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연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국도를 지나는 길에 푸른 사과를 파는 여인을 만난다. 사각거리는 누런 종이봉투에 사과를 담아주는 여인은 두껍고 성글게 짠 머플러를 하고 뺨은 거칠고 붉으며 머리에는 먼지가 쌓인 것만 같다.
이 애잔하고 쓸쓸한 이미지는 이 소설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장식한다. 친구의 이야기, 사촌 언니의 이야기, 같이 국도를 지나 어느 섬으로 여행을 다녀왔던 연인의 이야기.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이상하게 안개처럼 흩어져버리고 그 짙은 안개 속에서도 유독 푸른 사과와 국도, 머플러를 쓴 뺨이 튼 것 같은 여인만이 강렬하게 끝까지 기억으로 남는다.
이 단편에서 작가는 아주 자연스럽게 과거의 한 자락을 현실로 가져오며 그것은 조금도 독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능숙하다. 꼭 인과관계가 맺어질 때만 과거를 불러와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상, 어떤 정황, 어떤 하찮은 티끌 한 조각도 과거를 데려올 수 있는 것이다. 또 불려온 과거는 특별한 이유없이 불려나왔듯이 제 역할을 다하기 전에 또 사라진다. 두 문장, 세 문장, 이게 뭔가 싶게 만들고 불친절하게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뭔가 아슴프레한 요소를 만들어내며 진행되던 현재의 서사는 그 윤곽이 뭉개지고 만다.
해서 배수아의 소설은 서사가 있으되 명징하게 잡히지 않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정통소설을 선호하는 독자에게는 뭐가뭔지 좀 애매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 미묘한 감정을 만들어내고 모호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세련된 작품 전체 분위기를 가져온다.
* 이 작품의 주요 이미지
푸른 사과, 국도, 사과를 파는 여인, 국도 양쪽에 늘어선 플라타너스(였던가?), 먼지, 노을, 섬, 차 앞을 스쳐지나간 고양이, 방황하는 젊은이들, 외로움, 눈 쌓인 산 속, 어두워가는 스포츠 의류 아울렛 매장 앞에서 신문지에 불을 붙여 태우는 남녀들, 친구의 죽음, 그 친구가 마지막 들고 있었던 백화점 행사용 독일제 나이프, 사촌 언니, 영혼 대신 물질적인 안정, 눈에 빛이 사라졌다. 나는 그 국도와 푸른 사과와 사과를 파는 여인에 대해 말하고 싶다. 나도 언젠가 그런 여인이 돼 있을 것 같다.
1988년의 어두운 방
몇십 명의 사람들이 콘도에 모인다. 그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져 한 편은 콘도에 머물고 한 편은 바닷가로 향한다. 그 과정에서 유별난 여자 시인이 내게 관심을 보인다. 그녀는 몇 년 전, 이국의 호텔에서 내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을 그녀는 기억해 낸 것이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일까? 나로선 잘 모르겠다. 작가의 의도와 목적을 알 수 없는 글들도 간혹 있으니까. 내가 무슨 얘기를 할 때 그것을 온전히 알아주는 사람을 만난 적이 많지 않으므로 이해된다. 그걸 것일 테지.
이 단편에서도 동생의 남자가 죽는다. 이 정도로 해 두자.
엘리제를 위하여
한 소녀의 성장기. 피아노를 치던 소녀와 소년. 엄마가 죽고 동생이 죽고. 시장통을 지나가는 소녀들과 자전거를 타는 한 소녀의 그림이 보일 듯 묘사가 뛰어나다. 이 작품은 정통소설의 서사를 제대로 따른다. 서사가 오롯이 살아있다.
여섯번째 여자아이의 슬픔
남학생들이 한 여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그녀를 만나고 싶어한다. 그녀는 집안에서 여섯번째 아이다. 기윤은 내게 함께 살자고 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의 동기면서 사촌인 준영은 여자아이와 주문진 행 기차를 탄다. 준영은 은행에서 돈을 찾고 여자아이는 사실 자기는 임신했다고 말한다. 도착지인 주문진 버스를 타고 떠나기 전에 준영은 내려 담배를 피운다. 그리고 그는 그 버스를 타지 않는다. 버스 안에서 여섯번째 여자아이는 슬픈 꿈을 꾸고 있다.
엘뤼아르의 시
어쩌란 말인가 도시는 굶주렸는데. 어쩌란 말인가 우린 무장해제 되었는데.
어쩌란 말인가 밤은 떨어졌는데. 어쩌란 말인가 우린 사랑했는데.
아멜리의 파스텔 그림
이 작품은 내게 배수아가 얼마나 뛰어난 작가인지를 증명해준 단편이었다. 동생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언니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언니가 동생에게 소개해주려던 남자는 사실 언니가 대학 때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남자이다. 그 남자는 지금 화구상을 크게 하고 있고 그림도 그리는 화가인데 한쪽 다리를 저는 사람이다.
집들이를 하는 날 손님들이 아멜리 카페에 걸린 그림에 대해 말하며 그 화가가 누구인지에 대해 갑론을박한다. 동생은 주방에서 손님들의 그런 잡담을 듣고 있다. 언니는 동생을 붙들어놓고 한 남자가 오기를 기다린다. 뒤늦게 온 남자가 나가려하자 동생이 그 남자에게 함께 가자고 한다.
둘은 비가 퍼붓는 도로변에 차를 세운다. 바로 앞에는 통유리로 된 아멜리 카페가 훤히 빗속에서 불을 밝히고 있다. 그 카페 벽에 대형 파스텔 그림이 걸려 있다. 동생인 그녀가 남자에게 말한다. 저 그림을 누가 그린 줄 아느냐고, 자기는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을 알고 있다고.
젊은 날, 오래 전, 그는 군대에 가지 않겠다며 여자에게 자신과 강원도로 떠나자고 했다. 여자는 짐을 챙겨 그와 떠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결국 군대에 갔고 그녀의 여행가방은 오랫동안 짐을 풀지 않은 채 한구석에 남겨져 있었다. 그가 바로 그 그림의 화가였다. 그녀는 지금 비내리는 아멜리에 카페 앞에서 오늘 처음 만난 남자에게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생각한다. 자신의 생에서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언니의 시점으로 언니는 유치원에서 나오는 아이를 데리고 백화점으로 함께 쇼핑 겸 놀러간다. 그녀는 물건을 고르고 만지면서 생각한다.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뒤에 더 있는 두 편, '인디언 레드의 지붕'과 '검은 늑대의 무리'는 생략하겠다. 읽을 때도 재미없었으니까.