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6회 이상 문학상 대상작 <옥수수와 나>와 김영하 자신이 뽑은 자선 대표작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읽었다. 아주 오래전도 오래전, 김영하를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 몹시 실망했던 터라(필요 이상으로 성적인 이야기에 질려버렸었다) 다시는 김영하를 읽을 줄 몰랐는데 우연히 이 책이 다른 사람을 통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이 작가를 티브이나 지면으로 볼 때는 꽤 좋아하는 편이다. 나이에 비해 젊은 느낌이 들어 좋고 입담이 좋은데다 유머러스하고 댄디하기까지 해서 안 좋아할 수가 없다. 한데 그의 글은(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자유롭고 개방적이어서 잘 읽히기는 하지만 무언가 중요한 부분을 건너띈 듯한 느낌이 든다. 건너띈다는 표현이 별로라면, 나로선 무언가 더 깊은 곳의 그 무엇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의 문제라기보다 글을 읽는 사람의 문제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니까 내가 이런 작가의 책을 너무 읽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와 작가의 성향이 아주 달라서일 수도 있겠다. 한데도 나는 한 사람으로서의 김영하를 싫어할 수가 없고 많은 사람이 이 작가를 사랑하고 있는 걸 보면 복이 많은 작가인 것 같다. 


  옥수수와 나

  작품속의 화자는 작가이다. 그는 자신이 옥수수라고 느낀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출판사 사장과 그의 아내인 영선을 닭이라고 생각한다. 서두를 슬라보에 지젝이 인용하는 동유럽의 농담으로 시작하고(농담의 내용이 아주 재미있다) 결말도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라는 문장을 소리내어 읽는 것으로 마친다. 

  옥수수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흔한, 영양가는 없지만 에너지원이 되는 식품이다. 그것은 언제나 먹혀져서 사라지고 또 수많은 다른 옥수수들이 끊임없이 소비되는, 싸구려 곡물일 뿐이다. 결국 작가도 이 세계의 자본 시장에서 소비되는 존재이고 소비로써의 가치가 없다면 폐기될 뿐이라는, 알레고리를 담고 있는 것 같다. 

 과하다 싶게 농담과 위트 넘치는 대화가 속출하고 그러다보니 의미없이 장면이 늘어져있다. 그런데 읽는 재미는 아주 쏠쏠하다. 자본 앞에서는 소설가와 그의 작품조차 하나의 소비재이며 상품이라는 인식이 마음에 와 닿는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

  "어리석은 의문은 또 있다. 창공의 새에게도 그림자가 있을까? 저렇게 작고 가벼운 것에게 어찌 그림자처럼 거추장스런 것이 달려 있으랴 싶은 것이다. 그러나 새에게도 분명 그림자가 있다. 날아가는 새 떼를 보고 있노라면 가끔, 아주 가끔, 뭔가 검고 어두운 것이 휙 지나간다. 너무 찰나여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으면 잘 모르기 십상이다. 달이 해를 가리는 걸 일식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새가 해를 가리는 이런 현상은 무어라 할까. 물론 나는 모른다. 그렇지만 가끔 새 그림자가 해를 가리는 일도 있다는 걸 말해두고 싶은 것이다."

  첫 페이지 도입부에 이런 문단이 나오는데 참 좋다. 

  맨 마지막 결말은 또 이렇다. 

  "그렇게 누군가와 옥닥복닥 부대끼며 지내다 보면, 어쩌면 내게도 그림자가 생길지 모른다. 그렇게 멋진 그림자가 생기면............ 그 생각을 하는 사이 거대한 새 그림자가 내 머리 위를 지나간다. 하늘을 본다. 이상하다. 달도 없는 밤에 웬 새 그림자. 몸이 다시 움츠러든다. 덕분에 쓸데없는 상상은 끝. 나는 옷만 벗어던지고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운다"

  '그리고 운다', 정말 쉽고 단순한 문장인데 코끝이 찡했다. 

  '새에게도 그림자가 있다'. 이 단편에서는 이 문장만으로 모든 게 통한다. 

  그러나 제목은 전체적인 이야기와 어울리지 않거니와 작품을 오히려 하향하게 만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