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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이완의 자세 ㅣ 소설Q
김유담 지음 / 창비 / 2021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목욕탕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좋아한 것 같지 않은데 성인이 되고서야 대중목욕탕에 가는 것이 좋아졌다. 특히 주변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은 날이면 뜨끈한 목욕탕에 들어가 모든 피로와 잡념들을 물 속에 풀어서 하수구로 보내고 싶었다. 요즘은 대중목욕탕도 가기가 힘들어져서 더욱 일상적으로 누리던 것에 대해 그리움과 간절함만 커지는 것 같다. 그 아쉬움을 책으로나마 달래고 싶어서 얼마전 대전의 독립서점에서 <아무튼 목욕탕>을 사서 읽었다. 생각했던 느낌과 내용의 책이라 흥미있게 보았다. 이번에는 좀 다른 결의 목욕탕을 배경으로 하는 책을 읽었다. 올 1월에 출간된 김유담작가의 <<이완의 자세>> 이다.
김유담작가는 201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핀 캐리」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2020년엔 소설집 「탬버린」으로 제38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여탕 실세 세신사 엄마와 여탕을 탈출하고 싶은 딸
까슬한 마음과 삶을 따뜻하게 풀어내다
<이완의 자세>에서
'목욕 대야, 환풍기, 모래시계, 사물함 키, 초록색 때수건, 목욕의자, 후끈한 열기를 내뿜는 목욕탕 욕조' 책표지에는 목욕탕을 연상시키는 물건들이 그려있다. "나는 종종 공중목욕탕에서 우는 여자들을 본다."라는 문장으로 글은 시작되는데, "혼자만의 욕실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거울 앞에 서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흘리는 눈물보다 여탕 목욕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흐느끼다가 샤워기에 씻어내 버리는 눈물이 나는 조금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한다.(7쪽)" 책 속의 문장을 따라가다 고개를 끄덕이며 목욕탕에 쪼그리고 앉아 뿌옇게 서리낀 거울을 닦아내며 내 얼굴을 마주하고 '수고했다. 잘 견뎠다.'위로해 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만수는 제 엄마를 많이 닮았다. 기골이 장대한 외양부터 닮았고 성격도 비슷한 구석이 많다. 키가 187센티에 몸무게는 90킬로가 넘는데다 목소리도 크다. 만수가 길에서 알은체하며 큰 소리로 부를 때면, 나는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어진다. 어려서부터 녀석은 나를 누나라고 부르며 따라다녔다. 지금은 기분이 좋을 때만 누나라고 부른다. 만수는 야구를 잘한다. 중학교 시절에는 또래 중 가장 성적이 좋은 좌완 투수였다. 메이저리거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 야구 유학을 떠났던 만수는, 환호성을 받으며 출루했지만 맥없이 아웃을 당한 타자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 24시만수불가마사우나입구에 들어선 손님들은, 이 집 아들 만수가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따. 가로 80센티, 세로 110센터 크기의 액자 사진 속에서 유니폼을 입은 만수는 우승기를 흔들고 있었다. 만수가 일본에서 돌아오면서 그 액자는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다.(...) 하얗게 남은 액자의 자리는, 홀연히 사라진 만수의 꿈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이완의 자세, 9쪽)"
만수네 목욕탕, 24시만수불가마사우나가 '선녀탕'이었을 시절부터 그곳에서 '세신사'로 일하는 엄마와 목욕탕에서 먹고 자면서 지냈던 주인공, 유라.
"만수와 나는 다르다. 엄마의 사물함 벽면에 붙어 있는 내 사진을 떠올렸다. 엄마는 내가 머리에 족두리를 쓰고 트로피를 든 채 찍은 사진과, 나에 대한 기사가 실린 무용 잡지 한면을 코팅해 사물함에 붙여놓았다. 나는 더이상 무대에 설 수 없지만, 엄마에게 얼른 그 사진들을 떼어버리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제 엄마는 대체 어떤 희망으로 그 조그만 사물함의 문을 여닫을 수 있을까.이완의 자세, 10쪽)"
만수와 자신을 언급하며 책의 첫꼭지가 시작된다.
책의 제일 후반부에서 '만수와의 에피소드'가 다시 나온다. 조금 더 친밀해진 모습으로. 늘 유라에게 관심이 있었던 만수는 유라와 함께 술자리를 하게 되고 유라에게 자신이 관심이 있었던 것을 일본에서의 화려한 여자관계에 대한 시덥지않은 이야기를 하면서 넌지시 알리고 급기야 기습키스를 하게 되고 좀 더 친밀한 시간을 갖고자 한다.
"수면을 손으로 크게 휘저으며 온탕 속으로 들어갔다. 발끝부터 아랫도리까지 뜨거운 기운이 와 닿았다. (...) 이곳에서 나는 오롯이 혼자였다. 누구의 딸도, 대단한 무용가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살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나는 아무도 없는 욕조 속에서 생각을 지워야한다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몸을 낮추면서 뜨거운 물속으로 몸을 집어넣고 앉았다. 두 가랑이를 넓게 벌려 앉으면서 두 팔을 수면 위로 띄운 채 스스로 눈을 감았다. 온몸을 휘감은 온기 속에서 내 몸의 모든 구멍이 열리고 있었다. 그 안에서 어떤 것이 쏟아져 나올지 나도 알 수 없었다.이완의 자세, 167쪽)"
만수와의 첫경험에서도 타인의 접촉이 부담스러워서 피하는 바람에 실패를 하고 엄마가 있는 목욕탕으로 가서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혼자 온탕 속으로 들어가 몸을 담그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생각을 지우려는 상태, 몸을 물의 중력에 맡기고 두 팔과 다리를 벌리고 진정한 '이완의 자세'를 취하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세신사 엄마의 딸로 어렸을 적 엄마에게 억지로 때밀림을 당하며 거친 손을 어린 몸으로 감당하며 느꼈을 수치감과 불쾌함, 재능이 탁월하지 않은 평범한 대학생 무용수로 엄마의 허영된 꿈을 투영받은 무력함, 타인의 터치를 소름돋아 하며 사랑의 표현으로 느끼지 못하는 방어적 태도 등, 그간 고단한 그녀의 삶을 물 속 깊은 곳에 내려놓고 자신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나의 조부모에게 빌린 돈으로 집을 구하는 대신 선녀탕의 때밀이 자리를 샀다.
이제부터는 양손에 스포츠카의 운전대가 아니라 이태리타월을 쥐어야 했다.
이완의 자세, 28쪽
주인공 유라의 엄마는 처음부터 때밀이를 시작한 것은 아니였다. 상고를 나와 서울시내 가장 큰 백화점의 화장품 매장에 용모단정의 이유로 취직을 했고, 재고 파악 및 주문을 위해 본사에서 나오는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고, 유라를 낳았는데 지방출장길 고속도로에서 사고를 당해 세상을 뜨게 된다. 어린 아기를 포대기로 업고 화장품가방을 든채 이 집 저집 다니며 피부 마사지와 눈썹 문신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고 남편의 회사와의 산재 보상 싸움끝에 보상금을 받고 '뷰티케어'가게를 차린다. 10분 거리를 빨간 스포츠카를 몰고 다닐 정도였는데 다단계사업을 추천하는 허우대 멀쩡한 사람을 잘못만나 사기를 당하고 결국 목욕탕에서 때밀이를 시작한다.
"여탕 안의 난방 장치는 이미 꺼져 있었고, 내 몸은 금방 식었다. 때가 제대로 나올 리 만무했다. 때가 나오지 않는다며 엄마는 또 신경질을 부리며 나를 때렸다. 엄마와 나 둘밖에 없었지만 넓은 공간에 그렇게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있는 것이 수치스러워서 눈물이 났다. 내가 눈물을 찔끔거리면 엄마는 또다시 손바닥으로 나를 매섭게 내리쳤다. (...)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어금니를 깨문 채로 추위와 아픔, 그리고 수치와 모멸감을 견뎠다. 버둥거리지도 말고, 울지도 말고, 몸에 힘을 뺀 채로 가만히 누워 있으라는 엄마의 요구 조건을 일곱살의 내가 모두 수용하기는 힘들었다. 나는 몸에 힘을 잔뜩 주고 긴장한 상태로 그 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나는 무엇이 그토록 엄마를 화나게 하는지, 엄마의 분노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몰랐다. 내가 참아야 하는 것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이완의 자세, 29쪽)"
"엄마는 손님이 없을 때면 만수 엄마 곁에서 아기 목욕을 도왔다. (...) 그런 엄마를 볼 때면 왈칵 서러움이 올라왔다. 나는 벌거벗은 미미 인형들을 세숫대야에 담그고 거칠게 씻겼다. 미미 인형의 가랑이 사이는 밋밋하고 딱딱했다. 나는 인형의 가랑이를 쭉 찢어서 비누칠을 했다.이완의 자세, 41쪽)"
세신사 딸로 엄마가 하는 일을 가까이에서 보고 자란 딸의 마음이 잘 드러난 문장을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
"남의 돈은 원래 더럽기 마련이라며 담담하게 때 묻은 돈을 세는 엄마 밑에서 나는 자랐다. 엄마는 바쁘다는 핑계로 내 스타킹을 빨아주지도, 교복을 다려주지도 않는 야멸찬 사람이었지만, 내게 건네는 용돈만큼은 천원짜리 한장까지 다리미로 다려주었다. 양말을 제때 꿰매주지 않아 때때로 내가 구멍난 양말을 신고 다니는 것도 모르는 엄마의 무신경함에 신경질을 내고 싶다가도, 졸린 눈을 부리면서 내 무용복 한복 저고리 동정만은 매번 손바느질로 새로 달아주던 엄마를 보면 맥이 풀렸다. 내가 태어난 이래 우리 모녀의 삶은 늘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하지만 동정받을 정도는 아니었고, 제자리를 지키면서 서로를 그럭저럭 지켜왔다. (...) 나는 엄마의 돈으로 무용을 전공했고 대학원도 다닌다.이완의 자세, 49쪽)"
엄마와 딸의 사정을 엿보며 녹록지 않은 삶에서 애증하는 관계로
살아왔겠다 싶었다. 두 모녀가 타인을 의식하지도 무시하지도 않은 채 적당히 자신의 마음과 삶을 지키며 사느라 얼마나 고됐을까 싶기도 하다.
<이완의 자세>에는 목욕탕에서 여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하는 모습도 나온다.
"오전 9시 전후로 여탕에는 출근 멤버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 중년 여성들의 사교 모임은 평일 오전 10시에서 12시 사이에 가장 활발해지는데, 얼음을 띄운 녹차를 마시며 피부 관리와 다이어트에 대한 정보를 나누다가 재테크와 사교육으로 화제가 옮겨가는 식이었다.이완의 자세, 97쪽)" 여성들의 질투와 시기심, 오해로 인한 싸움은 어딜가나 있길 마련이다. 그런데 그것이 목욕탕이란 장소에서는 좀 더 격상되는 느낌이다. '수리부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한 여자는 재테크와 사교육에서 전문가의 자질을 뽐내고 여러 추문에도 밝아서 여자들의 정보 중심에 있었는데 여자들의 험담으로 기분이 상한 수리부인이 그 험담을 주도한 사람으로 유라엄마를 의심했고, 급기야 인격모독까지 하며 싸움을 건다. 수리부인의 "여탕"이라고 부르는 호칭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나는 아줌마가 누군지는 전혀 관심 없고요. 로커 키 몇 번 손님인지, 나한테 키를 맡길 건지 말 건지만 궁금하거든요? 기분 나쁘다면 죄송하지만, 선불이 원칙이에요.이완의 자세, 100쪽)"라고 말하는 그녀의 당당함이 오히려 더욱 짠해 보였다. 그간 여러 힘든 일을 겪고 일반인들이 직업적 소명을 가지고 일한다고 생각하기 힘든 일을 하면서도 전혀 낙심하지 않는 모습이 자신의 기준과 틀을 만들고 묵묵히 일해왔던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일텐데 아직 난 편견으로 사로잡힌 그릇이 작은 사람이라 묵묵함 속에 감춰진 수치심과 모멸감이 보이는 것 같다.
한편의 흥미로운 소설을 보았지만 그 내밀한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메세지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책의 말미에 쓴 '작가의 말'중에서 "원하는 무언가로 살지 못하더라도 그 삶이 가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내가 꿈꿔온 나'가 아니더라도 '충분한 나'로 살 수 있을 거라는 낙관이 어쩌면 더 오래 쓰게 하는 힘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조금 더 멀리 나아가고 싶다.(188쪽)"말이 와닿았다. 작가로서 '잘 써지지 않을 때'를 지나오며 저런 깨달음을 얻은 듯 하다. 저자가 생각한대로 이대로도 충분한 나라고 만족감을 얻으며, 글쓰는 삶을 더욱 만족해하며 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