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무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롤리타>를 읽었다. 작년부터 책상 아래에 나뒹굴던 책이 드디어 독서대 위에서 페이지가 넘어갔고, 이제 책장을 덮는다. 환희와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첫 문장 때문에 (롤리타, 내 삶의 빛이여,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리,타.) 그 전부를 보고 싶었고 그 어떤 책보다 금기된 욕망과 에로틱한 장면들을 상상했었다. 나야말로 나보코프가 제일 치를 떨며 독설하고 싶은 독자가 아닐까.
실제로 나보코프는1956년에 쓴 '작가의 말'에서 (504쪽) "최초의 독자들은 더러 이 책을 음란 서적으로 오인하기도 했"다며, "그러나 예상이 빗나가자 실망하고 따분해하다가 결국 독서를 중단하고 말았다" 며 저급한 독자와 매너리즘에 파진 출판사를 향해 날을 세운다.
그렇다 해도 나는 그렇게까지 저급한 독자는 아니다. 책을 많이 읽지 못해 상상력이 좁은 불우한 독자일 뿐. 오히려 이 <롤리타>를 통해 나는 나보코프의 예술적인 심미안을, 광범한 모든 형식과 담론을 문학에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험버트는 관습적인 사회에서는 비정상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독특하면서도 예술적인 내면에서는 진실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는 고군분투해야 하고 폭력적이고 비굴해야하며 남들 앞에서는 늘 연기를 해야한다.
하긴 보통의 사랑도 그것을 얻기까지는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그리고 사랑이란 게 남들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형식을 갖추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관습적이고 이성적인 사회에서 한쌍의 남녀는 서로 미혼이어야하고 나이가 엇비슷하게 맞아야하며 이상한 집단이나 결손가정에서 자라지 않았어야 한다. 하나 사랑이란 건 그렇게 맞출 수 있는 게 아니다. 어쩌다 보니 사랑에 빠진 남녀는 그들이 사랑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선택당하고 만 것이다(이 부분은 이 책 어딘가에 분명히 비슷한 문장으로 씌여있다).
험버트로서도 어쩔 수 없이(?) 생겨난 성적 취향인 것이다. 어린 시절 사랑했던 애너벨리에 대한 못이룬 사랑이 평생 그를 유아적 시각장애인으로 만든 것이라면... 나보코프는 이렇게 험버트를 완전히 사랑에 결핍되어 장애를 입게 된, 유아적인 중년 남자로 그리면서 그의 내면과 그의 범죄적인 행위를 섬세하게, 장황하게 보여준다. 어느 순간 독자는 험버트라는 꼴불견인 한 남자의 내면과 작가의 종횡무진한 박식함과 예술적 소양의 세계로 빠져드는데, 그 세계는 너무도 넓고 다채로운 빛이 가득한 세상이다. 거기에 유머와 위트가 구석구석 상황마다 인물마다 더해져 책읽는 재미가 더해진다. 나는 작가가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이런저런 한심스런 성격을 갈아입히는 데 우습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했다. 발레리아, 그의 새 남편, 샬럿, 진 팔로, 가스통이던가 보스통이던가, 퀼티, 여학교의 교장 등등.
그러나, 그래도 <롤리타>는 꺼려지는, 불쾌한 소설이다. 소아성애자의 극단적인 에로티시즘에의 추구와 범죄에 가까운 어린 소녀와 단 둘만의 여정. 나보코프는 기예적으로, 환상적으로, 마법적으로 써나가지만 험버트라는 인물은 파렴치한 범죄자일 뿐이라는 인식이 자꾸만 들이닥친다.
이쯤해서 해설자의 비평을 붙여보고 싶다. 해설자(로쟈 이현우)는 "서술자-험버트의 역할은 무엇인가. "님펫을 향한 사랑이라는 기이하고 무시무시하고 미칠 듯한 세계 속에서 지옥 같은 부분과 천국 같은 부분을 가려"내는 것이다. 그는 "더러운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이 만나는 지점", 곧 그 경계선을 확인하고 싶어하지만 성공하진 못했다고 자평한다. 그가 실패한 지점이 한편으론 작가 나보코프가 성공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것이 곧 서술자-험버트와 같은 목소리를 내면서도 작가 나보코프가 그와는 다른 결과를 얻어내는 방식이다. 험버트의 수기<롤리타: 어느 백인 홀아비의 고백>과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같으면서도 다른 이유다. 험버트의 수기에서 서술자-험버트는 '저자'이지만 나보코프의 <롤리타>에서 서술자-험버트는 저자라는 배역을 맡은 것에 불과하다. 자신이 만든 세계의 주인이자 신이 되려 하지만 험버트는 그가 대상화하고 소유한 롤리타의 욕망조차도 간파하지 못하고 그녀를 잃는다. 그는 롤리타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방해하는 사람으로 또다른 작가 퀼티를 지목하고 그에게 복수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헛다리짚기다. 퀼티Quilty는 이름부터가 험버트의 죄의식Guilty을 반영하는 인물이므로 둘은 마치 거울상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둘이 맞대결하는 장면은 나보코프식 유희와 조롱의 하이라이트다."(532~533쪽) 단순한 독자가 간파하지 못한 작가의 의도가 설명되어진다.
또 "주인공-험버트의 고백이 금지된 욕망을 다룬 에로틱erotic한 이야기라면 서술자-험버트는 이를 시적인poetic 것으로 변모시킨다. 한 비평가의 말을 빌리면 <롤리타>는 포에로틱한poerotic 소설, 곧 시적 에로티시즘의 소설이다."(532쪽 맨 위) 라고 정의를 내려준다.
이로써 나는 주인공- 서술자- 작가라는, 삼위일체같으면서도 조금씩 다른 위상을 정립시킬 수 있게 된다. 주인공 험버트는 내면에 불이 붙은, 금지된 욕망 때문에 결핍과 과잉이 분출되는 인물이며 서술자 험버트는 지난 시간을 회상하면서 시적 서술을 하게 되는 인물을 맡는다. 그 위에 작가는 그들이 자신들의 배역을 잘 소화하고 그들이 작품의 층을 만들게 한다. 그리고 여기에 한 사람 더 추가하자면 험버트의 수기를 편집한 존 레이 주니어 박사 또한 미미하지만 작가의 배역에 필요한 인물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로쟈 이현우 선생님은 정말 뛰어난 비평가다. 이 해설을 읽지 않았다면, 특히 존 레이 주니어 박사를 등장시킨 작가의 의도를 몰랐으리라. "<롤리타>의 저자가 존 레이란 가상의 인물을 편집자로 등장시킨 것은 그러한 트릭이자 문학적 유희의 일종이다. ........ 그는 편집자를 자신의 대역이 아닌 허수아비로 데려다놓고 정신병리학의 전문가연하는 그의 말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런 유희와 조롱을 그와 함께 즐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지한 작가의 말로 오해했다. <롤리타>가 정신병리학 분야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식의 농담은 물론, "롤리타는 우리모두에게-부모든, 사회사업가든, 교육자든-경각심과 통찰력을 심어줌으로써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고 더 나은 세대를 길러내는 일에 매진하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와 같은 우스갯소리마저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이다."(528~529쪽) 진지함이 간혹 우매함과 상통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지금 나는 들소와 천사를,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물감의 비밀을, 예언적인 소네트를,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떠올린다. 너와 내가 함께 불멸을 누리는 길은 이것뿐이구나, 나의 롤리타."
소설에서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의 중요성을, 외우고 싶은 시적 문장의 중요성을 <롤리타>가 다 보여준다. 하지만 첫, 마지막만이 아닌, <롤리타>의 모든 장면들은 너무나 한심스러웠고 코믹스러웠으며 기막혔고 잔혹했다. 그래도 가장 잔혹한 건, 롤리타는 알고 보면 그저 한 소녀였을 뿐이라는 것, 스물도 안 된 그녀가 아이를 낳다 죽었다는 것, 진정한 사랑을 그녀는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토록 험버트가 그녀가 오래 살기를 바랐지만 아이를 낳다 죽었다는 서사 자체로써 작가는 험버트와의 대척점에 그녀를 세워둔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