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는 아니지만, 구병모
자음과 모음(이룸), 2011년 7월
2009년에 '위저드 베이커리'로 등단한 작가의 첫 소설집. 얼마전 '단 하나의 문장'(소설집)을 읽으며 작가의 타고난 입담과 세세한 묘사력, 특유의 시니컬함을 맛보았지만 이 소설집은 그때의 느낌보다 헐씬 더 강렬하고 으스스하다.
그래서인지 대개의 소설집을 읽고 나면 기억에 남는 제목이 서너 개밖에 되지 않지만 이 '고의는 아니지만'은 7개 단편 전부가 뇌리에 남는다. 그리고 이 소설집의 특징은 각각의 이야기들이 뚜렷하게 독립된 하나의 세계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 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부조리한 세계를 하나의 참혹한 사건으로 상징화하고 있기에 주제적으로는 서로 자매처럼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는 점이다.
마치......같은 이야기
언어에서의 비유법을 금지한 한 도시, 문화와 예술뿐 아니라 여타의 사회적 기능까지 마비되며 퇴보적인 상황에 이른다. 어느날 한 시인이 이 도시의 경계지역에 위치한 술집에 나타나 술집 주인에게 그간의 사정을 듣는다. 시인은 주인의 만류를 뒤로 하고 시장을 만나러 가는데, 사실 시장은 미무르라는 괴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비밀(괴물인 미무르라는)을 지키고 시민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 비유를 금지시킨 터였다. 시인은 마침 시민의 날을 맞아 모든 공공 기관들이 문을 열어둔 것을 기회로 시장실에 들어가 죽어가는 괴물, 시장을 만나게 된다....
타자의 탄생
이 작품은 어느 순간 카프카를 떠올리게 한다. 화자이면서 주인공인 '나'에게 벌어진 끔찍한 상황과 나를 둘러싼 인간 군상들의 다양하면서도 일률적인 행태들이 변신의 '잠자르'와 비슷해 보여서이다.
어느날 갑자기 정신이 들어보니 인도 한가운데에 무처럼 하반신이 땅속에 박혀있는 자신. 어젯밤 기억은 '밤의 허리를 면도칼로 베어낸 듯 그 시간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후로 그는 그 자리에서 구조를 기다리지만 전문가도 이해할 수 없고 본 적 없는 금속붙이와 흙이 얽혀 그의 몸은 그 곳에서 떼어낼 수 없는 상황이다.
의가 좋지 않았던 아내는 도시락을 한 번 싸다주고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고 이혼서류를 남긴 채 떠나간다. 시일이 지날수록 그는 점점 문명화된 인간에서 동물을 거쳐 버섯처럼 그리고 곰팡이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한다.... 그리고 마지막, 그는 어쩌다 현장에 나타난 리포터에게 구멍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구멍은 어디에나 있다고.
이 작품은 두 번 읽었다. 의미나 주제적으로도 훌륭하지만 강렬하면서도 세밀한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이 작품뿐 아니라 소설집에 실린 나머지 작품들도 비현실적인, 판타지에 가까운 사건을 시발점으로 하지만 그 후의 상황은 너무나 리얼하고 구체적이면서 현실적이다.
황광수 문평가는 이렇게 추천글에 썼다. "이 작품들의 괴기스러운 광경들은 비현실적이라는 점에서 '환상'으로 불릴 수도 있지만, 그것은 현실에서 한 발도 빼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직면한 고통에서 발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허황한 상상물이 아니다."라고
고의는 아니지만
유치원 교사 F.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사명감과 성실함으로 일관하던 F는 어느 날 극도에 다다른 스트레스로 인해 준비물을 챙겨오지 못한 아이들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만다. 그리고 그날 밤! 고의는 아니지만 잘못 뱉어진 말로 인해 그녀는 비극적인 일을 당하고 만다.
조장기
등록금을 벌기 위해 휴학을 하고 보육도우미 일을 하게 된 나는 사람을 공격해 온 몸을 뜯어먹는 새떼들을 보게 된다. 원인 불명의 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하면서 나는 새들의 공격이 절망의 에너지와 관련이 있다는 풍설에 시달리게 된다. 아무리 긍정하려 해도 '나'가 하는 보육도우미의 일은 가사도우미를 넘어 간병인의 역할을 떠안게 되자 나는 새떼들을 의식하게 되고....
어떤 자장가
석사논문 대필로 생계를 이어가는 여자는(남편도 13시간 노동을 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끝내지 못한 박사논문 때문에 더 우울하고 피곤하다. 한데 아이는 밤새 자지 않고 엄마의 작업을 방해한다. 여자는 떼를 쓰는 아이를 세탁기에 넣고 돌리고 오븐에 넣고 굽고 냉장고에 집어 넣는다.
아침에 피곤함에 간신히 일어난 남편은 잠든 아내와 아이를 바라보며 화장실로 들어간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삶에서 어린 자식이란 얼마나 애궂은 운명적인 존재일까.
재봉틀 여인
선생에게 두들겨 맞고 간신히 학교를 나온 소년은 재봉틀로 뭐든지 꿰매준다는 수선집을 들어간다. 몸집이 거대한 수선집 여자는 몸과는 어울리지 않는 희고 부드럽고 고운 손으로 그의 세포들을 꿰매준다. 눈물이 흘러내리는 눈물샘 아래와 감각과 지각을 일으키는 모든 세포들을 하나하나.
청년이 된 그는 한 여자를 만나게 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자신의 무감각과 무심함 때문에 배신을 당하고.... 그리고 그는 재래시장 수선집을 찾아가 불을 지른다. 경찰과 감식반이 와서 수선집 긴 커튼을 열어보지만 그곳에 커다란 몸집의 무언가에 수많은 바늘이 꽂혀있을 뿐, 수선집에 그런 여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곤충도감
이 소설집에서 처음 만나는 감성적인, 러브스토리이다. 하나 여기서도 성범죄자들의 뇌에 심겨진 어떤 칩이 폭발한다는 점에서는 SF적이고 그 칩이 폭발할 때 날개 달린 거대한 곤충이 남자의 몸을 찢고 나타난다는 점에서는 판타지이다.
우연히 배다른 남매가 서로를 사랑하다가 그 순간을 부모에게 들키게 된다. 여자아이의 엄마는 남편의 아들을 고발한다. 그는 무작위적으로 성범죄자의 뇌에 칩을 넣는 일에 선택당하고, 영원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그런 감정을 가질 수도 없게 된다.
3년 후, 배다른 오빠이면서 사랑했던 남자를 만난 여자아이는 그의 뇌 안에 들어있는 무서운 곤충이 될 칩을 꺼내주고 싶지만 방법은 전무하다. 여자아이는 그의 뇌에서 그 칩을 제거하기로 작정한다. 단 한 번의 사랑도 허락하지 않는 운명!! ㅠㅠ
구병모의 '아가미', '단 하나의 문장', '고의는 아니지만'을 읽었다. 언제나 너무나 부족하지만 일단은 구병모를 거쳐간다. 갈 길이 멀고 멀어서 구병모 작가를 이쯤해서 지나가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