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옷장 - 개정판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칼 같은 글쓰기, 아니 에르노


스웨덴 한림원은 지난 10월 6일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했다. “개인적인 기억의 뿌리와 소외, 집단적인 구속을 드러낸 용기와 꾸밈없는 날카로움”을 수상 이유로 꼽았다.



아니 에르노는 1940년 릴본에서 태어나, 노르망디의 이브토, 카페 겸 상점을 운영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문학을 공부한 후, 정식 교원, 현대문학 교수 자격증을 획득했고 1974년 <빈 옷장>으로 등단했다. <남자의 자리>로 르노도상을, <세월>로 마르그리트 뒤라스상, 프랑수아 모리아크상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는 <단순한 열정>, <사진의 용도>, <한 여자>, <부끄러움>, <다른 딸>등이 있다.



아니 에르노는 자전적 경험에서 사적인 감정을 배제한 채 사건의 경험과 진실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글을 써 왔다. 개인의 특수한 경험을 밀도 있게 파헤친 그녀의 작품은 개인의 문제가 계급과 계층, 사회 문화적 구조와 동떨어져 발생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런 그녀의 글은 ‘칼 같은 글쓰기’로 알려져 있다. 자신의 상처에 칼을 대어 그 핵심을 파고 넓혀 밖으로 꺼내 놓는 방식. “글쓰기는 현실을 보여 주기 위해 겉으로 드러난 것들을 찢는”(<진정한 장소>, 신유진 옮김, 1984books) 행위라고 말하는 그녀는 자신에게 깊게 영향을 미친 사건이나 상황을 낱낱이 드러내어 개인적 경험에 담긴 사회·정치적 의미를 묻는다.



아니 에르노 문학의 시초, <빈 옷장>


작가의 데뷔작 <빈 옷장>은 부모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신분 상승을 꿈꾸는 주인공의 성장 과정을 다룬다. 불법 낙태 시술이라는 충격적 장면에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사회가 침묵하는 것에 저항하는 에르노식 문학의 시초를 보여준다.



도시의 변두리에서 빈민층과 노동자를 대상으로 카페 겸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부모를 둔 ‘드니즈 르쉬르’가 이 책의 주인공이다.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던 소녀는 사립학교로 진학하고 사춘기를 지나면서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학교와 선생님, 중산층 가정이라는 청결하고 예의 바른 세계와의 대면을 통해 자신과 부모, 동네 사람들을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에 수치심이 자란다.



어쨌든 그들은 작은 소매상이자 동네 카페 주인, 벌이가 변변치 않은 초라한 사람들이었고 나는 그것을 보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음탕한 년이 되는 것도, 숨기는 것도, 존재 자체가 순수한, 가볍고 자유로운 반 친구들 앞에서 더럽고 무거운 여자애가 되는 것도 이제 그만 충분하다. 나는 부모님을 더 무시해야만 했다.

113쪽, <빈 옷장> 아니 에르노, 신유진 옮김, 1984 books



세상이 우월한 세계와 열등한 세계로 나뉘어 있음을 알게 된 소녀는 부모의 세계로부터 고통스러운 분리를 시작한다. 드니즈는 부모와 동네 사람들을 무시하고, 학업에만 몰두하면서 부모가 바라는 더 나은, 고상한 세계로 진입하길 꿈꾼다. 바칼로레아를 통과해 집을 떠나 대학 사회에 발을 들이고 부르주아 계급의 취향을 흡수하면서, 고급 문학과 철학의 세계에 심취하면서, 드니즈는 부모의 세계와 단절한다.



하지만 부르주아 출신의 남자 친구에게 버림을 받고 두려워했던 불법 낙태 시술이라는 현실에 놓이면서 그녀는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느낀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녀 자신? 그녀의 부모? 자신을 욕망하게 했던, 좋은 세계라고 믿었던 부르주아들? 그녀는 홀로 피를 흘리며 자신의 상처를 응시한다.



나는 둘로 나뉘었다. 바로 그것이다. 내 부모님, 소작농 가족, 노동, 학교, 책, 보르낭들. 여기도 저기도 아닌 그것이 증오를 키웠다. 선택을 해야만 했다.

214쪽, <빈 옷장>



드니즈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모욕을 배웠고 모욕을 느”꼈던 것은 학교와 선생님, 중산층 가정처럼 사회적으로 우월하다고 받아들여진 세계의 시선 때문이다. 그녀는 “학교에서, 시내의 가게 앞을 거닐면서, 책을 읽으면서 비교하는 법”과 “좋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법, “평가 시스템”을 배웠다.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모두를 속이”는데 익숙해지는 법을 훈련했다.



그녀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했던 외부의 폭력적 시선은 점차 그녀 내부로 옮겨갔다. 드니즈는 자신이 학습한 시선으로 자신과 자신이 속했던 세계, 부모와 소작농과 가난한 노동자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반추하는 드니즈의 언어는 날것의 생생함으로 읽는 이를 불편하게 한다.



분리를 강요하는 세상에 언어로 저항하기


그 글쓰기(<빈 옷장>)는 교육과 수치심을 통해 드니즈라는 화자에게 행사되는 보이지 않는, 긴 폭력성을 지녀야 했어요. 언어의 폭력성이 이 은근한 문화 지배의 폭력성에 대한 답이어야 했죠.

125쪽, <진정한 장소>



소녀를 둘로 나뉘게 한 것은 사회와 교육 시스템, 그리고 문화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 무엇이 우월하고 열등한 지, 그러므로 무엇을 욕망하고 꿈꿀 것인지 사회는 새겨 넣는다. 사회에서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 자체가 한 사람에게 분리를 가르친다.



소설 속 화자인 드니즈는 그 ‘은근한 문화 지배의 폭력성’을 비문학적 언어로 풀어낸다. 그로 인해 이 소설이 지니게 되는 ‘언어적 폭력성’은 ‘세상을 향한 복수’이기도 하다. 한 사람을 이방인이 되도록, 자신이 속한 곳과 분리시키고 증오와 수치심을 습득하게 한 사회를 향한 에르노식 언어 저항이다.



드니즈가 마주했던 분리와 단절은 사회에서 성장하는 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누구나 겪는 것이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 증오와 수치심을 배운다. 아니 에르노의 <빈 옷장>은 우리가 지우고자 애쓰는 혐오와 편견의 말, 시선이 사회화의 소산임을 깨닫게 한다.



인종과 계층, 나이와 성별, 지위와 역할에 따라 사회는 바람직한 기준을 제시하고 강요한다. 그에 부합하기 위해 우리는 여러 번 자신의 가면을 바꿔 가며 성장한다. 그러느라 어떤 욕망과 가면은 아무도 모르게 저마다의 빈 옷장에 숨겨 둘 수밖에 없다.



진실한 나로 머무는 것이 열등하다고 말하는 사회를 향해 드니즈와 함께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 무엇이 우월한 것이며 우월과 열등의 구분만이 전부인가라고. 선을 긋고 특정한 욕망만을 주입시키는 세상을 향해 이러한 질문을 끈질기게 되던져야 할 것 같다. 자신이 속한 곳과 단절 없는 세계, 우월과 열등이라는 구분 없는 세계로 나아가는 일은 그렇게 가능해지지 않을까.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살아낸 삶을 글로 쓰면서 세상의 지배적인 시선에 저항했다. 사회가 침묵하는 것을 찢고 그 속의 상처를 파헤치며 진실을 묻는 글을 썼다. 그녀는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겪은 일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에르노의 책을 읽으며 나 또한 “늘 나만 그렇다고 생각해 왔다”(76쪽, <빈 옷장>)는 비밀스러운 의구심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세상에는 온전히 꺼내 놓을 수 없는 상처가 아직 많다. 혐오로부터 자신을 숨겨야 하는 성소수자와 히잡을 쓰는 여성들, 난민처럼 세상의 이분법으로 낙인찍히고 배제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용기를 내어 침묵을 깨어줄 작가, 세상이 말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작가가 여전히 우리에겐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적 살던 이층 집에는 마당이 있었다. 집과 마당을 담벼락이 둘러쌌다. 집과 담 사이로는 한 명이 간신히 지나다닐 수 있는 통로가 있었는데 그리로 들어가면 창고가 나왔다. 통로에는 잡풀이 자라고 죽은 식물의 줄기와 까만 먼지, 어디서 왔는지 누가 버렸는지 알 수 없는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창고의 상태도 비슷했다. 바닥에는 낡고 더러운 판자가 널려 있고 쓰지 않는 연탄과 더러운 것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한쪽엔 재래식 화장실이 딸려 있었는데 어린 시절 많이 들었던 귀신 이야기에 등장할 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



내가 낡은 창고를 알게 된 시점은 쓸모가 사라진 다음이다. 보일러 실이었지만 더 이상 그 역할을 하지 않는 곳. 버려진 폐허. 귀신이 출몰할 것 같은, 더럽고 괴기스러운. 그러므로 위험한 곳, 금지된 장소.



그 통로를 지나 창고를 갔던 건 몇 번이나 될까. 모든 기억은 하나로 통합되었다. 혼자 몰래 거길 갔던 기억만 남았다. 들어가면 안 되는 곳, 열면 안 되는 문. 내 안에 새겨진 금지의 명령을 위반했던 순간. 뒤돌아 도망가고 싶으면서도 기어코 한 발을 내딛고 있던 기묘한 마음. 무섭게 두근거리면서도 강렬한 열망을 뿜어내던 심장을 기억한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홀린 듯 문을 열었던 순간을.



크리스티앙 보뱅의 <가벼운 마음>(김도연옮김, 1984books)을 읽다 그때 그 소녀의 마음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교감했던 늑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주인공은 가출을 일삼으며 자랐고, 성인이 되어서도 늑대의 환영을 떠올리며 빽빽하게 둘러싼 삶이라는 가림막 사이에서 틈새를 발견한다. 길들여지지 않는 마음, 그러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그녀는 틈새를 가뿐하게 넘나 든다. 때로 음악과 글쓰기로 잠수하면서.



"아마도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던져버린 이 생애 안에 있는 것 같다. 나는 가장 위대한 기술은 거리두기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가까우면 불타오르고, 너무 멀면 얼어붙는다 정확한 지점을 찾아서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건 현실 속의 모든 배움처럼 비용을 치러야만 배울 수 있다. 알기 위해서는 대가를 내야 한다."

145쪽



"우리가 무언가를 하는 것은 결코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와 닮았을 다른 무언가에 다다를 시간을 스스로에게 주려고 하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하려는 일은 나와 많이 닮았다. 그렇다. 내 천사는 정확하게 보았다. 나는 쥐라에서 어른이 되었고, 많은 성장을 했다. 전에는 불가능했다. 전에는 항상 누군가가 있었다. 부모, 남편, 친구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장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품은 사랑, 우리를 충분히 안다고 믿는 사랑에서 벗어나야만 성장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말하지 않을 것들을 할 때야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 설사 그들에게 말한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고, 붙잡을 수 없고, 그들이 던져 준 사랑의 망토로 덮을 수 없으며, 우리 속에 머물러 우리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건 천사 혹은 늑대의 일부다."

177쪽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부모님과 나, 그리고 딸을 생각한다. 함께와 홀로를 생각한다. 서로를 잘 안다고 여기지만 사실 전혀 모르기도 하는 우리를 둘러싼 관계를. 그들은 자주, 혹은 때로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할 수 있다. 하지만 홀로 있을 때만 찾아오는 가벼운 마음도 잊지 않았다. 자기만의 기쁨에 몰두하게 하는 그 마음은 길들여지는 것에 저항하고 금지된 것의 문을 열고자 한다. 그 마음 안에서 나는 아직도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에게 진심이라는 게 있다면, 사물의 핵심과 같은 단단한 핵이 있다면, 그것은 '가벼운 마음'이라고 크리스티앙 보뱅은 노래한다. 나의 그리고 너의, 늑대 혹은 천사의 일부인 마음에 대해. '어린아이의 피와 꿈과 연결된' 늑대, 어떤 순간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잠옷 입은 천사. 우리가 기억하고 지켜야 하는 건 그런 마음이다.



'가벼운 마음'을 노래하는 그의 글은 '날개와 기쁨'이 달린 하나의 음악 같다. "기다림, 피곤, 지루함으로 이루어진 투박한 삶을 사로잡고, 평범한 날들의 실체를 잊으려 굳이 애쓰지 않은 채 그런 날들을 자신의 기반과 자양분과 비상의 토양으로 만"드는 음악처럼, 우리를 가뿐하게 삶의 잊힌 틈새로 이끈다. 유년의 길들지 않은 마음으로, 늑대 혹은 천사가 살고 있는 그 장면으로.



"나의 늑대를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 눈에 비치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며, 그들이 다가오는 것 같을 때라도 실은 우리에게서 멀어진다는 것과, 모든 건 처음부터 사라지며 소멸해 간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절망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건 단순한 생각이다. 그 때문에 오히려 주저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으며, 그 생각으로 나는 이 순간에도 노래 부를 수 있다."

154쪽



모든 건 처음부터 사라지며 소멸해 간다. 이 사실은 절망의 이유가 아니라 주저 없이 사랑할 이유가 된다. 어둠이 머금은 희미한 빛을 따라 걸어 들어갈 용기, 달콤한 제안을 거절하고 낯선 스텝으로 옮겨가는 유연을, 윤곽이 지워질수록 드넓어지는 세계, 버림받은 것들에게 곁을 내어주는 온기를 선택하게 해 준다. 늑대의 마음, 혹은 천사의 마음으로 사랑하자. 사랑받지 못할까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언제든 우리를 사랑해줄 누군가를 찾을 수 있으니까. "공기, 모래, 물, 빛은 늘 옆에 있"(51쪽)으니까. 침묵으로만 볼 수 있는 사랑이 우리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다.



책장을 덮자 가슴에서 일제히 새들이 날아오른다. "섬들의 새".(25쪽) 가벼운 날갯짓, 빛처럼 부서지는 웃음소리. 간질간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고 기특한 불행 - 카피라이터 오지윤 산문집
오지윤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여름 동네 도서관에서 글쓰기 수업을 들었다. 혼자 쓰는 글은 제자리만 맴돌아 답답했고 계속 써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강제로라도 마감이 필요했다. 큰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회차가 지속될수록 그 마음은 바뀌었다.



글 친구들은 빤할 것 같아 피했던 소재로 신선한 글을 써냈다. 누구나 아는 경험이지만 거기서 길어 올린 생각은 저마다 달랐으니까. 흔한 일에서 반짝이는 기쁨과 의미를 발견해내는 글동무들의 시선에 감탄했다. 다루어지는 소재가 작으면 작을수록, 사소하면 사소할수록 이야기는 더 특별해졌다. 어떤 의미에서 친구들은 이미 작가였다.



작가는 개별적인 것들의 거대한 연대를 중개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한 명 한 명의 고유한 목소리와 사연을 모아서 더 높은 의미 단위로 가공하는 일이다. 수집과 나열은 결국 연대의 마음이다.

167쪽, <작고 기특한 불행> 오지윤, RHK



<작고 기특한 불행>(RHK)을 쓴 오지윤은 ‘작가’를 이렇게 정의한다. 그녀는 자신이 내린 정의처럼 고유한 이야기를 모아 더 높은 의미 단위로 가공하는데 탁월하다. 수집과 나열이 연대의 마음이라면, 연대의 마음속에는 사랑과 믿음이 있다는 걸 그녀의 글은 알려준다.



이 책을 알게 된 건 브런치라는 글쓰기 플랫폼을 통해서다. 브런치는 매년 출판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선정된 작가들에게 출판의 기회를 제공한다. <작고 기특한 불행>은 작년에 진행되었던 9회 브런치 북 출판 프로젝트의 수상작 중 하나로 지난 7월에 출간되었다.



불행에 지지 않겠다는 다짐


수시로 병원을 들락거리는 자신의 삶, 언니의 암투병, 아빠의 은퇴와 파킨슨씨 병, 할머니의 치매와 죽음, 코로나 시대의 불안을 껴안고 있는 청춘의 삶. 작가를 둘러싼 삶의 배경색은 결코 밝지 않았다. 수시로 어둠이 드리우는 삶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랬기에 불행도 기특하다고 불러줄 수 있는 내공을 얻게 된 게 아닐까.



“지윤아, 나도 거지 같아.”

참 이상한 일이다. 서로 불행하다며 아웅다웅하는데 왜 우리는 웃음이 나는 걸까. 나만 힘든 게 아니고 그도 힘들다는 사실이 왜 우리를 웃게 만드는가.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나도 내 불행을 L에게 한껏 떠먹여 줬으니 자책하진 않기로 했다. 우리는 서로의 불행을 나눠 먹으며 위로받고 서로를 더 껴안아 주게 되니 오히려 좋다.

24쪽



오지윤은 타인의 불행이 나를 위로해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위안을 단순히 섭취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타인의 불행에 기대는 것이 ‘천박한 안전장치’ 임을 안다. 고통받는 나를 통해 타인도 고통받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하고 연민하는 ‘인류애’를 발휘할 줄도 안다. 불행을 나누는 데서 ‘연대감’이 생기고 그 ‘불행의 대잔치가 행복의 시작’ 임을 ‘기어이’ 발견해낸다.



자신의 불행과 부족을 부정하지 않고 곡해하지도 않는 작가의 시선이 건강해서 좋다. 거기서 체념하는 대신 발상을 바꾸어 기쁨의 씨앗을 찾아낼 줄 아는 것도. 그건 행복해지겠다는 다짐이라기보단 불행에 지지 않겠다는 다짐 같다. “행복은 순간이고 여운도 짧다. 불행은 자주 오고 여운도 쓸데없이 긴데.” (223쪽)



저자는 부질없는 행복에 투자하는 대신 ‘다양성’과 ‘고유함’, ‘무용’ 한 것들을 눈여겨 바라보며 자기만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찾는다. 불행과 친구가 되는 법을 터득하고 삶 속에 숨어 있는 ‘작은 귀여움’을 모으며 산다. 자신의 불행에 섬세한 시선을 건네고 타인의 불행에 공감할 줄 알기에, 그녀의 삶과 글쓰기는 믿음직스럽다.



그녀의 글은 점처럼 작은 이야기를 모아 어떻게 별자리를 만드는지 보여준다. 별개로 흩어져 있던 별을 오지윤이라는 실로 연결하는 방식은 참신하다. 가령, ‘바다 수영이 좋은 이유’라는 글에는 바다 수영과 타투, 돌아가신 할아버지와의 추억 같은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이들은 제각각의 모양으로 저자에게 삶의 안정감을 주는 대상이다.



글의 말미에는 바다에서 수영하는 한 할아버지와 어린아이의 모습이 담긴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깊이지만 할아버지와 함께 여서 안정적인 아이의 환한 미소. 그녀는 바다와 타투, 할아버지와 어린아이 같은 '흔하면서 아름다운 것'을 연결해 자신에게 필요했던 평형감을 되찾는다. 이 글에는 아련한 여운이 길게 맺힌다.



오지윤만의 에세이 작법의 또 다른 장점을 꼽아본다면,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담담하게 풀어내면서도 정확한 단어로 감정의 결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에는 마음을 건드리는 문장이 수두룩하다. 수시로 ‘싱숭생숭’해지는데 “마음이 움직여 어수선해지는 것이다.”(168쪽) 파킨슨 씨 병을 앓는 아빠를 바라보며 쓴 부분이 특히 그렇다.



무뚝뚝한 그를 닮아 무뚝뚝한 나는 효녀가 되겠다는 ‘다짐’ 대신 ‘그리움’부터 키운다. 나는 그가 벌써 그립다. 그리워하는 것은 참 쉬운 일이다. 그에게 전화 한 통 하는 것은 부끄러워, 벌써부터 아무것도 안 하고 그리워하기만 한다.

36쪽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으로 훈련된 면모 일지 모르겠으나 그녀는 흔한 단어에 대해 자기만의 정의를 내리는 데 빼어나다. 평이한 단어일지라도 그녀만의 정의가 붙으면 울림이 커진다. “밥벌이로 책임지는 게 내 ‘생명’이라면 집안일로 완성되는 건 내 ‘삶’이다.”(139쪽) “열거는 사랑의 기술이다. 사랑해야 오랜 시간 찾고 모으고 기다릴 수 있다.”(168쪽)



그녀는 사소한 단어로 시작해 특유한 의미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물레 위에 올려놓은 흙덩이가 노련한 도공의 손을 거쳐 수려한 그릇으로 변모하는 것처럼. 자기만의 사상과 심상을 담아내는 에세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생각하면 구성력과 문장력이 빼어난 그녀의 글은 좋은 에세이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도서관 글쓰기 수업이 마지막 회차를 남기고 있다. 수업에 가서 이 책을 추천해야겠다. 좋은 에세이는 이런 글 같다고. 불행을 거부하는 대신 불행을 씨앗 삼아 글을 쓰자고, 그게 삶과 글쓰기에서 나만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비밀임을 전파해야겠다. 그러다 보면 무용하고 쓸모없을 지라도 글쓰기만은 계속하고 싶어질 거라고.



나의 인생은 ‘기어이’가 많아질수록 풍성해질 거라 믿는다. 기어이 무언가를 저질러도, 인생은 크게 잘못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아 버렸다. 크게 잘못되기에는 우리가 너무 작은 존재다.

22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창문 너머 어렴풋이
신유진 지음 / 시간의흐름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게 본다는 행위는 기억으로 완성된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제대로 본 것이 아니다.

신유진, <창문 너머 어렴풋이>, 시간의 흐름, 122쪽




어려서부터 남들보다 기억력이 안 좋았던 나는 보는 것에 서툰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마음의 시력이 약한 사람. 기억력이 안 좋은 걸 알아서,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게 습관이 되고 살아가는 일의 일부가 되었다. 시력이 약해 보는 일에 더 정성을 들였고, 그 감각이 글로 포개졌다는 작가 신유진처럼 내게도 글쓰기는 시력을 교정하는 일이었으려나.



신유진 작가의 <창문 너머 어렴풋이>에는 유독 ‘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작가는 출판사로부터 ‘감각’에 대해 써 주길 제안받았고 그게 모호해 ‘시각’으로 좁혀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이 책은 ‘보는 일’을 주제로 쓰인 책이다.



작가의 보는 일은 그녀의 집에 있는 두 개의 창에서 시작된다. 어둠을 보여주는 서향 창은 기억으로 통한다. 빛이 들이치는 남향 창은 빛이 남긴 흔적과 얼룩을 더듬는 일로 이어진다. 그렇게 두 개의 창 앞에서 그녀가 길어 올린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다. 작가는 친절하게도 창 앞에 우리를 위한 의자를 준비해 두었다. 그녀가 내어준 의자에 앉아 한껏 열어준 창을 내다보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글과 맞닿은 자신의 기억과 빛의 얼룩을 마주하게 된다.



내 글이 방이라면…, 글자 가득한 방에 기억이 보이는 창 하나와 빛이 들어오는 창 하나를 내고 싶습니다. 그리고 거기, 창가에는 당신을 위한 편안한 의자를 가져다 놓을 겁니다. 상상만으로도 이 작은 방이 벌써 환해지는 기분입니다.

창가에 잠시 머물다 가시겠습니까?

지금,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12~13쪽



그녀가 서향 창으로 보여주는 기억의 창고에는 어린 시절을 보낸 빨간 벽돌 이층 집과 아기였던 그녀를 등에 업고 재워주던 미자와, 친구 희와 지영이, 그리고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번역 일로 알게 된 문학평론가를 통해 특별한 곳이 된 리스본에 대한 기억과 뱃속의 아이를 잃었던 은밀한 상처도 있다. 때론 부끄러이 여겼던 어릴 적 추억은 어느새 아련하고 안타까운 것이 되었다. 돌아갈 수 없기에 그리움의 먼지만 뽀얗게 앉은 기억들. 먼지는 빛이 타버리고 남은 재가 아닐까. 한때 찬란하게 우리 앞에서 빛났던 시간들이 먼지처럼 켜켜이 쌓여 있다.



작가는 먼지 앉은 그 기억을 이렇게 부른다. “멀어진 것들이 남기고 간 굴곡진 풍경 같은 것, 그러니까 시간의 주름.”(27쪽) 일기장에, 빛바랜 편지 속에 잠들어 있던 이야기를 작가는 ‘시간의 주름’이라는 이름으로 펼쳐 보여준다. 그 주름 사이에 고인 것들이 낡고 부질없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곳에서 작고 희미한 빛을 품고 있다는 걸, 슬픔과 기쁨, 다정과 온기, 기다림과 사랑임을 살뜰하게 그려낸다. 어쩌면 그곳의 빛이 이곳의 어둠을 밝혀 우리를 지탱해주는지도 모르겠다고. 그걸 바라보는 사이 내 기억의 빛깔도 미세하게 바뀌는 것 같았다.



초록색 대문이 달린 이층 집에 살았던 기억, 잠시 일을 했던 엄마 대신 살림을 봐주었던 먼 친척 이모할머니, 새우깡과 짱구를 나누어 먹고 테이프 앞 뒷면을 좋아하는 노래로 꽉 채워 교환하곤 했던 친구 미연이와, 지금도 만나면 그때 순정 만화책을 나눠 보던 일을 회상하며 깔깔거리게 되는 연정이, 그리고 떠올릴 때마다 그 끝에 슬픔이 맺히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보고 싶어 진다. 이상하다. 나는 신유진이라는 작가의 기억을 들여다보았을 뿐인데 거기서 내 기억으로 통하는 창을 발견한다. “모든 순간이 연결되는 지점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작가처럼, ‘내’가 있어 그녀의 기억과도 연결이 된다. 나는, 우리는, 이렇게 “어디에나, 있다.”(119쪽)



빛을 보여주는 남향 창의 분위기는 서향 창과 또 다르다. 그녀의 창에서 보았던 고라니와 그걸 함께 본 강아지와 나눈 무릎 키스, '눈(雪)'에 대한 기억과 ‘숨’으로 연결된 세상, 엑상 프로방스에서 페터 한트케와 세잔과 같이 걸었던 일, 뒤라스의 바다, 세르지의 은퇴 공연과 언젠가 살았던 프랑스 시골 마을 집 창 밖의 사람들 이야기가 소설처럼 펼쳐진다. 서향 창에선 과거의 기억으로,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갔다면 남향 창에서는 창 밖으로, 나의 외면으로 시선이 나아간다. 그 경험을 통해 작가가 깨닫는 것은 내가 바라보는 풍경이 자신의 내면이 된다는 역설이다.



내가 볼 수 있는 만큼만 보이는 것이니까. 풍경이 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풍경이 되는 것임을 오래도록 모르고 살았다.

166쪽



여행은 걷는 일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지금도 날마다 산책을 하며 호수가와 숲을 걷는다. 그녀에겐 보는 일이 곧 걷는 일. 걸으며 본 것과 인식한 것 사이, 그 틈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나의 심상이라고 말한다. 내가 바라보는 지점과 인식 사이에서 떠오르는 상(象)이 나의 심상이며 그것이 곧 나의 내면이라고. 그녀에게 “하나의 장소는 내면과 외면이 만나는 지점”(120쪽)이다.



그녀가 자신을 열어 보여주는 풍경들은, 그곳이 엑상 프로방스든, 트루빌이든, 리스본이든 모두 그녀 내면의 풍경인 것이다. 그곳을 보는 사이 내면에 맺힌 상(象)이 그녀만의 언어라는 색을 입고 이 책을 빼곡히 물들인다. 풍경의 장( 넘기다 가슴이 울렁거려 자주 멈춰야 했다. 그녀의 내면과 만나려 나의 내면이 너무 빠르게 멀리 내달렸던 걸까.



“어떤 글들은 그 창을 지나 누군가에게 닿는다. 나의 가장 먼 곳과 타인의 가장 가까운 곳이 만나는 경계에서 그런 식으로 의사소통이 일어난다.”

(김연수, <거울이 아니라 창에서 글쓰기>, ≪사물함≫5호, ‘창문’)

이제 나는 완전히 열지 못했던 창을 활짝 열고 이 기록을 힘껏 던진다. 내게 가장 먼 곳이 당신에게 가장 가까운 곳임을 기억하며. 여기, 이 글을 저기 멀리서 보고 있으리라는 믿음, 그것으로 한 글자씩 써 내려간다.

145쪽



“내게 가장 먼 곳”에 서 있는 그녀가 창을 열어 내게 가장 가까운 곳까지 던져주는 기록을 힘껏 끌어안느라 온 몸이 흔들렸으려나. 그런데도 나는 영원히 그 창 앞을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언제든 그녀가 던져주는 소중한 것을 받을 수 있게 한 순간도 한눈팔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그녀가 활짝 열어준 창이, 거기서 새어 나오는 검은빛이, 빛의 흔적과 얼룩이라는 낯선 것들이 생소하게 아름다워 하염없이 기뻤으니까.



책을 다 읽고 나자 세상에 없던 하나의 창이 내 앞에 생긴 것 같다. 작가가 열어 보여준 창을 건너 나의 내면을 향하는 창의 존재를 알아챘으니. 그녀의 말처럼 내면은 내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나를 둘러싼 외면의 풍경에 있을 테니까.



이 창 앞에서 나는 스위치를 내린 채 어둠 속을 응시할 수 있을 것 같다. 작가처럼 “컴컴한 어둠에 내가 만든 미약한 빛”(11쪽)을 보내며 더디게 당도할 풍경을 기다리고 싶다. ‘시간의 주름’을 천천히 펼쳐 보거나 나를 지나간 풍경이 남긴 ‘빛의 얼룩’을 더듬어 보고 싶다. 언어 밖의 세계를 상상하고 내가 보는 것과 인식하는 것 사이의 틈새를 지켜보는 일. 그러다 ‘반딧불이’나 ‘뜨거운 눈(雪)’, ‘검은빛’ 같은 것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그건 "소중한 사람, 소중한 무엇과 조금 더 해보”겠다는 마음, 조금 더 사랑해보겠다는 다짐일 테고.



“어떤 작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런 것이 아닐까. 그의 창문에 서서 그가 보는 풍경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151쪽) 뒤라스의 창 앞에 서서 그녀의 풍경을 받아들인 신유진 작가처럼 작가가 열어 준 창을 통해 그녀의 풍경을 끌어안는다. 그녀의 심상과 언어를, 자기 앞에 놓인 생을 한치의 아쉬움 없이 사랑하려는 다정한 자세를 받아들인다. “조금 더 기쁘고, 조금 더 슬픈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17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답장이 없는 삶이라도
김해서 지음 / 세미콜론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두렵고도 기쁜 사실 하나 알려줄까. 시간에 벼려지고 벼려져 마침내 사람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을 거야. 나무가 자라 겨우 나무이기만 한 것처럼.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가능성은 없어. 너 역시 어떤 경우에도 네가 될 수 있어. 그보다 큰 위로가 있을까. 나도 나를 선택하기 위해, 택할 수 없는 여러 미래를 받아들여야겠지. 

(…)

너는 너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지. 그러나 기억하렴. 깎이고 깎여 그저 너이기만한 너도 나는 사랑한단다. 너의 무상함도 사랑해. 깔깔거리는 웃음, 씰룩이는 엉덩이춤, 고양이 앞에서 해제되는 무장, 사방으로 뻗는 호감과 눈물. 아무것도 아닌 모든 너를."  

253~254쪽



“시간에 벼려지고 벼려져 마침내 사람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사람의 글,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가능성은 없지만 어떤 경우에도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걸 기쁨이자 위로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글을 읽었다. 그런 글이 모인 책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버티고 깎아온 시간이 빼곡히 담겨 있다. 진실해서 고유하게 빛나는 책이란 이런 걸 테다. 김해서 작가의 산문집 <답장이 없는 삶이라도>이다. 



그녀는 아주 어릴 적부터 시인이 되길 꿈꿨고, 국문과를 다니며 등단을 위해 매년 신춘문예에 시를 보냈지만 거듭 낙방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인정을 받아 시를 쓰는 대신 “에세이, 인터뷰를 비롯한 잡지 기사, 주얼리나 향기 제품 설명글, 책 큐레이션 등” 다양한 글을 쓰며 스스로 자신의 시를 먹여 살렸다. 그녀는 시인이 되지 않고도 시를 썼고, 시인이 되는 대신 시처럼 살게 되었다. 어느새 시는 그녀 삶의 바닥이 되었다. 자신이 엎어지더라도 매번 그 위라는 걸 믿을 만큼 시로 다져졌다.   



"쌓인 것들을 모아 시집을 낼 수도 있으려나. 시집을 내면 시인이 될 수 있으려나. 그러나 그때도 나는 계속 ‘지망인’이기로, 시와 그다음 시 사이에서 기다리는 지망인. 늘 다음 시가 목표인 지망인. 

내 삶의 자리를 찾았다. 이 잠자코의 시간. 평온한가 물어온다면, 그렇다." 

59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하면서도 세상에 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시를 흠모하여 시로 다져진 내 감각이 무엇으로든 세상에 쓰일 수 있음을, 그것으로도 이 한 몸을 지탱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내게는 버티는 힘이 존재한다. 그 사실만으로 자긍심을 되찾고 감사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다. 일은 일이고 시는 시니까. 시인은 어떤 상태일 뿐 직업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나는 내시를 먹여 살리기 위해 일하는 몸으로 전환되었다." 

65쪽



"하지만 이젠 안다. 행복의 기준을 자기 자신이 세운다면 어떤 거절과 실패 앞에서도 나는 부정당하지 않을 수 있다. 스스로 확보한 작은 행복만큼 나의 아웃라인은 선명해진다. 외부의 평가나 자극에 휩쓸리지 않고, 어떤 사회적 강요에 복종하지 않고, 순수하게 뻗어나가는 기호와 기쁨을 키우는 게 가능하다. 누구와도 다른 나만의 목소리는 그렇게 빚어진다." 

70쪽



그녀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촘촘하게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기억하기 위해 얼마나 살뜰하게 살았을지 짐작하게 된다. 유년 시절을 지나 지금의 자신이 되기까지, 나와 외부, 가족과 주변의 사람들을 세심하고도 끈질긴 시선으로 탐구해온 기록이 말해준다. 어떤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의 시선과 언어를 어떻게 만들어 왔는지, 자신과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있는지, 그녀의 글은  보여준다. 온 마음을 다해 살아왔음을 알려준다.  



“나는 꽤 진지하게 믿고 있다. 지금만큼, 내 사람들을 사랑할 자신이 있다.”

301쪽



이 책은 '김해서'라는 시를 애정 하는 한 사람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과 사람, 시라는 세계를 사랑하는 일에 대해 쓴 글이다. 매일 시와 연애하면서도 지치지 않고 시를 향한 마음만은 끝까지 책임지려는 섬세한 사람이 그 마음으로 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걸 시의 언어로 애틋하게 써 내려간 글이다. 온통 사랑으로 가득 차 붉게 물들어가는 글.



“서러움이라는 건 홀로 짙은 빨강이 되는 기분이라”고 그녀는 말했지만 책을 읽는 동안 내 마음이야말로 짙은 빨강이 되는 기분이었다. 부러움과 질투심으로. 이토록 무언가를 끈질기게 사랑할 수 있는 마음과, 그토록 세밀하게 삶을 기억하고 풍성하게 상상할 수 있는 언어에 대해. 아마도 ‘시’에게 보냈던 그녀의 긴 연서는 이런 답장으로 돌아온  같다. 그녀만의 반짝거리는 언어로 말이다. 김해서의 실패가 부럽다. 시인이 되지 못했는데도 평생 ‘지망인’으로 살고 싶다고 다짐할 수 있는 실패, 그러느라 누구도 아닌 그녀만의 목소리로 찬란히 빛나는 글을 쓰게 된 이상한 실패를. 



책을 읽고 나면 이런 확신이 든다. 열심히 살아서 자신이 된 사람이구나, 김해서 작가는. 그러니까 나도 열심히 살아서 나 자신이 되어보고 싶다. 누구도, 무엇도 아닌 그저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벼려지고 벼려지는 시간을 기어이 버티고 싶어 진다.   



이 모든 게 시의 힘이라는 것도 기쁘다. 다른 무엇 때문도 아닌 뭔가를 쓰고 싶어서 침이 고이고 열심히 살고 싶고 자신에게 정직해지려는 게.” 

27쪽



'김해서'라는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답장이 없는 삶'에 대한 답장이   같다.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도 자신이 되고 삶을 책임질  있음을 보여주는 사람. 그녀를 알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