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을 좋아해서
그림을 그렸고 제법 잘 그려서 미술로 전공을 했던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그림책을 만들고 싶었다.
대학원보다 힘들었던 출판 일러스트레이트 과정을 끝내고 전문가 과정으로 들어간 친구는 기다리고 버티고 기 싸움하는 주변을
보다 이내 지쳐 포기했다. 그 과정을 나는 직접 알지 못한다. 건너
건너 지나가는 소리를 종합해서 들었을 뿐이다. 나중에 그 친구에게는 이 말만 들었다.
“좋아하는 일이 생존 수단이 되는 순간 재미 없는 게 되어버리더라고. 예전에 내게 삶에서 의미를 주던게 고통을 준다고 생각하니까 더 이상 못 하겠더라.”
나는 책 읽기를
좋아한다. 10살 이전부터 나는 서평을 써 왔다.(그 당시는 독서 감상문이었다.)
이 단편 주인공도 그런 듯 싶다. 결국 주인공은 독서 상담사가 됐고 나는 어쩌다
어떤 책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먹고 사는 일인데
주변 사람들은 삶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 점이 문제다. 이 단편을
읽으며 계속 생각해 본 주제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재미고 어디까지가 삶이 되어야 하는가. 이 조화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환자와 상담사라는
두 사람 거리는 결국 독서라는 매개체로 가까워지고 이어진다. 삶이 라는 고단함이 준 재미다.
결국 고용관계는 끝이났지만 같이 책을 좋아하고 이야기 했던 그 사람에 대한 흥미는 멈추지 않았다.
사람으로 사는 삶은 그래서 재밌는 것
같다. 어떤 부분에 있어도 딱 정해진 기준이 없다. 고단한 삶을 살다가
삶 속에서 재미를 찾게 되기도 하고 재미를 찾다가 결국 생존할 수 있는 도구를 얻기도 하고 말이다.
책 덕후라는 공통점을 가진 나와 주인공
사이에 나는 덕질과 업무라는 이 애매모호한 경계선에 대해 생각해 보게됐다. 그 이외에는 내가 생각하는 부분이
대부분 일치함으로.
오늘날 독서에서 작가의 영향력은 눈에 띄게 감소한 반면 독자의 영향력은 날로 강력해지고 있다. 책의 의미는 작가의 창조적 재능이 아니라 독자의 취향에 따라 결정된다.
독서로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를 두려움 없이 똑바로 바라보게 할 수는 있다. 같은 생각을 품은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남에게 이해받는다는 것의 기쁨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낀 순간 소년이 자신도 모르게 사육하던 괴물은 자취를 감추었다.
독서치료사. 나는 책으로 마음의 병을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사람이다.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고 처방하듯 나는 피상담자의 심리상태를 체크한 뒤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추천한다. 모든 약효의 팔십 퍼센트는 플라시보 효과다. 플라시보 효과로 치자면 책 만한 물건도 없을 것이다. 부작용도 거의 없다. 중독? 환영할 만한 일이다.
"요즘 읽을 만한 책은 뭐가 있져? 그럴 때면 나는 정색하고 대답한다. 돈 내고 물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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