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보는 법 - 법치주의의 겉과 속
김욱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MB가 법에 대해 말할 때 마다 역겨움을 참을 수 없다. 도대체 그(와 그의 하수인들)가 생각하는 법이란 도대체 어떤 모습인가? 그런데 MB는 그렇다 하더라도, 삼권이 분립되었다는 사법부 법관들은 도대체 뭐하는 족속들인지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군사정권 시절 법정에서 많은 민주인사들이 고문에 의한 강압이었음을 호소해도, 법관들은 무시했다. 바지만 올려보게 했어도 확인할 수 있었던 고문을, 그들은 모른 채 했다. 한국 현대사에 대해 이런 저런 자료를 접할 때마다 법조계에 대한 나의 불신과 분노는 커져만 갔다. 민주주의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담보로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그들 법관과 검사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했던가? 그들이 법, 그나마 지배계급의 이익에만 복무하는 그 누더기의 법에라도 충실했다면, 오버하지 않고 딱 그 기준만이라도 지켜줬더라도, 우리 사회가 그나마 좀 더 숨쉴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상상을 한다.  

  아니, 그들 법조인에게 분노를 느끼는 내가, 현실(?)을 모르는 낭만적 투정일 뿐인가? 법관들이 최소한의 양심에 따라 판결하고 아니, 판결하지 않고 그냥 거부하고, 법복을 벗고 변호사 개업을 한다 해도, 그래도 이 사회의 상층부 아니겠는가? 내 생각이 지나친 것일까? 법관들이 법복을 벗는다 해도 변호사 개업까지 방해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저러나, 그들은 절대적 기준으로 볼 때 일반 서민들보다는 살아남기 수월했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 안이한 생각일까? 우리의 사법부는 독재와 억압에 책임이 어느 정도일까? 나는 지금 부정한 독재정권에 던져야 할 분노를 힘없는(?) 사법부에게로 잘못 향한 것일까?  

 

  그러나 나는 내 편한대로 그냥 말해야겠다. 고문에 의한 자백으로 죽음의 공포 앞에 선 자에게 사형과 몇 십년 징역형을 선고하는 그들이, 나치의 무뇌아인 ‘아이히만’과 다를 바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엘리트 의식’의 단면일 것이다. 사회 최상층을 향한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못 견뎌하는 엘리트 의식, 이 더러운 욕망의 관성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사법부만이라도 똑바로 기능해 준다면, 그래도 희망이 있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관습 헌법 운운하는 자들을 보라, 촛불에 대한 사법부의 태도를 보라, 언론 소비자 운동에 대한 그들의 판결을 보라, 삼성을 다루는 그들의 주둥이를 보라! 기대난망이다. 또 헌법 재판관이든 대법관이든, 한 사회의 상층부를 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회의 보수적 이념을 통과하지 않으면 진입 자체가 불가능한 것 아니던가? 선출되지도 않고, 통제 받지 않는 절대 권력이다. 지금 미디어법의 불법성을 헌재에 가져가는 이 상황도 완전 코미디다. 입법부가 사법부에 스스로 종속되기를 바라는, 이 희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법이란 당연히 지켜야하는 것이라고 이제는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법’을 냉소하기 시작했다. 그 누군가 법을 외치면 외칠수록 그것은 기만의 주술로만 들렸다. 더더욱 요즘엔, 법을 외치는 자일수록 더욱 그를 불신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 말한 적이 없음에도, 우리사회는 이 담론의 위력이 넘쳐난다. 설혹 그가 그렇게 말했다 하더라도 이는 당연히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만, 자신의 알량한 준법성을 내세우는 근거로 그냥 맹목적으로 내세우곤 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악법도 법이다라는 이 거짓 담론을 누가 유통시키는가이다. 그래서 이 담론이 결국 누구에게 봉사하고 있는가를 지적하는 것이다.    

 

 

  서설이 길었다. 김욱의 『법을 보는 법』, 유익한 책이다. 이 책은 판검사나 사법부 행태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일반인들의 법 이해를 위한 에세이로 볼 수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일반인을 위한 법 상식을 도와주는 책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법에 대한 책들은 대체로 너무 학문적이거나, 혹은 너무 기능적이거나 한데, 김욱은 법에 대한 교양적 설명을 꾸준히 해 주고 있다. 아마도 우리의 법학자들은 너무 고상(?)하여 이런 글은 쓰지 않는 모양이다. 이런 책을 꾸준히 내는 김욱은 그 바닥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의 작업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의 책들은 모두 읽을 만하다.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자본주의 시대 우리가 만든 실정법은 자연법에 토대를 두었으니 이 실정법의 정당성을 논하지 말고 이제는 그 주석에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86)

 저자는 줄곧 ‘법 실증주의’를 비판한다. 부르주아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이렇게 말해왔다. ‘적힌 글자 그대로 따라! 그게 준법 정신이야!’ 저자는 이러한 법 이데올로기에 대해 ‘누가 법을 만들었는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렇다. 새겨 두자! 지금 당신이 말하는 법은 누가 만들었으며, 누구더러 지키라 하는가? 김욱은 그의 다른 책 『교양으로 읽는 법 이야기』에서 재미있는 예를 든다. 

 “예컨대 법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절도를 금한다. 그러나 부자가 남의 물건을 훔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기본적으로 이런 법은 가난한 자를 대상으로 하는 법이다.”

 재미있지만 명쾌한 예 아닌가? “법은 이미 그 자체가 강자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여기에 더하여 부자가 남의 물건을 훔쳐도 안 잡아 간다.)  

 

 16C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前, 지옥같은 공장에서 일하고 얻는 피죽 한 그릇 임금보다는, 차라리 부랑자가 되기를 택한 사람들을 겨냥한 자본가들의 해결책은 무엇이었을까. 간단하다. ‘그들 자본가의’ 법을 만드는 것이다. 부랑자가 노동하기를 거부하고 3번 째 단속될 때에는 사형! 즉 공장 바깥 세상을 공장보다 더 지옥 같이 만들어 버리는 법을 제정한 것이다. 그래서 7만명 넘는 사람들이 교수대에서 목이 잘렸다는, 그래서 ‘노동하는 규율’을 확립해 갔다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언제나 이런 끔찍한 이야기로 넘쳐나는, 당신이 믿거나 말거나, 역사는 그러했다는, ……  

  

 

 비정규직! 최대노동에 최소임금, 시급 몇 백원 올리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우리 시대의 노비들. 아직도 노비가 있느냐는 놈들의 주둥아리들에게, “어셔 오십쇼~  캄사함미돠~”를 이마트 구석구석에서 하루종일 소리치게 하고 싶은 나의 가학증이 도진다.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지 뭔 노비냐고? 이 쓰~바, 그럼 너는 일하기 싫으면 직장 안 나가도 되겠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란, 노동하거나 굶어 죽거나의 자유일 뿐이란 걸 모르면, 그 놈은 자본가이거나 진짜 바보이거나~ 
 

 지금 비정규직은 은유로서의 노비가 아니라, 실제 노비 그 자체이다. 온갖 이론을 들먹여도, 그들은 노비 문서에 묶여 있을 뿐이다. 올해 현대와 삼성은 최대 이익을 냈다한들, 그 이익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착취에 바탕한, 자본가의 이익일 뿐, 부(富)는 절대로 낙수(落水)하지 않는다.  

 

 요즘 MB와 그 하수인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면, 투표로 당선 되었기에 무엇을 해도, 국민들에게 위임받은 정당한 권력 행사라는 식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전통성과 정당성의 범주로 ‘똥침’을 날린다. 

  “이론상으로는 정통성이 없어 저항권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정권도 선정을 행함에 따라 정당성을 획득해갈 수 있으며, 정통성 있는 정권도 악정을 반복함에 따라 정당성을 잃고 저항권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 정도(程度)에 있다” (237)

  그래, MB가 비록 국민 투표라는 정통성을 확보했더라도, 국민과의 소통에서는 그 정당성을 잃었다면 당연히 저항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대의 받은 자들이니까 무엇이든 다 해도 된다는 듯이 하는, 이 오만의 극치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지금 미디어법 가지고 장난치는 놈들이 부결된 법안을 ‘투표 불성립이니 재투표’로 가결될 때가지 하는 걸 보면, 누구 말마따나, “대선 불성립, 재투표해 쓰바~”  

 

 “기관 구성권과 정책 결정권을 분리해서 국민에게는 기관 구성권만 행사하게 하고 국회의원에게는 정책 결정권을 자유 위임한다는 대의제 원리”(119)의 폐해가 여지 없이 드러나고 있다. ‘너희들이 뽑았으면 우리가 어떤 정책을 펴든 이건 민주주의야!’란다. 애야~ 아니란다. 민주주의란 그런 게 아니라고 학교에서 못 배웠구나~  계속해서 저자는 대의 민주주의라고 할 때, ‘대의’와 ‘민주’는 모순 관계에 있다고 한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피지배계급의 무기였으며, 대의제는 지배계급의 무기였다는 사실이다”(122)   

 

 

 그래서 ‘대의/민주’주의가 서로 모순 관계 속에서 진보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대의제에 모순되는 <국민투표, 국민발안, 국민소환제> 같은 직접 민주주의 제도를 반드시 규정해야 한다고 한다.(123)  그럼에도 법은 언제나 체제의 수호자로서 ‘보수’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당연하다. 법은 기본적으로는 언제나 재귀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분쟁을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법이 모든 이해관계로부터 초연할 수는 없다. 만약 기득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을 ‘보수나 진보에 초연한 태도’라고 착각한다면 더 큰 문제다. 법 자체가 기득의 질서를 반영하는 것인데 어떻게 그 법에 의한 법원의 판단이 보수나 진보에 초연할 수 있겠는가?” (144)  

 

 그래서 재판이 공정하다거나 법은 절대 불편부당하다거나 하는 소리는 헛소리가 되는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판검사들이 뭐하러 법리 논쟁을 하겠는가? 어떤 사건을 입력하면 바로 판결이 출력되는 ‘판결 자판기’만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법관들이 상식적으로 납득가지 않는 판결을 내놓으며, 재판이 공정하다고 항변하곤 하는데, 이는 “법치주의 이데올로기의 은밀한 지배이자 판사들의 순결 메카니즘”(152)이라고 조롱받을 수 있는 것이다.  


 자, 이제 법의 강요에 대해 한 번 쯤 생각을 다시 해보자. 누군가 내가 도저히 상식으로도 인정할 수 없는 법의 이름으로 나를 잡아 법정에 세운다면, 당연히 두려울 것이다. 그렇다, 왜 두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적어도, 나의 내면에서 ‘나는 위법자야, 나는 반사회적 인간이야, 나는 부도덕해’ 따위의 자기 비하와 검열은 더 이상 하지 않도록 하자. 물론 그렇게 열심히 나를 자위한다 해도, 법은 힘으로 나를 능멸하겠지만, 내가 나 스스로를 능멸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말도 안 되는 법’을 비웃어 주는 것이다. 법을 조롱하는 것이다. 법을 낙후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법의 위선을, 위선을, ×같은 위선을 마음껏 비웃어 주자! 
 도둑을 잡으러 도로를 가로질러 갔다 해서, 도둑은 내버려 두고, 쫒는 자를 도로 교통법 위반으로 잡아가는, 이 희대의 희극장에서는, 우리도 웃어줄 수 밖에 없다. “그래 쨔쌰~ 너 정말 웃긴다~” 비웃어 주자, 그래서 공연을 멈추게 하고, 막을 내리게 하는 수 밖에 없다. 웃어 주자, 심하게 웃어 주자,  깔깔대며 비웃어 주자!   

 

 

 법을 지키라고? 그렇게 말하는 너는? 그 법 누가 만들었냐? 똥침을 날려 주자!  


  “(사회에서) 위법이 전혀 완벽하게 없다는 것은 사실상 법과 현실이 모순 없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의미이고, 이는 규범적 의식작용을 통해 세상을 더욱 진보시키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 즉 적극적 의미든 소극적 의미든 위법은 법 개정의 추동력이다” (219)  

 

 저자는 위법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지를 말한다. 누군가 잔디밭을 자꾸 가로질러 간다면 잔디밭을 길로 바꾸는 그것이 상식이다. 뭐 특별할 것도 없는 것 아닌가? 또 저자는 법이란 사실상 현실과 모순 관계에서 진보한다고, 그래서 양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우리 헌법체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관계는 ‘법치주의와 양심의 자유’ 간의 모순일 것이다. 양심은 오직 법을 거스를 때에만 비로소 그것이 양심이란 사실이 드러난다.”(253)   

 

 

 그러면서 저자는 이런 예를 든다. 어떤 A가 군대 가서 집총하는 것이 자신의 양심인데, 군대가서 총을 들었다고 해서 A의 양심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군에 간 것이 양심 때문인지 병역법 때문인지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총 거부를 양심으로 여기는 B가 양심을 지키기 위해 병역법을 어기는 순간, 그의 양심이 드러나는 것이 된다. 즉 법치주의와 양심의 자유는 모순 개념인데도 우리 헌법은 왜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일까?   

 

 

 “양심의 자유는 바로 ‘법’ 자체에 대한 도전이다. 하지만 법은 자신을 부정하는 양심의 도전에 대해 모순적으로 타협(적 처벌)함으로써 자신을 끊임없이 진보시켜 나가려는 것이”(254)기 때문이란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지적이다.   

 

 

 글쓴이는 법의 형식논리에 갇혀 있지 말라고 줄곧 말한다. “권리와 권리 사이에는 힘이 사태를 결정 짓는다”며 법은 항상 누군가의 법일 뿐이며, “법이란 지배계급의 의지일뿐”임을 잊지 말라고 한다. 즉 법은 인간 일반의 정의가 아니라, 지배계급 정의이며, 법은 동의를 통해 지배를 강화하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줄곧 형식논리가 아닌 변증논리로 법과 현실의 모순과 긴장을 살펴보라고 한다. 
 준법 정신만을 교육 받아온 우리로서는 꼭 한 번 쯤 살펴볼 내용들로 되어 있다. 영화나 기타 실례를 들어 읽기 편한 이 책도 좋지만, 이 책 앞에 펴낸 『교양으로 읽는 법 이야기』를 먼저 추천한다. 좀 더 이론적인 부분도 있지만, 무척 잘 정리된 책이면서도 읽기에도 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관술 1902-1950 -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안재성 지음 / 사회평론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자연스레 선생님이라 부르고 싶은,  이, 관, 술,
일대기를 따라가며,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사회 역사적 좌표로 자리매김하여 가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해방 공간 지도자로서 민중의 인지도가 김일성이나 김규식 보다 더 높았던 5위라는 사실도 놀랍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지난한 길을 꿋꿋이 걸어간 선생의 모습에 진한 감동과 함께, 우리 현대사의 굴절이 함께 다가와 깊은 슬픔도 함께 했다. 해방공간의 좌우 대립과 시대 상황은 알고 있었지만, 이 책처럼 ‘공산주의자의 눈으로 본 해방공간’은, 예전에 내가 읽었던 자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생동하고 있었다.
  엄혹한 일제시대, 민족주의 우파들의 고담준론(?)과 해외파들의 안온과는 달리, ‘반제동맹 - 경성콤그룹 -조선 공산당’으로 이어지는 이관술의 투사적 실천에 가슴이 저려 왔다. 당시 최고의 인텔리이자 부농의 아들로 아쉬울 것 없던 그가 가족과 목숨을 내놓고 이루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차별 없는 인간해방, 노동해방의 세상이 아니었을까.

  그도 처음부터 투사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덕여고의 교사로 재직하며 ‘경성 만세 운동’의 경과를 지켜보며 그는 서서히 사회의식에 눈뜨고 실천가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 후 그는, 변절과 타협의 시대를 정면으로 치고 나가며 투사로 살아간다. 아마도 그는 민족의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한 지사이자, 민중의 삶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윤리적 인간이었을 것이다. 정파간 권력투쟁보다 오직 노동운동을 위해 묵묵히 걸어갔던 그의 모습에서 나는 지극히 윤리적인 인간의 모습을 본다. 전태일에게서 불로 처형당하는 예수를 느꼈던 것처럼, 이관술에게서도 낮은 곳을 향하는 참된 예수의 사랑이 오버랩 되었다.
  특히 이관술이 체포-처형의 계기가 된 ‘정판사 위조 지폐 사건’은 이 책이 제시하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조작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물론 그가 유죄라는 자료를 읽지 않은 독자로서는, 지금 편파적인 자료만 읽은 것이 된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제시하는 정황, 당시 미군정이 남한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고 단독정부로 가기 위한 수순에 따라 조선 공산당을 고문으로 엮어 만든 사건이라는, 이 책의 주장과 근거 제시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책의 끝부분, 이관술이 처형 당하는 부분에 이르면 ‘현대사의 비극’ 운운하며 쉽게 말할 수만은 없는, ‘야만의 세월’이었다. 물론 북조선도 수많은 학살과 살인을 저질렀고, 남한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서 ‘김일성 정권’의 파쇼적 측면과 해방공간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운동가’와의 삶을 등치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관술이 북조선 정권에 합류했다면, 그가 고위 권력자가 되었을 가능성 보다 숙청되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적어도 내 생각엔 박헌영보다 훨씬 더 순수했던 이관술이 그 권력 투쟁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 의심이 간다.

  어쩌면 그는 이상주의자일 것이다. 남북 어디에도 안착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그것은 현실적이지 않은 이상이다.’ 나는 항상 묻는다. ‘당신이 말하는 현실은 누구의 현실이며 그것은 어떤 현실인가?’ 아직 오지 않은 삶을 이상이라 부르며 가치를 폄하한다면 “죄 없는 자만이 이 여인을 돌로 쳐라”는 예수의 가르침도 이상주의자의 헛된 소리일까?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단지 용기가 없거나 솔직하지 못할 뿐이다. 차라리 그러지 못해 부끄럽다고 솔직히 고백하자. 그것이 차라리 위선적이지는 않다.        

  일제시대 재판부보다 못한 군정 재판이나, 더 악독한 친일 경찰들, 즉결처분,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 중의 하나인 보도연맹 학살. 이런 사건을 책에서 활자로 읽으며 ‘많이 죽었군’이라거나 ‘급박한 시대의 불가피한 상황’ 운운하는 자들이야말로, 야만의 지속일 것이다. 진실 없는 (그리고 책임 규명 없는) 역사 청산이 가능하기나 할까?  김영삼 정권 때 사회주의 운동가의 국가 유공자 인정 발표에 따른 이관술의 비석마저도 수구 세력들에 의해 다시 땅에 묻어야 할 만큼(이 사건  예전에 신문 기사로 본 듯하다) 우리의 역사 인식은 아직, 천박하다.  
  특히 그의 개인 가족사를 보면 우리 현대사의 참담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당한 큰 사위, 동생 이학술의 사살, 아내와 딸들의 행방불명, 유일하게 살아남은 큰 딸과 어린 막내딸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겠는가는 우리가 짐작하지도 못할 것이다. 거물급 ‘빨갱이’의 자식으로 이 땅에서 숨쉰다는 것이 어떤 삶이었을까?
  이관술의 손녀인 손옥희 님에게서 책을 선물 받은 나로서는, 그들이 살았을 시대의 어둠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 - 미국의 식민지 대한민국, 10 vs 90의 소통할 수 없는 현실
지승호 지음, 박노자 외 / 시대의창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정치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 책은 지승호가 소위 진보적 지식인과의 대담을 묶은 것으로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정치적 지형도를 파악하지 못한 독자들은 산만하다 싶을 수도 있겠지만, 정치적 분화를 눈여겨 봐본 독자라면 ‘지극히 현재적인’ 의미에서 유효한 글읽기가 될 것이다. 지승호는 각 대담자에게 개별적인 질문과 함께 공통 질문을 던지는데, 그 중 하나가 현재 노무현 정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 한미 FTA에 대한 견해는? / 그러면서 자연스레 민주노동당에 대한 질문도 함께 한다. 
  첫 번째, 노무현 정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해 대부분의 대담자가 정치적 개념으로 ‘보수 정당’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좌파정권이니 진보정권이니 하는 규정은 수구 세력의 딱지 붙이기에 불과하다고 규정한다. 논자들은 노무현의 보수적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며, 386정치인, 운동권 정치인들의 실패로 인해 진보세력 전체가 (진보와 좌파의 현실적 변화를 체험해보지도 못하고) 매도 당하는 것에 가장 큰 분노를 표하고  있다. 이중에 한홍구는 노무현의 개혁적 성과는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이것은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 보수세력들이 해야할 일임에도 우리 사회의 수구세력의 불건강성을 질타하고 있다.  대분분의 논자가 ‘진보’와 ‘개혁’을 구분하며 노무현이 개혁적인 부분은 있을지 몰라도(이 부분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진보적인 정권으로는 규정하지 않는 공통 견해를 가진다.  

  두 번째 한미 FTA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논자들이 부정적이었다. 국익론 자체가 실은 계급의 이익으로 대체되어야 하며 반민중적 정책을 일방적으로 펼친 노무현은 한나라당과 차이가 없다고 규정한다.  11일 나는 서울의 반 FTA 민중 대회에 결합하기로 하였다. 각 지역별로 전세버스로 상경하기로 하였는데, 경찰들이 전세버스를 자신들의 차량으로 막고 나몰라라 막아 버렸다. 수십명의 경찰이 우리 버스 한 대를 에워싸 출발 자체를 막아버린 것이다. 이 사태는 전국적인 것이었으며 서울 대회의 군중의 숫자는 반 이상 날아가 버렸다. 뉴스에서도 경찰의 불법은 지적되지 않고 마치 농민들이 도로를 불법 점거한 것처럼 보도하거나, 수 만명의 서울 도심 시위도 지극히 피상적(말단적 현상인 폭력적 장면만 내보낼뿐)보도 일뿐 그들의 주장이 무엇인지는 전혀 보도 하지 않는다. 그 때 느낀 참담함은 도대체 내가 내 발로 움직이는 이동의 자유조차 허락하지 않는 현 정권,  민중들의 의사 표현자체도 막아버리는 노무현 정권이 군사 독재 정권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깊은 회의와 분노가 있었다.  아직도 민중들은 자신의 기본적 의사 표현도 허락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지배계급의 헤게모니 자체를 자각하지도 못한다.  
  세 번 째 민노당에 대한 견해는 사람마다 미묘한 편차가 있지만 대체로 진보적 가치를 인정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당파성이나 외연의 확대의 실패면에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특히 진중권은, 비핵을 내세워야 할 진보정당이 어떻게 북한 핵을 옹호할 수 있느냐며 민노당을 주사파의 붉은 파쇼집단으로 규정하는 부분은 섬뜩하기도 하고, 또 한편 그런 민노당의 경직성에 나 역시 실망하기도 한다. 
 

박노자는 위험하지 않은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며, 그리고 홍세화는 물신주의와 지배계급의 헤게모니에 장악된 한국사회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결국 ‘교육’의 문제라고 두 사람은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전교조에 애정과 비판을 함께 보내주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양의 불편과 위로를 주는 글을 혐오한다는 김규항은 계급의식의 각성을 주로 이야기 하고 있다. 한홍구는 과거사 위원회의 진실 회복일을 하며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보수적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좌파/진보/개혁’으로 규정되는 비상식적 정치개념을 비판하고 있다.
  심상정은 민노당 국회의원이어서 현정권의 보수반동성에 가장 강한 비판을 하고 있다. 자본과 관료, 보수 세력에 굴복한 노무현 정권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애초 노무현이 참여정부로서 개혁적 작업을 이루어내려면, 관료사회를 견제하기 위해서 공무원 노조와 손잡거나, 교육관료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전교조와 손잡고 개혁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노조는 탄압하고 소수 엘리트들만 참여시킴으로써 개혁의 힘을 스스로 상실했다는 지적은 정확하고도 가슴 아픈 지적이다. 노무현 정권의 출범 당시 나는 이제야 정부는 개혁 세력과 손잡고 보수 반동 세력과 한 판 붙겠구나 이렇게 생각했는데, 정권 초기부터 노조를 배척하는 노무현에게 너무 놀라고 배신감을 느낀 터라 지금 생각해도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다.
 진중권은 이번에는 깊은 논의보다 단편적으로 던지는 말들이 우리 사회의 모습을 정확해 해부해 버린다. “지식인은 대중이 듣고 싶어하는 얘기가 아니라 들어야 하는 얘기를 해야한다.” “진보가 그것이 비판하는 사회보다 더 낙후된 것이 문제” “사람들은 미래를 못 보니까 자꾸 과거를 본다” 등은 촌철 살인의 명언이다. 그리고 진중권이 얼마 전 민노당을 탈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것 같은데, 아마도 단단히 실망한 모양이다. 손석춘은 노무현이 조선일보를 비판하면서 사실은 조선일보의 논리와 방법을 그대로 답습한다며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조선일보와 중앙, 동아의 구독수가 반토막 났다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우리 사회의 보수화에 대한 걱정도 함께 하고 있다. 

  지금 현시점의 정치적 지형을 읽기에 좋으나, 내가 바라는 것은 이 책의 효용가치가 아예 사라져 ‘아 옛날에는 이런 이상한 논의도 있었구나’라며 웃을 날이 오는 것일 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육조단경 읽기 - 참 불교를 알고 싶어하는 이들을 위한
김윤수 엮음 / 마고북스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성철 스님' 번역본과 함께 비교하며 읽기  

당나라 禪僧으로 달마에 이어 6祖에 해당하는 惠能 선사의 설법집이다.  그 내용은 금강경의 가르침과 같으며 단지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였다.  대범사의 설법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전제 33절로 구성되어 있다. 부처의 가르침이 아님에도 그에 버금 간다하여 ‘經’이라 하여 남종의 所依경전으로 내세우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내가 읽은 두 책은 모두 현존 最古本인 돈황본을 텍스트로 삼고 있다. 단 후반 23절 부터는 혜능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내용도 앞에 비해 무척 번쇄하고 편협하다. 이는 북종에 대한 남종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후대 남종의 승가집단에 의해 조작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전반부 6절까지에서, 홍인화상 밑에서 신수를 제치고 혜능이 가사를 받고 법을 계승하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예화인데 이도 북종의 신수에 대한 남종의 정통성을 다분히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이리라.  혜능이 覺悟의 증거로 남긴 그 유명한 偈頌이 이 단경 가름침의 전부다 해도 틀리지 않다. 한마디로 나는 壇經이 금강경의 㒣無所住 以生其心의 풀이라고 여기고 있다. 내게는 계속 無相이 가장 핵심적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김윤수의 책이 단경에 대한 전체적 이해를 일목하게 잘 정리했다. 또한 기존의 성철 번역과 그 밖의 여러 번역본을 참고 비교하여 활용하기에 좋았다.

  성철의 책은 우리말 사용에 있어 자연스럽고 몇몇 핵심적인 곳에 이르면 훨씬 수월하게 그 뜻이 전해온다. 깊은 안목을 유감없이 나타낸다. 성철이 앞부분에 편찬 수록한 識心見性, 內外明徹, 無念爲宗 등은 단경의 핵심적 사항들을 정리한 것으로 보면 되겠다. 그런데 성철은 줄곧 漸修에 대한 頓悟의 우위를 강조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한글 번역 다음에 거의 사족을 달지 않다가도 頓悟나 漸修와 관련된 부분만 나오면 꼭 한마디 거든다.

 금강경 일독 후, 이제나 저제나 壇經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제야 읽게 되었다. 단경은 금강경의 약식 해설서로 생각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항상 생각하건대, 이러한 經을 ‘읽었다, 내용을 이해했다’는 것이 經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차원이라면, 그런 근본주의적 언술을 강요한다면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단지 그 책이 가지는 텍스트로서의 가치와 구성을 일별하고 그냥 말할 뿐이다, ‘읽고 이해했다’라고.  이는 문자적 이해마저 곤란한 현대 서양 철학의 난해성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박태균 지음 / 책과함께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 전쟁에 대한 학자의 본격 연구 결과를 독자들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해 대중서로 출간한 것이다. 소련의 사주에 의한 남침설이나, 브루스 커밍스의 수정주의 입장의 부정확성을 모두 보충 비판하고 있다. 그럼에도 전쟁의 기원이 내적 요인보다는 미국과 소련의 강대국의 이익에 따른 분단에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전쟁의 경과가 북한군과 미군의 작전 실패의 연속이라는 점을 부각 설명하며, 특히 남측 정치 세력내의 역학 관계를 전쟁의 한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전쟁 초기의 급격한 전황과는 달리 2년여 간 진행된 전쟁의 고착 원인과 경과도 친절하게 짚어주고 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과 자료 등 유익한 면도 많지만, 특기할만하거나 획기적인 자료나 결과도 별로 없다. 이는 철저한 역사적 실증 연구에 기초했기 때문에 소설같은 과감한 가설이나 추측을 처음부터 배제했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은 ‘북측의 도발에 따른 자유세계의 응징’이라는 단세포적인 이해를 떨쳐버리고, 남과 북, 그리고 강대국들의 비인도적 정치행위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한국인들은 한국 전쟁에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이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준 책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