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법을 보는 법 - 법치주의의 겉과 속
김욱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MB가 법에 대해 말할 때 마다 역겨움을 참을 수 없다. 도대체 그(와 그의 하수인들)가 생각하는 법이란 도대체 어떤 모습인가? 그런데 MB는 그렇다 하더라도, 삼권이 분립되었다는 사법부 법관들은 도대체 뭐하는 족속들인지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군사정권 시절 법정에서 많은 민주인사들이 고문에 의한 강압이었음을 호소해도, 법관들은 무시했다. 바지만 올려보게 했어도 확인할 수 있었던 고문을, 그들은 모른 채 했다. 한국 현대사에 대해 이런 저런 자료를 접할 때마다 법조계에 대한 나의 불신과 분노는 커져만 갔다. 민주주의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담보로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그들 법관과 검사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했던가? 그들이 법, 그나마 지배계급의 이익에만 복무하는 그 누더기의 법에라도 충실했다면, 오버하지 않고 딱 그 기준만이라도 지켜줬더라도, 우리 사회가 그나마 좀 더 숨쉴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상상을 한다.
아니, 그들 법조인에게 분노를 느끼는 내가, 현실(?)을 모르는 낭만적 투정일 뿐인가? 법관들이 최소한의 양심에 따라 판결하고 아니, 판결하지 않고 그냥 거부하고, 법복을 벗고 변호사 개업을 한다 해도, 그래도 이 사회의 상층부 아니겠는가? 내 생각이 지나친 것일까? 법관들이 법복을 벗는다 해도 변호사 개업까지 방해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저러나, 그들은 절대적 기준으로 볼 때 일반 서민들보다는 살아남기 수월했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 안이한 생각일까? 우리의 사법부는 독재와 억압에 책임이 어느 정도일까? 나는 지금 부정한 독재정권에 던져야 할 분노를 힘없는(?) 사법부에게로 잘못 향한 것일까?
그러나 나는 내 편한대로 그냥 말해야겠다. 고문에 의한 자백으로 죽음의 공포 앞에 선 자에게 사형과 몇 십년 징역형을 선고하는 그들이, 나치의 무뇌아인 ‘아이히만’과 다를 바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엘리트 의식’의 단면일 것이다. 사회 최상층을 향한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못 견뎌하는 엘리트 의식, 이 더러운 욕망의 관성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사법부만이라도 똑바로 기능해 준다면, 그래도 희망이 있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관습 헌법 운운하는 자들을 보라, 촛불에 대한 사법부의 태도를 보라, 언론 소비자 운동에 대한 그들의 판결을 보라, 삼성을 다루는 그들의 주둥이를 보라! 기대난망이다. 또 헌법 재판관이든 대법관이든, 한 사회의 상층부를 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회의 보수적 이념을 통과하지 않으면 진입 자체가 불가능한 것 아니던가? 선출되지도 않고, 통제 받지 않는 절대 권력이다. 지금 미디어법의 불법성을 헌재에 가져가는 이 상황도 완전 코미디다. 입법부가 사법부에 스스로 종속되기를 바라는, 이 희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법이란 당연히 지켜야하는 것이라고 이제는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법’을 냉소하기 시작했다. 그 누군가 법을 외치면 외칠수록 그것은 기만의 주술로만 들렸다. 더더욱 요즘엔, 법을 외치는 자일수록 더욱 그를 불신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 말한 적이 없음에도, 우리사회는 이 담론의 위력이 넘쳐난다. 설혹 그가 그렇게 말했다 하더라도 이는 당연히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만, 자신의 알량한 준법성을 내세우는 근거로 그냥 맹목적으로 내세우곤 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악법도 법이다라는 이 거짓 담론을 누가 유통시키는가이다. 그래서 이 담론이 결국 누구에게 봉사하고 있는가를 지적하는 것이다.
서설이 길었다. 김욱의 『법을 보는 법』, 유익한 책이다. 이 책은 판검사나 사법부 행태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일반인들의 법 이해를 위한 에세이로 볼 수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일반인을 위한 법 상식을 도와주는 책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법에 대한 책들은 대체로 너무 학문적이거나, 혹은 너무 기능적이거나 한데, 김욱은 법에 대한 교양적 설명을 꾸준히 해 주고 있다. 아마도 우리의 법학자들은 너무 고상(?)하여 이런 글은 쓰지 않는 모양이다. 이런 책을 꾸준히 내는 김욱은 그 바닥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의 작업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의 책들은 모두 읽을 만하다.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자본주의 시대 우리가 만든 실정법은 자연법에 토대를 두었으니 이 실정법의 정당성을 논하지 말고 이제는 그 주석에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86)
저자는 줄곧 ‘법 실증주의’를 비판한다. 부르주아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이렇게 말해왔다. ‘적힌 글자 그대로 따라! 그게 준법 정신이야!’ 저자는 이러한 법 이데올로기에 대해 ‘누가 법을 만들었는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렇다. 새겨 두자! 지금 당신이 말하는 법은 누가 만들었으며, 누구더러 지키라 하는가? 김욱은 그의 다른 책 『교양으로 읽는 법 이야기』에서 재미있는 예를 든다.
“예컨대 법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절도를 금한다. 그러나 부자가 남의 물건을 훔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기본적으로 이런 법은 가난한 자를 대상으로 하는 법이다.”
재미있지만 명쾌한 예 아닌가? “법은 이미 그 자체가 강자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여기에 더하여 부자가 남의 물건을 훔쳐도 안 잡아 간다.)
16C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前, 지옥같은 공장에서 일하고 얻는 피죽 한 그릇 임금보다는, 차라리 부랑자가 되기를 택한 사람들을 겨냥한 자본가들의 해결책은 무엇이었을까. 간단하다. ‘그들 자본가의’ 법을 만드는 것이다. 부랑자가 노동하기를 거부하고 3번 째 단속될 때에는 사형! 즉 공장 바깥 세상을 공장보다 더 지옥 같이 만들어 버리는 법을 제정한 것이다. 그래서 7만명 넘는 사람들이 교수대에서 목이 잘렸다는, 그래서 ‘노동하는 규율’을 확립해 갔다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언제나 이런 끔찍한 이야기로 넘쳐나는, 당신이 믿거나 말거나, 역사는 그러했다는, ……
비정규직! 최대노동에 최소임금, 시급 몇 백원 올리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우리 시대의 노비들. 아직도 노비가 있느냐는 놈들의 주둥아리들에게, “어셔 오십쇼~ 캄사함미돠~”를 이마트 구석구석에서 하루종일 소리치게 하고 싶은 나의 가학증이 도진다.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지 뭔 노비냐고? 이 쓰~바, 그럼 너는 일하기 싫으면 직장 안 나가도 되겠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란, 노동하거나 굶어 죽거나의 자유일 뿐이란 걸 모르면, 그 놈은 자본가이거나 진짜 바보이거나~
지금 비정규직은 은유로서의 노비가 아니라, 실제 노비 그 자체이다. 온갖 이론을 들먹여도, 그들은 노비 문서에 묶여 있을 뿐이다. 올해 현대와 삼성은 최대 이익을 냈다한들, 그 이익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착취에 바탕한, 자본가의 이익일 뿐, 부(富)는 절대로 낙수(落水)하지 않는다.
요즘 MB와 그 하수인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면, 투표로 당선 되었기에 무엇을 해도, 국민들에게 위임받은 정당한 권력 행사라는 식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전통성과 정당성의 범주로 ‘똥침’을 날린다.
“이론상으로는 정통성이 없어 저항권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정권도 선정을 행함에 따라 정당성을 획득해갈 수 있으며, 정통성 있는 정권도 악정을 반복함에 따라 정당성을 잃고 저항권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 정도(程度)에 있다” (237)
그래, MB가 비록 국민 투표라는 정통성을 확보했더라도, 국민과의 소통에서는 그 정당성을 잃었다면 당연히 저항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대의 받은 자들이니까 무엇이든 다 해도 된다는 듯이 하는, 이 오만의 극치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지금 미디어법 가지고 장난치는 놈들이 부결된 법안을 ‘투표 불성립이니 재투표’로 가결될 때가지 하는 걸 보면, 누구 말마따나, “대선 불성립, 재투표해 쓰바~”
“기관 구성권과 정책 결정권을 분리해서 국민에게는 기관 구성권만 행사하게 하고 국회의원에게는 정책 결정권을 자유 위임한다는 대의제 원리”(119)의 폐해가 여지 없이 드러나고 있다. ‘너희들이 뽑았으면 우리가 어떤 정책을 펴든 이건 민주주의야!’란다. 애야~ 아니란다. 민주주의란 그런 게 아니라고 학교에서 못 배웠구나~ 계속해서 저자는 대의 민주주의라고 할 때, ‘대의’와 ‘민주’는 모순 관계에 있다고 한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피지배계급의 무기였으며, 대의제는 지배계급의 무기였다는 사실이다”(122)
그래서 ‘대의/민주’주의가 서로 모순 관계 속에서 진보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대의제에 모순되는 <국민투표, 국민발안, 국민소환제> 같은 직접 민주주의 제도를 반드시 규정해야 한다고 한다.(123) 그럼에도 법은 언제나 체제의 수호자로서 ‘보수’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당연하다. 법은 기본적으로는 언제나 재귀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분쟁을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법이 모든 이해관계로부터 초연할 수는 없다. 만약 기득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을 ‘보수나 진보에 초연한 태도’라고 착각한다면 더 큰 문제다. 법 자체가 기득의 질서를 반영하는 것인데 어떻게 그 법에 의한 법원의 판단이 보수나 진보에 초연할 수 있겠는가?” (144)
그래서 재판이 공정하다거나 법은 절대 불편부당하다거나 하는 소리는 헛소리가 되는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판검사들이 뭐하러 법리 논쟁을 하겠는가? 어떤 사건을 입력하면 바로 판결이 출력되는 ‘판결 자판기’만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법관들이 상식적으로 납득가지 않는 판결을 내놓으며, 재판이 공정하다고 항변하곤 하는데, 이는 “법치주의 이데올로기의 은밀한 지배이자 판사들의 순결 메카니즘”(152)이라고 조롱받을 수 있는 것이다.
자, 이제 법의 강요에 대해 한 번 쯤 생각을 다시 해보자. 누군가 내가 도저히 상식으로도 인정할 수 없는 법의 이름으로 나를 잡아 법정에 세운다면, 당연히 두려울 것이다. 그렇다, 왜 두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적어도, 나의 내면에서 ‘나는 위법자야, 나는 반사회적 인간이야, 나는 부도덕해’ 따위의 자기 비하와 검열은 더 이상 하지 않도록 하자. 물론 그렇게 열심히 나를 자위한다 해도, 법은 힘으로 나를 능멸하겠지만, 내가 나 스스로를 능멸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말도 안 되는 법’을 비웃어 주는 것이다. 법을 조롱하는 것이다. 법을 낙후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법의 위선을, 위선을, ×같은 위선을 마음껏 비웃어 주자!
도둑을 잡으러 도로를 가로질러 갔다 해서, 도둑은 내버려 두고, 쫒는 자를 도로 교통법 위반으로 잡아가는, 이 희대의 희극장에서는, 우리도 웃어줄 수 밖에 없다. “그래 쨔쌰~ 너 정말 웃긴다~” 비웃어 주자, 그래서 공연을 멈추게 하고, 막을 내리게 하는 수 밖에 없다. 웃어 주자, 심하게 웃어 주자, 깔깔대며 비웃어 주자!
법을 지키라고? 그렇게 말하는 너는? 그 법 누가 만들었냐? 똥침을 날려 주자!
“(사회에서) 위법이 전혀 완벽하게 없다는 것은 사실상 법과 현실이 모순 없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의미이고, 이는 규범적 의식작용을 통해 세상을 더욱 진보시키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 즉 적극적 의미든 소극적 의미든 위법은 법 개정의 추동력이다” (219)
저자는 위법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지를 말한다. 누군가 잔디밭을 자꾸 가로질러 간다면 잔디밭을 길로 바꾸는 그것이 상식이다. 뭐 특별할 것도 없는 것 아닌가? 또 저자는 법이란 사실상 현실과 모순 관계에서 진보한다고, 그래서 양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우리 헌법체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관계는 ‘법치주의와 양심의 자유’ 간의 모순일 것이다. 양심은 오직 법을 거스를 때에만 비로소 그것이 양심이란 사실이 드러난다.”(253)
그러면서 저자는 이런 예를 든다. 어떤 A가 군대 가서 집총하는 것이 자신의 양심인데, 군대가서 총을 들었다고 해서 A의 양심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군에 간 것이 양심 때문인지 병역법 때문인지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총 거부를 양심으로 여기는 B가 양심을 지키기 위해 병역법을 어기는 순간, 그의 양심이 드러나는 것이 된다. 즉 법치주의와 양심의 자유는 모순 개념인데도 우리 헌법은 왜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일까?
“양심의 자유는 바로 ‘법’ 자체에 대한 도전이다. 하지만 법은 자신을 부정하는 양심의 도전에 대해 모순적으로 타협(적 처벌)함으로써 자신을 끊임없이 진보시켜 나가려는 것이”(254)기 때문이란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지적이다.
글쓴이는 법의 형식논리에 갇혀 있지 말라고 줄곧 말한다. “권리와 권리 사이에는 힘이 사태를 결정 짓는다”며 법은 항상 누군가의 법일 뿐이며, “법이란 지배계급의 의지일뿐”임을 잊지 말라고 한다. 즉 법은 인간 일반의 정의가 아니라, 지배계급 정의이며, 법은 동의를 통해 지배를 강화하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줄곧 형식논리가 아닌 변증논리로 법과 현실의 모순과 긴장을 살펴보라고 한다.
준법 정신만을 교육 받아온 우리로서는 꼭 한 번 쯤 살펴볼 내용들로 되어 있다. 영화나 기타 실례를 들어 읽기 편한 이 책도 좋지만, 이 책 앞에 펴낸 『교양으로 읽는 법 이야기』를 먼저 추천한다. 좀 더 이론적인 부분도 있지만, 무척 잘 정리된 책이면서도 읽기에도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