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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 6가지 우회적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 외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6년 4월
평점 :
21세기문화원
리뷰를 쓰기 앞서 벅찬 마음을 표현할 단어를 찾다가 내 부족한 언어의 한계가 부끄러울 뿐이다.
슬라보예 지젝 선생님 (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의 표현으로 나는 위대한 지성을 '선생님'이라 부른다)과 동시대를 살다니, 이건 내 삶의 큰 자랑이자 신의 축복이다.
“폭력은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시작된다"라는 문장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처럼 느껴졌다. 과연 우리는 폭력이 일어나는 곳을 모르는지, 지젝이 말하는 폭력의 구조란 무엇일까? 궁금한 마음으로 펼친 책이다. 무려 15년 만에 새 옷을 입고 태어난 지젝 사유의 결정판!!
전쟁과 혐오, 정치적 양극화, 온라인 집단 린치와 불안이 일상이 된 폭력의 시대에 지젝은 단순히 누가 폭력을 행사했는지 묻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폭력을 가능하게 만든 구조와 언어, 그리고 우리가 무심코 유지하는 시스템 자체를 의심한다. 부제 우회적 성찰이라는 표현처럼, 그는 폭력을 정면에서만 바라보지 않는다.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볼 때 오히려 더 본질적인 장면들이 드러나지 않는가?
원서로 말하면 무려 2008년에 쓴 이 책은 18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더 현재적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기술적으로 더 연결된 시대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혐오와 공포, 분노와 불안이 끝없이 증폭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지젝은 이미 오래전 이 시대의 균열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특히 목차를 따라가다 보면 폭력이라는 현상을 통해 현대 사회 전체를 해부하려는 지젝의 의도를 느낄 수 있다.
1부에서 지젝은 우리가 흔히 폭력이라고 부르는 사건들 뒤에 숨어 있는 구조를 이야기한다. 그는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을 구분한다. 누군가를 때리고 죽이는 장면은 비난받지만, 경쟁과 빈곤, 차별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시스템은 오히려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이 부분 읽다가 문득, 우리 사회의 끝없는 생존 경쟁이 떠올랐다. 청년 세대의 불안, 혐오 정치, 타인의 실패를 관망하는 문화는 어떤가? 이는 단순한 개인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폭력의 결과는 아닌지?
책 초반에 2006년 8월 6일 영국의 자위 마라톤이 언급된다. 찾아보니 이는 실제로 열린 퍼포먼스성 행사라고 한다. 참가자들이 공개적으로 자위를 하며 성에 대한 금기와 보수적 규범에 저항한다는 취지의 이벤트였다. 일부는 성 건강 캠페인이나 기부 행사 성격도 띠고 있었다고 한다.
지젝이 이 사례를 가져오는 이유는 뭘까? 단순히 선정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는 현대 사회가 겉으로는 점점 더 자유롭고 쾌락에 개방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쾌락조차 새로운 방식의 사회적 규율 안에서 이용된다고 본다. 자유로운 쾌락조차 이벤트화·상품화되면서 결국 시스템 안에 흡수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부분은 지젝의 핵심 개념인 ‘잉여 향유’와도 연결된다. 인간은 단순히 즐거움을 원하는 게 아니라, “즐겨야 한다"라는 압박 속에서 피로와 강박을 느낀다. SNS 시대를 떠올리면 사람들은 행복과 자유, 자기표현을 끊임없이 전시해야 하는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더 지치곤 한다.
지젝은 자위 마라톤 사례를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역설을 보여주는 상징처럼 사용한다. 가장 사적인 행위조차 공적 퍼포먼스와 소비의 대상으로 변하는 시대.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해방”이라고 느끼지만 동시에 또 다른 규율 안으로 들어간다는 지점을 포착한 것이다.
이 장면이 흥미로운 이유는, 지젝이 폭력을 꼭 피 흘리는 장면에서만 찾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욕망과 쾌락을 조직하는 방식 자체에도 보이지 않는 폭력이 숨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슬라보예 지젝을 사랑하고 그의 저작을 읽을 때마다 살아 있는 역동성을 느끼는 이유는 또 하나 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이론만 설파하는 철학자가 아니다. 조르주 바타유, 테오도어 아도르노, 알랭 바디우 같은 사상가들뿐 아니라 영화감독, 대중문화, 사건과 뉴스까지 끌어와 끊임없이 충돌시키고 뒤집는다. 때로는 날카롭게 비판하고, 때로는 그들의 사유 위에 자신의 철학을 덧입히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를 이끌어주는 느낌.
읽다가 이해가 어려운 문장을 만나면 그 부분을 캡처해 검색하고, 언급된 철학자와 영화, 사건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또 다른 사유의 세계가 열린다. 하나의 문장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또 다른 질문으로 끝없이 번져나가는 쾌감은 읽어본 분들만 아실 듯.
2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두려워하라! 」에서는 지젝 특유의 불안한 인간관이 드러난다. 그는 타인을 단순히 이해와 공감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서로에게 낯설고 위협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언어의 폭력”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말이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라 이미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설명한다. sns 시대를 살며 우리는 타인을 쉽게 조롱하고 낙인찍지 않는가? 누군가는 단지 말 몇 마디만으로도 사회적으로 삭제된다. 폭력은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언어 속에도 깊게 스며 있다는 사실... 섬뜩하다.
3부에서는 테러와 분노의 구조를 분석한다. 여기서 지젝은 단순히 “폭력은 나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 어떤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폭발 직전의 상태로 내몰리는지를 묻는다. 이 부분을 읽으며 한국 사회에서 반복되는 묻지 마 범죄나 극단적 분노 범죄가 떠올랐다. 물론 범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지젝은 사건 자체만 소비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그 배경의 구조를 보라고 요구하는데 정말 공감되는 말이다. 가해자의 악마성에 집착하는 언론의 보도를 보면 씁쓸하다. 한 사람을 악마화하면 우리는 안도할 수 있다. 문제는 저 사람 개인에게만 있었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개인을 악마화할수록, 경쟁과 고립, 혐오와 불안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사회 구조는 오히려 보이지 않게 된다. 지젝은 바로 그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폭력은 어느 날 갑자기 허공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래 외면해온 세계의 균열 속에서 서서히 자라난다는 사실!

4부와 5부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건 ‘관용’에 대한 비판이었다. 우리는 관용을 좋은 가치라고 믿지만, 지젝은 현대 사회의 관용 담론이 사실은 정치적 문제를 문화 차이 문제로 축소한다고 지적한다. “정치의 문화화”라는 표현은 지금 한국 사회에도 놀랍도록 잘 들어맞는다. 노동, 계급,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서로의 취향과 정체성만 이야기하는 사회. 갈등의 원인을 구조가 아니라 개인 감수성 문제로 돌리는 풍경은 너무 익숙하다.
이 대목에서 예전에 읽었던 《잉여 향유》 와 《지젝 비판적 독해》 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지젝은 늘 인간 욕망의 모순을 파헤친다. 사람들은 평등과 자유를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혐오와 배제를 통해 쾌감을 얻는 아이러니! 그는 불편한 욕망을 끝까지 직시하게 만든다.
마지막 장에서 지젝은 발터 벤야민을 끌어오며 기존 질서를 완전히 뒤흔드는 폭력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단순한 복수도 아니고 국가 권력의 폭력도 아니다. 오히려 기존 질서 자체를 중단시키는 어떤 순간에 가깝다. 이 부분은 선뜻 동의하기 어렵지만, 동시에 왜 사람들이 체제 전체를 향해 분노하는지를 이해하게 만든다.
혐오 정치, 알고리즘이 증폭시키는 분노, 온라인 린치, 불평등과 불안의 시대 속에서 지젝의 질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어쩌면 지금은 폭력이 너무 노골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너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더 위험한 시대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은 폭력에 관한 책이라기보다, 우리가 어떤 세계를 “정상”이라고 믿고 살아가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18년이 지난 지금 더 현재성을 지닌다.
폭력은 갑자기 터지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오래 당연하게 여긴 세계의 구조 속에서 천천히 자라난다는 것. 내게 지젝은 지금 시대를 읽는 가장 독보적인 렌즈이자 좌표다.
지젝은 묻는다.
정말 우리가 봐야 할 폭력은 저기 바깥에만 있는가. 아니면 이미 우리의 언어와 일상, 욕망 속에도 깊게 스며들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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