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두

구효서 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9월


  누가 언제 '명두'에 대해 말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얼마전부터 '명두'라는 제목을 혼자서 외고 있었다.  알라딘에서는 품절이라서 중고서점에서 택배를 시켰다. 명작을 헐값에 샀다. 싸게 사서(요즘 중고알라딘이나 중고서점을 이용할 때가 몇 번인가 있었다. 하두 곤궁해서, 또 품절된 것들도 있어서) 좋기도 하지만 이 정도의 명작이 품절인 게 아쉽고 안타깝다. 
  한때 구효서 작가님 밑에서 짧은 기간 수업을 듣기도 했는데, 그때 나는 작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작가의 두세 작품을 읽었지만 큰 감흥을 받지 못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몇 년 뒤, 이 작품을 읽으니 내가 대작가를 너무 몰라뵈었구나, 싶다. 소설도 가요처럼 유행처럼, 발표되면서 지면을 타고 소수의 관심을 받고 상을 받고 얼마 뒤면 잊혀지고 품절되는 터라, 더는 만나기 쉽지 않은 옛 시절의 유행가처럼 사라지고 만다. 애석하고 안타깝다. 명두는 그런 작품이다. 

  "나는 죽었다. 죽은 몸으로 20년을 서 있다." 첫문장이 굴참나무의 서술로 시작된다. 죽은 나무는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 명두집을 이야기한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녀는 나에게 다녀갔다. 몸이 아플 때는 시곗바늘처럼이나 느린 걸음으로 다녀갔다. 가뭄 때는 작은 물동이를 들고 와 발치에 부었고, 명절 때나 굿풀이를 한 날에는 사과와 배를 들고 찾았다. ....그녀는 그냥 왔고, 왔다가 그냥 갔다. 그러기를 한평생, 마침내 그녀는 오늘 늙어 죽으려는 것이다."
  그녀는 왜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굴참나무를 찾아갔던 것일까. 그런데 그녀는 오늘 죽을 것이라고 나무는 말한다.  하지만 일단은 왜 그녀가 나무를 찾아다녔는지부터,
  "아무도 모르는 얘기다. 나와 함께 숲을 이루었던 나무들이라면 알까, 마을 사람 그 누구도 모르는 얘기다. 명두집은 내 밑동에다 세 아이를 묻었다. 모두 생후 열흘도 채 안 된 아이들이었다. 첫아이의 시신은 남쪽으로 난 뿌리 밑에 나머지 두 아이는 각각 북쪽과 동쪽 뿌리 아래 묻혔다.", "그녀는 달빛 없는 날을 헤아려 아침부터 아이를 엎어놓았다. 그러곤 칠흑 같은 산길을 헤집고 올라와 화가 난 사람처럼 식식거리며 내 발치의 흙을 파헤쳤다. 채 가시지 않은 아이의 체온이 뿌리에 닿을 때 나는 부르르 진저리를 친 적도 있었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엎어놓아 죽여놓고 한밤중에 나무 아래 흙을 파헤치는 여자, 이만하면 엽기 공포 스릴러 악녀의 얘기 같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미 열 살 안팎의 아이가 둘이나 있었다. 맏딸은 여덟 살 되던 해 이미, 5대조가 겨우 초시에 합격했었다는 산 너머 곽씨네 둘째 마나님의 애보기를 주어버리곤 그만이었다. 사내아이는 아비와 함께 일찌감치 품앗이를 다니거나 송기를 베거나 하릴없이 싸리나무 빗자루를 만들거나 했는데, 가난하기로 치자면 마을 사람 전부가 다 거기가 거기여서 그들에게 품을 나누어줄 여유조차 없었다. 굶는 사람 살리자고 그들 부자에게 일부러 없는 품을 만들어주었다가는 자기가 굶어야 할 판이었다. 자기 땅이라곤 한 뼘도 없을뿐더러, 소작 부칠 땅조차 구할 수 없는 툇골이었다. ....인근 마을의 사정이라봤자 나을 게 없었다. 허기가 지도록 걸어나가야 고작 지붕을 얹은 초가를 볼 수 있었다. ....배를 채우려는 사람들로 샘물가엔 사람이 끊이지 않았으나 그나마 체면 때문에 실컷 마시지도 못했다. 누군지도 모른 채, 입을 덜자고 무작정 어린 자식을 타지 사람의 손에 딸려 보내거나, 끼니 굶지 않는 집이라 하여 열다섯도 안 된 계집아이를 애 줄줄이 딸린 홀아비의 재취로 들여보냈다."
  이쯤 되면 명두만 그러하지 않았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살아있는 것 하나가 그렇게도 힘든 시절, 산골짝의 일이라는 게 알만해진다. 배를 곯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 시대에는 야만스런 세월이라고  할 것이다. 한데 나무가 말한다. "지금은 이런 일들을 고릿적 얘기로 취급하지만, 사실 먼 얘기도 남의 얘기도 아니었다."고.
  그런데 가난한 이들이, 자기 한 입도 모자란 판국에, 어째서 책임지지도 못할 생명을 자꾸 잉태하는가?  "가난과 허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죽음에 대한 중압감은 일상적인 거였고 때로는 시시각각 아주 예리한 칼날처럼 그들을 위협했다. 그럴 때마다 도망치듯, 혹은 죽음을 앞당기듯, 아니면 대책 없는 습관처럼 곁에 있는 사람을 숨가쁘게 얼싸안았고, 당연한 결과로 불행이 예고된 새 생명이 탄생했다. 죽음은 끝없이 생명을 만들고, 삶은 끝없이 죽음을 낳았다."
  그리고 가난은 어이없는 죽음을 짓어낸다.  명두의 남편이 더덕을 캐려다 여뀌가 무성한 밭에서 떼뱀에게 물려 죽는 것이다. "죽은 그의 시체는 참혹했다. 뱀들은 그의 두 눈을 파고들었으며 입과 귀와 콧구멍과 똥구멍에도 뱀의 몸통이 득시글거리며 박혀 있었다."
  그리고 이 고달픈 삶에 전쟁마저 찾아온다. 그리고 전쟁의 끝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사내들이 처음 기운을 내어 한 짓이란 홀로 남은 명두집을 겁간하는 일이었다. 서리꾼처럼 은밀히 찾아와 타고 누르거나, 헛간 검불 속으로 끌고 가거나, 나물 뜯는 거친 풀밭에 엎어뜨리거나, 산길에 숨어 있다가 가고리 같은 손으로 그녀를 나꿔챘다. 겉으론 입을 모아 불쌍하다며 혀를 차던 자들이 혼자가 되거나 밤이 되면 눈 귀 없고 양심도 없는 귀두 몽둥이로 돌변하여 그녀를 을러댔다. 명두집이 세 번째로 묻은 시신은 그렇게 생긴 아이였고, 그 마지막 아이를 묻은 뒤로 그녀는 갑자기 달라졌다." 
  갑자기 달라진 명두는 이전의 명두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겁간했던 남자에게 도움을 청해 명두집 헛간에서 죽어간 공산 유격대장을 끌어다 성황당 아래 묻어준다. "행동은 굼뜨고 나른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커다란 남자 시체를 옮기는 그녀에게서는 놀라운 힘이 느껴졌다. 그것은 힘이라기보단 일종의 기세 같은 것이었다. 몸이 아니라 눈빛과 서슬에서 뿜어져 나왔다." 죽은 남자를 언덕 아래, 성황당 나무 밑에 묻기 위해 그녀가 그 밤에 보인 결기는 그녀가 변하는 시작점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변한 명두는 산골짝에 찾아든 개발의 바람에 저항하던 철거 반대 탑에 갇힌 청년을 구해내고, 동네 아픈 사람들에게 "화엄성중 탱화 속 인물처럼 근엄한 낯빛으로 사람에게 붙은 귀신을 쫓아내어 병을 다스렸다. 나무 방망이로 다듬잇돌을 두드리고 복화술로 어린 영혼의 음성을 흉내냈다."
  그녀는 병자들이 찾아오면 "잊은 게 있지? 라고" 묻는다.  아픈 이들은 "죽거나 죽인 아이를 떠올렸다. 죽거나 죽인 부모를 떠올렸다." 명두집은 "그 면상에다 대고" "냅다 소리를 내질렀다.
  불망!
  그 소리는 경천동지할 만큼 커서 대부분의 아낙들은 뒤로 나가자빠졌다."
  명두집은 그들이 버리거나 죽게 놔둔 자식들의 무엇이라도 가져오라고 시킨다. "명두집의 분부대로 아낙들은 배냇저고리의 한 귀퉁이를 오리거나 마른 태반 안쪽을 떼어다 그녀에게 바쳤다. 그도 저도 없는 사람들은 아이가 벴던 베개의 일부를, 아니면 아이가 묻힌 땅의 흙 한 자밤이라도 갖다 바쳤다."
  그리고 오늘 죽음에 이른 그녀, "몇 명의 아낙들이 명두집으로 황급히 달려간 사실을 골목의 가로등만 알 뿐이다."  명두집은 "눈길을 돌려 천장 아래쪽에 붙어 있는 작은 시렁을 오래도록 응시한다. 시렁에 얹혀 있던 백자 항아리를 아들이 조심스레 끌어내린다. 백자 항아리가 명두집 눈길 위에 한동안 머물 수 있도록 아들이 동작을 멈춘다." "어느새 어린 영혼의 것으로 변한 명두집의 목소리가 벌어진 입술 틈새로 힘없이 새어나"온다. "이제들.... 알아서..... 가져가."
  백자 항아리 안에는" 배냇저고리 오린 것, 마른 태반 조각, 베갯잇 조각, 약봉지에 싼 흙, 가느다란 머리카락 몇 올, 플라스틱 딸랑이, 노인의 비녀, 손톱처럼 보이는 것들, 때 묻은 동정 조각, 장갑, 안경집, 반지와 목걸이, 라이터, 그리고 출력한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초음파 태아 사진도 세 장이나 나온다. 그동안 명두집이 삼킨 줄 알았던 망자의 유류품들이다."
  그리고 그 항아리 안에, "아이의 손가락처럼 생긴 나뭇가지"들이 세 개나 있다. "창칼로 껍질을  벗기고 사포로 문질러 표면이 끼끗하다. 하나의 줄기에 세 개의 작은 가지가 뻗은 꼴이다. ...아이를 하나씩 묻을 때마다 명두집은 내게서 가지를 꺾어갔다. 껍질을 벗겨 다듬었다. 이미 50년 전의 것들이지만 지금 속속들이 검게 죽어잇는 내 가지들에 비하면 살아 있는 것만큼이나 생생하다. 그것이 그녀의 명두였다."
  그녀가 명두집으로 불린 사정이면서 사람들이 자세히는 알지 못했던 사정이다.
  불망! 잊으면 안 된다고, 명두는 아낙들에게 호령했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그토록 50년이나 굴참나무를 매일 찾아다녔다. 죽은 아이들, 죽은 부모들이 생전에 닿았던 그 무엇이라도 갖다주면 자신이 백자 항아리에 대신이라도 간직하려 했던 그녀는, 명두집이었다. 
  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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