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계획 중 하나인 버지니아 울프 전작 읽기를 시작했다. 울프 읽기에 결정적 방아쇠를 당긴 것은 올리비아 랭의 <강으로>다.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한 가장 지적인 여행'이라는 부제처럼 올리비아 랭을 우즈 강으로 이끌었고, 물줄기를 따라 걷는 내내 그녀의 마음을 붙잡아 준 건 버지니아 울프다. 강을 따라 걷는 여정에는 사멸한 존재를 좇아 예술과 삶의 의미를 길어올리는 사색만이 가득하다. <강으로>의 구석구석에서 울프의 작품과 삶의 편린이 등장하니 책을 읽고 나면 울프의 소설과 그의 생애가 더 궁금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책꽂이 있는 <댈러웨이 부인>부터 펼쳐 보았다.
그 유명한 문장이 흘러나왔다. “꽃은 자기가 사오겠노라고 댈러웨이 부인은 말했다.”(p.7) 철학자 김진영이 시한부 선고를 받고 삶의 마지막 순간의 심경을 담담하게 기록한 책 <아침의 피아노>에도 인용된 구절이다. 그 책에서 이 문장을 마주했을 때, 앞뒤 맥락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꽃을 사겠다는 건 삶을 사랑한다는 의미다. 그 문장을 빌어 삶에 대한 열정을 표현하고 싶었던 철학자의 심경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댈러웨이 부인>의 주인공 클라리사는 그런 사람이다. 삶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사람. 자기 앞에 펼쳐진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사건과 순간 순간 미세하게 번져 나가는 공기와 분위기, 감정 변화를 세밀하게 포착해내는 사람이다. 그녀의 머리 속에서 매 순간 솟아나는 감정과 생각을 고스란히 쏟아놓은 듯한 문장들, 섬세하고 시적인 단어들로 수 놓아진 문장들이 끝없이 펼쳐졌다. 여러 해 전, 몇 번이나 읽으려다 실패하고 말았던 책이다. 도저히 몰입할 수 없고 생각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울프의 문장, 아니 주인공 클라리사의 의식의 흐름 속으로 마법에 걸린 듯 빨려 들기 시작했다.
우린 참 바보라니까, 그녀는 빅토리아 스트리트를 건너며 생각했다. 왜 그렇게 삶을 사랑하는지, 어떻게 삶을 그렇게 보는지, 삶을 꿈꾸고 자기 둘레에 쌓아 올렸다가는 뒤엎어 버리고 매 순간 새로 창조하는지, 하늘이나 아실 일이다. 더없이 누추한 여인들, 남의 집 문간에 앉아 있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이들도 (자신의 몰락을 마시는 거지) 마찬가지야. 저 사람들도 인생을 사랑하거든. 바로 그 때문에 의회 법으로도 다스릴 수 없는 거야. 사람들의 눈 속에, 경쾌한, 묵직한, 터벅대는 발걸음 속에, 아우성과 소란 속에, 마차, 자동차, 버스, 짐차, 지척거리며 돌아다니는 샌드위치맨, 관악대, 손풍금 속에, 승리의 함성과 찌르릉 소리, 머리 위를 날아가는 비행기의 묘하게 높은 여음 속에, 들어 있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이, 삶이, 런던이, 유월의 이 순간이. p.9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지금 여기 이것, 그녀 앞에 있는 것이었다. 택시를 탄 뚱뚱한 저 부인이라든가. 그렇다면 문제가 될까? 그녀는 본드 스트리트 쪽으로 걸어가며 계속 생각했다. 그녀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 이 모든 것은 그녀 없이도 계속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 점이 한스러운가? 또는, 죽으면 모든 것이 완전히 끝이라고 믿는 편이 위로가 될까? 하지만 어떻든 런던의 길거리에, 사물들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흐름 속에,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고, 피터도 살아 있으며, 서로의 속에 살아 있었다. 그녀가 고향집 나무들의 일부이듯이, 저기 보기 싫게 잡동사니처럼 늘어서 있는 집들의 일부이고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사람들의 일부이듯이. 그녀는 자신이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 엷은 안개처럼 펼쳐져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나무들이 안개를 떠받치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가지 위에 그녀를 받쳐 주고 있었지만, 그 안개는, 그녀의 삶은, 그녀 자신은 끝없이 멀리 퍼져 나갔다. p.16
일상의 평범한 풍경 앞에서 일순간 솟아나는 삶에 대한 사랑과 희열이 그녀의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런던 거리를 걸으며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따라 그녀의 사고와 의식은 자유롭게 유영했다. 나는 그녀의 눈과 귀, 코와 입이 된 것 같았다. 아! 이런 생생함이라니! 그녀에게 푹 빠지고 말았다.
이제 종종 자신이 걸치고 있는 몸(그녀는 네덜란드 그림을 보려고 멈추어 섰다), 이 몸과 그 모든 기능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아무것도 아니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듯한 기묘한 느낌이었다. 보이지도 않고 알려지지도 않은 존재. 더는 결혼을 할 것도 아니고, 아이를 낳을 것도 아니고, 단지 사람들과 더불어 본드 스트리트를 걸어가는, 이 놀랍고도 다분히 엄숙한 행진에 동참하고 있을 뿐이야. 클라리사조차도 더는 아니고 그저 미세스 댈러웨이, 리처드 댈러웨이의 부인으로서. p.16
클라리사는 거리의 활기 속에 한껏 들떠 올랐다가도 젊음을 잃어버린 존재, 노년과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는 깨달음 속에서 쓸쓸함을 떨쳐버리지 못하며 위축되기도 한다. 그런 급작스런 심경의 변화마저 낯설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 내 안에서 타올랐다 꺼져버렸다, 다시 타올랐다, 잦아들길 반복했던 감정의 기색과 닮아 있었다. 처음 이 책을 읽으려 했을 때에는 알 수 없었던 감정이었을 것이다. 이제야 댈러웨이 부인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경험이 내게도 축적된 것일까.
이것이 그녀의 삶이었다. 현관 테이블 위로 몸을 굽히며 그녀는 마치 그 삶의 영향 아래 절하는 듯 축복받고 정화된 느낌이 든 나머지, 전화 메시지가 적힌 수첩을 집으면서 이런 순간은 마치 생명 나무의 꽃봉오리 같아, 하고 중얼거렸다. 어둠 속에 피어나는 꽃이지, 그녀는 생각했다(마치 탐스러운 장미가 그녀만을 위해 피어난 듯했다). p.42
클라리사는 현관을 들어서며 익히 알고 있는 분위기, 바깥의 생동감과는 전혀 다른 정돈된 집안의 분위기에 ‘써늘’함마저 느낀다. 하지만 그 순간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이라는 인정 속에 피어나는 ‘꽃’을 발견한다. 그녀만을 위한 탐스러운 장미를. 이것은 자기만의 가정을 꾸려본 여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완벽하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지만, 밖에서 돌아와 현관으로 들어설 때 우리를 맞이하는 안도감 속에는 희미한 행복이 묻어 있다. 내 집, 내가 가꾼 가정만이 나에게 보여줄 수 있는 미소, 그걸 클라리사의 표현을 빌어 ‘꽃봉오리’라고 불러야겠다.
“웨스터민스터에 살다 보면-몇 년이나 되었지? 20년도 넘었어-이렇게 차들이 붐비는 한복판에서도, 또는 한밤중에 잠이 깨어서도, 간혹 특별한 정적 내지는 엄숙함을 느끼게 되지. 확실히 그렇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정지의 순간, 빅벤이 시종을 치기 직전의(독감 때문에 그녀의 심장이 약해져서 그런 거라고들 하지만) 조마조마함. 아, 마침 종이치네! 종소리가 퍼져 나간다. 먼저 음악적인 예종이 울리고, 이어 시종이 친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종소리가 겹겹이 묵직한 원을 그리며 공중으로 흩어져 간다. 우린 참 바보라니까, 그녀는 빅토리아 스트리트를 건너며 생각했다. 왜 그렇게 삶을 사랑하는지, 어떻게 삶을 그렇게 보는지, 삶을 꿈꾸고 자기 둘레에 쌓아 올렸다가는 뒤엎어 버리고 매 순간 새로 창조하는지, 하늘이나 아실 일이다.” p/8~9
*사소한 사건이 발생할 때, 미세한 찰나에 번져 나가는 분위기와 감정의 변화를 극도로 세밀하게 포착해낸다. 인물의 심리 변화가 인물 안에서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세계-장소, 소리, 풍경 등과 같은-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벌어진다.
"사랑은-하지만 또 다른 시계, 빅벤보다 언제나 2분 늦게 치는 시계 종소리가 들려왔다. 발을 질질 끌며 들어와 무릎에 가득 담아 가지고 온 잡동사니들을 쏟아 놓는 듯한 소리였다. 마치 빅벤은 워낙 위엄이 있으니까 엄숙하고 정의롭게 법을 제정하는 것은 극히 지당하지만, 자기는 자질구레한 것들을-마셤 부인이니 엘리 헨더슨이니 아이스크림 담을 유리잔들이니-기억해야만 한다는 듯이.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이 밀려들어와, 바다 위에 금괴처럼 납작하게 떠 있는 빅벤의 엄숙한 종소리가 일으킨 항적을 따라 철썩이며 춤추었다." p/168~169
*클라리사는 민감하게 사물을 감각하고 이를 통해 생각을 펼쳐 나가는 사유방식을 보여준다. ‘빅벤보다 2분 늦게 치는’ 종소리는 빅벤이 가진 엄숙함 뒤로 일상의 잡동사니를 다시 몰고 온다. 잠시 진지한 문제에 골몰해 있던 클라리사는 그 소리와 함께 당장 처리해야할 자질구레한 일을 떠올린다.
<댈러웨이 부인>에서 발견되는 두드러진 특징은 인물의 심리 변화가 인물 안에서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세계-장소, 소리, 풍경, 등-의 자극과 관계 맺음 속에서 벌어진다는 것이다. 인물들은 풍경의 변화나 사소한 사건이 발생할 때, 미세한 찰나에 번져 나가는 분위기를 감각하고 섬세하게 반응한다. 그로 인해 생생한 생명력이 부여된 인물이 ‘클라리사’다. <도시를 걷는 여자들>에서 로런 엘킨은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낸다. 20세기 문학에서 최고의 플라뇌즈라 할 인물이다.” 라고 말했다. 또한 “도시의 분위기와 강렬하고 구체적인 관계를 맺은 듯한 느낌”을 클라리사에게 부여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도시를 걷는 여자들> ‘플라뇌르’는 ‘산보자(산책자)’라는 의미를 지닌 프랑스어로 남성형이다. 로런 엘킨의 저서는 ‘플라뇌즈’라는 여성형 명사는 왜 없는지에서 시작되며, 역사, 문화, 예술사를 훑으며 ‘플라뇌즈’라 부를 만한 여성을 탐색한다.)
"서머싯 하우스구나. 아주 훌륭한 농부가 되어야지-이런 생각이 든 것은 미스 킬먼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거의 전적으로 서머싯 하우스 때문이었다. 그 회색 건물은 너무나 훌륭하고 진지해 보였다. 그녀는 사람들이 일을 한다는 그 느낌을 좋아했다. 스트랜드 거리의 인파에 맞서고 있는, 회색 종이로 오린 듯한 교회들도 좋았다. 웨스트민스터와 사뭇 달라, 그녀는 챈서리 레인에서 버스를 내리며 생각했다. 아주 진지하고, 아주 바쁜 동네 같아. 한마디로, 그녀는 직업을 가지고 싶었다. 의사나 농부가 되어 가능하면 의회에도 들어가고 싶었다. 모두 스트랜드 거리 때문이었다." p/180
*눈 앞의 풍경에서 비롯되어 확장되고 심화되는 인물의 심리를 표현하고 있다. 머리 속에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것은 ‘풍경’에 있다고 말하는 듯 싶다.(도시와 인물 사이에 강렬하고 구체적인 관계가 맺어짐을 보여준다.) 멈추어 있던 생각을 깨워 ‘사고’의 창고 속으로 뛰어들게 하고, 상상력에 발동을 거는 일은 ‘풍경’ 속을 거닐 때(산책 또는 거리 헤매기) 일어난다고. ‘플라뇌르’로서의 버지니아 울프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클라리사 뿐만이 아니라, 피터 월시, 리처드 댈러웨이, 엘리자베스 댈러웨이 등, 소설 속 인물들은 거리를 걸으며 도시와 공명하며 모호했던 생각과 감정에 구체성을 갖추게 된다. 우리가 소설을 통해 마주하는 감정은 친숙한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늘 ‘느낌’이라는 모호한 정서로만 다가왔었다. 그런데 울프는 소설 속 인물들의 감정을 단지 ‘느낌’이라는 신비로운 영역에 남겨두지 않고 명확하게 이름을 붙이는데 열광적인 노력을 쏟는다. 의미를 축소시키지 않으면서 정확한 단어를 찾으려 했던 그 노력이 소설을 읽는 우리에게 그 감정을 또렷하게 읽어낼 수 있게 하는 생생함을 선사한다.
"그녀는, 섀프츠버리 대로로 올라가는 버스에 앉아서 말했다. 자기는 어디에나 있는 것 같다고. <여기, 여기, 여기>가 아니라(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의자 등받이를 툭툭 쳤다) 어디에나. 섀프츠버리 대로를 올라가면서, 그녀는 손을 내둘렀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이라고. 자기를 알려면, 아니 다른 누구라도, 그들을 완성하는 사람들, 장소들을 찾아내야 한다고. 그녀는 한 번도 말을 건네 본 적이 없는 사람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어떤 여자, 계산대 뒤에 있는 어떤 남자, 심지어 나무나 헛간과도 묘한 친화력을 느낀다고 했다. 그것은 결국 초월적 이론으로 발전해서, 한편으로는 죽음에 대한 공포도 작용한 나머지, 그녀는 이렇게 믿기에, 혹은 적어도 믿는다고(자신의 회의주의에도 불구하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즉, 우리의 외현, 즉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나머지 부분에 비하면 너무나 일시적이며, 그 보이지 않는 부분은 널리 퍼져 나간다고,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살아남아서 이 사람 혹은 저 사람과 어떻게인가 결부된 채 다시 나타나거나, 심지어 죽은 후에 특정한 장소들에 출몰하게 된다고……." p/200
*울프의 정체성에 대한 생각이 ‘클라리사’라는 캐릭터에 반영된 듯 보인다.
다른 책을 통해 얻은 ‘버지니아 울프’와 그의 작품에 대한 인상은 조각 조각으로 흩어져 따로 존재했다. 그런데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흩어져 있던 조각을 한나씩 연결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울프 언어의 정확성과 구체성, 울프라는 작가의 정체성과 그녀에게 있어 ‘산책’의 의미 등, 이제야 그녀 자신의 문장으로, 직접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이 건네는 기쁨이라니. 책과 책이 연결되는 순간을 만끽하며 책을 쓴 저자들과 책을 읽는 이의 일부가 연결된다는 묘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어디에나 자신이 있다고, 모든 것이 자신이며, 사람들 사이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클라리사의 말이 그런 내 마음으로 스며 든다.
‘길잃기(걷기)’를 통해 정체성을 길어올렸던 울프(울프가 반영된 인물 ‘클라리사’)에 대해 서술한 리베카 솔닛의 글(<길 잃기 안내서>)과 '산책자(플라뇌즈)’로서 울프(또는 ‘클라리사’)가 걷기를 통해 도시와 교감한 방식에 대해 쓴 로런 앨킨의 글(<도시를 걷는 여자들>)을 덧붙여본다.
“날이 좋은 4시에서 6시 사이에 집을 나설 때, 우리는 친구들에게 알려진 자아를 잠시 벗어둔 채 익명의 보행자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화국 군대의 일부가 된다. 자기만의 방에서 고독을 맛본 뒤인지라, 그들과의 사교가 참으로 기껍다. [……] 우리는 그들 각각의 삶으로 조금이나마 들어가 볼 수 있고, 그 경험만으로도 자신이 실은 하나의 영혼에 매인 존재가 아니라 그저 잠시라도 타인의 심신을 걸쳐볼 수 있는 존재라는 환상을 품게 된다.” 울프에게 길 잃기는 지리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체성의 문제, 열렬한 욕망의 문제, 심지어 다급한 필요의 문제였다. 아무도 되지 않는 동시에 아무나 될 수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들이 생각하는 나를 상기시키는 일상의 족쇄를 떨치고 싶다는 필요성의 문제였다. 이런 정체성의 용해는 낯선 장소나 외딴 은거지를 찾는 여행자가 빈번히 겪는 일이지만, 울프는 의식의 미묘한 뉘앙스를 예리하게 인식하는 능력이 있었기에 낯익은 도시의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안락의자에서 잠시 고독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알아낼 수 있었다. 울프는 낭만주의자는 아니었다. 에로틱한 사랑이라는 길 잃기, 십칠 년 만의 노래를 기약하며 땅속에서 잠자는 매미처럼 내 안에 이미 숨어 있던 나 자신이 되게끔 나를 이끌어내는 연인의 손길에 따르는 사랑, 상대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미스터리 속에서 나 자신의 미스터리에 빠지고 싶은 욕망이기도 한 사랑을 칭송한 사람은 아니었다. 울프의 길 잃기는 소로의 길 읽기처럼 고독했다. p/33~34
<길 잃기 안내서>, 리베카 솔닛
“훨씬 더 나이를 먹은 뒤에,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낸다. 20세기 문학에서 최고의 플라뇌즈라 할 인물이다. 댈러웨이 부인이 소설에서 가장 처음으로 하는 대사가 이렇다. “‘전 런던 거리를 걷는 게 좋아요.’ 댈러웨이 부인이 말했다. ‘시골길을 걷는 것보다 훨씬 좋아요.’” 울프에게 혼자 도시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 상상해보지 못한 자유였고, 울프가 본격적으로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계기가 이사였다면 글쓰기의 소재를 제공해준 것은 산보였다. 거리에는 울프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울프는 머릿속에서 장면들을 그려보았다. 주변에서 보는 삶이 “거대하고 불문명한 재료 덩어리” 같았고 “나에게 전달되어 그것에 상당하는 언어가 되는 듯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 궁금해하다 보니 “삶 자체”를 종이 위에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의 문제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삶의 열정”인 도시를 계속 돌아보고 또 돌아보게 되었다. 거리의 소음도 일종의 언어여서 이따금 울프는 멈추어 서서 귀 기울이고 포착하려 했다. p/127~128
울프는 거리에서 이야기를 캐냈고 자기가 관찰한 사람들, 걷고 물건을 사고 일하고 멈추어 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책을 채웠다. 특히, 여자들. 기차에서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묘사하면서 울프는 이렇게 선언했다. “모든 소설은 반대편 구석의 늙은 여자로부터 시작한다.” 아니면 상점의 젊은 여자. “나는 나폴레옹의 150번째 전기나, Z교수가 심혈을 기울이는 키츠가 밀튼을 어떻게 전도하여 사용했는지에 대한 70번째 연구보다는, 그 여자의 진짜 삶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p/129
도시와의 접촉 지점에서 우리가 줄여서 ‘느낌’이라고 부르는 모호한 정서가 솟아난다. 가장 흥미로운 것들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우리는 샛길에 공식 명칭을 부여하듯이 정식으로 이름을 붙여서 신비감을 줄여보려 한다. 의미를 축소시키지 않을 단어를 찾으려고 애쓴다. 바로 이게 울프가 작가로서 하려고 했던 일이다. p/132~133
형태가 바뀌고 의미가 바뀌는 아직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도시 산보자를 감싸고 안으로 스며들고 이해할 수 없는 계약으로 묶어 놓는다. 울프에게는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늘 알 수 없는 느낌에 알맞은 형태를 찾아내는 것이 평생의 과업이 될 것이었다. p/136
<도시를 걷는 여성들>, 로런 앨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