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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문학의 거장,
박완서작가님의 마지막 장편소설 《그 남자네 집》의 개정판이 나왔다. 책을 좋아하지 않았을 학창시절에 언니가 사서 읽고 꽂아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너무도 쓸쓸한 당신》 이 책들의 제목을 본 기억이 또렷하다. 그런데 책을 펼쳐 읽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 조금이라도 읽었더라면 작가님의 생동감 넘치는 서술과 등장인물의 감칠맛나는 묘사에 책을 잘 읽지않던 나도 읽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 남자네 집》은 '박완서 문학의 가장 아름다운 결정체'라고 할 정도라 그런지 정말 소설을 읽는 내내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인물들의 대사도 귀에 속속 박히는 것 같고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 했다.
글의 배경이 되는 시대상, 사회상을 잘 반영하고 소설의 특성을 정말 잘 살린 작품을 보는 내내 참 흐뭇했다. 사백쪽이 넘는 분량임에도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이 손에 들면 책내지가 후르륵 넘어갔다.
이 책은 50년대 초, 저자가 살던 동네로 이사온, 엄마의 먼 친척뻘 되는 집의 아들 그 남자에 대한 연정을 담아 쓴 글이다. 원래 2002년에 《문학과 사회》에 발표한 동명의 단편 《그 남자네 집》에 기초하고 있다고 한다. 단편으로 발표하고 나서 연작으로 몇 편을 더 이어 쓰고 싶은 마음과 현대문학 50주년에 맞추고 싶다는 생각으로 써내려갔다고 한다.
글의 시작은 저자가 살던 옛날 친정집 근처로 이사온 후배집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의 옛집은 바로 신선탕 뒷골목에 있었고,
그 남자네 집은 천주교당 뒤쪽에 있었다.
(...)
작약, 모란, 창포 등 숙근초까지 손바닥만 한 마당을 놓고 한없이 가짓수를 늘려가는 후배를 바라보면서
나는 딴생각을 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자꾸만 그 남자네 집은 남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였다.
《그 남자네 집》 17쪽
궁금해졌다. 그 남자네 집을 찾았을까. 그 남자는 친정어머니의 외가쪽으로 조카뻘 되는 먼 친척의 막내아들이었다.
...등굣길에 몇 번 눈길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짧은 일별로도 그의 전체가 빛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애도 나를 알아보았는지 미처 확인할 새도 없이 황급하게 눈길을 피하긴 했지만,
잠깐이라도 그 애하고 눈길이 마주친 날은
온종일 기분이 좋았다.(...)
둘이 똑같이 대학생이 된 걸 알고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젠 마주쳐도 그럴 필요가 없다는 설레는 자유에의 예감이었다.
《그 남자네 집》 24쪽
사춘기시절을 지나고 관심있는 이성을 보고 설레임을 느껴본 적은 누구나 있을거다. 괜시리 나도 옛적이 생각나 슬쩍 입꼬리가 올라가는게 느껴졌다.
세종로의 은행나무들이 자기안에 깊숙히 숨어 있던 노랑 중 최고로 순수한 금빛을 환장을 한 것처럼 한꺼번에 분출하던 날, 5호선을 타고 집으로 가다 말고 동대문운동장에서 4호선으로 갈아탔다.(...)
곧장 그 남자네 집으로 갔다. (...)
나는 보리수나무가 세월을 거꾸로 먹어 50년 전엔 무성한 그늘에서 관옥같이 아름다운 청년이 단꿈을 꾼 것 같은 착란에 빠졌다.
《그 남자네 집》 31쪽
"5월은 마치 미친 것처럼, 울부짖는 것처럼 격렬하게 제명을 다하고 극성스러운 여름이 되었다. 나는 6월의 모란꽃처럼 피곤했다. 찌는 듯한 더위가 극에 달한 어느 날 휴전이 되었다.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전투는 오히려 더 치열했다. ... 한 치라도 더 땅을 뺏으려고 젊은 피로 산하를 물들였다." - 《그 남자네 집》 62쪽
전시의 암담한 상황을 묘사한 곳도 여럿있지만 담담하게 그려내어 그런지 슬프거나 우울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하지만 "엄마는 남편과 아들을 잡아가서 다시 돌려보내지 않은...미친 듯이 시체를 찾아 해매던...정말 참을 수 없었던 것은 한 골목 사람들이 돌아오는 것을 맞이해야 하는 일이었다."라는 문장은 뼈아프게 강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돈을 벌어 올 사내들을 잃은 여자들은 그 시대에 하숙을 놓거나 시장에 터를 잡고 장사를 해서 가족을 벌여먹였다고 한다. 그리고 제일 안타까웠던 건 '한국전쟁 중에 섹스 산업이 한국 경제에 얼마나 기여했나'라고 책의 후반부에서도 언급하듯 우리 나라에 주둔해있는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일로 가족을 부양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만일 그 남자를 못 만났더라면 그 시절을 어떻게 넘겼을까. 그 살벌했던 날, 포성이 지척에서 들리는 최전방 도시, 시민으로부터 버림받은 도시, 버림받은 사람만이 지키던 헐벗은 도시를 그 남자는 풍선에 띄우듯이 가볍고 어질어질하게 들어 올렸다. 황홀한 현기증이었다." - 같은책 82쪽
그 남자를 사랑했지만, 함께 한 시간들이 소중했지만 결국 시집은 다른 남자에게 간다. 친척 또래끼리의 만남이라 주변에서는 이 둘을 서로 애정하는 관계라고 여기지 못했고 끝까지 둘만의 애달픈 첫사랑으로 남게되는데...
"나들이옷 떨쳐입고 동대문시장으로 장보러 가서 그 치열한 아우성과 싱싱하고 풍성한 푸성귀와 수산물이 내뿜는 활기를 쐬지 않고는 유지되지 않는 결핍이랄까, 불균형이 내 안에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같은 책 151
노모의 외아들인 은행원인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오로지 사는 즐거움을 '먹는 것'으로 채우려는 시어머니와 장 볼 돈만 주고 모든 경제관리를 하며 어머니께 월급의 십분의 일을 꼬박 새돈으로 바꿔 용돈을 주는 남편과 사는 아내의 모습을 한 주인공이 자유함을 느끼는 시간이 장보는 시간이다.
"제왕처럼 제 입만 아는 남편과 영원토록 아들을 입맛으로 붙들어두려는 시어머니의 눈물겨운 노력에 복잡한 비애를 느꼈다. 나의 비애는 패배감일 수도 있었고, 체념일 수도 있었다." - 같은 책 156
왜 그토록 시어머니가 고급 재료로 정성어린 음식을 만드는 것에 집착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책에는 주인공의 가족뿐만 아니라 시어머니와 가깝게 지내는 춘희어머니와 춘희, 사촌언니의 아들 광수 이야기도 나오는데 그들과 엮인 이야기가 소설의 재미를 한층 올려준다.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이 소설은 '그 남자'와의 사랑이야기가 제일 맛깔난다. 결혼을 하고 안정된 가정을 꾸려나가지만 그 남자에 대한 관심은 여전한데, 마침 그의 누나의 부탁으로 그 남자와 밀회를 시작한다.
정말 놀라운 것은 흔히 보는 불륜의 느낌이 아니고 풋풋한 사랑느낌이라 전혀 거북스럽지가 않다.
책을 다 읽고 덮고 나서도 그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역시 문학의 거장답다는 생각이 든다. 연휴동안 좋은 책을 볼 수 있어 감사하다. 이후에 삶이 팍팍하다 느껴질때 박완서선생님의 다른 책들도 펼쳐보고 싶다.
++ 서평단 활동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