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5월



     생김새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을 읽으면서 나는 작가를 순박하고 소탈한 이미지의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단순한 상상이었다. 작가를 검색해보았다. 그의 여러 사진을 보면서 나는 내 상상이 정말 단순하다는 걸, 내가 형편없는 추리력을 갖고 있다는 걸 새삼 확인했다. 이기호 작가는 예쁘고 (?) 지적이면서도 섬세한 윤곽을 지닌 사람이었다. 물론 나는 사람을 추리하는 데에도 영 젬병이지만 실제 모습을 표현하는데도 잘 짚어내질 못하는 편이라 나와 다르게 평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한데도 내가 이기호 작가의 외모를 이야기하는 데는 그만큼 그 작가가 내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사람이 맘에 들면 괜히 그사람 얘기를 자꾸 하는 게 인지상정이니까 말이다. 나는 요즘 이 작가에게 존경심마저 느끼고 있다. 그의 작품들의 성격이나 지향이 정말 인간적이고 또 윤리적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은 작품마다 평범한 소시민들이 주인공이고 제목마저 그들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최미진은 어디로'
  화자인 작가가 언젠가 우연히 북 콘서트에서 만난 최미진에게 한 사인이 문제가 된다. 최미진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르는 옛 남자친구였던 남자가 그 책 때문에 괴롭다고 한다. 그가 작가에게 말한다. 따지는 것인지, 하소연하는 것인지 애매하게  딴지를 건다. 
  "아저씨는 우리 미진이도 잘 모르잖아요...... 모르면서 그냥 좋은 인연이라고 쓴 거잖아요...... 그건 그냥 쓴게 맞잖아요...... 씨발,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가 왜 책을 파는지...... 내가 당신이 쓴 글씨를 얼마나 오랫동안 바라봤는지......"
  내가 최미진일 수도 있고 최미진을 잊어야하는데 잊지 못하며 헤매는 예전의 남자친구일 수도 있고 화자인 작가처럼 아무것도 모르면서 형식적으로 말만 좋은 인사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얼마든지 있는 일이지만 때론 엄청난 고통이 그 가운데에 끼어들기도 한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피해갈 수 없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삶을 아무리 긍정적으로 산다해도 그 긍정성이 언제나 바른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면 겸손해야 할 일이고 함부로 쉽게 누군가를 판단할 일도 아니다. 

'나정만씨의 살짝 아래로 굽은 붐'
  "아니, 아니, 다른 게 아니고...... 거 용산에서 일어난 그거 말이에요...... 지금 형씨가 그걸 쓰겠다고 이러는 거 아니에요. ... 그거 때문에 우리가 그 난리를 쳤고...... 한데요...... 그걸 쓰려고 하는 사람이...... 하필 왜 나를 찾아왔어요?..... 거기 있었던 사람들을 만났어야지, 거기에 갔던 크레인 기사를 만났어야지, 왜 나를 찾아왔냐...... 나는 그게 진짜 궁금한 거예요..... 그게 정상 아니에요?" 
  여기서 말하는 용산에서 일어난 그거는 용산 참사를  말한다. 그 사건을 쓰고 싶은 화자(작가)는 그런데 현장에 있었던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 현장에 가려다 가지 못한 크레인 기사를  만나 같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듣고 있다. 둘이 곤드레가 되었을 때 기사가 위의 대사를 한다.  그리고 작가인 화자는 계속 울고 있다. 
"그러니까 형씨도 나랑 비슷한 거 아니냐구요.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고, 무서운 건 무서운 거 아니냐구요. 네? 내 말이 틀렸어요? 아, 나 참, 이사람..... 아, 씨발 울지 좀 말고!"
  왜 작가는 술에 취해 울고 있을까, 왜 그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가지 못한 것일까. 그는, 끔찍한 불행을, 분노할 수밖에 없는 사건을 직접 맞대면할 용기가 없어서라는 것을 나정만이라는 크레인 기사는 어느새 알게 된 것 같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불행을, 백성을 얕잡아보는 권력을 향한 분노를, 그대로 직설적으로 발설하기 어려운 사람은 작가만이 아니다. 대부분은 알고 있지만 결코 맞대면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간혹 차선을  행하면서 자기 위안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용산 참사의 이면에 이토록 무수한, 비겁하고 소심한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지. 작가는. 용산 참사를 쓰려하면서도 정작 그 한가운데, 끔찍한 부패와 태만과 고통이 얽혀있는 현장으로는 파고들지 못하는 작가를  비난하면서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이 소설집 전체가 그렇지만 이 단편 또한 읽어볼 만한 작품이다. 작품이라는 말은 아무 글에나 붙일 수 없다.  이 단편에는 그러나 꼭 붙여서 쓰고 싶은 말이다. 권순찬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온다. 

나를 혐오하게 될 박창수에게
  김숙희라는 여자의 진술서에 의해 이야기가 진행된다. 한 여자의 어쩔 수 없는 불행을 심도있게 그렸다. 누군가에게 계속 지원을 받는다면, 지원을 받는 그 사람은 행복할 수 있을까.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자존감과 자아를 잃어버릴 위험에 처한다는 것과 상통할 수 있다. 이럴 때 지원을 하는, 도움을 주는 사람은 정말 순수하게 상대를 위해서 지원을 하는 것일까. 혹시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최소한 나는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래전 김숙희는
  남편에게 오래전 지원을 받았고 그로 인해 결혼하게 된 김숙희는 고맙기만 한 남편을 죽이고 남편의 보험금을 잠시 불륜관계를 가졌던 다른 남자 정재민에게 전부 주었다. 김숙희는 남편에게서 무한정 받았던 사람이었고 그것은 김숙희에게 모종의 반발심을 가져왔다. 그녀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정재민과 불륜을 하면서 남편에게 그 사실을 말한다. 자신이 다른 남자를 만났고......   그러나 남편은 대답을 하지 않는다. 모른척, 상대를 해주지 않는다. 그녀는 몇 번인가 더 남편에게 자신은 불륜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남편은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남편은 그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다. 나는 김숙희를 백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죽이고 싶었으리라. 추궁하고 화를 내고 따지는 게 진짜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행동이 아닌가. 그는 아내를 어떻게 생각하길래 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은 것일까. 
  그녀는 남편의 보험금을 정재민에게 다 준다. 둘은 이미 헤어질 사이인데 김숙희는 그 돈을 전부 줘버린다. 그리고 그녀는 십 오년 뒤, 경찰서를 찾아가 자수한다. 자신이 남편을 죽였노라고..... 그녀의 진술로 정재민은 참고조사를 받지만 그는 그녀의 남편을 죽인 일이 없으므로 그냥 풀려나온다. 
 "그는 길을 건넌 후, 다시 한번 경찰청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저기 저 건물 어딘가에 그녀가 있다. 남루하고 살찐, 그리고 모든 것을 자백한...... 그는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조금 혐오스러웠다. 그 생각을 잊으려고, 그는 다가오는 택시를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김숙희는 남편에게 전적인 지원을 받았고 정재민에게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고 보험금 전부를 줘버렸다. 그녀는 남편을 증오한 것 같고 정재민을 향해서도 결국엔 아무 감정이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의 관계에서 애정은 없었다. 주고 받는 일이 오히려 애정과 무관할 수 있다는 게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 작품도 누구에게나 친절한 게 얼마나 나쁜 일이고 무책임한 일인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강민호는 정말 공평하게 정말 순수하게 한 일이지 무엇을 기대하고 계산적으로 행한 것은 아니었다. 한데도 상대에게는(윤희)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친절한 것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아무나 예수가 아니고 석가가 아니다. 

한정희와 나
  황순원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시작부터 아주 재미있다. 현재 상황을 말하기 전에 그렇게 될만한 과거의 이야기를 죽 나열해 보여준다. 그래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의 서론이 한참 길지만 이야기의 인과성을 저절로 느끼게 해준다. 화자의 무조건적인 베풂이 그럴만하다고 느끼게 된다. 하지만 선의로 한 선택이 꼭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그게 한 어린 여자아이인데도 그렇게 되고 만다. 한정희라는 어린 소녀에 엃힌, 결코 행복하지 않은 기억과 결말은 화자에게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그늘이 될 것이다. 
 
 우리는 아무 조건없이 누군가를 환대할 수 있을까. 상대가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라도 그를 환대할 수 있을까. 해설에서 김형중은 데리다의 환대를 이야기한다. 데리다의 환대는 무조건적인, 정언명령같은 환대를 말하지만 그것이 어려운 이유도 데리다는 말하고 있단다.
  "이제 다시 읽자닌 데리다는대문자 환대의 법(Low)에 대해서 강조한 만큼이나, 소문자 환대의 법들(low)에 대해서도 말한 적이 있었다. 그에 따르면 환대의 윤리는 정언명령이자 대문자 '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그 법이 명하는 바를 우리가 속한 가족과 시민사회와 국가의 '법들'속에서만 수행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항상 부족한 환대, 항상 제한적인 환대, 항상 특정 조건과 상황 속에서만 실행되는 환대...... 무조건적인 환대 같은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환대는 그래서 부끄러움을 수반한다. 부끄러움은 환대의 윤리에 대해 구성적이다. 환대하는 자는 항상 자신의 불철저한 환대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니 부끄러움 속에서 환대하라."

  혹시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마지막의 '이기호의 말(작가의 말)'을 읽어야 한다. 앞의 작품들도 작품이지만 작가의 길고 긴 말도 진짜 작품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작가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자신의 비윤리적인 행위를 고백하는 데, 그래서 이 작가가 존경스럽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이 될 원고의 교정지를 받고 서랍에서 꺼내지 않은 채 지내다가 우연히 학교 앞에서 사고를 내었는데, 그 사고의 과정과 결말을 작가는 지나치게 상세하게 고백한다. 마지막 문장이 이렇다.
  "진실이 눈앞에 도착했을 때, 자네는 얼마나 뻔하지 않게 행동할 수 있는가? 
  나는 아직 멀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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