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장이 없는 삶이라도
김해서 지음 / 세미콜론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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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렵고도 기쁜 사실 하나 알려줄까. 시간에 벼려지고 벼려져 마침내 사람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을 거야. 나무가 자라 겨우 나무이기만 한 것처럼.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가능성은 없어. 너 역시 어떤 경우에도 네가 될 수 있어. 그보다 큰 위로가 있을까. 나도 나를 선택하기 위해, 택할 수 없는 여러 미래를 받아들여야겠지. 

(…)

너는 너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지. 그러나 기억하렴. 깎이고 깎여 그저 너이기만한 너도 나는 사랑한단다. 너의 무상함도 사랑해. 깔깔거리는 웃음, 씰룩이는 엉덩이춤, 고양이 앞에서 해제되는 무장, 사방으로 뻗는 호감과 눈물. 아무것도 아닌 모든 너를."  

253~254쪽



“시간에 벼려지고 벼려져 마침내 사람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사람의 글,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가능성은 없지만 어떤 경우에도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걸 기쁨이자 위로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글을 읽었다. 그런 글이 모인 책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버티고 깎아온 시간이 빼곡히 담겨 있다. 진실해서 고유하게 빛나는 책이란 이런 걸 테다. 김해서 작가의 산문집 <답장이 없는 삶이라도>이다. 



그녀는 아주 어릴 적부터 시인이 되길 꿈꿨고, 국문과를 다니며 등단을 위해 매년 신춘문예에 시를 보냈지만 거듭 낙방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인정을 받아 시를 쓰는 대신 “에세이, 인터뷰를 비롯한 잡지 기사, 주얼리나 향기 제품 설명글, 책 큐레이션 등” 다양한 글을 쓰며 스스로 자신의 시를 먹여 살렸다. 그녀는 시인이 되지 않고도 시를 썼고, 시인이 되는 대신 시처럼 살게 되었다. 어느새 시는 그녀 삶의 바닥이 되었다. 자신이 엎어지더라도 매번 그 위라는 걸 믿을 만큼 시로 다져졌다.   



"쌓인 것들을 모아 시집을 낼 수도 있으려나. 시집을 내면 시인이 될 수 있으려나. 그러나 그때도 나는 계속 ‘지망인’이기로, 시와 그다음 시 사이에서 기다리는 지망인. 늘 다음 시가 목표인 지망인. 

내 삶의 자리를 찾았다. 이 잠자코의 시간. 평온한가 물어온다면, 그렇다." 

59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하면서도 세상에 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시를 흠모하여 시로 다져진 내 감각이 무엇으로든 세상에 쓰일 수 있음을, 그것으로도 이 한 몸을 지탱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내게는 버티는 힘이 존재한다. 그 사실만으로 자긍심을 되찾고 감사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다. 일은 일이고 시는 시니까. 시인은 어떤 상태일 뿐 직업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나는 내시를 먹여 살리기 위해 일하는 몸으로 전환되었다." 

65쪽



"하지만 이젠 안다. 행복의 기준을 자기 자신이 세운다면 어떤 거절과 실패 앞에서도 나는 부정당하지 않을 수 있다. 스스로 확보한 작은 행복만큼 나의 아웃라인은 선명해진다. 외부의 평가나 자극에 휩쓸리지 않고, 어떤 사회적 강요에 복종하지 않고, 순수하게 뻗어나가는 기호와 기쁨을 키우는 게 가능하다. 누구와도 다른 나만의 목소리는 그렇게 빚어진다." 

70쪽



그녀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촘촘하게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기억하기 위해 얼마나 살뜰하게 살았을지 짐작하게 된다. 유년 시절을 지나 지금의 자신이 되기까지, 나와 외부, 가족과 주변의 사람들을 세심하고도 끈질긴 시선으로 탐구해온 기록이 말해준다. 어떤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의 시선과 언어를 어떻게 만들어 왔는지, 자신과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있는지, 그녀의 글은  보여준다. 온 마음을 다해 살아왔음을 알려준다.  



“나는 꽤 진지하게 믿고 있다. 지금만큼, 내 사람들을 사랑할 자신이 있다.”

301쪽



이 책은 '김해서'라는 시를 애정 하는 한 사람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과 사람, 시라는 세계를 사랑하는 일에 대해 쓴 글이다. 매일 시와 연애하면서도 지치지 않고 시를 향한 마음만은 끝까지 책임지려는 섬세한 사람이 그 마음으로 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걸 시의 언어로 애틋하게 써 내려간 글이다. 온통 사랑으로 가득 차 붉게 물들어가는 글.



“서러움이라는 건 홀로 짙은 빨강이 되는 기분이라”고 그녀는 말했지만 책을 읽는 동안 내 마음이야말로 짙은 빨강이 되는 기분이었다. 부러움과 질투심으로. 이토록 무언가를 끈질기게 사랑할 수 있는 마음과, 그토록 세밀하게 삶을 기억하고 풍성하게 상상할 수 있는 언어에 대해. 아마도 ‘시’에게 보냈던 그녀의 긴 연서는 이런 답장으로 돌아온  같다. 그녀만의 반짝거리는 언어로 말이다. 김해서의 실패가 부럽다. 시인이 되지 못했는데도 평생 ‘지망인’으로 살고 싶다고 다짐할 수 있는 실패, 그러느라 누구도 아닌 그녀만의 목소리로 찬란히 빛나는 글을 쓰게 된 이상한 실패를. 



책을 읽고 나면 이런 확신이 든다. 열심히 살아서 자신이 된 사람이구나, 김해서 작가는. 그러니까 나도 열심히 살아서 나 자신이 되어보고 싶다. 누구도, 무엇도 아닌 그저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벼려지고 벼려지는 시간을 기어이 버티고 싶어 진다.   



이 모든 게 시의 힘이라는 것도 기쁘다. 다른 무엇 때문도 아닌 뭔가를 쓰고 싶어서 침이 고이고 열심히 살고 싶고 자신에게 정직해지려는 게.” 

27쪽



'김해서'라는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답장이 없는 삶'에 대한 답장이   같다.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도 자신이 되고 삶을 책임질  있음을 보여주는 사람. 그녀를 알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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