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배수아 옮김 / 한겨레출판 / 201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고독이라는 운명


창작은 고독을 필요로한다. 세상의 밖에서 홀로 있을 때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기 때문일 테다. 그래서 탁월한 예술가 중에는 고독한 삶을 자처하여 불행하게 생을 마감한 이들이 많다. 그들이 고독에서 불행을 감내하며 절망에서 길어 올린 빛 같은 작품이 우리에겐 감동과 위안을 준다. 그러므로 창작에 몰두한 순간,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세계를 열었던 순간만이라도 그들 창작자에게 지극한 행복과 위안이 있었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 에밀리 디킨슨이 적은 것처럼 ‘영혼의 창조자’들에게 고독은 잴 수 없는 어둠일테지만 무언가를 밝히는 빛의 씨앗 또한 품고 있기를.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그 크기는 그 파멸의 무덤에 들어가서 재는 대로

추측할 뿐-

(…)

이야말로 내가 두려워하는-고독-

영혼의 창조자

고독의 동굴, 고독의 회랑은

밝고도-캄캄하다-

_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에밀리 디킨슨



고독 속으로 한없이 걸어 들어가 세상을 산책한 작가가 한 명 있다. 바로 로베르트 발저(1878~1956)다. 1878년 스위스에서 태어나 가난 탓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오랫동안 하인, 사무보조, 사서, 은행사무원, 공장노동자 등의 직업을 전전했던 그는 원래 배우가 되길 꿈꿨다고 한다. 하지만 그 꿈은 좌절되었고 틈틈이 글을 써 신문과 잡지에 발표해 작가로 문인 사회에 입문했지만 지성인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고 한다. 당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면서 궁핍한 생활에 시달렸고 자살 시도에 실패하자 1929년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1933년에는 절필을 선언하고 걷기와 도보 여행, 종이봉투 붙이기 외의 활동은 하지 않으며 여생을 보냈다.



그가 쓴 에세이가 묶여 있는 <산책자>(배수아 옮김, 한겨레출판)에는 내내 걸어 다녔다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집을 보러 다니고, 정처 없이 걸었던 그는 우연히 발견한 하찮고 사소한 것들과 자연이 내어주는 풍경에 무한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였다. 그는 일과 성취, 겉치레에 몰두하는 사람들과 달리 남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자신으로 존재하길 바랐다. 그런 비범한 시선에만 발견될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책 속에 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에게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으면서 존재 그대로의 자연스러움 만을 읊조렸다. 그러기 위해 스스로 고독 속으로,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가 작은 존재가 되었다.





◊◊





고독의 두 얼굴


“클라이스트는 높은 교회 담장 위에 앉아 있다. 대기 중에는 습기가 가득하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후텁지근하다. 그는 셔츠 단추를 열어서 가슴을 드러낸다. 노랗고 불그스름하게 반짝이는 호수가 막강한 신의 손에 의해 심연으로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저 아래쪽에 놓여 있다. 밑바닥에서부터 용솟음쳐 올라오는 광채로 호수 전체가 뜨겁게 이글거린다. 호수는 활활 불타고 있다. 알프스의 산들이 살아나 환상의 동작으로 이마를 물속에 담근다.”

_196쪽 '툰의 클라이스트'



이 책에 실린 산문 ‘툰의 클라이스트’에는 클라이스트(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19세기 독일의 극작가이자 소설가)라는 작가가 자신과 글쓰기에 절망하며 느끼는 깊은 고통이 주변의 눈부신 풍광과 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담겨 있다. 천상의 것인 듯 황홀하리 만치 아름다운 풍경처럼 그의 가없는 고통과 슬픔도 이 세계에 속한 게 아닌 듯하다.



“그는 고통스러울 만큼 행복하다. 너무도 행복하여 숨이 막힐 듯이, 바싹 말라버릴 듯이 고통스럽다. 그렇게 외롭다. 죽은 자들이 살아나 이 고독한 남자와 반시간 정도만 대화를 나눠준다면 좋을 텐데. 여름밤에는 연인이 있어야 한다. 하얗게 빛나는 젖가슴과 입술을 생각하며 클라이스트는 서둘러 언덕을 내려온다. 호숫가로 달려가 그대로 물속으로 돌진한다. 옷을 입은 채로, 큰 소리로 웃으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_197쪽 '툰의 클라이스트'



그는 아름다운 경치에서 어떤 목소리가 자신에게 오기를 기대하며 스스로를 철저한 고독 속에 남겨둔다. 그리고 쓰고 또 쓰기만이 있는 날들. 하지만 “클라이스트는 원고를 한 편, 두 편, 세 편의 원고를 찢어버린다.” “더 새로운 것, 더 격렬한 것, 더 아름다운 것”, 최고의 걸작을 원하기에 절망만 깊어 간다. 오로지 글쓰기에 매달려 ‘시인의 불운’에 전 생애를 온전히 내맡기고 만, 예술을 향한 지고지순한 열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클라이스트의 삶을 발저는 마치 자신의 것 인양 적어 내려간다. 툰에서 양조 주식회사 직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 발저는 그곳의 아름다움에 대해, 고독한 작가의 운명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리라.



발저 또한 그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카프카와 헤세가 칭송한 글을 썼지만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돈을 벌 수 없어 여러 일자리를 전전긍긍해야 했다.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던 그는 거처와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정신병원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고 이 책에 실린 산문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쓰인 문구처럼 산책을 나섰다 눈 오는 길에 쓰러져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떠났다. 빼어난 묘사와 놀라운 발견으로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주는 그의 글이 살아생전에는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가난과 절망으로 그를 밀어 넣었다는 사실이 쓸쓸하고 가슴 아프게 전해온다.



그러니 ‘툰의 클라이스트’가 품고 있는 미묘한 뉘앙스를 뭐라고 적어야 할까. 슬프도록 아름답다고 해야 할까, 예술가의 절망에 아름다움마저 옅어졌다고 해야 할까. 스스로 고통을 자처하는 이들의 숭고한 삶에 대해 우리는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다. 후에 클라이스트가 살았던 집 앞에는 그가 글을 썼던 곳이라고 알리는 현판이 걸렸고 무수한 사람들이 지나며 무심히 그걸 읽는다. 클라이스트가 그곳에서 보낸 절망의 시간과 현판의 가벼움 사이의 간극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것이라 더 막막해진다. 그러니 무상하고 헛되다고, 쓸쓸히 읊조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헛된 열정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은 그렇게 여겨져도 되는 걸까.



“아마도 어느 정도 몸이 피로했기 때문인지 나는 한 아름다운 소녀를 생각했고, 이 세상에서 내가 얼마나 홀로인지, 그리고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인지를 생각했다. 스스로에 대한 책망이 뒤에서 나를 밀었고 내 앞길을 막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나쁜 기억을 물리쳐야만 했다.”

_374쪽 '산책'



책에 실린 발저의 또 다른 에세이 ‘산책’의 말미에는 여름 비가 내리는 오리나무 숲에서 혼자임을 뼈저리게 느끼며 손에 쥐고 있던 꽃다발을 놓아버리는 그 자신의 쓸쓸한 초상이 그려진다. 이 모습은 외로움에 떨며 호숫가로 돌진하며 웃는 동시에 울고 있는 클라이스트와 정확하게 쌍을 이룬다. 클라이스트는 별다른 소득 없이 병을 얻어 결국 그를 데리러 온 누이의 손에 이끌려 툰을 떠났다. 발저는 정신 병원에서 절필을 선언하고 모두에게 잊힌 채 죽음을 맞았다.



웃으면서 눈물 흘리게 하는 것이 고독의 양면성이다. 고독의 입구에는 한정된 시간 동안 맛볼 수 있는 희열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끝에는 분명 잴 수 없는 깊이의 어둠에 잠긴 동굴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이다. 한 번 사로잡히면 나올 길도 알 수 없는, 절망과 파멸로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낭떠러지가 있다. 그런데도 고독의 끝으로 홀린 듯 걸어 들어간 작가와 예술가들이 있다. 문학과 예술에 대한 굽힐 줄 모르는 열정으로 고립을 자처하고 절망을 자신의 옷으로 택했던 이들. 그것을 한없는 사랑이라고 읽을 수밖에 없다. 무엇이 그들에게 그런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걸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독의 낭떠러지 앞에서 막막해질수록 그 사랑에 화답하고 싶어 진다.





◊◊◊





온전한 내가 되기 위한 산책


발저에게 유일한 기쁨은 산책이었다. 그의 산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산책과 달랐다. 그것은 생활의 전부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해가 뜨면 집을 나서 해가 질 때까지 정처 없이 걸었던 그는 다른 이들이 잠을 잘 때 글을 썼다. “성실하고 헌신적으로 자신을 지우고 대상에 몰입하여 자신을 잃는 행위, 모든 사물과 현상에 품는 열렬한 애정은 마치 의무를 완벽하게 의식하고 수행하는 일이 내면의 큰 기쁨이자 충만함인 것처럼 그렇게 큰 행복감을 산책자에게 안”겼다고 그는 산책을 예찬하고 그 효용성을 대변했다. 걷는 동안 그에게는 무수한 생각이 떠올랐고 갖가지 아름답고 미묘한 사색이 따라붙었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에 몰입하고 교감하는 사이 진정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산책은 그의 내면으로 닿는 여정이었다. (발저에게 산책의 의미는 이 책에 실린 ‘산책’에 완벽하게 적혀 있다.)



“나는 하나의 내면이 되었으며, 그렇게 내면을 산책했다. 모든 외부는 꿈이 되었고 지금까지 내가 이해했던 것들은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표면에서 떨어져 나와 지금 이 순간 내가 선함으로 인식하는 환상의 심연으로 추락했다. 우리가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이해하고 사랑한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라 어떤 다른 존재였으며,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진정으로 나 자신이었다. 감미로운 사랑의 빛 속에서 나는 깨달았고, 아니 깨달았으리라고 믿었는데, 아마도 내면의 인간이야말로 진정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_349쪽 '산책'



발저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허위나 허식 없이 자신을 존중하고 동일한 시선으로 타인을 존중했다. 그러므로 무언가가 되기보다 아무 것도 되지 않는 것을 바랐고 여러 글에서 한 장의 위선도 없이 자신을 드러냈다. 그저 하찮고 작은 존재, 먼지에 지나지 않는 자신으로 자연스럽게 있으며 그것에 만족한다고 썼다. 누군가는 감추고 싶거나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을, 몽상가적 기질이나 가난, 외로움과 좌절까지도 진솔한 문장으로 적어 내려갔다. ‘헬블링 이야기’나 ‘한 시인이 한 남자에게 보내는 편지’, ‘최후의 산문’ 같은 글이 인상적인 이유다.



“내가 나 자신으로 있지 못하고 내가 아닌 것이 되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것이야말로 멍청한 행동일 겁니다. 내가 나일 때, 나는 나에게 만족합니다. 그러면 나를 둘러싼 세상 전체도 조화로운 음색을 냅니다.”

_74쪽 '한 시인이 한 남자에게 보내는 편지'



자신이 지닌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살기를 결심하고 그것을 드러내며 사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로 인해 미움받고 거절당하는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용기와 담대함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게 해 주니까. 어떤 이들의 삶은 자신을 지우거나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며 사는 삶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알려준다. 비록 세계와 불화하여 고독이라는 방에 머물게 될지라도 불협화음 속에 서만 만들어지는 고귀한 빛이 있다는 걸. 그들의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훈련된 채 살아가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본모습을 찾고 싶어 하는 우리에게 한 줄기 빛처럼 비친다. 그것은 어둠으로 덮인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 보겠다고, 나만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겠다고 결심하는 용기를 건넨다. 획일적인 가치에서 벗어나 모두가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며 살아갈 수 있을 때 세상은 분명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남루한 것, 가장 진지한 것과 가장 유쾌한 것, 산책자에게는 이 모두가 마찬가지로 마음이 끌리며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_341쪽 '산책'



헤르만 헤세는 발저의 글을 사람들이 더 많이 읽는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라고 했다. 어떤 구분도 지우고 존재하는 그대로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예찬했던 로베르트 발저. 그는 허위와 겉치레를 용납하지 않았고 겸양과 관대함으로 타인을 대하려 애썼다. 그의 사후에 발견된 수첩에는 최대 3밀리 정도의 작은 글씨로 적힌 최후의 원고가 들어 있었다고 하니 작은 존재가 되고자 했던 신념을 상징적으로 담아낸 것처럼 보인다.



“진정한 시인은 먼지를 선호한다.”라고 발저는 말했다. 또 다른 은둔자였던 에밀리 디킨슨의 시 속, ‘길 위에 홀로 뒹구는 돌멩이’처럼, 꾸밈없는 자신으로 우주가 걸쳐 준 코트를 걸치고, 태양처럼 자유로이 결합하며 홀로 빛났을 그를, 상상해본다. 그를 사로잡았던 고독의 절망이 우리가 그를 읽을수록 옅어질 수 있길 바라며.



길 위에 홀로 뒹구는

하찮은 돌멩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성공을 걱정하지도 않으며

위기를 결코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그의 코트는 자연의 갈색,

우주가 지나가며 걸쳐 준 것

태양처럼 자유로이

결합하고 또는 홀로 빛나며,

덧없이 꾸밈없이

절대적인 신의 섭리를 지키며-

_ ‘길 위에 홀로 뒹구는’, 에밀리 디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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