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잔상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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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대일의 조건을 넘어선 사랑은 가능할까.

한 사람이 만약 인간이 아닌 사물, 이면, 신 또는 조국, 어떤 관념에 맹렬히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는 그걸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리고 한 집단이 한 집단을, 이름 없는 한 순교자나 영웅을 기꺼이 추앙하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말할 수 있을까.

어떤 불가항력성, 그러나 무력해지지 않을 용기, 우리가 가장 나약한 순간 발견하게 되는 작은 위로까지 사랑이라 이름한다면 세상에 사랑 아닌 게 있게 될까.

문득 그게 궁금해졌다. 사랑에 관한 이미지들을 찾아가는 데 있어, 그렇다면 사랑이 아닌 이미지는 무엇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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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령 작가의 <사랑의 잔상들>세상에 사랑 아닌 게 있게 될까. (…) 사랑이 아닌 이미지는 무엇일지.”(10)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작가는 십 년간 자신이 겪고 지나온 순간들에서 남은 이미지를 기록하고 간직하면서 그 이미지와 기억이 남겨진 이유는 사랑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가 이미지에 주목하는 이유는 쓴다는 일은 과거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편하는 과정이지만 이미지는 이러한 재편의 과정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서사가 시간의 질서를 따른다면 이미지는 무시간적”(13)이라 서사를 둘러싼 감정은 변하거나 사라지는 반면 이미지는 영원히 남기에 차가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남은 이미지에 대해 쓰는 일은 한 때의 감정을 서술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십 년에 걸쳐 지우고 고쳐져서 남은 책 속의 글은 그가 말한 이미지의 특성처럼 뜨겁기보단 차가운 쪽에 가깝다. 하지만 오래 지속되는 것은 뜨거운 열정이 아니라 적당한 온도의 마음임을 우리는 안다. 찬 기운이 감도는 이 글은회복기에 맞는 바람처럼 은은하고 낯설고 서늘한”(김연수) 설렘을 건넨다.



그가 보여주는 이미지 속에는 여행을 하거나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거나 비밀을 간직한, 이별을 하거나 어떤 기억에서 맴도는 사람이 있다. 작가가 접한 영화와 그림, 사진과 문학을 통해 자기 안에 맴도는 사랑의 이미지를 뜯어보고 이미지 너머로 건너가는 작은 문을 만든다. 그러므로 이 책에 실린 글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과거에 대한 진실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의미이거나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예감이다. 또한 예술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우리가 타인과 세계와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발견한다.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되어 타인의 움직임을 통해 생각하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성찰한다. 그러므로기꺼이 원했던 건 손을 내미는 것.”(12) 그가 어떤 이미지나 기억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조심스레 써 나가길 지속하는 것은, 그렇게 세계와 연결된 속에 있다는 것을 감지하며 다시 한번 손을 내미는 일일 것이다. 손을 내미는 일은 사랑하기의 다른 이름일 테고. 



“차츰 투명한 응시가 과거를 미래로부터 발견해내는 일임을, 다가올 이미지를 기다리며 무언가를 써나가는 작업, 글을 통해 하나의 이미지를 영속시키는 일이 사랑의 행위임을, 사랑하는 사람이 취하는 하나의 간절한 자세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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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통해 자신만의 이미지를 제대로 바라보고 그걸 우리 앞에 다시 펼쳐 보여주는 장혜령의 글은, 글 자체로 사랑을 실현하고 있다. 연결되고 싶은 마음, 연결되어 있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 또한 사랑이라 느낀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동안 저자의 이야기와 생각에 깊숙이 연결되는 것 같았고 그걸 통해 그가 만난 세계에도 어렴풋이 닿은 것 같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부재했던 (잊혔던) 이미지와 기억이 내 안에서 되살아났다. 장혜령의 글을 통해, 장혜령의 생각을 빌어 사고하고 글을 쓰는 경험을 했다. “우리는 어쩌면 태어나지 않은 사람, 또는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만난 적 없는 사람의 언어를 받아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감정을 느낄 때, 그것은 사실 내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그이에게서 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그의 예언처럼. (75)



그의 글은 가위처럼 봉합되어 있던 과거의 기억을 풀어 지워버렸거나 부재했던 기억으로 우리를 이끈다. 하지만 내내 우리와 타인, 우리와 세계 사이로 길을 내는 바느질을 한 땀 한 땀 이어간다. 책을 읽는 동안 그 어느 때보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타인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내 안의 사랑의 잔상들을 불러일으키는 책이자, 부재했다가 나타나거나 어딘가 있지만 아직 내게 당도하지 못한 기억을 더듬어 글로 써보고 싶어지게 하는 책이다. 사랑했던 모든 것에 대한 기억을, 그래서 슬프면서 아름다운 기억을 나만의 방식으로 기록해두고 싶다고 갈망하게 한다. 이런 책이 한 권 더 있었다. 목정원 작가의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아침달)이라는 책이다.





바슬라브 니진스키에 대한 영상을 보고춤추는 사람의 몸에 매료되었던 목정원 작가는 대학에서는 미학을, 프랑스로 건너가 대학원에서는 공연 예술을 공부한 사람이다. 책에는 무대 위에서사라지는 예술’, 공연에 몸담게 된 이야기와 배우가 아닌 관객이 되어, 무대에 올려지는 순간에만 목도할 수 있는 아름다움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이 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는 막이 오르기 전 어둠에 잠긴 무대를 앞에 두고 숨이 막힐 것 같던 기분, 먼 곳의 아름다움을 불러다 눈앞에서 펼쳐주는 재현의 순간 무대를 끌어안고 울고 말았던 경험, 공연이 끝나면 기억이 사라질까 서둘러 돌아와 글로 남겨야 했던 일까지. 공연이라는 시간 예술이 지닌 한계와 무한한 가능성, 그 속에서만 가늠해볼 수 있는 세계의 의미와 깊이, 그리고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해 썼다.



영화를 전공한 장혜령 작가가 이미지에서 맴돌고 순간에 탄생했다 서서히 옅어져 가는 이미지를 언어로 옮기는데 골몰했다면 공연 예술을 공부하고 노래를 부르는 목정원 작가는 무대를 통해 자신에게 건너온 이야기, 즉 목소리와 몸짓을 글로 풀어냈다. 하지만 두 작가 모두 사라지고 마는 것을영원으로 변환시키고자 언어에 기댄다는 게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결은 다르지만슬프면서 아름다운사라짐의 속성에 우리를 주목시킨다. 또한 두 책 모두 생에서 가장 뜨겁게 관통했을 이십 대에서 삼십 대에 걸친 시기, 십 년간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기록한 글이다. 적어 낸 것이다.  그래서인지 여행과 사람, 사랑이라는 주제에서도 겹친다. 가장 열렬하게 세상과 나를 만나는 시기라 힘겹고 외롭지만 그래서 더 빛나는 시절의 이야기, 모두에게 단 한 번뿐인 시기가 담겨 있어 소중하고 귀하게 읽히는지도 모르겠다.



신기한 건 책의 제목처럼사랑의 잔상들을 읽고 나면 책 속에서 마주했던 잔상들이 머릿속을 부유하고,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을 읽고 나면 아름답지만 슬프기도 한 것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침묵하고 싶어 진다.





<사랑의 잔상들>의 에필로그에는 책에 담긴 몇몇의 글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뒷 이야기가 있다. 처음 썼던 글이 지워지고 어떻게 고쳐졌는지 보여주는 글에서 십 년의 시간을 통해 일시적인 감정을 지우고 이미지가 지닌 영원성, 영원의 메시지를 찾으려 했던 그의 노력을 엿보게 된다. 자신을 쓰는 글에서 밖을 내다보는, 이미지 너머로 향해 가는, 그 방향을 바라보며 기어이 어떤 문을 그려보려는 과정을 말해준다. 그것은 에세이 쓰기의 귀한 교본이 되어준다. 글이 어떻게 글이 될 수 있는지, 표현이 어떻게 표현이 될 수 있는지 알게 해 준다. 사랑과 기억이라는 개인적인 이미지에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타인과 세계로 연결되는 이 글을 통해 저자는 나를 지우며 쓰는 일, 타인을 위한 자리를 만드는 글쓰기에 대한 지침을 건넨다.



“다 보여선 안 된다는 것은 비밀을 지킴으로써 당신이 내 안에 머물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어쩌면 씁쓸하겠지만, 내가 결코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 당신이 그 안으로 들어와 해석할 공간을 남기는 일이다.” 213

글 속에서 주체, 즉 내 몸을 비운다는 것은 언제든 문장 사이를 떠다닐 수 있는 자유를 얻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문장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자 세상은 전과 다르게 보였다.” 218



이름 붙일 수 없었던 무수한 마음을 사랑이라 불러도 될 것 같다. 노트북에사랑의 잔상들이라는 폴더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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