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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정육점 문지 푸른 문학
손홍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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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정육점.

언뜻 보기에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처럼 보인다. 이슬람에서 금기시하고 먹지 않는 것이 돼지고기인데 이런 고기류를 다루는 정육점 주인이 무슬림이라니. 게다가 이 소설의 배경은 한국이다. 한국에서 이슬람은 아직은 낯선 단어다.

서울의 한 달동네. 소설의 화자인 ‘나’는 고아원에서 입양된 아이다. 나를 입양한 사람은? 터키 출신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한국에 눌러앉은 ‘하산’아저씨다. 터키에서 왔으니 무슬림인 아저씨의 직업은 정육점 주인이다. 중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지만 학교에서 매일 같은 시간에 이승복 동상의 팔을 떼어버리고 화단에 오줌을 누었던 나는 어떤 ‘진단’을 받았고 그 후론 학교에 가지 못했다. 하산 아저씨가 몇 번이나 나를 학교에 보내고 싶어하셨어도 말이다. 내 몸에는 나도 알지 못하는 무수한 흉터가 있다. 하산 아저씨는 그 흉터의 기원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다. 그것도 소외되고 보잘것없는 방향으로. 하지만 이야기는 우울하지 않다. 등장인물들은 외려 담담하고, 이야기는 경쾌하게 흘러간다. 너무 무겁지 않은 이야기 전개가 등장인물들의 아픔과 우리 사회의 모순을 오히려 더 잘 전해주었지 않나 싶다.

본래 남편, 아이들과 무슨 연유에선지 떨어져 살고 있는 충남식당 안나 아주머니. 하산 아저씨처럼 한국전 참전 후 역시 한국에 눌러 살고 있는 그리스 출신의 야모스 아저씨. 소설가를 꿈꾸는 연탄집 아들 말더듬이 유정(동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자기가 억겁 세월 윤회를 통해 이 곳에 왔다며 끝도 없이 이야기를 쏟아내는 맹랑한 녀석, 참전 당시 기억을 잃어버려 그 당시 기록을 줄줄 외우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기억은 찾지 못한 대머리 아저씨. 어른이고 아이고 우리가 말하는 소위 ‘정상적인 삶’에서 한참 빗겨나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쌀집 둘째딸과 교회 전도사까지.

각 등장인물들의 사정을 자세히 보여주지는 않지만 이들의 이야기들이 갖가지 사건들을 통해 조금씩 드러난다. 클라이맥스는 아마도 다같이 ‘소풍’을 가는 장면일 것이다. 트럭을 타고 이 모든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이 함께 소풍을 떠나서 산돼지를 잡고 먹고 어울려 논다. 이후에 하산 아저씨의 가게를 더 비싼 값에 개발업자에게 팔려는 주인 때문에 하산 아저씨는 결국 가게를 내놓고 나와야 하게 되고, 라마단 금식 중 폐렴에 걸려 위중한 상태로 입원하게 된다. 거기서 하산 아저씨는 내 흉터가 총상에 의한 것이라는 걸 알려준다. 하산 아저씨의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의붓아저씨의 피가 흘러 들어온 것을 느끼고 , 그리고 적대하던 세계를 ‘입양’하기로 마음먹는다. 
 

어떤 처지에 있건 삶의 순간 순간은 소중하다고,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내라고 이 소설은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순응’하라는 것은 아니다. 무덤덤하게 소설 중간중간에서 보여준 비판적 시선을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의 후속편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자라 있을까 자못 궁금해진다.

(밑줄)
(p. 22) 학교란 한마디로 착실한 바보를 만들어내는 곳이었다. 나는 학교를 혐오하지 않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똑같은 책걸상에 똑같은 자세로 앉아 똑같은 이야기를 듣고 똑같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얻어터지거나 욕을 먹거나 웃거나 울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을 끔찍해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p. 50) 불행과 비극은 온전히 타인의 것일 때 동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오래전부터 알았다. 사람은 결코 자신과 닮은 타인을 진심으로는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과 닮은 이들 - 가난하고 억압받고 무시받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건, 인간이 그처럼 한없이 나약하다는 것, 저 불결하고 끔찍한 인간과 내가 전혀 다르지 않은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p. 51) 차이는 유사성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말한 자는 행복한 삶을 살았음이 분명하다. 차이가 유사성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들을 무시해도 상관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행복한 자들이라고 한다.
 

(p. 70) 세상 어디나 마찬가지다. 불우한 청소년들의 꿈은 하나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것. 추상은 구체와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다. 행복은 추상에 속한다. ......  이룰 수 없는 꿈을 꾼다는 것이야말로 구체가 아닌 추상으로밖에 꿈꿀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p. 91) 순종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철회할 수 있는 싸구려 애정과 동정일 뿐이었다.
.....
상처받은 사람을 놀리는 건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다.
 

(p. 107) 상처의 치유는 그런 식으로 유예된다. 정작 상처입은 사람들은 그걸 하루라도 빨리 잊기 위해 태연한 척 애를 쓰지만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상처가 낫기도 전에 새로운 상처가 생긴다. 그런 식으로 상처가 증식하면 드디어 온몽이 상처투성이가 된다. 그때부터 우리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되돌려주기 시작한다.
 

(p. 118) 말을 더듬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영혼이 확신에 차 있는 건 아니다.
(p. 126) 나는 지루한 오후를 맛없는 빵처럼 뜯어먹었다.
(p. 129) 둘 다 명사 같은 사람이었기에 그 둘이 함께 걷기 시작하자 일종의 합성명사가 되어 버렸다.
(p. 138) 내게 속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늘 그렇게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게 되리라는 것도 그 때 알았다.
(p. 140) 시선에는 한계가 없다. 어디든 볼 수가 있다.
 

(p. 141)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소리들은 어딘가 모르게 서글픈 구석이 있었다. .... 음악은 소리의 강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우리의 영혼과 유사한 리듬을 지녔느냐에 따라 음악으로 인식되는 법이니까.

(p. 155) 고통받는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언어의 목록은 너무 간단하다.

(p. 189) 슬픔에 시효가 없다는 점이 인간이 지닌 권리를 초라하게 만든다.
(p. 197) 소풍이란 이런 것이다. 용트림을 하는 돼지와 함께 게으른 바람속을 진땀을 흘리며 갈팡질팡 걷는 것.
 

(p. 214) 너도 잘 알아야 한다. 우리가 사는 곳은 대한민국이 아니다. 그냥 여기는 자본주의라는 곳이야. 자본주의란 녀석은 한마디로 버릇이 없단다. 너도 자본주의한테 예의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상처받는 건 너일 테니까.
 

(p. 229) 눈부신 하늘과 푸른 나무와 그것들이 품은 생명들. 그런 때가 있지 않던가. 세계가 선명한 의미가 되어 소나기처럼 와락 덤벼드는 순간. 지나가는 비 한 줄금에 영혼마저 흠뻑 적셔버린 그 순간이 지나고, 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그저 스쳐 지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르면 절로 눈물이 났다. 하산 아저씨는 까닭 없이 흐르는 내 눈물을 이해해 주었다. 그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계가 아름답다는 걸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p. 233)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 세상에 속해 있음에도 이 세상과 별거 중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인간이 지을 수 있는 모든 표정들이 수렴된 단 하나의 표정은 바로 저 엉덩이에 있는 게 아닐까.
 

(p. 236) 나는 내 몸속으로 의붓아버지의 피가 흘러들어온 걸 느꼈다. 뜨거웠다. 인간의 모든 기억들이 이처럼 단순하고 정직하게 이어진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훗날 내 자식들에게 나의 피가 아닌 의붓아버지의 피를 물려주리라. 병실 구석에 있던 이맘이 다가와 나를 껴안았다. 그날 나는 이 세계를 입양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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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이긴 사람들 - 하워드 진 새로운 역사에세이
하워드 진 지음, 문강형준 옮김 / 난장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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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음에 제목을 봤을 땐 가슴 두근거리는 참 멋진 제목이라 생각했다. ‘권력’이라는 단어는 실체가 음흉하게 가려져 있는 거대한 회색 구름-제도, 정부, 법 등-을 연상시켰고, ‘사람들’은 피와 살과 감정을 가진 구체적인 실존으로서의 인간으로 다가왔다. 그러한 거대 권력을 이긴 사람들의 이야기라니, 얼마나 희망적인가. 제목 아래 인용구 역시 그 희망의 연속선상에 있다. “역사가 창조적이려면, 역사가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서 가능한 미래를 예견하려면, 역사는 민중들이 저항하고 함께 모이고, 그래서 때로 승리했던 과거의 숨은 사건들을, 그것이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순간이었더라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가능성들을 강조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 책을 한 번 읽고 났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들은, ‘무지’, ‘나약함’ 같은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책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감정들이었다. 이 책은 희망으로 가득차 있는데, 왜 그런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냐는 말에 스스로도 당황했다. 왜 이러지? 그 때는 아마 심신이 피곤한 상태라서 그랬나 보다 생각했다.

 

  그래서, 몸과 맘을 좀 쉬어준 후, 다시 책을 집어들었다. 연필을 들고 다시 제대로 읽어보자 하며, 다른 일을 일단 제쳐놓고 한나절을 꼬박 읽었다. 두 번째 읽고 나서는, 책의 내용에 대해서도 더 명료하게 이해했고, 희망의 메시지들을 분명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감정적인 반응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 표정은 울 것처럼 침울하고 가슴에는 한기가 스민다. 나는 내 내부의 이 이상한 반응의 원인을 생각해 봐야겠다고 느낀다. 책의 내용에 대해서도 정리하겠지만, 이 책을 읽고 내가 이렇게 힘들어진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말이다.


 

  옮긴이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은 미국의 사회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하워드 진이 2007년 발간한 A Power Governments Cannot Suppress 를 완역한 것인데, 진이 최근 잡지에 기고한 칼럼, 다른 작가들이 쓴 책에 부친 서문이나 후기, 그리고 새로 쓴 에세이들을 엮은 에세이집이다. 소재의 범위도 미국 건국 초기의 여러 역사적 사건들, 독립선언서, 남북전쟁, 제 1․2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 1960년대 민권운동, 2000년 대통령 선거, 9․11 사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 반세계화운동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다.

진은 한국어 서문에서 책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미국이 저지른 폭력적이고 정의롭지 않은 행동을 다룰 뿐 아니라 그런 행태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운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어두운 시대에 희망을 제시하려는 시도입니다. 그 희망이란 안에서는 국부(國富)를 평범한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하고 밖으로는 세계 다른 나라의 절망적인 사람들을 도움으로써, 미국인들이 언젠가는 세계와 평화롭게 지내는 나라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첫 두 문장에 나와 있듯이, 이 책은 크게 세 가지의 내용으로 나누어질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세 가지는 한 고리로 연결되는 것들이다.)

 

  첫째, 미국이 저지른 폭력적이고 정의롭지 않은 행동들의 폭로(알려지지 않았던 진실 알리기)이다. 책에 소개된 사건의 양으로만 보면 이 첫째 사례들의 양이 더 많은 듯하다. 미국의 역사라 이 부분에 대해 잘 모르는 내겐 아주 굵직한 사건들 외에는 낯선 이름들이 많다. 옮긴이가 많은 부분 보충 설명을 덧붙였음에도 여전히 생소하다. 그냥 어렴풋이 알고 있던, (이런 소식들을 접하게 되는 언론에서도 늘 어렴풋이 보도했듯이) 사건들에 미국이 어떻게 개입했었는지 그 전말이 소상히 드러난다.

 

  둘째, 민중들의 저항과 불복종의 역사, 평화· 정의· 인권 같은 보편적 대의를 거스른 정부에 맞섰던, 역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사례들 드러낸다. 마크 트웨인이 반제국주의연맹의 부의장이었다는 것,「월든」의 저자로만 알고 있던 소로가 시민불복종운동을 주도했었다는 것, 유진 뎁스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새로 알게 되었다. (아니, 알고는 있었으나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여기 등장하는 사례들이 모두 반짝이는 승리의 사례들인 것은 아니다. 로자 파크스나 1954년 학교에서의 인종분리에 대한 브라운 판결 같은 잘 알려지고 기념되는 사례도 있지만, 알려지지 않았던 시도들, 투쟁들, 사코와 반제티(34장)의 경우처럼 사후 50년이 지나서야 재평가되는(제도권에서) 사건들도 있다. 이를 살펴보는 것은, 다시 인용하지만 “민중들이 저항하고 함께 모이고, 그래서 때로(언제나가 아니다) 승리했던 과거의 사건들을, 그것이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순간이었더라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가능성들을 강조해야만 한다.” 에서처럼, “드러내고” 새로운 가능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진은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희망인가? ’희망‘은 ’앞일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가지고 바람‘을 말한다. 현실이 부조리하거나 불만족스러울 때, 절망스러울 때 우리는 희망을 품는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상태에서 희망을 말하지는 않는다. 즉, 현실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이 책의 희망의 메시지를 공감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 인식부터 공유가 되어 있어야 한다. 책장을 덮고 나서 느꼈던 불편함의 한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이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은 늘 있었지만, 이런 구체적인, 수많은 사례를 한꺼번에 접하는 것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특히 전쟁에 관한 부분들이 그랬다. (이는 단지 진보냐, 보수냐의 구분을 넘어서는 것으로,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 - 자유, 평등, 인권, 행복 추구권 등 - 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 이것이 현실이었다면 그 오랜 시간 사람들이 무감각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마도 정부가 언론을 통해 국가주의, 애국, 민족 같은 말로 교묘하게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여론을 선동한 탓이 크리라.

 

  그래서 진은 정부나 국가에 의해 교묘하게 이용되고 있는 용어나 개념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셋째 부분이다.) 그가 강조하는 단어들은, 국가, 정부, 계급 같은 것들이다. 계급에 대해서는 한 장을 할애하여 말하고 있다. (5장 금지된 단어, 계급)

 

 ..."오늘날에는 국민들이 계급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주장을 아주 가볍게만 해도 분노의 반응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현실은 계급 없는 사회란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드러낸다." (p. 52)

 

이것은 우리나라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말이지 않을까. 이 ‘계급’이란 단어에 대한 금기 말이다. 나부터도 이 단어를 들었을 때 처음 드는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이 단어가 함께 연상시키는 다른 이미지들 때문에. 공산주의, 빨갱이, 투쟁, 그리고 (그야말로) 대강 알고 있는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 고문 등. 상당히 선동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들이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이나 근․현대사에 관심이 되려 없는 쪽에 가까웠는데, 자연스럽게 저런 이미지를 떠올린 것은, 아마 저런 이미지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집단적 무의식이 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계층’이란 말은 상대적으로 더 널리 쓰이는 것 같은데 ‘계층’과 '계급‘의 차이는 무엇일까?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 중 하나이다. (나중에 다른 책에서 보니, 'class'라는 용어를 우리나라 사회 분위기상 '계급'이라는 말로 섣불리 번역해 쓰기가 어려워 '계층'이라는 말로 썼다고도 한다. 용어에 대한 질문 한 가지 더. '인권 운동'과 '민권 운동'은 구별되는 것인지?

  

   ‘16장 누구를 위한 애국주의인가?’ 에서는 정부와 국가를 독립선언서와 트웨인, 엠마 골드만의 말을 통해 구별하고 있다.

 

독립선언서에 따르면 정부는 “생명, 자유, 행복추구”에 대한 모든 이의 동등한 권리와 같은 어떤 목표들을 지키는 일을 하라고 국민들이 세운 인위적 산물이다. 그리고 “어떤 형태의 정부라도 언제든 이 목표를 파괴하게 되면.... 그 정부를 바꾸거나 무너뜨리는 것은 인민들의 권리이다.” (p. 126)

 

여기서도 몇 가지 의문이 들었는데, ‘정부’에 대해서는 파악하기가 상대적으로 더 쉬웠던 반면, 여기서 인용된 여러 말들을 통해서 ‘국가’란 무엇을 말하는지 명확하지가 않았다. 트웨인은 ‘국가’와 ‘정부’를 구별한 반면 엠마 골드만의 인용문에서는 국가에 대한 충성 개념 자체를 비판하는 듯 보였다. 그 인용문에서 ‘국가’와 ‘정부’는 구별되지 않아 보였다. 또 한 가지는, ‘국민’, ‘민중’, ‘인민’, '시민'의 구별에 관한 것이었다. ‘민중’이나 ‘인민’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전제로 한 용어인 데 반해, ‘국민’에서 계급이 연상되지는 않는다. 본문에서는 이 용어가 혼용되어 쓰이고 있는 것 같은데, 원문에도 그렇게 구별이 되어 있었는지, 다르게 구별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사실, 비슷한 것 같지만 각 용어가 주는 어감은 상당히 다르다. ‘민중’, ‘인민’은 앞에서 말한 ‘계급’, ‘투쟁’과 같은 범주 안에 있는 인상을 주며, 이건 내게 그리 긍정적인 인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왜 그럴까? 단어의 역사적 배경(큰 줄기)에 관계없이 순전히 개인적 경험에 기초한 감정적 반응이다.

 

   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런 단어들을 들으면 자연스레 ‘운동권’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IMF 사태 이후로 이런 운동권에 대한 관심이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크게 사그라들었던 시기였고, 운동권하면 왠지 구시대적이고 낡았다는, 그리고 위험하다는 생각을 막연히 갖고 있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 책을 통해 그런 단어들에 대한 내 무지에서 비롯된 편견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마음이 불편해졌던 것 같다. 이것은 내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이 있기도 한데, ‘투쟁’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킨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때문이다. 전국 교대에서 정부의 어떤 정책에 대해 반대 시위를 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과에서 엄청난 지탄을 받았다. 그 정책에 대해 달리 어떤 ‘나의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떤 ‘믿음’ 때문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바보같을 정도로 순진했던 시절이었다.  내가 그 당시 옳다고 여겼던 그 믿음과, 그 믿음을 공유했던 사람들이 그러라고 했기 때문에 따랐던 것이지, '왜 그런가?", "과연 그러한가?" 하는 그에 대한 스스로의 치열한 고민은 부족했다. 그저 이 껄끄럽고 불편한 상황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소극적이고 회피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소위 ‘투쟁’을 한다는 사람들도, 평소엔 교육 문제에 별 관심도 없어 보이던 사람이 그럴 때만 앞에 나가 주먹 불끈 쥐고 ‘투쟁’을 외치는 게 일관성도 없어 보이고 위선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니 그 행동이 내겐 별 설득력이 없었다. 꼭 저렇게 전투적으로 해야 하나?라는 회의를 들게 한 것도 사실이었다.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과정도 민주적이라기보다는 매우 강압적으로 느껴졌다. (이런 것이 대학생들이 소위 ‘운동’을 외면했던 이유이기도 했을 듯) 어쨌든 이 때 사건은 소심하고 맘 약하고 순진했던 내게는 큰 충격이었고, 거기서 비롯된 의문이 점점 커져 결국 조금씩 내 주변에 대해, 세상에 대해 의심과 회의를 품게 만들었다. 지금도, 그 시절의 나를 아는 사람을 만나면 난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 때의 나는 제발 잊어주었으면! 하고 속으로 바라면서. 과거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창피한 건 어쩔 수 없다. (이 부분도 뭔가 마음에 걸린다. 그 당시 나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창피할 일도 아닌 것이다. 사람들이 '나의 신념과 양심'을 따른다고 할 때, 온전히 그 사람만의 신념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그 신념이 내가 속한 어떤 집단의 신념일 때 나는 그 집단의 일원이나, 그 신념이란 것에 내가 100% 공감 및 동의가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 개인은 무척 괴로워진다. 양심이란 것도 사회적, 문화적 가치에서 자유롭다고 하긴 어려울 텐데. )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진은 전쟁뿐만 아니라 “야만적이고 고삐 풀린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책을 읽으며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는데, 바로 그 질문에 대답한 곳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지구상에서 시급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을 보살피기에 충분히 쓸 수 있는 막대한 부가 존재하는데, 이 부는 소수의 개인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다. 이들은 수백만 명이 죽고, 수백만 명이 비참하고 지저분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도 사치품과 전쟁에 그 부를 탕진한다. 이것이야말로 세계 모든 곳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문제이다. ... 우리에게 가장 치명적인 적들은 해외의 동굴이나 숙소에 숨어 있는 게 아니라,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윤과 권력을 좇는 욕망이 낳은 ‘부수적 피해’로서) 수백만 명을 죽음과 비참함에 내주는 결정들이 만들어지는 기업 회의실과 정부 사무실에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p. 227~228) (이 책 위험한 책 맞다.ㅋ)

 

  권력의 부조리와 횡포를 보면서도 그 거대함에 나는 그저 쉽게 압도당하고 마는 작은 존재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도 전에 나에게 어떤 불이익이 있지 않을까를 먼저 계산하고 있는 속물적인 모습이 솔직한 나의 모습일 것이다. 그 나약함에, 비겁함에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그런 내게, 진은 다시 희망을 이야기한다. 괜찮다고, 거대한 것이 아닌,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고 어깨를 다독여준다. 그 부분을 옮겨본다.



 

  “혁명적 변화는 한 차례 격변의 순간(그런 순간들을 경계하라!)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사회를 향해 이리저리 움직여가는 가운데 등장하는 놀라움들의 끊임없는 연속으로 오는 것이다. 변화의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거대하고 영웅적인 행동을 할 필요는 없다. 작은 행동이 수백만의 사람들에 의해서 증식될 때 어떤 정부도 억누를 수 없는 조용한 힘, 세계를 뒤바꿀 수 있는 힘이 된다.

우리가 승리하지 못한다 해도, 다른 좋은 사람들과 함께 어떤 가치있는 일에 참여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유쾌함과 성취감은 남는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필요하다. ... 사악한 시대에 희망을 품는 행위가 바보같이 낭만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가 경쟁과 잔혹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공감, 희생, 용기, 친절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복잡한 역사 속에서 우리가 선택해 강조하는 바로 그것이 우리의 삶을 결정지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가장 나쁜 것만을 본다면, 그것은 뭔가를 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파괴해버릴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이 위대하게 행동했던 시대와 장소들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그런 예는 너무나 많다), 그것은 우리가 행동할 힘을 불어넣을 것이고, 적어도 이 팽이처럼 핑핑 도는 세상을 다른 방향으로 옮길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소한 방식으로라도 우리가 진정 행동한다면, 어떤 거대한 유토피아적 미래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미래는 현재의 끊임없는 연속이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나쁜 것들을 거부하는 가운데 우리가 마땅히 살아가야 하는 방식이라고 믿는 바처럼 지금을 살아간다면 바로 그 자체가 위대한 승리이다.“ (p. 290~291)

 

  그러다가 옮긴이의 후기를 읽으면서 내 마음은 또 다시 가라앉았다. 한국인에게 갖는 의미를 논하는 곳에서,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건들에 관한 내 무지를 또 한 번 발견하기 때문이다. 아, 다시 진의 희망 메시지로 돌아가자.  그리고, 공부하자.

 

하루가 꼬박 갔다. 글을 처음 쓸 때의 울 것 같은 침울함은 이제 사라졌다.


옮긴이의 바람대로, 이 책은 내게 ‘우리의 역사와 현실에 눈을 돌리게 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위험한‘ 책’이 된 것일까. 행동까지는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최소한 현실을 이전보다는 더 넓어진 눈으로, 두려움을 한꺼풀 걷어내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서 의미 있는 행동의 변화가 여기저기서 일어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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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책의 숲에서 길을 찾다 - 중고생이 꼭 읽어야 할 추천도서 56 청소년 자기계발 시리즈 1
류대성 지음 / 인더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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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국어교사로서 본인이 직접 읽은 책들과 책을 읽은 경험을 토대로 분야별로 청소년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들에 대한 소개, 생각해 볼 문제와 왜 책을 읽는지에 대한 내용을 충실하게 전해주고 있다. 제목처럼 책의 숲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안내해 주는 안내서인 셈이다.

 

중고등학생인 청소년들을 주 대상으로 씌어진 책이지만, 책의 뒷부분에 있는 책 읽기에 관핸 내용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내용이다. 성인 중에서도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할 지 막막한 사람에게는 좋은 안내서가 될 책이다. 여기 안내된 56권의 책 중 나도 못 읽은 책들이 사실 많다. 읽기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책 읽기는 생각과 행동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라는 것, 책 읽기는 결국 글 쓰기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도 강조한다. 언어 영역 대비용 요약집과 차별되는 진정성이 보이는 부분이다.

 

내가 중고등학교,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책과 멀어졌다 다시 책과 가까워지게 된 계기는, 책을 통해 변화가 일어나고 그 힘을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나서였다. 책을 읽고나서 짧고 어설프게라도 감상을 기록으로 남겨 보려고 애쓰는 데는 '인식의 힘'님 블로그도 큰 자극이 된 것이 사실이다. 구입한 지 꽤 되었는데도 빨리 읽지 못해 개인적으로 죄송하고, 독자들에게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소식에 기쁘다. 

 

책 읽기가 단지 활자 읽기가 아니라 생각과 행동의 변화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

차분히 책 읽을 시간 내는 습관이 아직 들어 있지 않아서 여전히 벼락치기 읽기, 리뷰 쓰기를 많이 하고 있다. 많은 독서가들이 이야기한다. 열 권의 책을 활자만 읽는 것보다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으라고. 제대로 읽는 과정 중에 속도도 빨라진다고. 지금은 시행착오의 과정이라 생각한다. 요즘은 뭐든지, 깊이 있게 시간을 두고 생각하는 과정이 너무 부족하다. 뭐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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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잃은 사회 사회를 잊은 교육
데이비드 오어 지음, 이한음 옮김 / 현실문화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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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Earth in Mind」이다. 생태와 경제, 사회, 교육을 아우르는 책인데 한국어 제목에는 생태가 드러나지 않아 아쉽다. 한국어 제목 「학교를 잃은 사회, 사회를 잊은 교육」 지나친 (학문의) 전문화가 전체를 통합적으로 보고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만드는 것에 초점을 둔 제목이다.


귀를 기울이면, 해마다 학위를 딴 명석하지만 생태학적으로 문맹인, 성공을 열망하는 호모사피엔스 무리가 생물권으로 쏟아질 때마다 만물이 신음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규항은 우리시대가 미시적인 것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거대 담론을 소홀히 했다고 했다. 이 책은 그 거대 담론, 방향성을 제공해 줄 사상을 담고 있다. 

1부 교육이라는 문제에서는 교육 내의 문제가아닌 교육이라는 문제를 다룬다.


정규교육은 학생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에 앞서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할지를 걱정하게 만들 것이며, 학생들을 도덕적으로 메마른 편협한 전문 기술자로 만들 것이며, 생물 세계에 대한 경이감을 죽일 것이다. .... 학교 교육은 문화 쇠퇴라는 더 큰 과정의 공범일 뿐이다. 하지만, 쇠퇴를 역전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제도는 교육이다. 따라서 답은 정규교육을 폐지하거나 줄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바꾸는 것이다. (p. 53)


2부 첫째 원칙들에서는, 점점 전문화하는 교육과정과 인간 조건에 관한 큰 질문을 하는 능력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사랑, 지성, 지혜, 미덕 같은 가치에 관해 이야기한다. <정치>에서는 '생태 위기'나 '생물 다양성 위기' 같은 것은 없고 생태적인 것을 비롯하여 여러 결과를 빚어 내는 대규모 정치 위기가 있다고 했다. <경제>에서는 비용과 가격을 구분하여 우리가 간과하고 지나치는 자연에 치르는 대가, 비용을 총비용으로 계산할 것을 생각해 보게 한다.

 

3부 교육을 다시 생각하다에서는, 초중고, 대학을 평가할 기준으로 그 졸업생이 생명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설명하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학교 교육과정과 건축물에 어떻게 반영되어야 하는지 이야기한다. (꼼꼼히 다시 읽어야 할 부분이다, <대학 순위 매기기>, <학문 분야의 문제와 문제의 학문 분야>, <전문직주의와 인간의 전망>, <마음 설계>. <교육학으로서의 건축>, <농업과 교양과목>, <긴 안목의 유권자 교육>

 

4부 목적에서는, 생명 친화력(바이오필리아),  시골과 도시 지역 사이 균형에 관한 추측, 식품체계 비용의 변화 등을 이야기한다. 

 

책은 한 권이지만 매우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핵심 주제는 생태이지만 이를 교육, 경제의 관점에서 세심하고 논리적으로 접근한다. (읽으면서 4대강 사업 생각도 자주 들었다. 그 정책 입안자, 추진자들이 이 책을 좀 읽었으면..) 원서로도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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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 B급 좌파 김규항이 말하는 진보와 영성
김규항.지승호 지음 / 알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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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승호와 김규항의 본격 인터뷰집. (본격적이라 함은 이전에도 「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이란 책에서 지승호가 한 장을 할애해 김규항을 인터뷰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


 
김규항의 책을 읽는 것은 「예수전」에 이어 두번째다. 사실 그를 잘 안다고 할 수는 없고 이 책을 계기로 많이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책에 드러난 그는 예리했고, 놓치기 쉬운 부분을 명확한 언어로 잡아내고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다. 뚜렷한 신념을 가졌으되 자기 성찰의 중요성을 알고 실천하려 하며, 오늘의 행복을 추구하고 기성세대로서 아이들에게 미안해하고 그 미안함을 「고래가 그랬어」로 갚아(?)나가고 있다. (까칠한 사람임엔 분명한 듯하지만)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왼쪽'에 있다고 분류되는 사람이고 스스로도 본인을 'B급 좌파'라 부른다. 좌우를 말하는 것은 늘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심스럽기도 하다. 너도 나도 좌니 우니 말을 하지만 그 기준이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요즘 우리나라에서 '좌'라는 것은 불리하게 작용할 때가 많다. 
    위키에 따르면 좌는, '좌파(左派) 또는 좌익(左翼)은 정치 이념 분포에서 우익의 반대편에 위치하며, 사회개혁과 변혁을 추구하는 정치성향을 가진 사람과 단체를 일컫는다. 또한 리버럴 평등주의를 중시하는 정치적 입장을 말하기도 한다.[1] 비슷한 말로는 진보주의라고 할 수도 있다. 세계적 기준에서 볼 때 보편적으로 사민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아나키즘,환경주의를 좌파로 본다.' 반면 우는 우익 (右翼) 또는 우파(右派)는 정치적 성향의 분포에서 좌익 또는 좌파에 반대되는 쪽으로, 일반적으로 보수적이거나 온건한 개혁을 주장하는 개인이나 단체를 말한다.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대칭되는 의미에서 보수주의, 반공주의,자유주의 등이 우파로 간주된다.
 
   김규항은 좌와 우를 기르는 기준으로 '신자유주의'를 말한다. 정확한 지적이다. 최근 10년 사이 우리나라도 급속도로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로 편입되었고, 이는 우리네 삶 전반에 '돈이 최고'라는 인식의 급부상과 함께 사회 안전망 약화 등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미치고 있다.
   그는 개인의 변화(영성)와 사회의 변화(진보)를 함께 말한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소위 진보운동을 한다는 이들도 그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루 30분 기도할 시간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의 세상은 끔찍한 것이라 말하는 그의 말이 가슴에 찔린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저당잡혀 살아가고 있는 현실도. 당장 나부터도 그렇게 살고 있다. 내가 찾고 싶은 오늘의 행복은 무엇인가. 김규항은 예수를 이야기한다. 바리새인에 대한 지적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에수전」을 다시 읽어볼 것.
   우리 나라 교육 문제의 핵심이 대학 입시에 있다는 것을 그는 정확히 지적한다. 그 부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부자 학부모는 당당하고 편한 얼굴로 아이들을 명문대에 보내려고 하고, 진보적인 학부모들은 불편한 얼굴로 아이들을 경쟁에 밀어넣는,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명문대생이 되기를 바라는 현실에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
  욕망이 달라야 한다는 것.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다. 욕망의 문제는 삶의 방향과 목적과 결국 연결된다.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제목은 왼쪽~이라 붙었지만, 그는 아주 상식적인 당연한 말들을 하고 있다. 이런 상식적인 말을 해도 '좌'라며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상한 세태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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