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너머 어렴풋이
신유진 지음 / 시간의흐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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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본다는 행위는 기억으로 완성된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제대로 본 것이 아니다.

신유진, <창문 너머 어렴풋이>, 시간의 흐름, 122쪽




어려서부터 남들보다 기억력이 안 좋았던 나는 보는 것에 서툰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마음의 시력이 약한 사람. 기억력이 안 좋은 걸 알아서,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게 습관이 되고 살아가는 일의 일부가 되었다. 시력이 약해 보는 일에 더 정성을 들였고, 그 감각이 글로 포개졌다는 작가 신유진처럼 내게도 글쓰기는 시력을 교정하는 일이었으려나.



신유진 작가의 <창문 너머 어렴풋이>에는 유독 ‘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작가는 출판사로부터 ‘감각’에 대해 써 주길 제안받았고 그게 모호해 ‘시각’으로 좁혀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이 책은 ‘보는 일’을 주제로 쓰인 책이다.



작가의 보는 일은 그녀의 집에 있는 두 개의 창에서 시작된다. 어둠을 보여주는 서향 창은 기억으로 통한다. 빛이 들이치는 남향 창은 빛이 남긴 흔적과 얼룩을 더듬는 일로 이어진다. 그렇게 두 개의 창 앞에서 그녀가 길어 올린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다. 작가는 친절하게도 창 앞에 우리를 위한 의자를 준비해 두었다. 그녀가 내어준 의자에 앉아 한껏 열어준 창을 내다보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글과 맞닿은 자신의 기억과 빛의 얼룩을 마주하게 된다.



내 글이 방이라면…, 글자 가득한 방에 기억이 보이는 창 하나와 빛이 들어오는 창 하나를 내고 싶습니다. 그리고 거기, 창가에는 당신을 위한 편안한 의자를 가져다 놓을 겁니다. 상상만으로도 이 작은 방이 벌써 환해지는 기분입니다.

창가에 잠시 머물다 가시겠습니까?

지금,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12~13쪽



그녀가 서향 창으로 보여주는 기억의 창고에는 어린 시절을 보낸 빨간 벽돌 이층 집과 아기였던 그녀를 등에 업고 재워주던 미자와, 친구 희와 지영이, 그리고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번역 일로 알게 된 문학평론가를 통해 특별한 곳이 된 리스본에 대한 기억과 뱃속의 아이를 잃었던 은밀한 상처도 있다. 때론 부끄러이 여겼던 어릴 적 추억은 어느새 아련하고 안타까운 것이 되었다. 돌아갈 수 없기에 그리움의 먼지만 뽀얗게 앉은 기억들. 먼지는 빛이 타버리고 남은 재가 아닐까. 한때 찬란하게 우리 앞에서 빛났던 시간들이 먼지처럼 켜켜이 쌓여 있다.



작가는 먼지 앉은 그 기억을 이렇게 부른다. “멀어진 것들이 남기고 간 굴곡진 풍경 같은 것, 그러니까 시간의 주름.”(27쪽) 일기장에, 빛바랜 편지 속에 잠들어 있던 이야기를 작가는 ‘시간의 주름’이라는 이름으로 펼쳐 보여준다. 그 주름 사이에 고인 것들이 낡고 부질없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곳에서 작고 희미한 빛을 품고 있다는 걸, 슬픔과 기쁨, 다정과 온기, 기다림과 사랑임을 살뜰하게 그려낸다. 어쩌면 그곳의 빛이 이곳의 어둠을 밝혀 우리를 지탱해주는지도 모르겠다고. 그걸 바라보는 사이 내 기억의 빛깔도 미세하게 바뀌는 것 같았다.



초록색 대문이 달린 이층 집에 살았던 기억, 잠시 일을 했던 엄마 대신 살림을 봐주었던 먼 친척 이모할머니, 새우깡과 짱구를 나누어 먹고 테이프 앞 뒷면을 좋아하는 노래로 꽉 채워 교환하곤 했던 친구 미연이와, 지금도 만나면 그때 순정 만화책을 나눠 보던 일을 회상하며 깔깔거리게 되는 연정이, 그리고 떠올릴 때마다 그 끝에 슬픔이 맺히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보고 싶어 진다. 이상하다. 나는 신유진이라는 작가의 기억을 들여다보았을 뿐인데 거기서 내 기억으로 통하는 창을 발견한다. “모든 순간이 연결되는 지점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작가처럼, ‘내’가 있어 그녀의 기억과도 연결이 된다. 나는, 우리는, 이렇게 “어디에나, 있다.”(119쪽)



빛을 보여주는 남향 창의 분위기는 서향 창과 또 다르다. 그녀의 창에서 보았던 고라니와 그걸 함께 본 강아지와 나눈 무릎 키스, '눈(雪)'에 대한 기억과 ‘숨’으로 연결된 세상, 엑상 프로방스에서 페터 한트케와 세잔과 같이 걸었던 일, 뒤라스의 바다, 세르지의 은퇴 공연과 언젠가 살았던 프랑스 시골 마을 집 창 밖의 사람들 이야기가 소설처럼 펼쳐진다. 서향 창에선 과거의 기억으로,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갔다면 남향 창에서는 창 밖으로, 나의 외면으로 시선이 나아간다. 그 경험을 통해 작가가 깨닫는 것은 내가 바라보는 풍경이 자신의 내면이 된다는 역설이다.



내가 볼 수 있는 만큼만 보이는 것이니까. 풍경이 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풍경이 되는 것임을 오래도록 모르고 살았다.

166쪽



여행은 걷는 일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지금도 날마다 산책을 하며 호수가와 숲을 걷는다. 그녀에겐 보는 일이 곧 걷는 일. 걸으며 본 것과 인식한 것 사이, 그 틈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나의 심상이라고 말한다. 내가 바라보는 지점과 인식 사이에서 떠오르는 상(象)이 나의 심상이며 그것이 곧 나의 내면이라고. 그녀에게 “하나의 장소는 내면과 외면이 만나는 지점”(120쪽)이다.



그녀가 자신을 열어 보여주는 풍경들은, 그곳이 엑상 프로방스든, 트루빌이든, 리스본이든 모두 그녀 내면의 풍경인 것이다. 그곳을 보는 사이 내면에 맺힌 상(象)이 그녀만의 언어라는 색을 입고 이 책을 빼곡히 물들인다. 풍경의 장( 넘기다 가슴이 울렁거려 자주 멈춰야 했다. 그녀의 내면과 만나려 나의 내면이 너무 빠르게 멀리 내달렸던 걸까.



“어떤 글들은 그 창을 지나 누군가에게 닿는다. 나의 가장 먼 곳과 타인의 가장 가까운 곳이 만나는 경계에서 그런 식으로 의사소통이 일어난다.”

(김연수, <거울이 아니라 창에서 글쓰기>, ≪사물함≫5호, ‘창문’)

이제 나는 완전히 열지 못했던 창을 활짝 열고 이 기록을 힘껏 던진다. 내게 가장 먼 곳이 당신에게 가장 가까운 곳임을 기억하며. 여기, 이 글을 저기 멀리서 보고 있으리라는 믿음, 그것으로 한 글자씩 써 내려간다.

145쪽



“내게 가장 먼 곳”에 서 있는 그녀가 창을 열어 내게 가장 가까운 곳까지 던져주는 기록을 힘껏 끌어안느라 온 몸이 흔들렸으려나. 그런데도 나는 영원히 그 창 앞을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언제든 그녀가 던져주는 소중한 것을 받을 수 있게 한 순간도 한눈팔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그녀가 활짝 열어준 창이, 거기서 새어 나오는 검은빛이, 빛의 흔적과 얼룩이라는 낯선 것들이 생소하게 아름다워 하염없이 기뻤으니까.



책을 다 읽고 나자 세상에 없던 하나의 창이 내 앞에 생긴 것 같다. 작가가 열어 보여준 창을 건너 나의 내면을 향하는 창의 존재를 알아챘으니. 그녀의 말처럼 내면은 내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나를 둘러싼 외면의 풍경에 있을 테니까.



이 창 앞에서 나는 스위치를 내린 채 어둠 속을 응시할 수 있을 것 같다. 작가처럼 “컴컴한 어둠에 내가 만든 미약한 빛”(11쪽)을 보내며 더디게 당도할 풍경을 기다리고 싶다. ‘시간의 주름’을 천천히 펼쳐 보거나 나를 지나간 풍경이 남긴 ‘빛의 얼룩’을 더듬어 보고 싶다. 언어 밖의 세계를 상상하고 내가 보는 것과 인식하는 것 사이의 틈새를 지켜보는 일. 그러다 ‘반딧불이’나 ‘뜨거운 눈(雪)’, ‘검은빛’ 같은 것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그건 "소중한 사람, 소중한 무엇과 조금 더 해보”겠다는 마음, 조금 더 사랑해보겠다는 다짐일 테고.



“어떤 작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런 것이 아닐까. 그의 창문에 서서 그가 보는 풍경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151쪽) 뒤라스의 창 앞에 서서 그녀의 풍경을 받아들인 신유진 작가처럼 작가가 열어 준 창을 통해 그녀의 풍경을 끌어안는다. 그녀의 심상과 언어를, 자기 앞에 놓인 생을 한치의 아쉬움 없이 사랑하려는 다정한 자세를 받아들인다. “조금 더 기쁘고, 조금 더 슬픈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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