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적 살던 이층 집에는 마당이 있었다. 집과 마당을 담벼락이 둘러쌌다. 집과 담 사이로는 한 명이 간신히 지나다닐 수 있는 통로가 있었는데 그리로 들어가면 창고가 나왔다. 통로에는 잡풀이 자라고 죽은 식물의 줄기와 까만 먼지, 어디서 왔는지 누가 버렸는지 알 수 없는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창고의 상태도 비슷했다. 바닥에는 낡고 더러운 판자가 널려 있고 쓰지 않는 연탄과 더러운 것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한쪽엔 재래식 화장실이 딸려 있었는데 어린 시절 많이 들었던 귀신 이야기에 등장할 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



내가 낡은 창고를 알게 된 시점은 쓸모가 사라진 다음이다. 보일러 실이었지만 더 이상 그 역할을 하지 않는 곳. 버려진 폐허. 귀신이 출몰할 것 같은, 더럽고 괴기스러운. 그러므로 위험한 곳, 금지된 장소.



그 통로를 지나 창고를 갔던 건 몇 번이나 될까. 모든 기억은 하나로 통합되었다. 혼자 몰래 거길 갔던 기억만 남았다. 들어가면 안 되는 곳, 열면 안 되는 문. 내 안에 새겨진 금지의 명령을 위반했던 순간. 뒤돌아 도망가고 싶으면서도 기어코 한 발을 내딛고 있던 기묘한 마음. 무섭게 두근거리면서도 강렬한 열망을 뿜어내던 심장을 기억한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홀린 듯 문을 열었던 순간을.



크리스티앙 보뱅의 <가벼운 마음>(김도연옮김, 1984books)을 읽다 그때 그 소녀의 마음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교감했던 늑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주인공은 가출을 일삼으며 자랐고, 성인이 되어서도 늑대의 환영을 떠올리며 빽빽하게 둘러싼 삶이라는 가림막 사이에서 틈새를 발견한다. 길들여지지 않는 마음, 그러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그녀는 틈새를 가뿐하게 넘나 든다. 때로 음악과 글쓰기로 잠수하면서.



"아마도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던져버린 이 생애 안에 있는 것 같다. 나는 가장 위대한 기술은 거리두기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가까우면 불타오르고, 너무 멀면 얼어붙는다 정확한 지점을 찾아서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건 현실 속의 모든 배움처럼 비용을 치러야만 배울 수 있다. 알기 위해서는 대가를 내야 한다."

145쪽



"우리가 무언가를 하는 것은 결코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와 닮았을 다른 무언가에 다다를 시간을 스스로에게 주려고 하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하려는 일은 나와 많이 닮았다. 그렇다. 내 천사는 정확하게 보았다. 나는 쥐라에서 어른이 되었고, 많은 성장을 했다. 전에는 불가능했다. 전에는 항상 누군가가 있었다. 부모, 남편, 친구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장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품은 사랑, 우리를 충분히 안다고 믿는 사랑에서 벗어나야만 성장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말하지 않을 것들을 할 때야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 설사 그들에게 말한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고, 붙잡을 수 없고, 그들이 던져 준 사랑의 망토로 덮을 수 없으며, 우리 속에 머물러 우리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건 천사 혹은 늑대의 일부다."

177쪽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부모님과 나, 그리고 딸을 생각한다. 함께와 홀로를 생각한다. 서로를 잘 안다고 여기지만 사실 전혀 모르기도 하는 우리를 둘러싼 관계를. 그들은 자주, 혹은 때로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할 수 있다. 하지만 홀로 있을 때만 찾아오는 가벼운 마음도 잊지 않았다. 자기만의 기쁨에 몰두하게 하는 그 마음은 길들여지는 것에 저항하고 금지된 것의 문을 열고자 한다. 그 마음 안에서 나는 아직도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에게 진심이라는 게 있다면, 사물의 핵심과 같은 단단한 핵이 있다면, 그것은 '가벼운 마음'이라고 크리스티앙 보뱅은 노래한다. 나의 그리고 너의, 늑대 혹은 천사의 일부인 마음에 대해. '어린아이의 피와 꿈과 연결된' 늑대, 어떤 순간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잠옷 입은 천사. 우리가 기억하고 지켜야 하는 건 그런 마음이다.



'가벼운 마음'을 노래하는 그의 글은 '날개와 기쁨'이 달린 하나의 음악 같다. "기다림, 피곤, 지루함으로 이루어진 투박한 삶을 사로잡고, 평범한 날들의 실체를 잊으려 굳이 애쓰지 않은 채 그런 날들을 자신의 기반과 자양분과 비상의 토양으로 만"드는 음악처럼, 우리를 가뿐하게 삶의 잊힌 틈새로 이끈다. 유년의 길들지 않은 마음으로, 늑대 혹은 천사가 살고 있는 그 장면으로.



"나의 늑대를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 눈에 비치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며, 그들이 다가오는 것 같을 때라도 실은 우리에게서 멀어진다는 것과, 모든 건 처음부터 사라지며 소멸해 간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절망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건 단순한 생각이다. 그 때문에 오히려 주저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으며, 그 생각으로 나는 이 순간에도 노래 부를 수 있다."

154쪽



모든 건 처음부터 사라지며 소멸해 간다. 이 사실은 절망의 이유가 아니라 주저 없이 사랑할 이유가 된다. 어둠이 머금은 희미한 빛을 따라 걸어 들어갈 용기, 달콤한 제안을 거절하고 낯선 스텝으로 옮겨가는 유연을, 윤곽이 지워질수록 드넓어지는 세계, 버림받은 것들에게 곁을 내어주는 온기를 선택하게 해 준다. 늑대의 마음, 혹은 천사의 마음으로 사랑하자. 사랑받지 못할까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언제든 우리를 사랑해줄 누군가를 찾을 수 있으니까. "공기, 모래, 물, 빛은 늘 옆에 있"(51쪽)으니까. 침묵으로만 볼 수 있는 사랑이 우리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다.



책장을 덮자 가슴에서 일제히 새들이 날아오른다. "섬들의 새".(25쪽) 가벼운 날갯짓, 빛처럼 부서지는 웃음소리. 간질간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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