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작가가 2016년 여름부터 2020년 봄까지 갈무리한 여덟편의 이야기.

  목록
  시간의 궤적
  여름의 빌라
  고요한 사건
  폭설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흑설탕 캔디
  아주 잠깐 동안에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백수린에게 매혹당한 이야기들이었다. 어느 한 편도 허투루 읽고 싶지 않은 완결성과 서사를 지녔다. 만남과 헤어짐, 그 후에 남겨진 아쉬움과 미안함, 그리움들. 
  우선 이 단편들에는 어린 시절, 젊은 날 이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고 그 시절을 반추해보는, 중년에 들어서기 전의 여성 화자들이 주인공인 작품들이 많다. 첫 단편 <시간의 궤적>은 프랑스에서 만난 '언니'와의 추억을 회상하고, <여름의 빌라>도 파리의 서점에서 만났던 한스 부부와의 만남과 헤어짐을 그린다. <고요한 사건>은 중고등학교 시절을 뒤돌아보며 자신이 처음 계층에 대해 어렴풋이 느꼈던 곤혹감을, 그러나 당시에는 잘 몰랐기 때문에 그저 지나쳤던 감정을 끄집어낸다. 
  이에 비하면 <폭설>은 혈육(엄마)이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었던, 폭설 속에 엄마와 단 둘이 고립된 상황에서 오래 묵은 감정을 터트릴 수 있었던, 앞의 작품들과는 해결 방식이 완전히 다른 작품이다. 폭설 속에서, 단 둘만이 오랜 시간 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야 참고 참았던 그리움과 원망을 뱉어내는 서사는 리얼하다. 뜻하지 않은 낯선 상황, 얼결에 마주치게 된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는 자신의 밑바닥까지 드러낼 수 없는 법이다. 늘 흘려보내는 안전하고 변함없는 일상에서는 자신의 깊은 곳을 꺼내어 발설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외로움은 일상의 뒷면에 만연하고 출구없는 감옥에 갇혀있는 것이 아닐까. 
  순서로 본다면 앞의 네 작품과 달리 이 소설집의 뒤에 실린,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흑설탕 캔디>,<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은 앞의 네 작품과 달리 두리뭉실하게 표현해서 성과 사랑에 방점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우선,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는 어린 두 자녀를 키우는 젊은 엄마인 주인공이 자신의 진짜 욕망에 솔직해지는 지점을 넘어서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의 자아찾기로도 볼 수 있었다. 또 사회적으로는 발화할 수 없는, 내밀한 욕망을 향해 울타리를 넘는 여성을 그리고 있어 독자에게는 불안감과 더불어 그 반대편의 공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물론 이럴 때 이런 공감은 억압 속에서 살아본 여자들이 느끼는 '공감'일지도 모르겠다.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은 사춘기 시절 꿈틀대는 본능의 속삭임을 다루고 있다. 분명 그 시절에는 금기인 어휘고 금기시되는 상상... 그러나 이제 어른이 된 그녀에게 지나간 그 날들은 그저 아카시아 향과 함께 기억되는 추억일 뿐이다. 남들에게 일일이 설명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사춘기 시절, 돌아보면 부끄럽기도 하고 어이없어 웃음이 터지는 아슴프레하고 풋풋하면서도 달큰한 그 무엇.
  이 소설집에서 내가 두 번 읽은 작품은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과 <흑설탕 캔디>였다. 특히 <흑설탕 캔디>는 필사를 했고(그래봐야 워드로. A4 12장 반) 플롯을 점검해봤고 밑줄을 다시 그었다. 정말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였다. 보통 소설이라는 게 사랑과 이별, 계층간의 위화감, 빈곤과 소외 등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사랑 이야기가 많을 것 같지만 현대 소설은 진지한 주제를 더 우위에 두기 때문인지 순수한 사랑 얘기는 드문 것 같다. 특히 단편에서는. 한데 <흑설탕 캔디>는 한국 할머니와 프랑스 할아버지의, 언어가 통하지 않는 두 노인의 이야기가 이채로우면서도 특별히 아름답다. 두 사람은 피아노를 통해 서서히 서로를 의식하게 되고 만나게 된다. 한불사전을 통해 겨우 명사와 현재형 동사로써만 의사소통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는 품격있고 진취적이면서 고요한 사람이다. 프랑스 할아버지(브뤼니에 씨)는 여유있으면서 낭만적이고 따듯한 사람이다. 그렇게 매력적이고 순수한(?) 두 사람은 시나브로 젖어들어간다, 사랑에. 노인들의 사랑이야기라는 것에 더 호감이 간다. 근래에 본 단편 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장 섬세한 작품이었다. 러브스토리의 명작으로 꼽고 싶다. 
  그리고 주인공이 남자인 유일한 작품은 <아주 잠깐 동안에>인데, 지나치게 선량하고 건실한 남자인 화자는 우연히 언덕을 오르는 산동네의 노인에게 친절을 베풀었다가 그 일의 뜻하지 않은 결과로 인해 평생 죄책감을 지고 살아가게 된다. 내겐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친절을 베풀다가 그 일의 수고스러움 때문에 후회할 때가 있지 않은가.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철저하게 진심이어야 하고 그 일에 따르는 어려움도 책임질 줄 아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나는 우리집  대문 위의 고양이들이나 감자를 돌볼 때 뼈저리게 느낀다. 나 아닌 다른 존재에게 봉사(?)한다는 것은 시작은 쉽지만 갈수록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럴 때 후회한다면 그건 시작하지 못한 것만 못할 수 있다. 강아지와 고양이, 자식과 남편, 늙으신 어머니. 그들은 내게 소중하지만 너무나 짐스러운 존재들이다. ㅠㅠ 
 이 소설집을 다 읽고 단 하나의 흠을 잡자면 주인공들 대부분이 너무나 모범적이라는 것, 판에 박은 듯한 건실성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작품마다 주인공들이 그 서사에 어울리게 아주 달랐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해도 결론은 백수린 작가를 알게 되어 기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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