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맹수의 눈을 갖게 되었다
조승연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나는 맹수의 눈을 갖게 되었다. 다소 어색하게도 보이는 이 제목은, 본문에서도 나오지만 니체의 글에 나오는 대목을 인용한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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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즈의 위대한 유산의 첫 대목이 머릿속에 맴돈다. "나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 말할 것이다." 어차피 이야기를 한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은 있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 속에 비수처럼 꽂혀 있는 것을 꺼내서 세상에 보여 주는 과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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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끝자락에 있는 부분이다. 이 말대로 저자는 뉴욕이라는 도시에 대해 본인의 기억 속에 꽂혀 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뉴욕에 관한 책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곤 한다. 전부 읽어보지는 않았어도 대개 목차를 보면, 뉴욕에 대한 기행기, 관광 안내서 같은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이 책은 그런 사실적인 기술보다는 뉴욕이라는 도시의 역사, 도시와 인간의 관계,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 등을 통해 느끼고 알게 된 뉴욕에 대해 다루고 있어 다른 책들과는 차별성을 가진다.

  영혼이 있는 도시. 도시와 인간의 관계. 인간이 거주하는 공간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해 새삼스레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를 둘러싸고 공간이 나에게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치는지,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전에는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젊은이들의 절망의 한 원인이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는 저자의 말은 내겐 좀 충격적이었다. 그렇다. 공간과 나는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 내가 이미 그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마치 공기에게 그런 것처럼 무관심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의 어떤 일치감, 정서를 느껴본 적이 없다.

  뉴욕하면 패션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만큼 뉴욕은 패션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유명 브랜드들도 뉴욕 출신들이 많다. 저자는 이 브랜드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내가 스스로 해낸 것이 아니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라고 말하는 뉴요커들의 철저한 땀, 노동의 정신을 이야기한다. 자연스레 뉴욕이 세워진 배경을 이야기하면서 뉴욕의 역사를 들려준다. 우리는 미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오래전부터 '뉴욕'은 미국과 별개의 지역이었다.  동인도 회사 노무자, 독일과 폴란드에서 종교 전쟁에 지쳐 먹을 것을 찾아 온 농민들, 하이티의 사탕수수밭에서 자유를 얻어 찾아온 노예들, 해적 선원들이 뉴욕 이민 1세대다. 교과서에서 공식적으로 메사추세츠와 버지니아의 '필그림'을 미국 역사의 시작으로 보는 미국인들은 오히려 뉴욕을 경멸했다. 링컨 시절 남북전쟁 때 징집령에 반대해 뉴욕시민들이 반대해 폭동을 일으키자 링컨은 메사추세츠와 뉴저지의 군대를 동원해 뉴욕을 쑥대밭으로 만들기도 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제 막 자유를 찾아 뉴욕에 와 도약의 기회를 맞고 있던 뉴요커들은 어떤 대의 명분으로도 자신의 자유와 생명을 타인의 결정에 맡기지 않으려 했다. 미국 사람들은 조국을 위한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뉴요커들을 비웃었지만 저자는 과연 그들 중 누가 법과 국가와 제도라는 정치인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고 자기 스스로 살 길을 정할 수 있는 권리를 찾으려고 손에 쇠파이프를 쥐고 군인들이 퍼붓는 총탄 속으로 뛰어들었을 것인가? 라고 묻는다. 그리고 뉴욕의 탄생 배경과 더불어 지금은 겉보기에 뉴욕과 흡사한 모습이지만 탄생 배경에서는 왕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주로 '위로부터의 역사'를 가진 서울과 비교하는 내용도 흥미롭다.

  뉴욕의 패션에 대해 이야기하며 저자는 뉴욕을 이루는 한 축인 뉴욕의 장사꾼들에 관한 이야기로 한국에 퍼져 있는 명품족 or 명품 신드롬을 꼬집는다.

  예술의 도시 뉴욕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뉴욕 속의 뉴욕이었던 소호와 그 소호에서 활동했던 예술가들, 그 예술가들을 후원했던 유로 트레쉬에 관해 들려준다. 저자와 개인적으로 친분을 가졌던 이들과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간혹 뉴욕이 나오는 영화에 보면 슬럼가가 많이 등장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디카프리오가 주연했던 '바스켓볼 다이어리'같은) 뉴욕이 슬럼화된 것은 1980년대로, 뉴욕 시장이었던 모세스의 아파트와 고속도로 건설 중심의 대도시 재개발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던 곳을 허물고 도로를 건설하고 아파트를 세우면서 도시는 급격히 슬럼화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중에 이를 뒤늦게 깨달은 뉴요커들의 저지로 이 정책은 중단되었고 아직 파괴되지 않은 소호 같은 곳에서 뉴욕이 다시 일어서는 힘이 나왔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도시의 문화와 역사를 고려하지 않은 무분별한 도시 개발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델리 이야기. 뉴욕이 도시 개발의 상처에서 회복될 무렵. 그 노력의 중심지에는 한국 이민자들이 세운 편의점 델리가 있었다.

  저자의 어린 시절 청계천 시장에서 용돈을 모아 샀던 오래된 지도 이야기. 이 이야기도 나에겐 감동과 어떤 부러움으로 다가왔다. 비행기에 관심이 많았던 저자가 날마다 형과 함께 청계천 장한평 시장 고물상에서 오래된 물건을 구경하다 마침내 용돈을 모아 물건을 사러 갔을 때. 이만큼의 돈으로 무얼 살 수 있느냐는 질문에 가게 아저씨는 비행 지도를 건네 주신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 보니 지도 안에 돈은 그대로 들어 있었다. 중학교 시절 배웠던 국어 교과서에 실린, 선물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제목의 어떤 이야기와 비슷한, 부러운 추억이다.


  이 책에 대해서, 혹은 이 저자의 다른 책에 대한 리뷰에서도, 오만함으로 비춰지기도 하는 , 아직은 나이가 젊은 저자의 당당함에 대한 비난이 눈에 많이 띈다. 사실 우리 나라에 나오는 여러 책이나 글들에서 이런 투로 글을 쓰는 사람이 드문 것은 사실이다. 내가 보기에 이 저자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스스로의 길을 일구는 뉴요커의 정신을 대단히 존중하며, 저자 스스로도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한 사람이다.  나는 그 당당함이 자신의 성취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루어냈다는 자부심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 당당함이 그저 철모르는 '잘난척'으로 보이지 않는다.
또 뉴요커들의 상술에 휘말리는 명품족들을 비판하고, 폐허가 되다시피 한 뉴욕에서 치열하게 델리를 살아남게 한 한국 이민자들을 존중할 줄 아는 저자가 철없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피의 허리케인' 이나 '유로트레쉬' 친구들과의 이야기, '피의 권리'를 존중하는 유럽 귀족들의 이야기에서 어떤 이질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저자의 친구 알렉스도 귀족 이라는 말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든다고 하니) 그러나 저자도 말했듯이 이 책은 사실적인 정보 전달을 위한 책이 아니라 개인의 기억 속에 있는 한 도시와 그에 얽힌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도시와 공간에 관한 성찰, 뉴욕이라는 도시의 역사적 배경, 정신에 대해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 아주 괜찮은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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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일만자 2008-03-05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굉장히 멋지게 쓰시네여...글 읽고 정말 감탄했습니다...마치 잔잔하게 말하면서도 할 말 다하는 침착한 사람이 생각났습니다...리뷰 정말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