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의 도시
폴 오스터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재기 넘치는 언어와 지성, 심오한 직관을 실험적이고 현란한 언어로 풀어내 언어의 마술사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탁월한 이야기꾼 폴오스터". 폴 오스터는 그만한 극찬을 받을 만큼 빼어난 상상력과 그 상상력이 현실적으로 느껴지도록 배경을 만들어낸다. 그 배경 위에서 인물들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모습 또한 아주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작가가 배경과 인물과 상황 하나하나를 리얼하게, 지나치다 싶게 디테일하게 묘사하기 때문에 독자가 다른 생각을 할 여백이 생기지 않을 정도다. 글을 읽다가 두어번은 숨이 막혔다. 행간이 너무 빽빽하고 질식할 것같은 구체적인 묘사와 설명이 머리를 아프게 했기 때문이었다. 

  좀 다른 얘기지만 같은 맥락인데, 어제 본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이 그랬다. 영화에 집중하고 후반부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두통이 느껴졌다. 머릿속이 아프고 열이 났다. 영화가 끝나고 화장실에 가서 찬물을 이마와 머리에 적시고 나서 몇 분 지나자 이런 증세는 말끔히 사라졌다.  내 머릿속 신경과 세포들이 왜 그토록 열을 받았던 걸까. 그만큼 단 1초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이 초집중하려니 힘들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머릿속이 과부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이 작품 '폐허의 도시'도 그랬다는 말을 나는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폐허의 도시'는 익명의 도시이다. 주인공 안나 블룸은 연락이 끊기고 행방이 묘연해진 오빠를 찾아 이 도시를 찾아간다. 그녀의 오빠는 취재차 이 도시로 떠났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한데 이 익명의 도시는 자신이 살던 문명의 도시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사라지고 소멸되고 있는 도시였다. 거리도 건물도 시스템도 완전히 붕괴된 채 하루가 다르게 파괴되면서 파멸을 향해서 전진하고 있었다.

  안나는 처음에 버려진 쓰레기들 중에서 쓸만한 물건을 찾는 넝마주이(물건 사냥꾼)로 간신히 연명하다 이사벨을 만나 그녀의 집에서 살게 된다. 이사벨의 남편 페르디난드는 집안에서 꼼짝도 안하면서 이사벨에게 생활을 의지하고 있는 남자였다. 어느날 안나는 그의 성적 폭행에 맞서 그의 목을 조르고 죽기 직전에 그를 놓아주지만 그녀가 나갔다 돌아와보니 페르디난드는 죽어있다. 두 여자는 시신을 끌고 옥상으로 올라가 밑으로 떨어뜨려서 일을 해결한다. 그런데 페르난드의 죽음 이후 이사벨은 서서히 죽어간다. 

  그녀의 죽음 후 안나는 다시 거리를 떠돌게 되고, 오빠를 찾기 위해 무작정 헤매다닌다.

  그러다 우연히 안나는 드디어 자신의 오빠를 이름으로만 알고 있는 다른 기자출신의 남자 사무엘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그와 지내면서 사랑에 빠지고 그가 쓰는 책을 완성하기 위해 그를 도와 애쓴다. 그러다 그녀는 신발 한 켤레를 사려다가 끔찍한 인간도살장으로 유인되고, 짐승처럼 도살되지 않기 위해 창밖으로 뛰어내린다. 그리고 그녀는 며칠 만에 깨어난다. 

  다행히 그녀가 깨어난 곳은 '워번 하우스'라는 자선공동체였고 그 곳에서 그녀는 몸을 추스른다. 자선을 행하는 이 하우스의 주인은 빅토리아 워번이었고 그녀는 이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아함과 재능을 지닌 여자였다. 빅토리아는 안나를 면접관으로 채용해서 머물 수 있게 해주고 안나는 바쁜 일상과 안전함 속에서 지낼 수 있게 된다. 그 사이 사무엘이 기거하던 도서관이 불타고 사무엘이 사라졌었는데 몇 달이 지난 후 그는 이 자선하우스에 면접을 보러 왔다가 안나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부족하고 소멸하기만 하는 도시에서의 삶이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드디어 워번 하우스에도 끝이 다가오고 그들은 돌보던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뒤 날이 풀리기를,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봄이 오면 간신히 쓰지 않고 버텨온 돈을 가지고 이 도시를 탈출할 계획이다.  가능할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들은 그런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처음 만났던 이사벨이 죽기 전에 몇 장 썼던 노트의 앞 부분을 찢어 간직하고 여백의 노트에 자신이 이 도시에 와서 겪은 일을 적기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났던 도시, 문명의 도시에서 친했던 옛 친구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노트 한 권을 다 채우고 갈수록 페이지가 부족해 작아지는 글씨로, 나중에는 과연 누가 제대로 읽을 수 있을까 싶게 작은 글씨로 이 폐허의 도시를 적어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부족한 것에 익숙해야 한다. 덜 원하고, 덜 만족하고, 덜 필요로 하면 부유해진다. 이도시가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이거다. 마음속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것이 이 도시다. 피할 도리가 없다. 아니, 피하든지 피하지 못하든지 둘 중의 하나다. 혹 지금은 피할 수 있다 해도 다음은 확신하지 못한다. 피하지 못하면, 그냥 그것으로 끝이다. (11쪽)


아마 이런 생각이었을 게다. 당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에 알려 주고 싶어 이 글을 쓴다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어서....(11쪽)


배고픔이 매일 찾아오는 저주인 양, 위장이 이 세상만큼이나 큰 구멍이 난 밑 빠진 독인 양, 사람들은 음식을 탐한다.(14)


통행세를 부과하는 장소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옛장소는 어느 날인가 사라지고 없고, 딴 곳에 그런 장애물이 새로 생긴다. 따라서 어느 길을 가야 하고 어느 길은 피해야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이 도시가 야금야금 사람들에게서 확실성을 빼앗아 가고 있는 것이다. 어디에도 정해진 길이 따로 없다. 필요한 것이 없어야 생존할 수 있는도시다. 사전 예고가 없어도 쉽게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하던 일을 금방 접을 줄도 알아야 하고, 거꾸로 안 하던 일도 얼른 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엔 모든 게 다 하나하나 문제가 되는 사례인 셈이다. 따라서 어느 경우든 그 징후를 읽어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눈이 흐려지면 코라도 예민해야 한다. (16)


희망이 사라지고, 희망의 가능성마저 포기해 버리고 나면 사람들은 그 빈 공간을 꿈으로, 어린아이의 생각과 같은 유치한 생각과 유치한 이야기로 채우고 싶어한다. 그래야 세상을 버텨낼 수 있기 때문이다(20)


환영의 언어, 죽음의 질주자, 최후의 질주, 최후의 점프, 안락사 클리닉( 신기한 여행, 귀향 항해, 쾌락의 순항), 암살 클럽, 변형 센터, 웃음 짓는 사람들, 기어다니는 사람들, 개 같은 사람들, 뱀 같은 사람들, 북 치는 사람들, 종말론자들, 자유 연상가들, 똥 치우는 사람들,쓰레기 수거인, 물건 사냥꾼, 부활 센터, 넝마주이-탐욕의 독수리


아무 의미도 없고 현실성도 없는 이야기면 된다. 대체로 사람들이 굳게 믿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옛날에 아무리 나쁜 것이었다 해도 그것이 오늘날의 그 어떤 것보다 낫다는 믿음이다. 이틀 전의 것이 어제의 것보다 더 좋다. 과거로 되돌아가면 갈수록 세상은 더 아름답고 살만한 세상이 된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보이는 것은 분명 그 전날보다 더 열악한 상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잠들기 전의 세상의 모습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지금'의 현재가 단순히 헛것에 불과하다는 미몽에 빠질 수 있다. 마음에 안고 사는 옛날의 기억만큼이나 현실성 없는 헛것, 그래서 현재의 아픔을 잊을 수가 있는 것이다. (22)


환상이 그들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나는 절대 환상을 그리지 않는다. 헛된 환상을 쫓는 사람들, 그들은 항상 잠을 자다 죽는다. 그전에, 한달이나 두 달 정도 그들의 얼굴엔 아릇한 웃음이 감돈다. 벌써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는듯, 제 모습이 아닌 딴 사람이 된 듯한 기묘한 기운이 그들 주위에 감돈다 싶으면 영락없다. 그 징후는 틀림없다. 뺨에 살짝 감도는 붉은 기운, 갑자기 커져버린 두 눈, 혼미한 발걸음,  하체에서 풍기는 역겨운 냄새 ㅡ 이런 것들이 죽음의 징후다. 하지만 행복한 죽음일지도 모른다.(23)


많은 관찰 끝에 내가 당신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곳의 하늘이 당신 머리 위의 하늘과 똑같은 하늘이라는 사실이다. 똑같은 구름, 똑같은 햇살, 똑같은 폭풍, 똑같은 고요, 똑같은 바람, 그런데도 뭔가 다르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바로 하늘 아래,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일 것이다.(36)


결국 나중에 내가 알게 된 것은 이곳 사람들이 어떤 일에 대해서는 전혀 물어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이곳에도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따지고 싶지 않은 주제가 있다는 사실이다.(38)


예를 들어, 소수이긴 하지만 나쁜 날씨는 나쁜 생각에서 연유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의견은 날씨 문제에 대해 다소 신비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다. 왜냐하면 이 의견의 바탕에는 사람의 생각을 물리적 세계의 사건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 따르면, 내가 어떤 암울하고 염세적인 생각을 하면 그것이 하늘에 구름을 생겨나게 한다는 것이다. (43)


각 구역마다 자체 발전소가 있는데, 그 발전소의 주 연료가 바로 쓰레기다. 자동차 연료, 난방연료 ㅡ 이 모든 연료가 바로 발전소에서 생산하는 메탄 가스에서 나오는 것이다. 당신에게는 좀 우습게 들릴지 모르나 이곳에서는심각한 문제다. 똥이 주요 사업 품목이다. 그래서 길에서 허락 없이 똥을 수거하는 사람은 발견 즉시 체포된다. 만일 두 번 적발되면 그때는 자동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제도가 이러니 어디 웃음이 나오겠는가.(52)


너무도 비참한 처지라 정신마저 마비된 것 같았다. 정지된 의식, 오로지 본능적이고 이기적인 몸부림만 남았다. 그러는 사이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다. 그 일들을 내가 어떻게 버텨냈는지 모르겠다. (69)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답게 살려는 노력을 포기했소. 내 삶의 목표는 주변 환경에서 나 자신을 지우는 것이었지. 더 이상 나를 괴롭히고 상처 주는 것이 없는, 그런 곳에서 살고 싶었소. 나는 하나하나 나와 관련된 것을 다 버리기 시작했다오. 내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 그냥 그렇게 없어지도록 내버려 두었소. 무관심, 그래요, 그런 무관심이었소. 초연한 무관심, 그 어떠한 공격과 괴로움으로부터도 내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무서운 무관심 말이오. 안나, 난 당신에게도 작별을 고했소, 책에게도 작별을 고하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도 다 지우고 말았소. 더 나아가 나 자신하고도 작별을 고하고 싶었소. ....... 내 육신만 없었다면, 속을 채우고 속을 비우라는 몸뚱어리의 요구만 없었다면 아마 나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을 거요.(244)


"내 육신만 없었다면, 속을 채우고 속을 비우라는 몸뚱어리의 요구만 없었다면 아마 나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을 거요."---내가 앞으로 꼭  쓰고 싶은 문장이었는데, 폴 오스터가 너무나 정확하고 멋지게 먼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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