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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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서로 알지 못하는 것


“두 사람이 서로 알지 못하는 게 뭘까? 그는 그녀가 손가락을 꼭 오므리고 잠을 자며, 악몽을 꿀 때면 경련 증세를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멜론 중에선 캔털루프보다 허니듀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병원에서 돌아왔을 때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 처음으로 한 일은 그들의 물건을 골라 복도에 마구 던져버리는 것이었음을 알았다. 책꽂이의 책, 창턱에 놓인 식물, 벽에 걸린 그림, 탁자에 놓인 사진, 가스레인지 위의 고리에 걸어놓은 솥과 냄비 따위를 말이다. 슈쿠마는 한 발짝 비켜서서 그녀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차근차근 옮겨 다니는 것을 지켜보았다. 분이 풀리자 쇼바는 거기에 서서 자신이 만들어놓은 산더미를 응시했다. 혐오스럽다는 듯이 입술을 뒤로 당겼는데, 슈쿠마는 그녀가 침을 뱉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울기 시작했다.” 36~37쪽


항상 문제를 대비하고 어떤 상황도 거침없이 다룰 수 있었던 쇼바였지만 아이를 잃고 나서부터 그녀는 많은 것에 무심한 채 일에 매달렸다. 슈쿠마는 한동안은 그런 그녀를 웃게 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이젠 침묵하는 데 익숙해져 버렸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지만 아이의 죽음이라는 사건 이후 각자의 내면에 방을 만들었고 상대에게 문을 열지 않는 관계가 되었다. 작업하는 방으로 쇼바가 찾아오는 유일한 시간을 슈쿠마가 두려워하게 되기까지 두 사람이 서로 알지 못하고 있었던 건 뭘까? 결정적인 사건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겪고도 그 기억을 밀어내며 관계는 나아갈 수 있을까. 봉합될 수 없는 틈을 가지고도 관계는 지속될 수 있는가. 줌파 라히리의 소설집 <축복받은 집>(서창렬 옮김, 마음산책)에 실린 단편들은 문득문득 내내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일시적인 문제’에서 아픔을 피하느라 서로의 마음을 읽는 법을 잃어버린 쇼바와 슈쿠마처럼, 이 책에 실린 여러 단편에는 소통하지 못하는 커플이나 관계가 등장한다. 그들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미묘하고 미세한 균열을 경험하고 상처 입는다. ‘질병 통역사’에서 여행 가이드 카파시씨는 미국에서 온 젊은 부부의 아내 미나에게 친밀함에 대한 욕망을 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긋나면서 그녀에게 모욕감을 느낀다. ‘섹시’에서 미랜다는 유부남인 데브를 만나 그에게서 들었던 “당신은 섹시해요.”라는 말을 의미 깊게 받아들이지만 정작 데브는 그 말을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남편을 따라 고향을 떠나 익숙한 삶과 분리된 채 사는 센 아주머니는 운전을 할 수 없어 더욱 고립된다.(‘센 아주머니’) ‘축복받은 집’의 산지브는 부모의 소개로 만나 결혼한 트윙클과 성격 차이를 깨달으며 후회의 감정에 빠져든다. 가장 가까운 관계나 친밀함을 기대했던 상대에게서 느끼는 단절감은 깊고 날카로우며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하지만 그런 경험은 생각보다 자주 삶의 도처에서 일어난다.


우리가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각자의 머릿속에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영화관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그곳을 볼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다. 거기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아무리 열심히 말한다 해도 언어가 지닌 불완전성 때문 에라도 완전한 소통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상대가 누구든 관계에서의 단절과 오해는 불가피하고 사람들과 함께 사는 한 그로 인한 상처는 계속될 것이다. 소통 불능은 시지프의 바위처럼 살아가는 동안 짊어져야 할 바위일지도 모른다. 그 형벌을 어떻게 감내할 수 있을까. 줌파 라히리는 어긋나는 관계를 보여주면서 절망하기보단 그럼에도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 같다. 타인을 알 수 없고 완전히 맞닿을 수 없으므로 그 불가능 때문 에라도 더 열심히 사랑해야 한다고. 어느 시인이 말했듯 결국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므로. 그러므로 ‘그 말을 발음해야만’하는 것처럼.*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난다)



연민의 거리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줌파 라히리는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의 답을 눈앞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 시선을 멀리 보내 기대하지 않았던 관계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사랑으로 그 가능성을 믿어보려 한다. 소설에서 쇼바와 슈쿠마, 산지브와 트윙클, 센 부부처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밀착되어 그들 사이의 틈새가 더 아득하게 느껴지는 관계에서는 사랑의 지속이 막막하고 쓸쓸하게 느껴지는 반면, 서로를 관찰하고 존중할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관계 - 피르자다 씨와 나(‘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 센 아주머니와 엘리엇, 크로프트 부인과 나(‘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에서는 (비록 삶의 한 면 일지라도) 진실된 이해와 존중이 가능할 수 있겠다는 희망의 기운을 감지하게 된다.


피르자다 씨가 (미국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고맙다’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과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딸을 그리워했던 마음이 무언지 알 수 없었던 어린 ‘나’가 그와 헤어진 후 그 감정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겠다고 느끼는 것처럼. 백 살이 넘은 고집스러운 크로프트 부인에 대한 걱정으로 밤마다 일정 시간 그녀의 곁에 머물며 그녀의 지난 한 세기를 그려보려 애쓰고, 그 나이에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챙겼던 그녀에게 애정과 존경을 품는 ‘나’처럼. 어떤 관계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해줄 수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집은 내밀한 관계에서의 소통 불능에 아파하며 그 사이의 어긋남을 어떻게 봉합하며 나아갈지에 대한 질문과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조금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다른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곁에 있는 이를 다시 바라보게 해주는 연민의 거리를 획득하려는 노력으로도 읽힌다.


“그 구두에 부드럽게 발을 밀어 넣는 그녀의 모습을 생각해보았다. 그 모습에서 이 집으로 이사 온 이래 자신이 줄곧 느꼈던 짜증의 감정 대신에, 그녀가 그 구두를 신고 곡선형 계단을 허겁지겁 뛰어 내려가고, 그러다가 목조 바닥을 약간 긁어버리는 모습이 머리에 떠오르며 애틋한 아픔을 느꼈다. 립스틱을 고쳐 바르려고 화장실로 달려가고, 사람들에게 외투를 내주려고 또 달려가고, 마침내 마지막 손님이 떠나고 난 다음 체리목 테이블로 달려가 집들이 선물을 열어보는 모습을 떠올리자 그 아픔은 더욱 커졌다. 결혼 전 통화를 끝내고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 느끼곤 했던 아픔과 같았다. 그녀를 배웅하고 공항에서 돌아오는 차 속에서 이륙하는 비행기를 보며, 저 하늘의 어떤 비행기에 트윙클이 타고 있을까 궁금해할 때 느꼈던 것과 똑같은 아픔이었다.” 246쪽


<축복받은 집>에서 산지브는 자신과 성향이 다른 트윙클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다가도 그녀의 구두를 보며 ‘애틋한 아픔’을 느낀다. 그녀의 모습에 피곤해하면서도 상처 주지 않으려 애쓰는 그의 모습에서 사랑의 지속 가능성을 읽고 싶다. ‘애틋한 아픔’이란 섭섭하고 안타까워 애가 타는 듯한 아픔이다. 상대의 구두에 자신의 발을 넣어보듯 상대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해 아파할 수 있다면, 연민의 감정을 품을 수 있다면 사랑이라는 감정이 가족과 생활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낡아갈지언정 고갈되진 않을 거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고 나면 상처받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고, 그런데도 사랑하려 애써보는 게 우리의 삶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어쩌면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의 나와 말라처럼, 중매로 결혼해 한동안 떨어져 있었던 탓에 어색한 두 사람이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익숙하고 가까운 관계로 깊게 연결되는 것처럼, 사랑이란 상처의 자리에서 당장의 개선을 바라는 게 아니라 때로는 긴 시간을 기다리며 먼 길을 돌아서라도 상대를 향해 걸어가 보겠다고 다짐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것


사랑하려는 우리 사이엔 테이블이 필요하다. 서로에게 적당한 거리를 만들어주면서도 마주 볼 수 있게 해주는 테이블이. 두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 앉더라도 서로의 기억을 같이 바라보며 울고 웃어줄 수 있는.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물리적 의미와 함께 상대에 대한 배려와 인내, 그리고 ‘애틋한 아픔’을 품어보려는 감정적 노력까지 포괄하는 것이리라. 시간을 내어 그 테이블에 앉고 불편하더라도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며 귀를 기울여주는 마음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슈쿠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쇼바의 접시 위에 자신의 접시를 포개었다. 그는 접시를 들고 싱크대로 갔지만, 수도꼭지를 틀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깥의 저녁 날씨는 아직 포근했다. 브래드포드 부부가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스래드포드 부부를 지켜보고 있을 때 방이 깜깜해졌고, 그는 몸을 돌렸다. 쇼바가 전등을 끈 것이다. 그녀는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 앉았고, 잠시 뒤 슈쿠마도 쇼바와 자리를 같이했다. 두 사람은 이제 자신들이 알게 된 사실 때문에 함께 울었다.” 45쪽


사랑은 애틋한 아픔을 느끼는 연민의 마음에서 간신히 이어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은 함께 울어주는 것일 테다. 그런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은 함께 웃는 일일 테고. 폐허 위에서도 지속되는 것이 삶이라면, 상처 위에서도 피어나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므로 삶의 조각을 공유해주는 이들을 최선을 다해 사랑해보려는 노력이 우리에게 남아 있길 바란다.


인도 이민자 출신 미국 작가 줌파 라히리의 소설에는 인도인이 등장하고 그들의 서사가 주를 이뤄 ‘이민자 소설’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작가 스스로 ‘이민자 소설’이라는 틀을 거부했다. 그렇다. 관계 맺고 소통하며 상처 입으면서도 사랑하는 법을 모색하는 것은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이의 삶에 보편적으로 거듭되는 일이다. 보편적 삶의 편린이 담긴 이 소설이 차가우면서도 뜨겁게, 담담하면서도 아프게 읽힌다. 줌파 라히리의 세밀하고 촘촘한 묘사는 때로 숨이 막힐 정도로 우리를 빨아들인다.



*'우리 사이엔 테이블이 필요하다'는 제목은 장혜령 작가의 ‘단 하나의 테이블’ <사랑의 잔상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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