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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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집이 친밀해질 때 나는 그곳을 떠났다.

그곳에서 살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하재경,라이프앤페이지, 2020)



하재영 작가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라이프앤페이지, 2020)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된다. 내게도 그런 곳이 있을까. 그곳에 살지 않았더라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집. 이것도 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결혼과 출산’이라는 집을 꼽아야겠다. ‘결혼과 출산’이 합쳐진 집에서 나는 비로소 나의 민낯을 마주했고 사십여 년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생각과 태도를 완전히 뒤바꾸는 경험을 하고 있다.



결혼을 하고 신혼집을 장만한 후 한동안은 집을 꾸미고 가꾸는데 열성적이었다. 집에 놀러 온 지인들은 카페 같다고 칭찬했고 자잘한 물건들을 어디에 넣었는지 궁금해했다. 내겐 먼지를 닦는 것보다 물건을 제자리에 놓는 일이 중요했다. 가능하면 비어있게, 가능하다면 조화롭게, 공간에 정성을 들였다. 미니멀리즘이 뭔지 모를 때에도 미니멀리즘을 추구하고 있었던 나에겐 집을 통해 ‘질서와 안정’을 추구하고자 했던 욕구가 있었다.



집에 있는 걸 좋아했고, 휴일이면 이불 빨래를 하고 음식 만들기를 즐겼다. 회사를 다니는 분주한 일상 속에서 주말에 하는 집안일은 삶의 기본을 보살피게 했다. 생활에 질서와 안정을 불어넣음으로써 소모적인 사회 생활에서 얻지 못하는 어떤 가치를 보상받는 것 같았다. 성인 두 명이 사는 집은 크게 어지럽혀질 일이 없었고 그때만 해도 남편이 자발적으로 청소기를 돌렸으니 부담도 덜 했다. 집을 가꾸고 요리도 꽤 한다는 데서 오는 자부심도 있었다. 내 손으로 밥을 지어먹고 집을 꾸미는 삶은 당시 유행하던 '킨포크' 속 사진과 닮아 보였으니까. 그러니 강박적으로 정리하는 행동의 이면에는 ‘인정’을 바라는 마음 또한 숨어 있었을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남편의 방이 따로 있었다. 집안에서 추구하던 ‘질서와 안정’이라는 선을 남편이 무너뜨릴 가능성은 적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지 않아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 했을 수도 있다. 신경은 거실과 주방, 내 방에 쏠렸다. 초록색 벽지에 초록색 꽃무늬 커튼이 달린 주방 옆 작은 방이 나만의 공간으로 존재했으니까. 그곳은 변함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거기 있었기에 주말을 지나 거실과 주방이 어지럽혀져도 참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나만의 방은 사라졌다. 아이가 자랄수록 아이 물건이 집안 곳곳을 장악했다. 남편과 같이 쓰게 된 방에는 남편의 물건과 옷이 내 것과 뒤섞여 정리되지 않은 채 쌓여갔다. 남편은 주머니에서 꺼낸 영수증과 동전을 고스란히 책상 위에 두었고 매일 아침 그걸 버리는 게 내 일이었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적었더라면 내 눈에도 보이지 않았을까. 잠에서 깬 아이를 먹이고 입히느라 세수할 겨를 조차 없는 나와 달리 그는 매일 아침, 저녁에 감은 머리를 다시 감고, 드라이를 하느라 삼십 분도 넘게 화장실에 머물렀다. 그러고는 흠뻑 젖은 수건을 남겨두었다. 누군가는 온전히 자신을 꾸미기 위해 시간을 쏟는 사이 누군가는 아이 뒤치다꺼리로 정신이 없었다. 그나마 허둥지둥 씻고 나면 젖은 수건에 얼굴을 닦아야 했다. 물이 흥건한 수건에 얼굴을 닦을 때마다 슬퍼졌다. 내 삶이 축축해졌다.



여러 사정이 맞물려 출산과 함께 회사를 그만둔 상태였다. 아이는 여기저기 장난감을 늘어놓았고 치워도 돌아서면 다시 어지럽혀져 있는 날이 지속되었다. 두 명은 어지럽히고 한 명은 늘 치우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나날이 쌓여가던 스트레스는 어느 날 폭발했고 이 모든 상황이 부당하게 느껴졌다. 남편이 출근한 후, 침실에서 폭발하듯 소리를 질렀던 아침이 떠올라 아찔해진다. 하지만 정리되지 않은 물건과 쓰레기는 내 눈에만 보이는 것 같았고, 그걸 보지 못하는 사람은 책상 위에 쌓인 영수증과 젖은 수건의 존재 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집은 우리에게 같은 장소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집이 쉼터이기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집은 일터가 되었다. 보수도, 출퇴근도, 휴일도 없이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가사 노동의 현장.” (p.26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하재영) 누군가에겐 “일과가 끝난 뒤 돌아가는 휴식의 공간을 집이라고 한다면” 나에게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 “다른 가족에게 집이 집이기 위해”, 아이를 돌보고, 밖에서 노동을 하고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리기 위해, 나는 집을 비울 수조차 없었다.



어지럽혀진 집안이 눈에 들어오면 참을 수 없었고, 쓸고 닦고 치우는 일을 반복하고 나면 내가 처한 현실이 암울해졌다. 물건이 마구 놓인 집안의 혼돈을 견디는 것도 스트레스였지만 혼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는 억울함이 더 참기 힘들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다. 내가 원하는 ‘질서와 안정’은 나의 끝없는 희생을 담보로 했다. 그토록 원했던 ‘질서와 안정’은 더 이상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이거나, 무언가를 덮기 위한 가림막에 불과한 것 같았다.



거기서 벗어나야 했다. 그래서 눈을 감기로 했다. 서재였지만 어느새 창고가 되어버린 방, 그 방으로 들어갔다. 어지럽혀진 거실과 설거지가 쌓인 주방이 보이지 않게 문을 닫았다. 옷과 가방, 선풍기와 제습기 등 철 지난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책상 앞에 앉으면 다 괜찮았다. 거기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끝없이 반복되는 집안일의 수렁에서 놓여 날 수 있었다. 의무와 역할 없이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그곳에서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었다.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대가 없이 반복되는 가사의 굴레에서, 완벽하게 정리된 집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방으로 들어가, 하얀 백지를 펼쳐 놓고 무작정 적어 내려갔다. 마음 속에 뒤섞여 있는 것들을 종이 위에 쏟아 놓고, 분류하고 정리했다. 많은 것을 바로잡고 잘라내면서, 적절한 단어를 찾아 제대로 문장을 만들면서, 숨어 있던 내 안의 욕구에 가 닿을 수 있었다. 무질서한 방은 더 이상 나의 내면을 뒤흔들 수 없었다. 그런 날이 오더라도 하얀 종이를 꺼내 다시 마음을 정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러니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방은 절실하다. 창고이지만 유일하게 내가 될 수 있는 곳, 나만의 방은 더 이상 문학 속 은유가 아니다.



평일엔 아이와 남편이 없는 대부분의 시간을 창고이면서 서재인 방에서 보낸다. 가사 노동은 육아와 식사 관련한 최소의 것으로 한정했다. 청소의 주기는 길어졌고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때가 쌓였을 테다. 집은 늘 아이 물건으로 어수선하고 예전처럼 아름답지도 않다. 하지만 괜찮다. 말끔하게 정돈된 집은 허상일 뿐 진정 원하는 것은 내면의 안정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질서와 안정’은 눈에 보이는 공간이 담보해주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고 독립적인 자아가 만들어주는 것임을 깨닫고 있다.





하재경 작가는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에서 집을 통해 공간의 의미와 사람과 사회와의 관계를 되새겨본다. 집안의 흥망성쇄를 거치며 경험한 결핍과 상실, 자기 몫을 하는 어른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부모와 타인의 자리를 돌아보기까지, 그녀가 거쳐왔던 집들의 이야기는 누구에게든 번지고 스며들 수 있는 무늬를 그려낸다. 그것은 고유하면서도 보편적이다. 그 속에 여성과 쓰는 이로서 공간의 의미를 고민했던 저자의 잠잠하지만 단단한 목소리가 담겨 있다. 그 소리가 가슴 속에 숨겨두었던 욕망과 집에 대한 나만의 이야기를 불러낸다.



‘어떤 이에게는 공간의 독립이 자아의 독립을 의미한다’는 저자의 말에서 공간에 몰두하고, 집이 있지만 진정한 집은 없다고 느꼈던 내 마음의 진위를 발견했다. ‘자기만의 방’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의 획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독립’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자아의 독립이란 경제력에서부터 자유로운 시간의 마련까지 다양한 자립의 힘을 내포하는 일이고. 집은 있으나 ‘자기만의 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 안의 모순이 여기서 발생했다. 내겐 엄마를 필요로 하는 작은 아이가 있고, ‘자아의 독립’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기에.



누군가와 공유하는 공간으로서 집의 의미를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공간이 늘 중요한 문제였듯, 가족과 공유하는 집에 대한 꿈도 내 안에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공간이 주어진다고 모두에게 ‘집’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을 뿐이다. 작은 방 하나라도 누구에게 침해받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 시간과 함께 주어질 때 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공간을 가진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독립과 같이 사는 이들의 배려로 온전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 집을 갖지 못했다.



여전히 나만의 공간을 꿈꾸며 기다리고 있다. 집이란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의 시간이 담기는 공간이다. 그래서 집을 기억하는 것은 하나의 시절을 돌아보게 되는 일이고. '결혼과 출산'이라는 집의 시간은 아직 완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한 시절을 통과하고 나면 다른 의미로 이 집을 기억하게 되지 않을까. 하재경 작가는 다음의 문장으로 글을 맺는다.



"내가 뭔가를 알게 되는 때는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이다.

현재의 집이 가진 의미를 깨닫는 것도 이곳을 영원히 상실한 다음일 것이다.

아직 이 집은 한 시절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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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7-08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춤추는바람 2021-07-08 09:5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