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만든 사람
최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6월


   2022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최은미 작가의 '고별'이 실려 있었다. '고별'은 어떤 페미니즘을 주제로 내세운 이즈음의 작품보다 파격적이고 과격하다 싶게 여성의 주체성을 끝까지 파고든 작품이었다.  '고별'의 주인공은 여자도 남자들만큼 정치적일 수 있고 당위성이 있다면 그래야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 점에 매료되었고 최은미 작가의 입심에 반했었다. 

  그래서 구매한 이 단편집은 역시나 좋았지만 '고별'을 읽을 때의 통쾌한 맛에 미치지는 않았다. 하긴 모든 작품에 파격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독자의 횡포(?)인 것 같다. 좋은 작품을 쓴다는 것도 힘든 일인데 매 작품이 늘 정점을 찍는다면 작가는 숨이 막혀 질식하고 말 것이다. ㅎㅎ


차례

보내는 이

여기 우리 마주

눈으로 만든 사람

나와 내담자

운내

미산

내게 내가 나일 그때

11월행

점등



보내는 이

  "진아씨가 이전 글들을 지우지 않았는지 보기 위해 매일 지역 맘카페에 들어간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진아씨가 어떤 얘기를 해도 서운했고 어떤 얘기를 하지 않아도 서운했다. 겉으로는 티내지 않았다. 진아씨가 나한테 해주지 않은 얘기를 내가 알고 있다는 걸 진아씨는 전혀 몰랐다. 맘 카페에서 진아씨를 봤다고 터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

  "지나가다 눈인사만 주고받는 이웃으로 돌아가자는 건가. 아니면 아예 안 보겠다는 건가. 내 인간관계는 또 한번 이렇게 실패하는 건가. 다음 주면 아이들이 개학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진아씨네서 보내던 여름 저녁들이 말할 수 없이 그리워졌다. "

  "나는 진아라고도 지나라고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진아씨한테 편지를 보낼 수가 없었다. 그런 채로 이 사람은 대체 문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 아파트에서 살고 아이들이 친한 학교 친구이고 여름을 같이 보냈고 함께 밥을 먹은 사이, 그런데 원래 이름은 진아가 아닌 지나인 걸 sns계정을 본 뒤에야 알게 되었고, 진아는 내게 이별의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이사를 떠나갔다. 어쩌면 별일이 아닐 수도 있는데, 마음으로는 정말 하염없이 울고 싶어질 것 같다. 나는,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이었나.


여기 우리 마주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아무리 좋아도 함께 있을 수 없다. 확진자가 되면 누구나 격리되어야 하니까. 


눈으로 만든 사람

  가족 친지간의 관계에서 일방적인 피해자였지만 발설할 수 없었던 여자. 성적 폭력을 가했던 삼촌은 이제 늙었고 그의 젊고 착한 아들(내겐 사촌동생)은 암에 걸려 앞을 내다볼 수 없다. 자신의 아들이 그런 상황에 이르자 삼촌은 자책감에 여자에게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말한다. 눈이 오는 날, 여자의 딸과 삼촌의 아들은 눈사람을 만들어 베란다에 세워둔다. 그리고 눈사람은 어느덧 녹아 없어진다.  딸은 눈사람이 없어졌다고 운다. 여자가 말한다. 

"아영아, 민서 삼촌이랑 니가 만든 눈사람, 없어진 거 아니야. 그냥 모습이 변한 거야."

어느날 새벽 여자는 자신의 딸이 자꾸 자신에게 비는 꿈을 꾼다고 말하곤 남편에게 기대어 운다. 남편은그녀의 등을 닦아주고 그녀를 어루만지며 그녀의 몸으로 들어온다. 그날 피임을 하지 않았다는 걸 부부는 아침이 되어서야 알게 된다.

  삼촌의 이름 강중식, 그의 암에 걸린 소년같은 아들 강민서, 남편 백은호, 딸 백아영, 인물들이 호칭으로 쓰이지 않고 이름으로 쓰였다. '고별'에서도 남편을 이름으로 칭했던 것과 상통한다. 그런 점이 매력적이었고 이치로도 합당해보인다. 우리는 누구의 누구가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여자든, 아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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