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의 신호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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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앞에서 억지웃음을 짓고 하기 싫은 일을 참으며 마음의 부대낌을 간신히 짓눌러 하루를 넘기다 보면 자신이 위선자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때론 그런 생활이 며칠씩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삶을 정말 원하는 거야?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이렇게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해?’ 쏟아낼 수 없는 질문이 솟아나 한숨을 만든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이 소설을 읽는 건 위험하다. 믿었던 관계와 삶을, 자신까지도 의심하게 하는 이런 소설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패배의 신호>, 그 속의 ‘루실’을 만나는 건.







“태양, 해변, 한가로움, 자유… 이게 우리가 누릴 것들이야, 앙투안. 우리도 어쩔 수가 없다고. 그게 우리의 정신에, 피부에 뿌리 박힌 걸. 어쩌면 우린 사람들이 타락했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들일지도 몰라. 하지만 난 그렇지 않은 척할 때, 더 타락했다는 기분을 느껴.”

239쪽, <패배의 신호>, 프랑수아즈 사강, 장소미 옮김, 녹색광선



서른 살의 루실, ‘그녀는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 전혀 없었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인생에 계획이 없듯 걱정도 없었다. 모든 것에 무책임했고 그로서 행복했다. 영원히 소녀로 머물러 있을 수 있는, ‘해맑고 무심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그녀의 무책임은 결점이라기보다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힘’이었다. ‘행복하려는 의지’, ‘원형 그대로의 온전하고 순수한 이기주의’가 그녀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런 그녀에게 유일한 도덕은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그리고 삶에게 거짓 노력과 체면을 들이밀지 않았다. 독서와 사랑만을 탐닉하는 자신이 타락한 존재일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일 망정 남들의 기준에 맞춰 일하고 성공을 향한 불행한 열정을 품는 식으로 자신을 감춰 그럴듯한 모습을 꾸며내지 않았다. 자신에게 거짓일 때 더 타락했다고 느꼈다.


루실은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부유한 사업가 샤를의 집에 살았다. 샤를의 여자 친구로 그의 보호를 받으며 그가 사준 모피 코트를 입고 컨버터블을 타고 파리의 자유를 만끽하며 무위한 삶을 즐겼다. 하지만 어느 날 연회에서 앙투안을 만나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면서 그녀의 삶은 위태로워졌다.


샤를의 고급스러운 집을 떠나 앙투안의 허름한 방에서 시작된 현실은 그녀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무위와 고독을 즐기는, 물질의 소유도 사랑의 독점도, 사랑의 영원성도 원치 않는 그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걸 지켜주려 했던 샤를과 달리 젊고 불안정한 앙투안은 그녀가 어떤 역할을 맡아주길 바란다. 그와 함께 하는 삶 속에 뿌리를 내리고 미래를 설계하길 바란다. 그래서 직장을 다니고, 여느 사람들처럼 사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길 종용한다. 앙투안을 사랑해서 그의 뜻을 따라주고 싶었던 루실은 처음엔 그 역할을 맡아 애써보지만 일이 자신을 불행하게 한다는 걸 알고 차라리 앙투안을 속이기로 한다. 관능적인 사랑의 희열이 두 사람을 가둔 철옹성에 미래의 불안이라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앙투안은 침대에 드러누웠다. 두 시간을 끝도 없는 절망감과 질투로 보낸 터였다. 분노가 그를 기진하게 했다. 그는 루실을 믿었다. 루실이 진실을 이야기했다는 걸 알았다. 이 진실이 그를 안심시키는 동시에 한없이 씁쓸하게 했다. 루실은 혼자였고, 늘 혼자일 터였다. 한순간 혹시 루실이 그를 속이는 게 더 나았던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그는 멀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발음했다.

“루실… 넌 나한테 아무 믿음이 없니?”

222쪽



그 모든 기억이 그녀가 행복했을 때 기꺼이 삶이라고 불렀던 균일하고 어렴풋한 하나의 무리를 형성하는 대신에, 그녀가 덜 행복한 지금은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마그마가 되었다. 앙투안이 옳았다. 그들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둘이서 어디로 노를 저어 갈 것인가, 그들은 무엇이 되었는가?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객선이었던 이 침대가 표류 중인 뗏목으로 변했고, 그토록 친근하던 이 방은 추상적이 되었다. 그가 루실의 머릿속에 미래의 개념을 주입했고, 그럼으로써 그들 사이의 미래를 아예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 같았다.

225쪽







소설의 첫 장면은 샤를의 집에서 루실이 이른 아침 홀로 컨버터블을 몰고 시골로 떠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루실은 겨울의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 ‘첫 봄바람’의 기척을 느끼고 잠들어 있는 샤를을 깨우지 않고 봄기운을 만끽하기 위해 외출한다. 루시의 기척을 감지한 샤를은 그녀를 사로잡은 게 무언지 단번에 알아챈다. 실존이 세계의 변화와 감응하는 순간 느끼는 기쁨, 홀로 존재할 때 더 또렷하게 다가오는 손짓에 열렬히 반응하기, 즉 ‘고독의 희열’이었다. 루실은 태생적으로 고독 속에서 홀로 행복할 수 있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눈을 뜨는 순간 삶이 자신에게 그려 보이는 행복이라는 퍼즐 조각을 알아보는 사람, 그러므로 삶에 대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바라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녀에겐 강렬한 사랑 속에서 타인과 하나 됨으로 느끼는 기쁨 못지않게 본래의 자신을 유지하는데서 얻는 행복이 중요하다.



“고독 속에서도 더러 완벽한 행복의 순간이 있다. 위기의 순간엔 외부적인 어떤 것보다도 기억이 우리를 절망에서 구한다. 우리는 우리가 혼자서, 아무 이유 없이 행복했었다는 걸 안다.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행복 - 우리가 누군가로 인해 불행할 때 그 누군가와 필연적이며 유기적으로 관련이 있어 보이고, 또한 그 누군가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행복 - 은 실은 매끄럽고, 둥글고, 흠 없는 무언가로 더할 수 없이 자유롭게, 우리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물론 잠깐일 수도 있지만, 틀림없이 가능하다) 나타난다. 이 기억은 우리에게 이전에 다른 누군가와 공유했던 행복보다 더 위안이 된다. 왜냐하면 그 다른 누군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와 공유했던 행복은, 실수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기반을 두었던 허무한 기억으로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125쪽



누군가와 함께 여야지만 행복한 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만 행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때로 상대를 바꾸려 하고 구속하는 감옥이 되기도 하니까. 열렬한 사랑의 감정도 결국은 끝이 나고 감정의 소멸과 함께 찾아올 슬픔과 불행을 예감하면서도 사랑에 빠지고 아픈 이별을 감당할 수 있는 건 ‘고독의 기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사강은 말한다. 고독 속에 누렸던 완벽한 행복에 대한 기억이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를 견디게 해 줄 거라고. 어쩌면, 사랑이 아니라 고독이, ‘고독의 희열’이 인간 실존이 감내해야 하는 혼자라는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내게 해 준다고. 많은 것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상태로 지나가 현재는 과거로 물러나지만 기억만은 남아서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때론 사랑의 기억이, 때론 고독의 기억이, 불안을 딛고 현실을 건너게 한다. 그리고 기억들이 언젠가의 우리를, 불안한 미래에서 위로해 줄 것이다.



“… 내가 어긋난 게 아닌지 해서요.”

“어긋나? 뭐에 말이요?”

“삶에요. 남들이 삶이라 부르는 것에요. 샤를, 그러니까 인간은 정말로 사랑해야 하는 걸까요, 불행한 열정을 가져야 하는 걸까요? 존재하기 위해 일하고, 돈을 벌고, 무언가를 해야 하는 걸까요?” 샤를이 대답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필수적이진 않소. 당신이 행복하기만 하다면.”

“당신 눈엔 그걸로 충분해 보여요?”

“다분히.”

103쪽



체면. 모든 책임이 이 체면에 있다. 이미 얼마 전에 나는 깨달았다. 무위야말로 우리의 모든 미덕과 그나마 참아줄 수 있는 우리의 모든 자질 – 명상, 한결같은 기분 유지, 게으름, 활발한 정신적, 육체적 소화력 – 을 드러낸다는 걸. 먹기, 배설하기, 육체관계 맺기, 햇볕을 쬐며 빈둥거리기. 이보다 더 나은 건 아무것도 없다. 이것과 비교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극히 일부분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숨쉬기, 살아있기, 그것을 인지하기. 이보다 더 나은 다른 건 아무것도 없다.

213쪽



현실적 삶을 책임지는데 무관심한 채 하루치의 행복에 만족하는 루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아이 같다. 하지만 자신의 그런 모습을 잘 알고 있으며 현실 속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혼란을 느끼기도 하는 루실은 자신과 세계의 부조화 속에서 어떤 진실을 꿰뚫어 보기도 한다. 루실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무수한 사람들의 삶은 한 편으로 어리석게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이 의심 없이 자신을 저당 잡히고 마는 삶의 방식- 일과 성취를 향한 불행한 열정, 인위적인 노력과 도덕관념 등-은 당연히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무시해버린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애쓰는 삶이 반드시 옳은 것인지, 그것만이 추구할 가치가 있다고 칭송할 수 있는지, 당혹스러운 질문이 떠오른다.


자신과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딱 들어맞는 퍼즐을 찾아낼 줄 아는 루실이 부러워 그녀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무위와 자유를 추구하려면 스스로가 삶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무위와 자유를 쫓으려면 누군가가 삶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삶의 한쪽을 의지하게 된다면 어떤 책임을 져야 할까? 하지만 반드시 책임을 느껴야 할까? 체면 세우기에 사로잡혀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 건 아닐까, 도덕이라는 틀에 맞추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끝없이 솟아나는 질문 속에서 이런 갈등과 고민 없이 지금 이 순간의 생만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루실이야말로 용감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의 모든 시선,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에서도 벗어나 자신의 본성을 유지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내게 그런 용기가 있는지 질문해보면 우물쭈물하는 위선자가 보일 뿐이다.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사랑의 감정, 사랑을 잠식하는 불안과 두려움, 관계 속에서 홀로 느끼는 고독, 그 복잡 미묘한 감정을 이토록 매력적으로 표현해낸 소설이 또 있을까. <패배의 신호>는 천재 소설가라고 일컬어지는 사강이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한 아이의 엄마가 되는 경험을 겪고 난 삼십 대에 쓴 소설이다. 그녀의 소설에 지속적으로 등장한 사랑과 이별이라는 주제에 삶의 깊이가 더해졌음이 느껴진다. 젊은 시절에는 알 수 없었던, 사랑과 관계의 쓸쓸함, 모든 것이 허물어진 자리에서도 계속되는 삶의 속성을 알게 되어 이 소설이 더 빛나게 읽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사랑의 광휘가 아니라 '고독의 희열'임을. 고독을 다루는 능력이 삶과 관계의 비밀 열쇠라는 깨달음에 닿는지도.


<패배의 신호>는 단순한 연애 소설이 아니다. 삶과 사랑, 삶에서 추구하는 성취를 위한 노력, 관계와 결혼, 행복과 고독에 대한 관념을 뒤집는 이야기다. 루실에게 패배했음을 느끼며 앙투안의 심장에서 ‘퇴각의 북소리’가 울렸듯, 내가 믿어왔던 것에 패배했음을 느낀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웅-웅-웅-, ‘퇴각의 북소리’가 울린다.



“인간이란 정말이지 예기치 못할 존재였다. 인간에 대해선 결코 ‘모든 것’을 알 수 없었다.”

33쪽



인간도, 삶도, 사랑과 행복조차도 예기치 못한 속성이 있지 않은가. 심지어 고독조차도. 결코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그것들에 대해 이토록 예리하고 우아하게 써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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