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탱고 - 2025 노벨문학상 수상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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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러스너 호르커이 라슬로 / 조원규 옮김/ 알마







사탄탱고의 첫머리에는 프란츠 카프카의 문장이 제사처럼 놓여 있다.

'그러면 차라리 기다리면서 만나지 못하렵니다.....'

카프카 소설 문장 (그렇다면 나는 기다리다가 그것을 놓치게 되겠군....)을 라슬로 식으로 은유한 문장이다. 이 문장은 소설 전체를 미리 설명하는 열쇠처럼 보인다. 마을 사람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어떤 변화가 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기다림은 끝내 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오지 않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지옥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지옥 속에서 그 고통을 견디느니 차라리 죽음을 소망하지만 뫼비우스 띠처럼 지옥은 순환되고 그들은 끝내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 ( 너무 강력한 스포인가 ? 이 소설을 읽은 한 문단 소감이기도 하다. 고통을 견딜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결국 죽음을 선택하기도 하는데 이곳은 전혀 탈출구가 없어 보인다.... ) 카프카의 세계에서처럼 구원은 언제나 도착 직전에 미뤄지고, 인간은 그 사이에서 끝없이 시간을 견디는 존재가 된다.


카프카를 읽지 않을 때에도 그를 생각한다는 라슬로 작가...




진입 장벽에 워낙 높다는 얘길 들어서 지난겨울부터 라슬로 읽기 선작업으로 먼저 케르테스 임레 작가님의 작품 《운명 3부작》을 읽었다.

케르테스 임레가 역사 속에서 인간의 운명을 묻는다면, 크러스너 호르카이 라슬로는 시간 속에서 인간의 미약한 희망을 묻는다.









탱고라는 제목

탱고는 헝가리의 춤이 아니다. 남미 항구 도시에서 태어난 춤이다. 그런데도 작가는 이 소설에 탱고라는 이름을 붙였다. 탱고의 리듬은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갔다가 다시 뒤로 물러나는 구조를 가진다. 바로 그 리듬이 『사탄탱고』의 서사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희망을 향해 움직이는 듯하다가 결국 같은 자리로 되돌아온다. 마을 사람들은 구원을 기다리지만 그 기다림은 언제나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원을 그린다. 뫼비우스의 띠.....


인간들이 파멸을 향해 춤추듯 움직이는 세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리듬 속에서 계속 이어지는 삶.








마을이라는 폐허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고립되어 있다.

  • 후터키

  • 슈미트와 슈미트 부인

  • 크라네르 부부

  • 헐리치 부인

  • 페트리너

  • 그리고 이리미아시



이 마을은 이미 공동체가 무너진 공간이다.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않고, 서로에게서 돈을 빼앗을 계획을 세우며, 간절히 구원자를 기다린다. 이리미아시는 그런 기대 위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구약성서의 예언자 예레미야를 연상시키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인물은 구원자가 아니라, 인간들의 믿음을 이용하는 존재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악이 아니다.

희망이다.








가장 잔혹한 장면

작품의 중심에는 호르고시의 막내딸 에슈티케가 있다. 그녀와 고양이 미추르의 이야기는 이 소설에서 가장 잔혹한 장면으로 남는다.

이 장면은 단순한 잔혹 묘사가 아니다.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계가 얼마나 무정한지를 보여준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폐허 속에서 가장 약한 존재가 먼저 무너진다. 5장에서 소녀가 죽는 장면은 리뷰를 쓰며 다시 읽어도 또 울음이 터져 나온다.

이 장면을 지나며 독자는 알게 된다.

이 마을에는 이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 ( 소설은 아니 불행은 여기서 끝나야 했다. ) 그럼에도 작가는 냉철한 눈으로 인간들을 관찰하기만 한다. 도스토옙스키식 폭발적인 지옥에 익숙해 있는 내게 일말의 다정함도 없는 라슬로 작가는 참으로 충격이었다.








그런데도 이 소설이 마냥 비극적이지 않은 이유 (이렇게라도 말하고 싶다. )

처음에는 이 소설을 종말론적인 분위기 속에서 읽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이미 무너진 세계, 인간들이 그 폐허 위를 맴도는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읽어서일까. 이상하게도 이 작품이 마냥 비극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간의 악의와 절망을 더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작품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컨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잔혹한 본성, 혹은 악령 속 니콜라이 스타브로긴 같은 인물은 훨씬 더 종말론적인 인간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에 비해 『사탄 탱고』의 세계는 파멸을 향해 폭발하는 세계가 아니다. 이미 무너진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온갖 추한 모습들. 인간은 어디까지 무너져내릴 수 있는가?

그래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의 종말은 폭발하는 악이고

크라스나호르카이의 종말은 지루하게 계속되는 붕괴다.









사탄탱고』에서 인상적인 것은 사람들이 종소리를 듣는 장면이다. 그 소리는 어떤 사건의 신호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소리에 가깝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소리를 징조로 받아들이고, 그 위에 이야기와 믿음을 덧붙인다. 마치 인간이 세계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 내는 방식 자체를 보여 주는 장면처럼. 이리미아시가 구원자로 떠오르는 과정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소리가 계시가 되듯, 어떤 인간은 어느 순간 메시아가 된다. 그리고 그 믿음이 바로 이 마을을 움직이는 힘이 된다.









헝가리 문학이 우울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봤다.

헝가리 문학을 이해하려면 한 사건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1920년의 트리아농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헝가리는 영토의 약 3분의 2를 잃었고, 수백만 헝가리인이 하루아침에 다른 나라의 소수민족이 되었다. 이 사건 이후 헝가리 문화에는 잃어버린 나라의 기억이 깊게 남게 된다.

그래서 헝가리 문학에는 이런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붕괴된 제국, 버려진 마을, 돌아올 수 없는 시간





역사가 잔인할수록 문학은 깊어진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아이러니인가!!


헝가리 문학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시선도 있다. 역사적 경험만 놓고 보면 헝가리는 폴란드와 닮아 있다. 강대국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상처 입은 나라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문학적 정서로 들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세계의 부조리와 인간 존재의 공허를 바라보는 시선은 오히려 아일랜드 문학과 닮아 있다.

특히 사뮈얼 베케트의 세계와 그렇다.

그래서 『사탄탱고』를 읽다 보면 동유럽의 황폐한 평원 위에서 어느 순간 베케트적 세계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다. 절망을 과장하는 문학이 아니라, 무너진 세계 속에서도 계속 이어지는 인간 시간을 묵묵히 바라보는 시선 말이다.



이 소설은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라기보다, 이미 종말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한 기록에 가깝다. 사람들은 구원을 기다리지만 결국 다시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마치 한 곡의 탱고처럼,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갔다가 다시 뒤로 물러나면서.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 역시, 사탄 탱고 속 배경과 다르지 않다. 자기 이익만 챙기는 정치인, 가짜 뉴스, 소비를 충동질하는 자본주의의 민낯... ( 자본주의의 노예인 난 오늘도 지적인 쾌감을 위해 시집 두 권을 샀다) 이미 오래전 시작된 사탄의 탱고 한 곡의 중간 부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소설이 결국 보여주는 것은 한마을의 몰락이 아니라 구원자를 기다리는 인간의 심리다. 사람들은 삶이 무너질수록 누군가 나타나 모든 것을 바꿔 주기를 기대한다. 종교에서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정치에서는 지도자를 기다리며, 역사 속에서는 혁명을 기다린다. 이 마을에서 그 역할을 맡은 인물이 바로 이리미아시다. 그러나 그는 진짜 구원자가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 낸 기대와 환상이 빚어낸 그림자에 가깝다. 인간은 종종 구원을 믿기 때문에 속는 것이 아니라, 속더라도 구원을 믿고 싶기 때문에 속는다. 그런 점에서 『사탄 탱고』가 보여주는 세계는 특별한 마을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축소판이다.



종말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은 계속 희망을 만들어 낸다


종말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은 여전히 종소리를 기다리고, 누군가를 구원자로 믿으며,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다. 마치 끝나지 않는 탱고의 리듬처럼.



이 지점에서 헝가리 문학을 조금 다른 방향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번에는 아일랜드 문학과의 비교를 통해 이 세계의 정서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아일랜드 작품 읽는 중~~




#사탄탱고

#라슬로크라스나호르카이

#Satantango

#헝가리문학

#세계문학

#동유럽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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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트레이시 자기 절제론 - 의지보다 기준을 세워라 위대한 행동주의자의 성공 원칙 2
브라이언 트레이시 지음, 정지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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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협찬 도서를 읽고 쓴 주관적인 리뷰










브라이언 트레이시 (지음)/ 21세기북스








의지보다 기준을 세워라!!!

이 책은 시리즈로 나온 구성인데, 세 권을 연작으로 다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자기 확신, 시간 관리, 자기 절제. 제목만 보아도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어떻게 하면 원하는 삶을 실제로 살아낼 수 있을까.







자기 계발서를 읽다 보면 동기부여의 문장들은 많지만, 막상 생활 속에서 떠오르는 내 것이 될만한 조언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책은 조금 결이 다르다. 거창한 성공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다 사람이 행동을 지속하지 못하는 이유를 꽤 현실적으로 짚어주기 때문이다.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목표를 세운다.

매달, 매주를 시작하며 계획도 세운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는다. 저자는 그 이유를 의지 부족에서 찾지 않는다.

대신 기준의 부재라고 말한다. 사람은 감정에 따라 쉽게 흔들린다. 피곤한 날, 기분이 가라앉은 날, 주변 환경이 바뀌는 날. 이런 날들이 반복되면 계획은 자연스럽게 흐려진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의지를 다잡는 결심이 아니라 미리 정해 둔 기준이다.







아하! 이 부분에서 뭔가 뒤통수 맞는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그 기준이란 뭘까?


예를 들어 ‘운동을 해야지’라는 마음은 쉽게 무너지지만 ‘아침에는 반드시 10분 걷는다’는 기준은 비교적 유지되기 쉽다. 책을 읽으며 느낀 점은 절제가 흔한 자기 계발서에 쓰여왔듯이 어떤 도덕적인 기준이 아니라는 점이다. 절제란 에너지를 어디에 쓸 것인지 결정하는 기술에 가깝다. 우리는 하루 동안 수많은 선택을 한다. 그 선택들이 쌓여 결국 삶의 방향을 만든다. 저자가 말하는 절제는 욕망을 억누르는 금욕이 아니다. 오히려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 위해 불필요한 선택을 줄이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변화가 거대한 결심에서 시작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대부분은 반복되는 작은 선택에서 시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의외로 단순하다.

의지로 버티지 말고, 기준을 세워라. 그 기준이 하루의 리듬이 되고, 그 리듬이 결국 삶의 방향을 만든다.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다른 시리즈인 자기 확신론과 시간 관리론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권을 함께 읽으면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돌아올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생각을 행동으로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떠올리며 함께 답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어준 책이다. 새해에 나는 수많은 결심으로 시작했다. 매번 자신을 달달 볶기만 하지 않았던가? 기준의 부재라는 새로운 개념을 얻고 나니 세상이 조금 달라 보인다.






#브라이언트레이시

#자기절제론

#위대한행동주의자의원칙

#자기계발서추천

#기준의힘

#습관의힘

#시간관리

#자기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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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력
이승후 지음 / 아침사과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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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협찬 도서를 읽고 쓴 주관적인 리뷰







이승후 지음/ 아침사과(펴냄)









20년간 위장병만 치료하던 한의사가 들려주는 심장 이야기!!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유튜브 채널, 아는 분은 이미 다들 아시는 #우리모두튼튼 한의사 이승후 원장이라고 한다. 책의 소개 글이 무척 흥미로웠다. 심지어 출판사 이름도 아침사과라니!!

병은 그 심각성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우리 몸 깊숙이 들어와있다. 건강할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르고 막상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 것, 건강!!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 건강!!

최근 몸을 너무 무리하게 혹사해서 건강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피로가 쌓이고 소화가 더뎌지고 밤잠이 얕아지면서 몸의 균형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표지와 제목을 보고는 바로 펼쳐들었던 책이다. 책이 던지는 질문은 의외로 단순하다.

“증상을 쫓지 말고 중심 엔진을 점검하라.”

우리는 몸의 문제를 늘 장기별로 나누어 생각한다. 소화가 안 되면 위장약을 먹고, 잠이 오지 않으면 수면제를 찾는다. 하지만 저자는 그 질문의 방향을 바꾼다.

그 증상을 만들어내는 몸의 중심 엔진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라는 질문!!

저자가 말하는 중심 엔진은 바로 심장이다. 바로 엊그제 읽은 책에서도 같은 말을 했었다. 이런 반가움이라니!!







심장은 단순히 피를 보내는 기관이 아니라 몸 전체의 순환과 에너지 흐름을 만드는 핵심 기관이다. 심장의 펌프 기능이 약해지면 위장으로 가는 에너지가 줄어들고, 그 결과 소화불량·불면·불안 같은 증상이 함께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거창한 처방을 말하지 않는 대신에 사소한 실천을 강조한다.





식후 10분 걷기.

계단 3층 오르기.

깊은 호흡 한 번. 2초간 들이마시고 4초간 길게 내쉬기 ( 이 호흡법은 나도 자주 실천하는데 정말 효과가 있다)

저자는 이것을 첫 번째 도미노라고 부른다.



작은 행동 하나가 시작되면 식습관이 바뀌고, 수면이 안정되고, 몸의 순환이 다시 연결된다는 것이다. 물론 몸은 한 번의 결심으로 바뀌지 않는다.





매일 반복되는 작은 행동이 몸의 리듬을 바꾼다. 책을 읽으며 새삼 느꼈다. 건강은 특별한 치료보다 생활의 리듬에 가까운 것이는 점을 다시 깨닫는다. 모든 문제는 심장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종종 몸을 기계처럼 다루며 고장이 나면 '수리'하려 한다. 하지만 몸은 기계가 아니라 순환하는 생명이다. 심장이 다시 리듬을 찾으면 몸도, 마음도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간다. 저자가 말하는 그 첫 번째 시작은 처방전이 아니라 식후 하루 10분씩 걷기다!! 지금 바로 해보시길!! 건강해야 우리 오래 책 읽을 수 있어요 추천합니다!



#심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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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독서

#몸의중심엔진

#심장건강

#건강습관

#식후10분걷기

#몸의리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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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그 밤이 또 온다 소소한설 1
김강 지음, 이수현 그림 / 득수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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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강 소설집/ 득수 (펴냄)



밤은 늘 갑자기 온다.

어떤 날은 가로등이 깜빡거리듯 조용히 오고 또 어떤 날은 이미 지나가 버린 사랑처럼 느닷없이.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밤은 반복된다는 점이다.



김강의 짧은 소설집 『곧, 그 밤이 또 온다』를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줄거리보다 순간이었다. 짧은 이야기들이 건드리는 감정은 꽤 오래 남는다. 밤길을 달리는 차창 밖으로 가로등이 휙휙 지나가듯, 한 장면이 스치고 지나간 뒤에도 한동안 눈앞에 여전히 아리는 잔상 같은 감정이

책을 덮은 후에도 오래 나를 따라다녔다.


사랑은 느닷없이 시작하고, 느닷없이 끝난다


이 소설집을 읽기 전에 작가를 전혀 몰랐다. 이 소설집을 읽고 나서 거꾸로 작가의 데뷔작 2017년 심훈 문학상 대상 수상작을 찾아봤다. 거꾸로 더듬어 읽기를 좋아한다. 바람직한 시작이다.

포라는 곳을 배경으로 스승과 제자가 화자가 되어 지민원이라는 의원을 운영한 교라는 이의 삶을 언급하는 방식이 독특했다. 《장미의 꽃을 기억하다》라는 제목이 잘 어울리는 소설이다. 마음 좋던 교가 변해버린 이유를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는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내게도 장미 시절 꽃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반대로 장미의 꽃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해 본다.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 제주를 찾은 현상과 수진,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

베트남에서 결혼 이민 온 여자, 제주를 떠나 육지로 간 사람, 다양한 사건이 얽히고설킨 제주 이야기... 재개발과 일용직 노동자의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담은 《닭의 장풀》

월지의 밤, 월지에 던져 넣은 사랑 《곧, 그 밤이 또 온다》


받지 못한 전화 한 통, 이미 끝나버린 사랑, 누군가가 떠난 자리, 그리고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순간들. 《이기전 1, 2》 사과데이로 이어지는 서사가 그 짧은 순간이 오래 남는다. 이 소설의 리뷰를 흔히 쓰듯이 줄거리로 쓰려고 하면 실패다. 작가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작은 식물에 대한 관심에서 소설은 시작되나 싶다가도 마침내 소행성 L2001에 이어지는 우주적인 관점까지~~

작가의 관심은 작은데서 큰 것으로 다양하게 옮겨간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랑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이 책에서 사랑은 드라마처럼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를 찾아보지만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순간.

그 사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먼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라고...


#곧그밤이또온다

#김강소설

#소소한설

#득수

#짧은소설의힘

#한국문학읽기

#문장기록

#책읽는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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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을유세계문학전집 109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진인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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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재독 리뷰입니다... 초독은 3년 전으로 기억됩니다



욕망을 처벌한 소설인가, 욕망을 기록한 소설인가

— 『마담 보바리』 재독하며












플로베르 / 을유문화사 (펴냄)









어떤 고전은 첫 독서보다 두 번째 독서에서 더 낯설어진다. 내게는 마담 보바리가 그렇다.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에마 보바리를 단편적으로만 이해했던 것 같다. 오래된 교과서적 독해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독서였다. 그러나 다시 읽으며 다른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흔히 이 소설을 불륜과 허영이 부른 비극으로 설명한다. 실제로 이 작품은 출간 당시 종교적 도덕과 미풍양속을 해쳤다는 이유로 법정에까지 서야 했다. 이 재판은 얼마나 우스운가!! 이 작품이 얼마나 당대의 도덕 감각을 불편하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플로베르는 에마의 행동을 설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동정으로 감싸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냉정한 거리에서 바라본다. 그 거리감이 이 소설을 독특하게 만든다.


책의 줄거리는 다들 아시다시피 에마는 평범한 시골 의사 샤를과 결혼한다. 그러나 결혼은 그녀가 꿈꾸던 삶의 입구가 아니라 오히려 출구(?)였다. 수도원에서 읽었던 낭만적인 소설들, 화려한 파리 사교계, 정열적인 사랑과 세련된 삶에 대한 환상은 그녀의 현실과 너무 멀었다. (당대 많은 여성들이 이런 감정을 느꼈지 않을까? )

문제는 에마의 욕망이 아니라 그 욕망을 담을 세계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19세기 프랑스 시골 사회에서 여성의 삶은 놀라울 만큼 단순했다. 결혼, 가정, 아이, 그리고 끝없는 일상의 반복. 지적인 야망도, 사회적 이동도, 자기실현도 거의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 시대에 에마가 느낀 권태는 단순한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에마는 너무 많은 상상력을 가진 여성이었고, 너무 작은 세계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 재독에서 플로베르의 여성관을 조금 다르게 읽게 되었다. 그는 에마를 타락한 여성으로 그리기보다, 욕망을 가진 인간이 현실과 충돌하는 과정을 실험하듯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 실험은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지만, 매우 정직하다.






플로베르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마담 보바리, 그것은 나다.

이런 고백은 놀랍고 놀랍다. 이런 솔직함 때문에 플로베르를 좋아한다. 반면 여성 작가가 이런 문장을 썼더라면 어땠을까? ( 감히 '여자 따위'가 '여자 주제'에 글을 쓸 수 없던 시대임을 감안하면 ) 아마 돌 때려 맞지 않았을까요....

이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플로베르는 에마의 허영과 욕망, 환상과 환멸을 자신 안에서도 발견했을 것이다. 즉 그는 여성을 비난하기 위해 이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 그 자체를 관찰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볼 수도 있다. 욕망을 관찰하기 위한 도구로써 여성 화자를 택한 점 놀랍다. 이 부분은 나의 독서력이 더 자라야 아마도? 분석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관점에서 이 소설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 비교된다. 두 작품 모두 불륜과 사회적 파멸을 겪는 여성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인물의 비극은 꽤 다르다. 안나 카레니나는 사랑 때문에 사회와 충돌한다. 그녀는 진짜 사랑을 선택하지만 사회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비극은 외부 세계와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반면 에마 보바리의 사랑은 어떤가?

이것은 사랑 자체보다 사랑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녀가 갈망한 것은 특정한 남자라기보다 낭만적인 삶의 이미지였다. 그래서 그녀의 비극은 사회만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환상 속에서도 자라난다.






이 점에서 에마는 또 다른 세계문학의 여주인공, 입센의 『인형의 집』의 노라와도 대비된다. 노라는 결국 집을 떠난다. 그녀는 자신이 인형처럼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문을 닫고 나간다. 하지만 에마는 떠나지 못한다. 떠날 세계를 상상했지만 실제로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그녀는 탈출 대신 환상을 선택하고, 그 환상은 결국 그녀를 집어삼킨다.


다시 읽은 『마담 보바리』는 불륜의 이야기라기보다 권태의 이야기였다. 에마의 삶에는 특별한 비극이 없다. 물론 비극의 정도에는 개인 차이가 있다. 그저 너무 평범한 결혼과 너무 조용한 시골 생활이 있을 뿐이다.







문제는 그녀가 이미 다른 삶을 꿈꾸어 보았다는 데 있다. 수도원에서 읽었던 낭만적인 이야기들, 화려한 무도회, 열정적인 사랑.... 그러나 현실은 그 모든 상상보다 훨씬 단조롭다.

플로베르는 바로 그 지점을 집요하게 관찰한다. 사람이 꿈꾸는 삶과 실제로 살아가는 삶 사이의 미묘한 간극. 에마는 그 간극을 견디지 못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의 욕망은 언제나 한 발짝 늦게 도착하고, 사랑은 언제나 기대보다 작다.





그래서 『마담 보바리』는 단순한 불륜 이야기나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욕망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해부한 소설에 가깝다. ( 책을 제대로 읽었나) 싶은 일부 인플루언서들 혹은 일부 책튜버들의 후킹 문장에 '불륜 소설' 어쩌고 쓰인 문구를 보면 클릭하지도 않을뿐더러 참으로 1차원적인 감각에 가깝다는 생각으로 혀를 끌끌 차게 된다. 책을 처음 접하는 학생들이 수행평가 등을 위해 이런 저급한 영상을 시청하고 또 이런 영상이나 글을 통해 책을 이해할까 봐 걱정이 앞선다.



플로베르는 에마를 처벌하지 않는다. 대신 그 간극이 얼마나 잔혹하게 인간을 소모시키는지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줄까.

19세기 여성의 삶은 분명 지금보다 훨씬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에마의 권태는 완전히 낯설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전히 수많은 이미지 속에서 살아간다. 소셜 미디어, 광고, 드라마, 로맨스. 삶은 언제나 더 화려하고 더 강렬하게 보인다.



그리고 현실은 우리 상상과 꽤 멀다.


어쩌면 에마 보바리는 19세기의 인물이 아니라 욕망과 이미지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끊임없이 더 강렬한 삶을 상상할수록 현실의 평범함은 더 견디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마담 보바리』 재독하며.... 이 소설은 한 여성의 파멸 이야기라기보다

욕망이 현실보다 커졌을 때 인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차갑고도 아름다운 기록.....이라고 쓸 수 있겠다.






내가 알기로 을유의 마담 보바리 표지는 가장 슬픈 뒷모습인데... 다시 봐도 슬프다

정확히 3년 후 재독해보겠다..... 그때까지 내가 존재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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