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윤은 타인의 불행이 나를 위로해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위안을 단순히 섭취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타인의 불행에 기대는 것이 ‘천박한 안전장치’ 임을 안다. 고통받는 나를 통해 타인도 고통받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하고 연민하는 ‘인류애’를 발휘할 줄도 안다. 불행을 나누는 데서 ‘연대감’이 생기고 그 ‘불행의 대잔치가 행복의 시작’ 임을 ‘기어이’ 발견해낸다.
자신의 불행과 부족을 부정하지 않고 곡해하지도 않는 작가의 시선이 건강해서 좋다. 거기서 체념하는 대신 발상을 바꾸어 기쁨의 씨앗을 찾아낼 줄 아는 것도. 그건 행복해지겠다는 다짐이라기보단 불행에 지지 않겠다는 다짐 같다. “행복은 순간이고 여운도 짧다. 불행은 자주 오고 여운도 쓸데없이 긴데.” (223쪽)
저자는 부질없는 행복에 투자하는 대신 ‘다양성’과 ‘고유함’, ‘무용’ 한 것들을 눈여겨 바라보며 자기만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찾는다. 불행과 친구가 되는 법을 터득하고 삶 속에 숨어 있는 ‘작은 귀여움’을 모으며 산다. 자신의 불행에 섬세한 시선을 건네고 타인의 불행에 공감할 줄 알기에, 그녀의 삶과 글쓰기는 믿음직스럽다.
그녀의 글은 점처럼 작은 이야기를 모아 어떻게 별자리를 만드는지 보여준다. 별개로 흩어져 있던 별을 오지윤이라는 실로 연결하는 방식은 참신하다. 가령, ‘바다 수영이 좋은 이유’라는 글에는 바다 수영과 타투, 돌아가신 할아버지와의 추억 같은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이들은 제각각의 모양으로 저자에게 삶의 안정감을 주는 대상이다.
글의 말미에는 바다에서 수영하는 한 할아버지와 어린아이의 모습이 담긴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깊이지만 할아버지와 함께 여서 안정적인 아이의 환한 미소. 그녀는 바다와 타투, 할아버지와 어린아이 같은 '흔하면서 아름다운 것'을 연결해 자신에게 필요했던 평형감을 되찾는다. 이 글에는 아련한 여운이 길게 맺힌다.
오지윤만의 에세이 작법의 또 다른 장점을 꼽아본다면,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담담하게 풀어내면서도 정확한 단어로 감정의 결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에는 마음을 건드리는 문장이 수두룩하다. 수시로 ‘싱숭생숭’해지는데 “마음이 움직여 어수선해지는 것이다.”(168쪽) 파킨슨 씨 병을 앓는 아빠를 바라보며 쓴 부분이 특히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