이 한 남자에게 보내는 편지’, ‘최후의 산문’ 같은 글이 인상적인 이유다.



“내가 나 자신으로 있지 못하고 내가 아닌 것이 되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것이야말로 멍청한 행동일 겁니다. 내가 나일 때, 나는 나에게 만족합니다. 그러면 나를 둘러싼 세상 전체도 조화로운 음색을 냅니다.”

_74쪽 '한 시인이 한 남자에게 보내는 편지'



자신이 지닌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살기를 결심하고 그것을 드러내며 사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로 인해 미움받고 거절당하는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용기와 담대함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게 해 주니까. 어떤 이들의 삶은 자신을 지우거나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며 사는 삶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알려준다. 비록 세계와 불화하여 고독이라는 방에 머물게 될지라도 불협화음 속에 서만 만들어지는 고귀한 빛이 있다는 걸. 그들의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훈련된 채 살아가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본모습을 찾고 싶어 하는 우리에게 한 줄기 빛처럼 비친다. 그것은 어둠으로 덮인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 보겠다고, 나만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겠다고 결심하는 용기를 건넨다. 획일적인 가치에서 벗어나 모두가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며 살아갈 수 있을 때 세상은 분명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남루한 것, 가장 진지한 것과 가장 유쾌한 것, 산책자에게는 이 모두가 마찬가지로 마음이 끌리며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_341쪽 '산책'



헤르만 헤세는 발저의 글을 사람들이 더 많이 읽는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라고 했다. 어떤 구분도 지우고 존재하는 그대로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예찬했던 로베르트 발저. 그는 허위와 겉치레를 용납하지 않았고 겸양과 관대함으로 타인을 대하려 애썼다. 그의 사후에 발견된 수첩에는 최대 3밀리 정도의 작은 글씨로 적힌 최후의 원고가 들어 있었다고 하니 작은 존재가 되고자 했던 신념을 상징적으로 담아낸 것처럼 보인다.



“진정한 시인은 먼지를 선호한다.”라고 발저는 말했다. 또 다른 은둔자였던 에밀리 디킨슨의 시 속, ‘길 위에 홀로 뒹구는 돌멩이’처럼, 꾸밈없는 자신으로 우주가 걸쳐 준 코트를 걸치고, 태양처럼 자유로이 결합하며 홀로 빛났을 그를, 상상해본다. 그를 사로잡았던 고독의 절망이 우리가 그를 읽을수록 옅어질 수 있길 바라며.



길 위에 홀로 뒹구는

하찮은 돌멩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성공을 걱정하지도 않으며

위기를 결코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그의 코트는 자연의 갈색,

우주가 지나가며 걸쳐 준 것

태양처럼 자유로이

결합하고 또는 홀로 빛나며,

덧없이 꾸밈없이

절대적인 신의 섭리를 지키며-

_ ‘길 위에 홀로 뒹구는’, 에밀리 디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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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잔상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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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대일의 조건을 넘어선 사랑은 가능할까.

한 사람이 만약 인간이 아닌 사물, 이면, 신 또는 조국, 어떤 관념에 맹렬히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는 그걸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리고 한 집단이 한 집단을, 이름 없는 한 순교자나 영웅을 기꺼이 추앙하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말할 수 있을까.

어떤 불가항력성, 그러나 무력해지지 않을 용기, 우리가 가장 나약한 순간 발견하게 되는 작은 위로까지 사랑이라 이름한다면 세상에 사랑 아닌 게 있게 될까.

문득 그게 궁금해졌다. 사랑에 관한 이미지들을 찾아가는 데 있어, 그렇다면 사랑이 아닌 이미지는 무엇일지.”

10



장혜령 작가의 <사랑의 잔상들>세상에 사랑 아닌 게 있게 될까. (…) 사랑이 아닌 이미지는 무엇일지.”(10)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작가는 십 년간 자신이 겪고 지나온 순간들에서 남은 이미지를 기록하고 간직하면서 그 이미지와 기억이 남겨진 이유는 사랑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가 이미지에 주목하는 이유는 쓴다는 일은 과거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편하는 과정이지만 이미지는 이러한 재편의 과정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서사가 시간의 질서를 따른다면 이미지는 무시간적”(13)이라 서사를 둘러싼 감정은 변하거나 사라지는 반면 이미지는 영원히 남기에 차가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남은 이미지에 대해 쓰는 일은 한 때의 감정을 서술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십 년에 걸쳐 지우고 고쳐져서 남은 책 속의 글은 그가 말한 이미지의 특성처럼 뜨겁기보단 차가운 쪽에 가깝다. 하지만 오래 지속되는 것은 뜨거운 열정이 아니라 적당한 온도의 마음임을 우리는 안다. 찬 기운이 감도는 이 글은회복기에 맞는 바람처럼 은은하고 낯설고 서늘한”(김연수) 설렘을 건넨다.



그가 보여주는 이미지 속에는 여행을 하거나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거나 비밀을 간직한, 이별을 하거나 어떤 기억에서 맴도는 사람이 있다. 작가가 접한 영화와 그림, 사진과 문학을 통해 자기 안에 맴도는 사랑의 이미지를 뜯어보고 이미지 너머로 건너가는 작은 문을 만든다. 그러므로 이 책에 실린 글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과거에 대한 진실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의미이거나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예감이다. 또한 예술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우리가 타인과 세계와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발견한다.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되어 타인의 움직임을 통해 생각하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성찰한다. 그러므로기꺼이 원했던 건 손을 내미는 것.”(12) 그가 어떤 이미지나 기억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조심스레 써 나가길 지속하는 것은, 그렇게 세계와 연결된 속에 있다는 것을 감지하며 다시 한번 손을 내미는 일일 것이다. 손을 내미는 일은 사랑하기의 다른 이름일 테고. 



“차츰 투명한 응시가 과거를 미래로부터 발견해내는 일임을, 다가올 이미지를 기다리며 무언가를 써나가는 작업, 글을 통해 하나의 이미지를 영속시키는 일이 사랑의 행위임을, 사랑하는 사람이 취하는 하나의 간절한 자세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6



예술을 통해 자신만의 이미지를 제대로 바라보고 그걸 우리 앞에 다시 펼쳐 보여주는 장혜령의 글은, 글 자체로 사랑을 실현하고 있다. 연결되고 싶은 마음, 연결되어 있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 또한 사랑이라 느낀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동안 저자의 이야기와 생각에 깊숙이 연결되는 것 같았고 그걸 통해 그가 만난 세계에도 어렴풋이 닿은 것 같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부재했던 (잊혔던) 이미지와 기억이 내 안에서 되살아났다. 장혜령의 글을 통해, 장혜령의 생각을 빌어 사고하고 글을 쓰는 경험을 했다. “우리는 어쩌면 태어나지 않은 사람, 또는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만난 적 없는 사람의 언어를 받아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감정을 느낄 때, 그것은 사실 내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그이에게서 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그의 예언처럼. (75)



그의 글은 가위처럼 봉합되어 있던 과거의 기억을 풀어 지워버렸거나 부재했던 기억으로 우리를 이끈다. 하지만 내내 우리와 타인, 우리와 세계 사이로 길을 내는 바느질을 한 땀 한 땀 이어간다. 책을 읽는 동안 그 어느 때보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타인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내 안의 사랑의 잔상들을 불러일으키는 책이자, 부재했다가 나타나거나 어딘가 있지만 아직 내게 당도하지 못한 기억을 더듬어 글로 써보고 싶어지게 하는 책이다. 사랑했던 모든 것에 대한 기억을, 그래서 슬프면서 아름다운 기억을 나만의 방식으로 기록해두고 싶다고 갈망하게 한다. 이런 책이 한 권 더 있었다. 목정원 작가의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아침달)이라는 책이다.





바슬라브 니진스키에 대한 영상을 보고춤추는 사람의 몸에 매료되었던 목정원 작가는 대학에서는 미학을, 프랑스로 건너가 대학원에서는 공연 예술을 공부한 사람이다. 책에는 무대 위에서사라지는 예술’, 공연에 몸담게 된 이야기와 배우가 아닌 관객이 되어, 무대에 올려지는 순간에만 목도할 수 있는 아름다움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이 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는 막이 오르기 전 어둠에 잠긴 무대를 앞에 두고 숨이 막힐 것 같던 기분, 먼 곳의 아름다움을 불러다 눈앞에서 펼쳐주는 재현의 순간 무대를 끌어안고 울고 말았던 경험, 공연이 끝나면 기억이 사라질까 서둘러 돌아와 글로 남겨야 했던 일까지. 공연이라는 시간 예술이 지닌 한계와 무한한 가능성, 그 속에서만 가늠해볼 수 있는 세계의 의미와 깊이, 그리고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해 썼다.



영화를 전공한 장혜령 작가가 이미지에서 맴돌고 순간에 탄생했다 서서히 옅어져 가는 이미지를 언어로 옮기는데 골몰했다면 공연 예술을 공부하고 노래를 부르는 목정원 작가는 무대를 통해 자신에게 건너온 이야기, 즉 목소리와 몸짓을 글로 풀어냈다. 하지만 두 작가 모두 사라지고 마는 것을영원으로 변환시키고자 언어에 기댄다는 게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결은 다르지만슬프면서 아름다운사라짐의 속성에 우리를 주목시킨다. 또한 두 책 모두 생에서 가장 뜨겁게 관통했을 이십 대에서 삼십 대에 걸친 시기, 십 년간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기록한 글이다. 적어 낸 것이다.  그래서인지 여행과 사람, 사랑이라는 주제에서도 겹친다. 가장 열렬하게 세상과 나를 만나는 시기라 힘겹고 외롭지만 그래서 더 빛나는 시절의 이야기, 모두에게 단 한 번뿐인 시기가 담겨 있어 소중하고 귀하게 읽히는지도 모르겠다.



신기한 건 책의 제목처럼사랑의 잔상들을 읽고 나면 책 속에서 마주했던 잔상들이 머릿속을 부유하고,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을 읽고 나면 아름답지만 슬프기도 한 것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침묵하고 싶어 진다.





<사랑의 잔상들>의 에필로그에는 책에 담긴 몇몇의 글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뒷 이야기가 있다. 처음 썼던 글이 지워지고 어떻게 고쳐졌는지 보여주는 글에서 십 년의 시간을 통해 일시적인 감정을 지우고 이미지가 지닌 영원성, 영원의 메시지를 찾으려 했던 그의 노력을 엿보게 된다. 자신을 쓰는 글에서 밖을 내다보는, 이미지 너머로 향해 가는, 그 방향을 바라보며 기어이 어떤 문을 그려보려는 과정을 말해준다. 그것은 에세이 쓰기의 귀한 교본이 되어준다. 글이 어떻게 글이 될 수 있는지, 표현이 어떻게 표현이 될 수 있는지 알게 해 준다. 사랑과 기억이라는 개인적인 이미지에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타인과 세계로 연결되는 이 글을 통해 저자는 나를 지우며 쓰는 일, 타인을 위한 자리를 만드는 글쓰기에 대한 지침을 건넨다.



“다 보여선 안 된다는 것은 비밀을 지킴으로써 당신이 내 안에 머물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어쩌면 씁쓸하겠지만, 내가 결코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 당신이 그 안으로 들어와 해석할 공간을 남기는 일이다.” 213

글 속에서 주체, 즉 내 몸을 비운다는 것은 언제든 문장 사이를 떠다닐 수 있는 자유를 얻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문장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자 세상은 전과 다르게 보였다.” 218



이름 붙일 수 없었던 무수한 마음을 사랑이라 불러도 될 것 같다. 노트북에사랑의 잔상들이라는 폴더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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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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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서로 알지 못하는 것


“두 사람이 서로 알지 못하는 게 뭘까? 그는 그녀가 손가락을 꼭 오므리고 잠을 자며, 악몽을 꿀 때면 경련 증세를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멜론 중에선 캔털루프보다 허니듀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병원에서 돌아왔을 때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 처음으로 한 일은 그들의 물건을 골라 복도에 마구 던져버리는 것이었음을 알았다. 책꽂이의 책, 창턱에 놓인 식물, 벽에 걸린 그림, 탁자에 놓인 사진, 가스레인지 위의 고리에 걸어놓은 솥과 냄비 따위를 말이다. 슈쿠마는 한 발짝 비켜서서 그녀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차근차근 옮겨 다니는 것을 지켜보았다. 분이 풀리자 쇼바는 거기에 서서 자신이 만들어놓은 산더미를 응시했다. 혐오스럽다는 듯이 입술을 뒤로 당겼는데, 슈쿠마는 그녀가 침을 뱉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울기 시작했다.” 36~37쪽


항상 문제를 대비하고 어떤 상황도 거침없이 다룰 수 있었던 쇼바였지만 아이를 잃고 나서부터 그녀는 많은 것에 무심한 채 일에 매달렸다. 슈쿠마는 한동안은 그런 그녀를 웃게 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이젠 침묵하는 데 익숙해져 버렸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지만 아이의 죽음이라는 사건 이후 각자의 내면에 방을 만들었고 상대에게 문을 열지 않는 관계가 되었다. 작업하는 방으로 쇼바가 찾아오는 유일한 시간을 슈쿠마가 두려워하게 되기까지 두 사람이 서로 알지 못하고 있었던 건 뭘까? 결정적인 사건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겪고도 그 기억을 밀어내며 관계는 나아갈 수 있을까. 봉합될 수 없는 틈을 가지고도 관계는 지속될 수 있는가. 줌파 라히리의 소설집 <축복받은 집>(서창렬 옮김, 마음산책)에 실린 단편들은 문득문득 내내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일시적인 문제’에서 아픔을 피하느라 서로의 마음을 읽는 법을 잃어버린 쇼바와 슈쿠마처럼, 이 책에 실린 여러 단편에는 소통하지 못하는 커플이나 관계가 등장한다. 그들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미묘하고 미세한 균열을 경험하고 상처 입는다. ‘질병 통역사’에서 여행 가이드 카파시씨는 미국에서 온 젊은 부부의 아내 미나에게 친밀함에 대한 욕망을 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긋나면서 그녀에게 모욕감을 느낀다. ‘섹시’에서 미랜다는 유부남인 데브를 만나 그에게서 들었던 “당신은 섹시해요.”라는 말을 의미 깊게 받아들이지만 정작 데브는 그 말을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남편을 따라 고향을 떠나 익숙한 삶과 분리된 채 사는 센 아주머니는 운전을 할 수 없어 더욱 고립된다.(‘센 아주머니’) ‘축복받은 집’의 산지브는 부모의 소개로 만나 결혼한 트윙클과 성격 차이를 깨달으며 후회의 감정에 빠져든다. 가장 가까운 관계나 친밀함을 기대했던 상대에게서 느끼는 단절감은 깊고 날카로우며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하지만 그런 경험은 생각보다 자주 삶의 도처에서 일어난다.


우리가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각자의 머릿속에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영화관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그곳을 볼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다. 거기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아무리 열심히 말한다 해도 언어가 지닌 불완전성 때문 에라도 완전한 소통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상대가 누구든 관계에서의 단절과 오해는 불가피하고 사람들과 함께 사는 한 그로 인한 상처는 계속될 것이다. 소통 불능은 시지프의 바위처럼 살아가는 동안 짊어져야 할 바위일지도 모른다. 그 형벌을 어떻게 감내할 수 있을까. 줌파 라히리는 어긋나는 관계를 보여주면서 절망하기보단 그럼에도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 같다. 타인을 알 수 없고 완전히 맞닿을 수 없으므로 그 불가능 때문 에라도 더 열심히 사랑해야 한다고. 어느 시인이 말했듯 결국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므로. 그러므로 ‘그 말을 발음해야만’하는 것처럼.*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난다)



연민의 거리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줌파 라히리는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의 답을 눈앞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 시선을 멀리 보내 기대하지 않았던 관계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사랑으로 그 가능성을 믿어보려 한다. 소설에서 쇼바와 슈쿠마, 산지브와 트윙클, 센 부부처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밀착되어 그들 사이의 틈새가 더 아득하게 느껴지는 관계에서는 사랑의 지속이 막막하고 쓸쓸하게 느껴지는 반면, 서로를 관찰하고 존중할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관계 - 피르자다 씨와 나(‘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 센 아주머니와 엘리엇, 크로프트 부인과 나(‘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에서는 (비록 삶의 한 면 일지라도) 진실된 이해와 존중이 가능할 수 있겠다는 희망의 기운을 감지하게 된다.


피르자다 씨가 (미국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고맙다’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과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딸을 그리워했던 마음이 무언지 알 수 없었던 어린 ‘나’가 그와 헤어진 후 그 감정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겠다고 느끼는 것처럼. 백 살이 넘은 고집스러운 크로프트 부인에 대한 걱정으로 밤마다 일정 시간 그녀의 곁에 머물며 그녀의 지난 한 세기를 그려보려 애쓰고, 그 나이에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챙겼던 그녀에게 애정과 존경을 품는 ‘나’처럼. 어떤 관계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해줄 수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집은 내밀한 관계에서의 소통 불능에 아파하며 그 사이의 어긋남을 어떻게 봉합하며 나아갈지에 대한 질문과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조금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다른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곁에 있는 이를 다시 바라보게 해주는 연민의 거리를 획득하려는 노력으로도 읽힌다.


“그 구두에 부드럽게 발을 밀어 넣는 그녀의 모습을 생각해보았다. 그 모습에서 이 집으로 이사 온 이래 자신이 줄곧 느꼈던 짜증의 감정 대신에, 그녀가 그 구두를 신고 곡선형 계단을 허겁지겁 뛰어 내려가고, 그러다가 목조 바닥을 약간 긁어버리는 모습이 머리에 떠오르며 애틋한 아픔을 느꼈다. 립스틱을 고쳐 바르려고 화장실로 달려가고, 사람들에게 외투를 내주려고 또 달려가고, 마침내 마지막 손님이 떠나고 난 다음 체리목 테이블로 달려가 집들이 선물을 열어보는 모습을 떠올리자 그 아픔은 더욱 커졌다. 결혼 전 통화를 끝내고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 느끼곤 했던 아픔과 같았다. 그녀를 배웅하고 공항에서 돌아오는 차 속에서 이륙하는 비행기를 보며, 저 하늘의 어떤 비행기에 트윙클이 타고 있을까 궁금해할 때 느꼈던 것과 똑같은 아픔이었다.” 246쪽


<축복받은 집>에서 산지브는 자신과 성향이 다른 트윙클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다가도 그녀의 구두를 보며 ‘애틋한 아픔’을 느낀다. 그녀의 모습에 피곤해하면서도 상처 주지 않으려 애쓰는 그의 모습에서 사랑의 지속 가능성을 읽고 싶다. ‘애틋한 아픔’이란 섭섭하고 안타까워 애가 타는 듯한 아픔이다. 상대의 구두에 자신의 발을 넣어보듯 상대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해 아파할 수 있다면, 연민의 감정을 품을 수 있다면 사랑이라는 감정이 가족과 생활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낡아갈지언정 고갈되진 않을 거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고 나면 상처받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고, 그런데도 사랑하려 애써보는 게 우리의 삶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어쩌면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의 나와 말라처럼, 중매로 결혼해 한동안 떨어져 있었던 탓에 어색한 두 사람이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익숙하고 가까운 관계로 깊게 연결되는 것처럼, 사랑이란 상처의 자리에서 당장의 개선을 바라는 게 아니라 때로는 긴 시간을 기다리며 먼 길을 돌아서라도 상대를 향해 걸어가 보겠다고 다짐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것


사랑하려는 우리 사이엔 테이블이 필요하다. 서로에게 적당한 거리를 만들어주면서도 마주 볼 수 있게 해주는 테이블이. 두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 앉더라도 서로의 기억을 같이 바라보며 울고 웃어줄 수 있는.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물리적 의미와 함께 상대에 대한 배려와 인내, 그리고 ‘애틋한 아픔’을 품어보려는 감정적 노력까지 포괄하는 것이리라. 시간을 내어 그 테이블에 앉고 불편하더라도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며 귀를 기울여주는 마음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슈쿠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쇼바의 접시 위에 자신의 접시를 포개었다. 그는 접시를 들고 싱크대로 갔지만, 수도꼭지를 틀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깥의 저녁 날씨는 아직 포근했다. 브래드포드 부부가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스래드포드 부부를 지켜보고 있을 때 방이 깜깜해졌고, 그는 몸을 돌렸다. 쇼바가 전등을 끈 것이다. 그녀는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 앉았고, 잠시 뒤 슈쿠마도 쇼바와 자리를 같이했다. 두 사람은 이제 자신들이 알게 된 사실 때문에 함께 울었다.” 45쪽


사랑은 애틋한 아픔을 느끼는 연민의 마음에서 간신히 이어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은 함께 울어주는 것일 테다. 그런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은 함께 웃는 일일 테고. 폐허 위에서도 지속되는 것이 삶이라면, 상처 위에서도 피어나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므로 삶의 조각을 공유해주는 이들을 최선을 다해 사랑해보려는 노력이 우리에게 남아 있길 바란다.


인도 이민자 출신 미국 작가 줌파 라히리의 소설에는 인도인이 등장하고 그들의 서사가 주를 이뤄 ‘이민자 소설’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작가 스스로 ‘이민자 소설’이라는 틀을 거부했다. 그렇다. 관계 맺고 소통하며 상처 입으면서도 사랑하는 법을 모색하는 것은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이의 삶에 보편적으로 거듭되는 일이다. 보편적 삶의 편린이 담긴 이 소설이 차가우면서도 뜨겁게, 담담하면서도 아프게 읽힌다. 줌파 라히리의 세밀하고 촘촘한 묘사는 때로 숨이 막힐 정도로 우리를 빨아들인다.



*'우리 사이엔 테이블이 필요하다'는 제목은 장혜령 작가의 ‘단 하나의 테이블’ <사랑의 잔상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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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의 신호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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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앞에서 억지웃음을 짓고 하기 싫은 일을 참으며 마음의 부대낌을 간신히 짓눌러 하루를 넘기다 보면 자신이 위선자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때론 그런 생활이 며칠씩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삶을 정말 원하는 거야?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이렇게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해?’ 쏟아낼 수 없는 질문이 솟아나 한숨을 만든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이 소설을 읽는 건 위험하다. 믿었던 관계와 삶을, 자신까지도 의심하게 하는 이런 소설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패배의 신호>, 그 속의 ‘루실’을 만나는 건.







“태양, 해변, 한가로움, 자유… 이게 우리가 누릴 것들이야, 앙투안. 우리도 어쩔 수가 없다고. 그게 우리의 정신에, 피부에 뿌리 박힌 걸. 어쩌면 우린 사람들이 타락했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들일지도 몰라. 하지만 난 그렇지 않은 척할 때, 더 타락했다는 기분을 느껴.”

239쪽, <패배의 신호>, 프랑수아즈 사강, 장소미 옮김, 녹색광선



서른 살의 루실, ‘그녀는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 전혀 없었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인생에 계획이 없듯 걱정도 없었다. 모든 것에 무책임했고 그로서 행복했다. 영원히 소녀로 머물러 있을 수 있는, ‘해맑고 무심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그녀의 무책임은 결점이라기보다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힘’이었다. ‘행복하려는 의지’, ‘원형 그대로의 온전하고 순수한 이기주의’가 그녀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런 그녀에게 유일한 도덕은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그리고 삶에게 거짓 노력과 체면을 들이밀지 않았다. 독서와 사랑만을 탐닉하는 자신이 타락한 존재일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일 망정 남들의 기준에 맞춰 일하고 성공을 향한 불행한 열정을 품는 식으로 자신을 감춰 그럴듯한 모습을 꾸며내지 않았다. 자신에게 거짓일 때 더 타락했다고 느꼈다.


루실은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부유한 사업가 샤를의 집에 살았다. 샤를의 여자 친구로 그의 보호를 받으며 그가 사준 모피 코트를 입고 컨버터블을 타고 파리의 자유를 만끽하며 무위한 삶을 즐겼다. 하지만 어느 날 연회에서 앙투안을 만나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면서 그녀의 삶은 위태로워졌다.


샤를의 고급스러운 집을 떠나 앙투안의 허름한 방에서 시작된 현실은 그녀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무위와 고독을 즐기는, 물질의 소유도 사랑의 독점도, 사랑의 영원성도 원치 않는 그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걸 지켜주려 했던 샤를과 달리 젊고 불안정한 앙투안은 그녀가 어떤 역할을 맡아주길 바란다. 그와 함께 하는 삶 속에 뿌리를 내리고 미래를 설계하길 바란다. 그래서 직장을 다니고, 여느 사람들처럼 사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길 종용한다. 앙투안을 사랑해서 그의 뜻을 따라주고 싶었던 루실은 처음엔 그 역할을 맡아 애써보지만 일이 자신을 불행하게 한다는 걸 알고 차라리 앙투안을 속이기로 한다. 관능적인 사랑의 희열이 두 사람을 가둔 철옹성에 미래의 불안이라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앙투안은 침대에 드러누웠다. 두 시간을 끝도 없는 절망감과 질투로 보낸 터였다. 분노가 그를 기진하게 했다. 그는 루실을 믿었다. 루실이 진실을 이야기했다는 걸 알았다. 이 진실이 그를 안심시키는 동시에 한없이 씁쓸하게 했다. 루실은 혼자였고, 늘 혼자일 터였다. 한순간 혹시 루실이 그를 속이는 게 더 나았던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그는 멀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발음했다.

“루실… 넌 나한테 아무 믿음이 없니?”

222쪽



그 모든 기억이 그녀가 행복했을 때 기꺼이 삶이라고 불렀던 균일하고 어렴풋한 하나의 무리를 형성하는 대신에, 그녀가 덜 행복한 지금은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마그마가 되었다. 앙투안이 옳았다. 그들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둘이서 어디로 노를 저어 갈 것인가, 그들은 무엇이 되었는가?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객선이었던 이 침대가 표류 중인 뗏목으로 변했고, 그토록 친근하던 이 방은 추상적이 되었다. 그가 루실의 머릿속에 미래의 개념을 주입했고, 그럼으로써 그들 사이의 미래를 아예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 같았다.

225쪽







소설의 첫 장면은 샤를의 집에서 루실이 이른 아침 홀로 컨버터블을 몰고 시골로 떠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루실은 겨울의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 ‘첫 봄바람’의 기척을 느끼고 잠들어 있는 샤를을 깨우지 않고 봄기운을 만끽하기 위해 외출한다. 루시의 기척을 감지한 샤를은 그녀를 사로잡은 게 무언지 단번에 알아챈다. 실존이 세계의 변화와 감응하는 순간 느끼는 기쁨, 홀로 존재할 때 더 또렷하게 다가오는 손짓에 열렬히 반응하기, 즉 ‘고독의 희열’이었다. 루실은 태생적으로 고독 속에서 홀로 행복할 수 있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눈을 뜨는 순간 삶이 자신에게 그려 보이는 행복이라는 퍼즐 조각을 알아보는 사람, 그러므로 삶에 대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바라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녀에겐 강렬한 사랑 속에서 타인과 하나 됨으로 느끼는 기쁨 못지않게 본래의 자신을 유지하는데서 얻는 행복이 중요하다.



“고독 속에서도 더러 완벽한 행복의 순간이 있다. 위기의 순간엔 외부적인 어떤 것보다도 기억이 우리를 절망에서 구한다. 우리는 우리가 혼자서, 아무 이유 없이 행복했었다는 걸 안다.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행복 - 우리가 누군가로 인해 불행할 때 그 누군가와 필연적이며 유기적으로 관련이 있어 보이고, 또한 그 누군가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행복 - 은 실은 매끄럽고, 둥글고, 흠 없는 무언가로 더할 수 없이 자유롭게, 우리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물론 잠깐일 수도 있지만, 틀림없이 가능하다) 나타난다. 이 기억은 우리에게 이전에 다른 누군가와 공유했던 행복보다 더 위안이 된다. 왜냐하면 그 다른 누군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와 공유했던 행복은, 실수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기반을 두었던 허무한 기억으로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125쪽



누군가와 함께 여야지만 행복한 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만 행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때로 상대를 바꾸려 하고 구속하는 감옥이 되기도 하니까. 열렬한 사랑의 감정도 결국은 끝이 나고 감정의 소멸과 함께 찾아올 슬픔과 불행을 예감하면서도 사랑에 빠지고 아픈 이별을 감당할 수 있는 건 ‘고독의 기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사강은 말한다. 고독 속에 누렸던 완벽한 행복에 대한 기억이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를 견디게 해 줄 거라고. 어쩌면, 사랑이 아니라 고독이, ‘고독의 희열’이 인간 실존이 감내해야 하는 혼자라는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내게 해 준다고. 많은 것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상태로 지나가 현재는 과거로 물러나지만 기억만은 남아서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때론 사랑의 기억이, 때론 고독의 기억이, 불안을 딛고 현실을 건너게 한다. 그리고 기억들이 언젠가의 우리를, 불안한 미래에서 위로해 줄 것이다.



“… 내가 어긋난 게 아닌지 해서요.”

“어긋나? 뭐에 말이요?”

“삶에요. 남들이 삶이라 부르는 것에요. 샤를, 그러니까 인간은 정말로 사랑해야 하는 걸까요, 불행한 열정을 가져야 하는 걸까요? 존재하기 위해 일하고, 돈을 벌고, 무언가를 해야 하는 걸까요?” 샤를이 대답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필수적이진 않소. 당신이 행복하기만 하다면.”

“당신 눈엔 그걸로 충분해 보여요?”

“다분히.”

103쪽



체면. 모든 책임이 이 체면에 있다. 이미 얼마 전에 나는 깨달았다. 무위야말로 우리의 모든 미덕과 그나마 참아줄 수 있는 우리의 모든 자질 – 명상, 한결같은 기분 유지, 게으름, 활발한 정신적, 육체적 소화력 – 을 드러낸다는 걸. 먹기, 배설하기, 육체관계 맺기, 햇볕을 쬐며 빈둥거리기. 이보다 더 나은 건 아무것도 없다. 이것과 비교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극히 일부분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숨쉬기, 살아있기, 그것을 인지하기. 이보다 더 나은 다른 건 아무것도 없다.

213쪽



현실적 삶을 책임지는데 무관심한 채 하루치의 행복에 만족하는 루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아이 같다. 하지만 자신의 그런 모습을 잘 알고 있으며 현실 속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혼란을 느끼기도 하는 루실은 자신과 세계의 부조화 속에서 어떤 진실을 꿰뚫어 보기도 한다. 루실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무수한 사람들의 삶은 한 편으로 어리석게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이 의심 없이 자신을 저당 잡히고 마는 삶의 방식- 일과 성취를 향한 불행한 열정, 인위적인 노력과 도덕관념 등-은 당연히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무시해버린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애쓰는 삶이 반드시 옳은 것인지, 그것만이 추구할 가치가 있다고 칭송할 수 있는지, 당혹스러운 질문이 떠오른다.


자신과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딱 들어맞는 퍼즐을 찾아낼 줄 아는 루실이 부러워 그녀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무위와 자유를 추구하려면 스스로가 삶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무위와 자유를 쫓으려면 누군가가 삶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삶의 한쪽을 의지하게 된다면 어떤 책임을 져야 할까? 하지만 반드시 책임을 느껴야 할까? 체면 세우기에 사로잡혀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 건 아닐까, 도덕이라는 틀에 맞추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끝없이 솟아나는 질문 속에서 이런 갈등과 고민 없이 지금 이 순간의 생만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루실이야말로 용감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의 모든 시선,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에서도 벗어나 자신의 본성을 유지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내게 그런 용기가 있는지 질문해보면 우물쭈물하는 위선자가 보일 뿐이다.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사랑의 감정, 사랑을 잠식하는 불안과 두려움, 관계 속에서 홀로 느끼는 고독, 그 복잡 미묘한 감정을 이토록 매력적으로 표현해낸 소설이 또 있을까. <패배의 신호>는 천재 소설가라고 일컬어지는 사강이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한 아이의 엄마가 되는 경험을 겪고 난 삼십 대에 쓴 소설이다. 그녀의 소설에 지속적으로 등장한 사랑과 이별이라는 주제에 삶의 깊이가 더해졌음이 느껴진다. 젊은 시절에는 알 수 없었던, 사랑과 관계의 쓸쓸함, 모든 것이 허물어진 자리에서도 계속되는 삶의 속성을 알게 되어 이 소설이 더 빛나게 읽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사랑의 광휘가 아니라 '고독의 희열'임을. 고독을 다루는 능력이 삶과 관계의 비밀 열쇠라는 깨달음에 닿는지도.


<패배의 신호>는 단순한 연애 소설이 아니다. 삶과 사랑, 삶에서 추구하는 성취를 위한 노력, 관계와 결혼, 행복과 고독에 대한 관념을 뒤집는 이야기다. 루실에게 패배했음을 느끼며 앙투안의 심장에서 ‘퇴각의 북소리’가 울렸듯, 내가 믿어왔던 것에 패배했음을 느낀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웅-웅-웅-, ‘퇴각의 북소리’가 울린다.



“인간이란 정말이지 예기치 못할 존재였다. 인간에 대해선 결코 ‘모든 것’을 알 수 없었다.”

33쪽



인간도, 삶도, 사랑과 행복조차도 예기치 못한 속성이 있지 않은가. 심지어 고독조차도. 결코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그것들에 대해 이토록 예리하고 우아하게 써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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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 펭귄 클래식 펭귄클래식 5
앙드레 지드 지음, 이혜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나타나엘, 내 그대에게 ‘순간들’을 말해 주리라. 그 순간들의 ‘현존’이 얼마나 힘찬 것인지 그대는 깨달았는가? 그대가 그대 생의 가장 작은 순간에까지 충분한 가치를 부여하지 못한 것은 죽음에 대하여 충분히 꾸준한 생각을 지속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매 순간이, 이를테면 지극히 캄캄한 죽음의 배경 위에 또렷이 드러나지 않고서는 그런 기막힌 광채를 발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대는 깨닫지 못하는가?”

_54쪽, <지상의 양식>, 앙드레 지드, 민음사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에서 죽음의 배경 위에서만 또렷이 드러나 광채를 발하는 것이 순간이라고 말했다. 죽음을 알지 못하면 순간에 현존하는 것이 얼마나 힘찬 것인지 깨닫지 못한다. 우리 인생에 그런 시기가 있으니 바로 청춘이 아닐까 싶다. 넘쳐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시간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기도 하니까. 그러느라 손 안에 보석을 쥐고도 더 빛나는 무언가를 찾겠다고 헤매는 게 청춘 아닐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청춘의 특권일지 모르겠지만 더 높은 이상, 더 고귀한 무언가를 쫓느라 정작 현재와 순간을 마음껏 즐기지 못하고 의미없는 무게를 지우기도 한다.



앙드레 지드는 이토록 열렬히 순간의 찬란함을 노래했으면서도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연인과 사랑의 순간을 누리기보다 기다림의 고통을 선택하는 제롬과 알리사라는 인물을 만들기도 했다. <좁은 문>에서 제롬과 알리사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숭고한 것으로 이끌고자 하는 바람에 급기가 그 사랑을 잃고 만다. 



“이를 테면 아주 어려서 오로지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던 마음보다 더 직접적으로 그녀를 소유하고 싶다는 열망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공부, 노력, 경건한 행동 따위의 것들을 모두 맹목적으로 알리사에게 바쳤다. 오로지 그녀만을 위해서 한 일조차도 그녀가 모르도록 하는 것이 더욱 값진 덕을 쌓는 일이라 둘러대면서, 나는 일종의 독주와도 같은 지독한 겸양에 도취되어 쾌락을 염두에 두기는커녕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일이 아니면 무엇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습성에 길들여져 있었다.”

_34쪽, <좁은 문>, 앙드레 지드, 펭귄 클래식



열두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엄격한 종교적 규율을 따르는 어머니와 가정교사의 보호 아래 자란 제롬은 허약한 체질로 공부에만 취미를 두고 있었다. 파리에서의 생활을 뒤로하고 노르망디 지방의 퐁괴즈마르에서 여름을 보낼 때면 뷔콜랭 외삼촌댁에 머물렀는데 그러는 사이 제롬은 사촌누이 알리사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된다.



일찍이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의 감정을 나누었던 제롬과 알리사, 하지만 종교적 의미를 추구했던 제롬은 “지독한 겸양에 도취되어 쾌락을 염두에 두기는커녕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일이 아니면 무엇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습성에 길들여져 있었다.”(34쪽) 그에게 알리사의 사랑은 신에 대한 사랑과 합치된 것으로 그것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엄격하게 자신을 통제했고 그의 노력-공부, 노력, 경건한 행동-은 알리사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장의 기쁨을 취하는 게 아닌 인내와 정신적 수련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더 고귀한 무언가로 격상시키고자 했던 제롬은 주위에서 당연시 여기는 약혼을 차일피일 미룬다.



두 사람 사이 너무도 당연해 보였던 사랑의 연결이 어그러진 지점은 어디일까? 알리사의 여동생 쥘리에트가 제롬을 흠모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일까. 그런데도 언니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다른 이와 결혼을 하지만, 동생의 희생을 안 알리사가 한동안 제롬을 멀리했기 때문일까.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억누르며 서신 왕래만 허락하고, 그마저도 통제하면서 시련 속에 자신들의 사랑이 더 숭고해질 거라는 어리석은 믿음을 따랐기 때문일까.



그런 사건이 아니더라도 애초에 두 사람이 사랑을 대하는 마음은 지나치게 신성한 무엇이었다. “아주 어려서 오로지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던 마음보다 더 직접적으로 그녀를 소유하고 싶다는 열망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34쪽)거나, “무슨 도전이라도 하는 마음에서, 그리고 아직은 서로 만날 때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마치 재미로 그러는 양 기다림의 시간을 연장하기로”(113~114쪽) 했다는 제롬의 표현을 보면 그의 사랑이 알리사를 얻고 그녀와 함께하며 나누는 기쁨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드높이기 위한 무엇이었던 게 아닐까 의심스럽다. 그렇기에 제롬을 통해 ‘좁은 문’을 알게 된 알리사 또한 자신들의 사랑을 평범한 기쁨을 위한 관계가 아닌 상대를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게 하는 희생으로 이끌었던 것 같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누가복음 13장 24절)



“나 혼자만이 이 같은 경쟁심에 고무되었던 것일까? 알리사는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았고 나로 인해, 아니 오직 그녀만을 위해 애쓰는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꾸밈없이 자연스럽기만 한 그녀의 영혼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띠었다. 그녀의 미덕에는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여유와 우아함이 깃들어 있었다. 어린애 같은 천진난만한 미소는 그녀의 엄숙한 시선에 매력을 더해 주었다. 다정하고도 부드럽게 무언가를 묻는 듯 시선을 들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_34~35쪽, <좁은 문>, 앙드레 지드, 펭귄 클래식



제롬보다 두 살이 많았던 알리사는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남다른 어머니의 존재로 인생의 어떤 속성을 일찌감치 깨달은 인물이었다. “모든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몸에 지니고 어디에도 강제되지 않는 “여유와 우아함”이 깃든 미덕을 갖춘 소녀. 하지만 제롬의 영향으로 신에 대한 사랑에 눈 뜨면서 제롬이 신이 아닌 자신을 우상으로 숭배한다는 두려움에 그의 신앙에 자신이 방해가 된다고 여긴다.



“나는 네 곁에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어…… 하지만 우리가 행복을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럼 인간의 영혼이 행복 외에 더 무엇을 바라야 한단 말이야?” 나는 흥분한 나머지 격한 어조로 물었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

성스러움…….”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음성이 너무도 낮았기 때문에 내가 그 말을 들었다기보다는 그렇게 추측한 것에 가까웠다.

내 모든 희망이 날개를 펼치고 나에게서 도망쳐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_139쪽, <좁은 문> 앙드레 지드



알리사의 사랑을 구함으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리라 믿었던 제롬에 비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알리사가 추구하는 미덕이 더 높아졌음을 알게 된다. 영혼의 충만감을 보태주는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못할 것 같고 “아무리 행복하더라도 진전이 없는 상태를 소망할 수는 없다.”(179쪽)는 알리사의 마음은 제롬과의 사랑이 완전함을 잃는 순간 그 사랑을 견뎌낼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으로 바뀌고 만다. 완전함, 완덕이라는 것에 의지를 둔 알리사에게 지상의 사랑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한 소녀를 사랑해 그 사랑을 고귀한 무언가로 여기고자 했던 제롬, 하지만 그 사랑을 통해 천상의 사랑(신에 대한 사랑)을 열망하게 된 알리사, 청춘의 달콤해야 할 사랑은 두 사람의 삶을 짓누르는 무거운 것이 되어버린다.



“가엾은 제롬! 때로는 그의 자그마한 몸짓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때로는 내가 그 몸짓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가 알았다면…….

어렸을 때부터 이미 나는 제롬 때문에 아름다워지기를 바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완덕을 구하였던 것’도 오직 그를 위해서였던 듯싶다. 그런데 이 완덕은 그가 없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오, 나의 주여! 이는 당신의 모든 가르침 가운데서도 저를 가장 당황케 하는 것이옵니다.”

_182쪽, <좁은 문> 앙드레 지드



통속적인 약혼으로 그들의 사랑을 지상에 묶었더라도, 둘의 관계는 파경을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청춘이라는 성장과 변화의 시기를 겪으며 두 사람이 지닌 세계의 차원이 미묘하게 어긋났으니 말이다. 다만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읽으며 내내 안타까웠던 건 당장의 기쁨과 행복조차 지나친 의미 속에 속수무책으로 흘려보내고 만 숱한 순간들 때문이다. 서로의 마음을 알면서도 미덕을 쫓느라 거리를 두고 멀리하는 사이 ‘자그마한 몸짓’으로도 충분할 사랑의 환희를 놓쳐버렸으니.



사랑하고 서로의 마음을 알면서도 서로에게 거리를 두려했던 건 두려움 때문일 테다. 자신이 맹렬하게 믿는 무엇, 가장 가치있는 진실로 추앙하는 것을 가까이서 직면하고 감당하며 책임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도 하니까. 불확실한 미래와 불완전한 자기 인식 속에 자아와 세계의 간격을 좁혀가는 청춘의 시기는 희미한 불안을 내내 껴안고 있어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 청춘이란 내가 있는 곳에서 가장 멀리 있는 이상을 품는 시기이며 둘 사이의 거리는 흔들려야지만 좁혀지는 것일 테니까. 흔들림 속에 무수한 방황과 실패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용인할 수 있었다면 두 사람은 사랑이라는 현재의 기쁨에 자연스레 녹아들 수도 있었을 테다. 완벽함, 완덕에 대한 추구가 그들 사랑에 대한 불안을 더 증폭시켰으리라.



“별들은 모두가 서로서로 그들의 미덕이요 힘인 어떤 유대에 의하여 이어져 있지요. 그래서 하나의 별은 다른 별에 의존하고 다른 별은 또 모든 별에 의존하지요. 각자의 길이 정해져 있어서 각자는 제 길을 찾지요. 각각의 길은 각각의 다른 별이 차지하고 있으므로 저마다의 별은 길을 바꿀 수가 없어요. 그러면 다른 별을 혼란에 빠뜨릴 테니까요. 그리고 각각의 별은 그가 따라가도록 되어 있는 것에 따라 자기 길을 택하지요. 그 별은 반드시 택해야 하는 것을 스스로 원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숙명적이라고 여겨지는 그 길이 각각의 별에게는 그가 선호하는 길이지요. 저마다의 길은 완전한 의지에 따른 것이니까요. 어떤 눈부신 사랑이 별들을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선택이 법칙을 확정하게 되니 우리는 그 법칙에 좌우됩니다. 우리는 도망갈 길이 없어요.”

_199쪽, <지상의 양식> 앙드레 지드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 마지막에서 “별은 그가 따라가도록 되어 있는 것에 따라 자기 길을 택하지요”라고 말했다. 별은 반드시 택해야 하는 것을 원해야 하며 눈부신 사랑이 그를 인도할 것이라고. 인간의 태생적 의존성과 불완전함은 살아가는 내내 누군가를 찾게 하고 삶의 무게를 함께 나누길 소망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별이 되어 줄 수 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을 낼 수 있어야 별이다. 누군가에게 별이 되기 이전에 자신의 빛과 길을 찾는 것이 먼저다. 제롬에 대한 사랑을 넘어 신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희구하며 자신을 희생한 알리사. 그녀의 혼란스러운 모습과 선택은 안타까움을 자아내지만 알리사가 길을 잃은 게 아니라 완전한 의지로 숙명의 길을 찾아낸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망갈 길조차 없는 눈부신 사랑, 신이라는 숙명의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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