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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에 돌직구를 던져라
정성식 지음 / 에듀니티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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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은 게 학기 시작 전 2월이었다. 학교를 옮기기 전 마음이 상당히 심란한 상태에서 책을 읽었다. 이전 학교에서 일 년 유예할 수도 있었지만, 혁신학교를 경험해 보고 싶어서 우대 점수를 믿고 지원했다. 업무 경감 시범학교부터 차근차근 혁신 학교 단계를 밟아가고 있는 듯 보였던 학교였고 지원자가 경쟁이 심할 정도로 많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번 서평 이벤트에서 <혁신학교 2.0>을 신청해 읽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 학교 선생님과 연락하며 학교 분위기와 학년 배정을 알아보며 나는 어디에 위치할 것인가를 가늠하고 있었다. 떨어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막상 인사 발표가 나고 보니 나는 다른 우대자에 밀려 한 학교에 우대자를 한 명만 받는다는 규정에 따라 2지망에 썼던 학교에 발령이 나 있었다. 계획하고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틀어졌고, 새 학교 발령 뒤 영어 교담을 희망했었지만 나는 1학년 담임 교사에 학년 업무는 학년교육과정이 주어졌다.

이 책의 1, 교육과정의 현실에 묘사된 현실이 그대로 나의 현실이 되었다. 8년만에 맡는 담임, 그 새 많이 바뀐 1학년 교육과정,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새 학교, 적응해야 할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막 입학해서 가뜩이나 긴장한 아이들만큼이나 나 역시 긴장 상태로 보낸 첫 2, 아이들이 가고 나면 오후에는 몰아치는 각종 제출과 서류 업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학년 교육과정 작업이 시작되었다. 교육과정 작업을 맡아서 해 보는 건 처음이었다. 각 학년 교육과정 담당자들이 모여 전체 교육과정 담당교사의 설명과 반드시 맞춰 넣어야 하는 각종 시수와 가이드라인이 적힌 종이와 작년 교육과정 파일을 받았다. 다들 한 번쯤은 해 본 선생님들인지 별다른 질문도 없었다. 몇 장의 종이를 보며 막막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하는 것인지다른 선생님들은 아는 당연한 것을 묻는 것 같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것조차 어려웠다.

작년 파일에서 교과 내용은 거의 그대로 두고 날짜와 시수를 맞추는데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작업하면서 계속 이 책이 생각났다. 이런 거였군.. 교육과정이란 게  한 학년 교육과정이 거의 100페이지에 달한다. 가뜩이나 바쁜 3, 2주 정도의 기간에 다 되어야 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다. 앞부분의 시수가 중요하지 일 년 동안 잘 보지도 않는다고 한다. 3월에 하는 행사란다. 당연히 속에서 이런 질문이 올라온다. 책에서 제기한 같은 물음. 보지도 않을 걸 이 시간을 들여서 이렇게나 길게 왜 해야 하는가? 이 시수를 맞추고 창체 영역에 교육청 지침에 따른 OO교육을 몇 시간 맞추어 넣고, 비고란에 무슨 내용인지 전체 차시와 해당 차시를 표시하는 작업에서 진을 뺐다. 뭐가 이렇게나 많은지. 이걸 다 이 서류에 넣으면 다 한 게 되나? 우리 학교는 이 내용을 포함시켜 했다는 서류 증거를 남기기 위한 것 아닌가? 정작 그 내용들을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빠진 채, 담당 교사만 며칠간을 죽어라 숫자 맞추기에 급급하여 만드는 문서가 들인 시간과 노력만큼의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건 뭔가 문제가 있다.

그렇게 몇 날 며칠 잠 못 자며 했어도 시수와 지침대로 다 제대로 넣은 것인지 자신이 없었다. 결국 또 2주 정도의 시간이 걸려 수정하고 또 수정해야 했다. 주로 창체에 들어가야 한다는 그 수많은 OO교육 부분에서.. 그러다 결재 라인에서 교감샘의 반려로 또 수정을 해야 했다. 그렇게 하고 나서 내 입술엔 물집이 잡혔다. 그렇게 하고 나서도 내가 1학년 교육과정에 대해 잘 알게 되었느냐 그것도 아니다. 실제 교육과정 내용보다는 꼭 들어가야 한다는 OO교육이 시수에 맞게 들어갔는지, 주로 시수 맞추는 데 대부분의 시간이 쓰였다.

10년쯤 됐을까, 그 때도 시수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은 나는데, 새삼 교육과정에 이렇게 많은 내용이 들어갔었던가 의아해졌다. 오랜만에 담임을 맡고, 또 학교 교육과정을 받아들고 보니 매우 촘촘하다. 틈이라곤 없어 보인다. 일 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지는 행사며 OO교육이며를 보다보니 숨이 막혀온다. 이게 솔직한 느낌이었다. 업무도 그렇고 교육과정도 그렇고 담임 교사가 재량껏 할 수 있는 여지는 아주 적어 보였다. 정해진 것을 따라가며 하기에도 벅차겠다.

그러고 나서 이 책을 다시 집어들었다. 저자인 정성식 선생님이 대단하다고 여겨진 부분은, 학교에서 담당자라면 누구나 다 어려움을 토로하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대안 제시도 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 문제제기를 공식적으로 하고, 학교 선생님들과 관리자들을 설득해 실제로 교육과정을 실제 이루어지는 교육을 실천으로 옮기셨다는 것이다.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책에는 생략하셨을지 모르나 준비 시간이나 기간도 많았을 것이다. 그냥 관행처럼 해 오던 교육과정 작업은 담당자만 며칠 (혹은 몇 달) 고생하는 일이니 다른 선생님들 입장에서는 괜히 일 하나를 더 만드는 것으로 보였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한 분 한 분 만나 대화와 소통을 시도하셨다는 것 자체가 진정성과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공장의 분업 공정처럼 세분화된 학교 업무와 일정 속에서, 그리고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 속에서는 ?’라는 질문 자체가 불편할 때가 많다. ‘위에서 내려오는 것 하라는 것 하기에도 피곤한데 무슨?’ 이런 분위기랄까. 이제 새 학교에 막 와서, 이런 분위기도 겨우 파악하고 있는 처지에서 교육과정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고 이 책을 함께 읽어보자고 다른 선생님들께 제안하는 것 이 지금으로서는 멀게만 느껴진다.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소통. 학교 실정에 맞는, 구성원들의 바람과 의견이 반영된 학교 교육과정은 이러한 소통의 기반 없이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이다. 좀 더 이 곳에 익숙해지게 되면 그런 질문과 제안을 던져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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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허쌤의 공책레시피 - 공부가 좋아지는 공책필기 시작하기! 허쌤의 공책레시피
허승환 지음, 허예은 그림 / 테크빌교육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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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승환 선생님의 공책 레시피는 학생들이 공책 필기를 통해 자기주도적 학습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기술(technique)적인 면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왜 공부를 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동기를 유발하고 있는 점이 신선하다. 나는 지금 영어 교담교사이기 때문에 허승환 선생님이 제시하신 방법들을 바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많이 따르지만, 다른 과목(특히 주지교과인 국어, 사회 등 내용 정리할 것들이 많은 과목)에서는 꽤 체계적으로 아이들에게 공책 정리하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는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요즘 아이들은 예전만큼 공책 정리를 많이 하지는 않는 것 같고, 수업 내용을 요약 정리하는 모습도 보기 드문 것 같다. 학원 학습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자기주도적 학습을 위해 스스로 손으로 써 보며 공책정리를 하고 정리를 하는 것은 추후 공부량이 많아질 때에도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이상의 고학년 아이들에게 활용도가 높을 내용인데, 이미 공부를 잘 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에게는 활용도가 높을 것 같으나, 그런 동기가 이미 떨어져 버린 아이들한테는 어떻게 공책 정리를 시작하도록 해야 할 지에 대한 사례나 허승환 선생님의 노하우가 좀 더 제시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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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쓰리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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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쓰리'가 무엇인가 했다. 일본 소설이니 영어 three는 설마 아닐테고. 표지의 그림이 '쓰리'가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의 말처럼 '반사회적'인 소매치기이다.   

일본 소설을 많이 읽지 않은 내게 나카무라 후미노리는 낯선 이름이고, 이 소설가의 책도 처음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에 흡인력이 있어 쉽게 읽힌다. 무엇보다 소매치기 장면의 생생한 묘사,인물 행동들의 묘사가 영화를 보는 듯 눈 앞에 그려진다.

주인공들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일어난 사건들, 그들간의 대화를 통해 보여주지 각 인물들에 대한 부연 설명은 거의 없다.  

'나(니시무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맨 마지막 그를 죽이기 직전에 기자키가 "너 참 너저분하게 살았더군."이라고 한 것과 지난 날을 회상하는 아주 잠깐의 몇 몇 장면에서 '나'에 대해 유추해 볼 뿐이다.  

신처럼 이 세상을 휘두르는 기자키 외에 (아니 그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모두들 삶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안정되고 지속적인 관계는 없다. 니시무라와 관계를 맺었던 유부녀 사에코는 헤어진 후 한달 뒤 자살했고, 신미도 살해당했다. 편의점에서 발견한 꼬마 소녀치기와 창녀인 그 젊은 어머니의 관계, 생활도 매우 불안하다. '내'가 그들을 도와줌으로써 그들은 나에게 조금씩 의미있는 존재가 되어가지만 그것이 오히려 기자키에게 약점으로 이용당하고 만다.  

기자키는 소름끼치는 존재다.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국가나 권력자보다도 더 큰 권력을 뒤에서 휘두르고 사람의 운명을 마음대로 정하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는 자다. 기자키가 니시무라에게 들려준 '운명의 노트' 이야기는 기자키가 생각하는 최고의 쾌락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사실 그가 예로 든 이야기는 끔찍하다)

기자키는 몇 가지 임무를 니시무라에게 맡긴다. 꼬마 소매치기와 그 어머니의 목숨을 담보로. 임무 수행 전 꼬마 소매치기에게 상자를 주고 함께 공던지기를 한다. 작별인사를 하며 '시시한 인간이 되지 말라'고 말한다. 이 세상과 어울려 살 수 없으니 소매치기도 되지 말라고. 니시무라가 그 임무를 수행해 내는 과정은 이 소설에서 극적인 재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그는 기자키의 칼(그가 명령한)에 찔린다. 애초부터 그렇게 되기로 되어 있었다면서. 그러나 소설은 그가 죽지 않고 살아남으리는 암시를 남기며 끝난다. 기대할 것 없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다라는 걸까. 혹시 속편이 나온다면 살아남은 내가 기자키에게 어떻게 복수를 하며, 그 꼬마 소매치기가 어떻게 성장해서 또 그들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려지지 않을까. 

파편화된 인간관계가 일본 소설에서는 주로 많이 다루어지지 않나 싶다.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라고 실제 우리 삶이 많은 부분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런데 일본 소설을 읽고 나면 금속성의 차가운 기운이 더 많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야기 중간중간 등장하는 '탑'. 실제 작가의 경험과 의식에서 나온 이 '탑'은 어떤 지향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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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정육점>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이슬람 정육점 문지 푸른 문학
손홍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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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정육점.

언뜻 보기에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처럼 보인다. 이슬람에서 금기시하고 먹지 않는 것이 돼지고기인데 이런 고기류를 다루는 정육점 주인이 무슬림이라니. 게다가 이 소설의 배경은 한국이다. 한국에서 이슬람은 아직은 낯선 단어다.

서울의 한 달동네. 소설의 화자인 ‘나’는 고아원에서 입양된 아이다. 나를 입양한 사람은? 터키 출신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한국에 눌러앉은 ‘하산’아저씨다. 터키에서 왔으니 무슬림인 아저씨의 직업은 정육점 주인이다. 중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지만 학교에서 매일 같은 시간에 이승복 동상의 팔을 떼어버리고 화단에 오줌을 누었던 나는 어떤 ‘진단’을 받았고 그 후론 학교에 가지 못했다. 하산 아저씨가 몇 번이나 나를 학교에 보내고 싶어하셨어도 말이다. 내 몸에는 나도 알지 못하는 무수한 흉터가 있다. 하산 아저씨는 그 흉터의 기원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다. 그것도 소외되고 보잘것없는 방향으로. 하지만 이야기는 우울하지 않다. 등장인물들은 외려 담담하고, 이야기는 경쾌하게 흘러간다. 너무 무겁지 않은 이야기 전개가 등장인물들의 아픔과 우리 사회의 모순을 오히려 더 잘 전해주었지 않나 싶다.

본래 남편, 아이들과 무슨 연유에선지 떨어져 살고 있는 충남식당 안나 아주머니. 하산 아저씨처럼 한국전 참전 후 역시 한국에 눌러 살고 있는 그리스 출신의 야모스 아저씨. 소설가를 꿈꾸는 연탄집 아들 말더듬이 유정(동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자기가 억겁 세월 윤회를 통해 이 곳에 왔다며 끝도 없이 이야기를 쏟아내는 맹랑한 녀석, 참전 당시 기억을 잃어버려 그 당시 기록을 줄줄 외우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기억은 찾지 못한 대머리 아저씨. 어른이고 아이고 우리가 말하는 소위 ‘정상적인 삶’에서 한참 빗겨나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쌀집 둘째딸과 교회 전도사까지.

각 등장인물들의 사정을 자세히 보여주지는 않지만 이들의 이야기들이 갖가지 사건들을 통해 조금씩 드러난다. 클라이맥스는 아마도 다같이 ‘소풍’을 가는 장면일 것이다. 트럭을 타고 이 모든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이 함께 소풍을 떠나서 산돼지를 잡고 먹고 어울려 논다. 이후에 하산 아저씨의 가게를 더 비싼 값에 개발업자에게 팔려는 주인 때문에 하산 아저씨는 결국 가게를 내놓고 나와야 하게 되고, 라마단 금식 중 폐렴에 걸려 위중한 상태로 입원하게 된다. 거기서 하산 아저씨는 내 흉터가 총상에 의한 것이라는 걸 알려준다. 하산 아저씨의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의붓아저씨의 피가 흘러 들어온 것을 느끼고 , 그리고 적대하던 세계를 ‘입양’하기로 마음먹는다. 
 

어떤 처지에 있건 삶의 순간 순간은 소중하다고,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내라고 이 소설은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순응’하라는 것은 아니다. 무덤덤하게 소설 중간중간에서 보여준 비판적 시선을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의 후속편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자라 있을까 자못 궁금해진다.

(밑줄)
(p. 22) 학교란 한마디로 착실한 바보를 만들어내는 곳이었다. 나는 학교를 혐오하지 않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똑같은 책걸상에 똑같은 자세로 앉아 똑같은 이야기를 듣고 똑같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얻어터지거나 욕을 먹거나 웃거나 울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을 끔찍해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p. 50) 불행과 비극은 온전히 타인의 것일 때 동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오래전부터 알았다. 사람은 결코 자신과 닮은 타인을 진심으로는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과 닮은 이들 - 가난하고 억압받고 무시받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건, 인간이 그처럼 한없이 나약하다는 것, 저 불결하고 끔찍한 인간과 내가 전혀 다르지 않은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p. 51) 차이는 유사성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말한 자는 행복한 삶을 살았음이 분명하다. 차이가 유사성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들을 무시해도 상관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행복한 자들이라고 한다.
 

(p. 70) 세상 어디나 마찬가지다. 불우한 청소년들의 꿈은 하나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것. 추상은 구체와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다. 행복은 추상에 속한다. ......  이룰 수 없는 꿈을 꾼다는 것이야말로 구체가 아닌 추상으로밖에 꿈꿀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p. 91) 순종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철회할 수 있는 싸구려 애정과 동정일 뿐이었다.
.....
상처받은 사람을 놀리는 건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다.
 

(p. 107) 상처의 치유는 그런 식으로 유예된다. 정작 상처입은 사람들은 그걸 하루라도 빨리 잊기 위해 태연한 척 애를 쓰지만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상처가 낫기도 전에 새로운 상처가 생긴다. 그런 식으로 상처가 증식하면 드디어 온몽이 상처투성이가 된다. 그때부터 우리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되돌려주기 시작한다.
 

(p. 118) 말을 더듬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영혼이 확신에 차 있는 건 아니다.
(p. 126) 나는 지루한 오후를 맛없는 빵처럼 뜯어먹었다.
(p. 129) 둘 다 명사 같은 사람이었기에 그 둘이 함께 걷기 시작하자 일종의 합성명사가 되어 버렸다.
(p. 138) 내게 속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늘 그렇게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게 되리라는 것도 그 때 알았다.
(p. 140) 시선에는 한계가 없다. 어디든 볼 수가 있다.
 

(p. 141)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소리들은 어딘가 모르게 서글픈 구석이 있었다. .... 음악은 소리의 강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우리의 영혼과 유사한 리듬을 지녔느냐에 따라 음악으로 인식되는 법이니까.

(p. 155) 고통받는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언어의 목록은 너무 간단하다.

(p. 189) 슬픔에 시효가 없다는 점이 인간이 지닌 권리를 초라하게 만든다.
(p. 197) 소풍이란 이런 것이다. 용트림을 하는 돼지와 함께 게으른 바람속을 진땀을 흘리며 갈팡질팡 걷는 것.
 

(p. 214) 너도 잘 알아야 한다. 우리가 사는 곳은 대한민국이 아니다. 그냥 여기는 자본주의라는 곳이야. 자본주의란 녀석은 한마디로 버릇이 없단다. 너도 자본주의한테 예의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상처받는 건 너일 테니까.
 

(p. 229) 눈부신 하늘과 푸른 나무와 그것들이 품은 생명들. 그런 때가 있지 않던가. 세계가 선명한 의미가 되어 소나기처럼 와락 덤벼드는 순간. 지나가는 비 한 줄금에 영혼마저 흠뻑 적셔버린 그 순간이 지나고, 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그저 스쳐 지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르면 절로 눈물이 났다. 하산 아저씨는 까닭 없이 흐르는 내 눈물을 이해해 주었다. 그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계가 아름답다는 걸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p. 233)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 세상에 속해 있음에도 이 세상과 별거 중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인간이 지을 수 있는 모든 표정들이 수렴된 단 하나의 표정은 바로 저 엉덩이에 있는 게 아닐까.
 

(p. 236) 나는 내 몸속으로 의붓아버지의 피가 흘러들어온 걸 느꼈다. 뜨거웠다. 인간의 모든 기억들이 이처럼 단순하고 정직하게 이어진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훗날 내 자식들에게 나의 피가 아닌 의붓아버지의 피를 물려주리라. 병실 구석에 있던 이맘이 다가와 나를 껴안았다. 그날 나는 이 세계를 입양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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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이긴 사람들 - 하워드 진 새로운 역사에세이
하워드 진 지음, 문강형준 옮김 / 난장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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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제목을 봤을 땐 가슴 두근거리는 참 멋진 제목이라 생각했다. ‘권력’이라는 단어는 실체가 음흉하게 가려져 있는 거대한 회색 구름-제도, 정부, 법 등-을 연상시켰고, ‘사람들’은 피와 살과 감정을 가진 구체적인 실존으로서의 인간으로 다가왔다. 그러한 거대 권력을 이긴 사람들의 이야기라니, 얼마나 희망적인가. 제목 아래 인용구 역시 그 희망의 연속선상에 있다. “역사가 창조적이려면, 역사가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서 가능한 미래를 예견하려면, 역사는 민중들이 저항하고 함께 모이고, 그래서 때로 승리했던 과거의 숨은 사건들을, 그것이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순간이었더라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가능성들을 강조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 책을 한 번 읽고 났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들은, ‘무지’, ‘나약함’ 같은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책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감정들이었다. 이 책은 희망으로 가득차 있는데, 왜 그런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냐는 말에 스스로도 당황했다. 왜 이러지? 그 때는 아마 심신이 피곤한 상태라서 그랬나 보다 생각했다.

 

  그래서, 몸과 맘을 좀 쉬어준 후, 다시 책을 집어들었다. 연필을 들고 다시 제대로 읽어보자 하며, 다른 일을 일단 제쳐놓고 한나절을 꼬박 읽었다. 두 번째 읽고 나서는, 책의 내용에 대해서도 더 명료하게 이해했고, 희망의 메시지들을 분명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감정적인 반응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 표정은 울 것처럼 침울하고 가슴에는 한기가 스민다. 나는 내 내부의 이 이상한 반응의 원인을 생각해 봐야겠다고 느낀다. 책의 내용에 대해서도 정리하겠지만, 이 책을 읽고 내가 이렇게 힘들어진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말이다.


 

  옮긴이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은 미국의 사회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하워드 진이 2007년 발간한 A Power Governments Cannot Suppress 를 완역한 것인데, 진이 최근 잡지에 기고한 칼럼, 다른 작가들이 쓴 책에 부친 서문이나 후기, 그리고 새로 쓴 에세이들을 엮은 에세이집이다. 소재의 범위도 미국 건국 초기의 여러 역사적 사건들, 독립선언서, 남북전쟁, 제 1․2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 1960년대 민권운동, 2000년 대통령 선거, 9․11 사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 반세계화운동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다.

진은 한국어 서문에서 책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미국이 저지른 폭력적이고 정의롭지 않은 행동을 다룰 뿐 아니라 그런 행태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운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어두운 시대에 희망을 제시하려는 시도입니다. 그 희망이란 안에서는 국부(國富)를 평범한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하고 밖으로는 세계 다른 나라의 절망적인 사람들을 도움으로써, 미국인들이 언젠가는 세계와 평화롭게 지내는 나라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첫 두 문장에 나와 있듯이, 이 책은 크게 세 가지의 내용으로 나누어질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세 가지는 한 고리로 연결되는 것들이다.)

 

  첫째, 미국이 저지른 폭력적이고 정의롭지 않은 행동들의 폭로(알려지지 않았던 진실 알리기)이다. 책에 소개된 사건의 양으로만 보면 이 첫째 사례들의 양이 더 많은 듯하다. 미국의 역사라 이 부분에 대해 잘 모르는 내겐 아주 굵직한 사건들 외에는 낯선 이름들이 많다. 옮긴이가 많은 부분 보충 설명을 덧붙였음에도 여전히 생소하다. 그냥 어렴풋이 알고 있던, (이런 소식들을 접하게 되는 언론에서도 늘 어렴풋이 보도했듯이) 사건들에 미국이 어떻게 개입했었는지 그 전말이 소상히 드러난다.

 

  둘째, 민중들의 저항과 불복종의 역사, 평화· 정의· 인권 같은 보편적 대의를 거스른 정부에 맞섰던, 역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사례들 드러낸다. 마크 트웨인이 반제국주의연맹의 부의장이었다는 것,「월든」의 저자로만 알고 있던 소로가 시민불복종운동을 주도했었다는 것, 유진 뎁스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새로 알게 되었다. (아니, 알고는 있었으나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여기 등장하는 사례들이 모두 반짝이는 승리의 사례들인 것은 아니다. 로자 파크스나 1954년 학교에서의 인종분리에 대한 브라운 판결 같은 잘 알려지고 기념되는 사례도 있지만, 알려지지 않았던 시도들, 투쟁들, 사코와 반제티(34장)의 경우처럼 사후 50년이 지나서야 재평가되는(제도권에서) 사건들도 있다. 이를 살펴보는 것은, 다시 인용하지만 “민중들이 저항하고 함께 모이고, 그래서 때로(언제나가 아니다) 승리했던 과거의 사건들을, 그것이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순간이었더라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가능성들을 강조해야만 한다.” 에서처럼, “드러내고” 새로운 가능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진은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희망인가? ’희망‘은 ’앞일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가지고 바람‘을 말한다. 현실이 부조리하거나 불만족스러울 때, 절망스러울 때 우리는 희망을 품는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상태에서 희망을 말하지는 않는다. 즉, 현실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이 책의 희망의 메시지를 공감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 인식부터 공유가 되어 있어야 한다. 책장을 덮고 나서 느꼈던 불편함의 한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이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은 늘 있었지만, 이런 구체적인, 수많은 사례를 한꺼번에 접하는 것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특히 전쟁에 관한 부분들이 그랬다. (이는 단지 진보냐, 보수냐의 구분을 넘어서는 것으로,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 - 자유, 평등, 인권, 행복 추구권 등 - 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 이것이 현실이었다면 그 오랜 시간 사람들이 무감각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마도 정부가 언론을 통해 국가주의, 애국, 민족 같은 말로 교묘하게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여론을 선동한 탓이 크리라.

 

  그래서 진은 정부나 국가에 의해 교묘하게 이용되고 있는 용어나 개념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셋째 부분이다.) 그가 강조하는 단어들은, 국가, 정부, 계급 같은 것들이다. 계급에 대해서는 한 장을 할애하여 말하고 있다. (5장 금지된 단어, 계급)

 

 ..."오늘날에는 국민들이 계급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주장을 아주 가볍게만 해도 분노의 반응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현실은 계급 없는 사회란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드러낸다." (p. 52)

 

이것은 우리나라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말이지 않을까. 이 ‘계급’이란 단어에 대한 금기 말이다. 나부터도 이 단어를 들었을 때 처음 드는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이 단어가 함께 연상시키는 다른 이미지들 때문에. 공산주의, 빨갱이, 투쟁, 그리고 (그야말로) 대강 알고 있는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 고문 등. 상당히 선동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들이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이나 근․현대사에 관심이 되려 없는 쪽에 가까웠는데, 자연스럽게 저런 이미지를 떠올린 것은, 아마 저런 이미지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집단적 무의식이 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계층’이란 말은 상대적으로 더 널리 쓰이는 것 같은데 ‘계층’과 '계급‘의 차이는 무엇일까?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 중 하나이다. (나중에 다른 책에서 보니, 'class'라는 용어를 우리나라 사회 분위기상 '계급'이라는 말로 섣불리 번역해 쓰기가 어려워 '계층'이라는 말로 썼다고도 한다. 용어에 대한 질문 한 가지 더. '인권 운동'과 '민권 운동'은 구별되는 것인지?

  

   ‘16장 누구를 위한 애국주의인가?’ 에서는 정부와 국가를 독립선언서와 트웨인, 엠마 골드만의 말을 통해 구별하고 있다.

 

독립선언서에 따르면 정부는 “생명, 자유, 행복추구”에 대한 모든 이의 동등한 권리와 같은 어떤 목표들을 지키는 일을 하라고 국민들이 세운 인위적 산물이다. 그리고 “어떤 형태의 정부라도 언제든 이 목표를 파괴하게 되면.... 그 정부를 바꾸거나 무너뜨리는 것은 인민들의 권리이다.” (p. 126)

 

여기서도 몇 가지 의문이 들었는데, ‘정부’에 대해서는 파악하기가 상대적으로 더 쉬웠던 반면, 여기서 인용된 여러 말들을 통해서 ‘국가’란 무엇을 말하는지 명확하지가 않았다. 트웨인은 ‘국가’와 ‘정부’를 구별한 반면 엠마 골드만의 인용문에서는 국가에 대한 충성 개념 자체를 비판하는 듯 보였다. 그 인용문에서 ‘국가’와 ‘정부’는 구별되지 않아 보였다. 또 한 가지는, ‘국민’, ‘민중’, ‘인민’, '시민'의 구별에 관한 것이었다. ‘민중’이나 ‘인민’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전제로 한 용어인 데 반해, ‘국민’에서 계급이 연상되지는 않는다. 본문에서는 이 용어가 혼용되어 쓰이고 있는 것 같은데, 원문에도 그렇게 구별이 되어 있었는지, 다르게 구별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사실, 비슷한 것 같지만 각 용어가 주는 어감은 상당히 다르다. ‘민중’, ‘인민’은 앞에서 말한 ‘계급’, ‘투쟁’과 같은 범주 안에 있는 인상을 주며, 이건 내게 그리 긍정적인 인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왜 그럴까? 단어의 역사적 배경(큰 줄기)에 관계없이 순전히 개인적 경험에 기초한 감정적 반응이다.

 

   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런 단어들을 들으면 자연스레 ‘운동권’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IMF 사태 이후로 이런 운동권에 대한 관심이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크게 사그라들었던 시기였고, 운동권하면 왠지 구시대적이고 낡았다는, 그리고 위험하다는 생각을 막연히 갖고 있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 책을 통해 그런 단어들에 대한 내 무지에서 비롯된 편견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마음이 불편해졌던 것 같다. 이것은 내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이 있기도 한데, ‘투쟁’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킨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때문이다. 전국 교대에서 정부의 어떤 정책에 대해 반대 시위를 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과에서 엄청난 지탄을 받았다. 그 정책에 대해 달리 어떤 ‘나의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떤 ‘믿음’ 때문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바보같을 정도로 순진했던 시절이었다.  내가 그 당시 옳다고 여겼던 그 믿음과, 그 믿음을 공유했던 사람들이 그러라고 했기 때문에 따랐던 것이지, '왜 그런가?", "과연 그러한가?" 하는 그에 대한 스스로의 치열한 고민은 부족했다. 그저 이 껄끄럽고 불편한 상황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소극적이고 회피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소위 ‘투쟁’을 한다는 사람들도, 평소엔 교육 문제에 별 관심도 없어 보이던 사람이 그럴 때만 앞에 나가 주먹 불끈 쥐고 ‘투쟁’을 외치는 게 일관성도 없어 보이고 위선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니 그 행동이 내겐 별 설득력이 없었다. 꼭 저렇게 전투적으로 해야 하나?라는 회의를 들게 한 것도 사실이었다.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과정도 민주적이라기보다는 매우 강압적으로 느껴졌다. (이런 것이 대학생들이 소위 ‘운동’을 외면했던 이유이기도 했을 듯) 어쨌든 이 때 사건은 소심하고 맘 약하고 순진했던 내게는 큰 충격이었고, 거기서 비롯된 의문이 점점 커져 결국 조금씩 내 주변에 대해, 세상에 대해 의심과 회의를 품게 만들었다. 지금도, 그 시절의 나를 아는 사람을 만나면 난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 때의 나는 제발 잊어주었으면! 하고 속으로 바라면서. 과거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창피한 건 어쩔 수 없다. (이 부분도 뭔가 마음에 걸린다. 그 당시 나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창피할 일도 아닌 것이다. 사람들이 '나의 신념과 양심'을 따른다고 할 때, 온전히 그 사람만의 신념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그 신념이 내가 속한 어떤 집단의 신념일 때 나는 그 집단의 일원이나, 그 신념이란 것에 내가 100% 공감 및 동의가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 개인은 무척 괴로워진다. 양심이란 것도 사회적, 문화적 가치에서 자유롭다고 하긴 어려울 텐데. )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진은 전쟁뿐만 아니라 “야만적이고 고삐 풀린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책을 읽으며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는데, 바로 그 질문에 대답한 곳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지구상에서 시급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을 보살피기에 충분히 쓸 수 있는 막대한 부가 존재하는데, 이 부는 소수의 개인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다. 이들은 수백만 명이 죽고, 수백만 명이 비참하고 지저분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도 사치품과 전쟁에 그 부를 탕진한다. 이것이야말로 세계 모든 곳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문제이다. ... 우리에게 가장 치명적인 적들은 해외의 동굴이나 숙소에 숨어 있는 게 아니라,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윤과 권력을 좇는 욕망이 낳은 ‘부수적 피해’로서) 수백만 명을 죽음과 비참함에 내주는 결정들이 만들어지는 기업 회의실과 정부 사무실에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p. 227~228) (이 책 위험한 책 맞다.ㅋ)

 

  권력의 부조리와 횡포를 보면서도 그 거대함에 나는 그저 쉽게 압도당하고 마는 작은 존재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도 전에 나에게 어떤 불이익이 있지 않을까를 먼저 계산하고 있는 속물적인 모습이 솔직한 나의 모습일 것이다. 그 나약함에, 비겁함에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그런 내게, 진은 다시 희망을 이야기한다. 괜찮다고, 거대한 것이 아닌,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고 어깨를 다독여준다. 그 부분을 옮겨본다.



 

  “혁명적 변화는 한 차례 격변의 순간(그런 순간들을 경계하라!)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사회를 향해 이리저리 움직여가는 가운데 등장하는 놀라움들의 끊임없는 연속으로 오는 것이다. 변화의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거대하고 영웅적인 행동을 할 필요는 없다. 작은 행동이 수백만의 사람들에 의해서 증식될 때 어떤 정부도 억누를 수 없는 조용한 힘, 세계를 뒤바꿀 수 있는 힘이 된다.

우리가 승리하지 못한다 해도, 다른 좋은 사람들과 함께 어떤 가치있는 일에 참여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유쾌함과 성취감은 남는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필요하다. ... 사악한 시대에 희망을 품는 행위가 바보같이 낭만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가 경쟁과 잔혹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공감, 희생, 용기, 친절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복잡한 역사 속에서 우리가 선택해 강조하는 바로 그것이 우리의 삶을 결정지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가장 나쁜 것만을 본다면, 그것은 뭔가를 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파괴해버릴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이 위대하게 행동했던 시대와 장소들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그런 예는 너무나 많다), 그것은 우리가 행동할 힘을 불어넣을 것이고, 적어도 이 팽이처럼 핑핑 도는 세상을 다른 방향으로 옮길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소한 방식으로라도 우리가 진정 행동한다면, 어떤 거대한 유토피아적 미래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미래는 현재의 끊임없는 연속이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나쁜 것들을 거부하는 가운데 우리가 마땅히 살아가야 하는 방식이라고 믿는 바처럼 지금을 살아간다면 바로 그 자체가 위대한 승리이다.“ (p. 290~291)

 

  그러다가 옮긴이의 후기를 읽으면서 내 마음은 또 다시 가라앉았다. 한국인에게 갖는 의미를 논하는 곳에서,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건들에 관한 내 무지를 또 한 번 발견하기 때문이다. 아, 다시 진의 희망 메시지로 돌아가자.  그리고, 공부하자.

 

하루가 꼬박 갔다. 글을 처음 쓸 때의 울 것 같은 침울함은 이제 사라졌다.


옮긴이의 바람대로, 이 책은 내게 ‘우리의 역사와 현실에 눈을 돌리게 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위험한‘ 책’이 된 것일까. 행동까지는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최소한 현실을 이전보다는 더 넓어진 눈으로, 두려움을 한꺼풀 걷어내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서 의미 있는 행동의 변화가 여기저기서 일어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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